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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5는 염소 페로몬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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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5는 염소 페로몬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일까?

2014.03.03 18:00
[강석기의 과학카페 167] 숫염소 머리털에서 페로몬 물질 발견

향기가 없는 여성은 미래가 없다.
- 폴 발레리

 

“강상, 간바떼구다사이!(강 선생님, 파이팅!)”

 

  19년 전 이맘 때 필자는 일본 도쿄에 있었다. 당시 한 화장품회사 연구소 향료실에서 일하던 필자는 원료(향료)공급업체인 한 일본회사의 연구소에서 6주 동안 조향(調香)연수를 받았다. 그림을 그리려면 개개 물감의 특성을 알아야하듯, 향료를 조합해 새로운 향기를 창조하려면 개별 향료의 특성을 숙지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천연향료의 향기를 먼저 외워야했고, 매일 아침이면 미모의 여직원이 끝에 향료를 묻힌 폭이 좁고 길쭉한 종이 다섯 개를 갖다 주며 다정한 미소와 함께 위의 말은 건넸다. 종이 끝의 향을 맡고 어떤 향료인지 종이 밑에 적는 퀴즈로, 처음에는 한 두 개 밖에 못 맞췄지만 연수가 끝날 쯤에는 다 맞춘 날도 있었다.

 

  향수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향료는 수백 가지가 있지만, 입문 교육을 받는 사람은 100여 가지로 출발한다. 감귤류 향료 냄새를 맡게 하고 ‘장미향이냐 오렌지향이냐?’라고 물으면 후맹(嗅盲)이 아닌 다음에야 쉽게 답하겠지만, 오렌지, 그레이프프루트(자몽), 레몬, 베르가못, 만달린, 라임 등 감귤류 향료가 여럿이면 막상 종이 끝에 찍힌 향료의 냄새만으로는 어떤 건지 꽤 헷갈린다. 결국 여러 번 맡으면서 그 향료에 고유한 냄새 프로파일을 스스로 구성해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식물에서 얻는 향료는 수백 가지나 되는데 동물에서 얻는 향료는 달랑 네 가지 뿐이라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데, 식물은 꽃, 잎, 줄기, 뿌리 등 다양한 부위에서 향기성분이 나오지만 사실 동물에서야 땀 냄새밖에 더 나오겠는가. 따라서 향수에 들어가는 동물성 향료가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동물 향료를 잠깐 살펴보자.

 

●동물 향료는 4가지뿐

 

위키피디아 제공
위키피디아 제공

  먼저 용연향(ambergris)이 있다. 이건 향유고래의 위에 있는 일종의 결석으로 너무 커져 고래가 토해낸 것이다. 물에 둥둥 떠다니는 토사물 덩어리는 ‘바다의 로또’로, 수년 전에도 한 어부가 건져 수 억 원을 받았다는 외신을 본 적이 있다. 고래가 토한 것이라니 냄새도 역겨울 것 같은데, 막상 맡아보면 의외로 달콤한 수지(樹脂) 같은 미묘한 향기를 풍긴다. 따라서 향수에 용연향을 살짝 첨가하면 향이 훨씬 고급스러워지고 풍부해진다.

 

  다음으로 영묘향(civet)이 있다. 사향고양이의 향낭에 모인 분비물을 채취해 얻는데, 짙은 갈색의 연고 같은 형태다. 처음 냄새를 맡아보고 역겨워서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이런 걸 어떻게 향료로 쓰지?’라고 생각했지만 낮은 농도로 희석하면 미묘하면서도 섹시한 향기를 풍긴다는데 잘 모르겠다. 요즘은 사향고양이를 길러 향을 얻는다고 한다.

 

  세 번째는 해리향(castoreum)으로 비버의 향냥에서 얻는다. 이것 역시 굉장히 고약한 냄새로 필자가 맡은 역대 향료 가운데 가장 역겨웠던 것 같다. 영묘향처럼 향수에 희석액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고급스러운 향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향(musk)이 있다. 동서를 불문하고 오래전부터 고가에 거래돼온 사향은 사향노루 수컷의 생식선에서 들어있는 분비물로 ,역시 그 자체로는 불쾌한 냄새이지만 희석하면 대단히 매력적인 향기를 풍긴다. 오늘날은 사향노루 멸종을 막기 위해 향료로 사향을 쓰지 못하게 막고 있다. 물론 이 전에도 너무 고가여서 향료회사들은 사향을 대체할 수 있는 여러 합성 무스크 물질을 개발해왔다.

 

  용연향을 뺀 세 가지 동물성 향료는 모두 생식선에서 얻는다. 이들 향료에는 동물의 번식행동과 관련한 물질, 즉 페로몬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페로몬은 정의상 같은 종의 이성을 유혹하는 물질이므로, 사람이 이들 동물의 페로몬을 향수로 쓴다고 해서 그런 효과를 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뭔가가 있기에 고가임에도 향수의 향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넣어온 게 아닐까.

