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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모차르트 살아온 일대기?? 를 요약해서 글로 풀어쓰면 10줄이 넘게 써주세요 내일 수행평가 더 늦게 써줘도 좋지만 내공50
jong**** 조회수 3,119 작성일2010.03.24

내일 수행평가라서 제발 부탁드림 제발점요 제가 음치 몸치 박치 치 3종세트라 이런거라도 선생님꺠 잘보여야 하그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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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런것도모르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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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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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마르티니 신부 영향으로 이탈리아 풍의 성악곡 [구원받은 베툴리아 K.118],
[하늘의 여왕 K.108]및 [동정녀 성 마리아를 위한 라티니아]를 작곡하게 된다.
그 후에 [고아원 미사곡 K.139], [성모 마리아를위한 라티니아]등을 작곡한다.
1775년 모차르트는바이얼린, 바순 협주곡등으로 사교계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단지 성공의 도취에서 나오는 감상적이고 표피적인 음악의 작곡이 아닌 교회 음악으로서 높이 평가 받는
모테트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Misericordias]K.222를 작곡하게 되는데 