 

●숫염소가 분비하는 감귤향 물질

 

숫염소는 두피에서 페로몬을 분비해 암컷의 행동변화와 생리변화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연구진들은 4-에틸옥타날이라는 지방산 알데히드 분자가 암컷의 생리변화를 일으키는 프라이머페로몬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숫염소는 두피에서 페로몬을 분비해 암컷의 행동변화와 생리변화를 일으킨다. 최근 일본 연구진들은 4-에틸옥타날이라는 지방산 알데히드 분자가 암컷의 생리변화를 일으키는 프라이머페로몬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 커런트 바이올로지 제공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3월 17일자(온라인에서 미리 공개됐다)에는 염소의 페로몬 성분을 발견했다는 논문이 실렸다. 페로몬은 작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릴리서페로몬(releaser pheromone)으로 상대의 행동변화를 유발하는 페로몬이고 다른 하나는 프라이머페로몬(primer pheromone)으로 상대의 내분비계를 변화시키는 페로몬이다. 지금까지 릴리서페로몬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결과가 있었지만 프라이머페로몬 연구는 드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숫염소 페로몬 4-에틸옥타날(4-ethyloctanal)은 암컷에서 프라이머페로몬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도쿄대 동물자원과학과 유지 모리 교수팀은 숫염소 두피에서 방출되는 휘발성분자를 포집해 그 성분을 분석했다. 쥐나 돼지 같은 동물들은 오줌에 페로몬 성분이 들어있는 반면 특이하게도 염소는 숫염소의 머리털에 그런 작용을 하는 물질이 있다는 게 알려져 있었다. 연구자들은 정상 숫염소와 거세한 숫염소의 두피에서 포집한 성분을 분석해 비교한 뒤 정상 숫염소에만 있는 성분 7가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각각에 대해 프라이머페로몬으로 작용하는지 여부를 측정했다.

 

  즉 추출물의 냄새를 맡은 암염소의 뇌 속 시상하부에 있는 성선자극호르몬분비호르몬 파동적 분비 패턴의 변화를 측정한 것. 시상하부는 내분비계를 조절하는 지휘본부다. 만일 프라이머페로몬이라면 이 분비 패턴의 주기가 짧아져 암컷이 짝짓기를 준비할 수 있는 몸상태로 바뀐다. 숫염소의 두피 휘발성물질 혼합물은 강력한 프라이머페로몬으로 작용했고, 구성 성분별로 실험을 한 결과 4-에틸옥타날이라는 분자가 주된 페로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 자연계에서 이 분자의 존재가 보고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염소의 페로몬으로 밝혀진 4-에틸옥타날 구조.
염소의 페로몬으로 밝혀진 4-에틸옥타날 구조.

  한편 4-에틸옥타날은 공기에 노출되면 4-에틸옥탄산(4-ethyloctanoic acid)로 산화되는데, 4-에틸옥탄산이 바로 염소 특유의 노린내를 내는 물질이다. 1980년대 연구자들은 4-에틸옥탄산이 암컷이 수컷에 관심을 보이게 하는 릴리서페로몬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사람에게는 4-에틸옥탄산이 불쾌한 냄새인 반면, 4-에틸옥타날은 시트러스(감귤류) 계열의 냄새라고 한다. 필자는 이 분자의 냄새를 맡아보지 못했지만 문득 어떤 느낌일지 감이 왔다.

 

●모던 향수 시대를 연 알데히드

 

  1921년 프랑스 파리. 당시 러시아 황족을 위해 일하던 유명한 조향사 어네스트 보(Ernest Beaux)는 심플한 원피스를 내놓으며 패션계를 전복하고 있는 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의 의뢰를 받고, 샤넬의 정신을 담은 향기를 창조하는 프로젝트을 맡는다. 보는 과거 러시아에 머물던 어느 날 아침 안개가 축축이 깔려있는 호수를 거닐 때 인상을 향기로 재현하기로 했다.

 

  원료를 아끼지 말라는 코코 샤넬의 말에 따라 최고가인 그라스(향료의 메카인 남프랑스 도시) 장미, 그라스 자스민, 시벳 등을 주원료로 해서 골격을 완성한 보는 여기에 지방족알데히드라는 합성향료물질을 첨가하는 혁신적인 처방을 내놓는다. 지방족알데히드는 그 자체로 향기가 좋다고 보기 어려운데, 분자에서 탄소사슬 길이에 따라 시트러스향기와 복숭아향기, 지방냄새(양초에서 나는 냄새를 연상하면 된다)가 복합적으로 풍긴다. 

 

1921년 출시된 전설의 향수 ‘샤넬 No.5’를 창조한 천재 조향사 어네스트 보. 그는 샤넬 No.5에 합성 향료 물질 지방산알데히드를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데카날은 이번에 밝혀진 염소 페로몬 4-에틸옥타날의 이성질체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21년 출시된 전설의 향수 ‘샤넬 No.5’를 창조한 천재 조향사 어네스트 보. 그는 샤넬 No.5에 합성 향료 물질 지방산알데히드를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데카날은 이번에 밝혀진 염소 페로몬 4-에틸옥타날의 이성질체다. - 위키피디아 제공

  코코 샤넬은 어네스트 보가 준비한 10가지 견본(1번에서 5번, 20번에서 24번)의 향기를 맡은 뒤 “5번이 좋군요”라고 촌평했고, 이 말 한마디로 향수의 대명사 ‘샤넬 No. 5’가 태어났다. 훗날 샤넬은 “그건 내가 기다리던 향기였다. 그 향기는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여성의 향기가 풍기는 여성의 향수였다”라고 그 순간을 회상했다.   

 

  보가 샤넬 No.5에 쓴 지방족알데히드 가운데 하나인 데카날(decanal)은 탄소 10개로 이뤄진 분자로 오렌지향에 지방냄새가 섞인 느낌이다. 그런데 이번에 숫염소에서 발견된 페로몬 4-에틸옥타날은 탄소 8개인 옥타날 골격에 탄소 2개짜리 곁사슬이 붙은, 역시 탄소 10개짜리 분자로 데카날과 분자식(C10H20O)이 동일하다. 즉 데카날의 이성질체다. 따라서 그 향기도 데카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문득 어네스트 보가 러시아의 안개 낀 호숫가를 거닐 때 주변에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각 천재 보는 숫염소가 발산하는 4-에틸옥타날의 향기를 포착했고, 여기서 영감을 얻어 샤넬 No.5를 창조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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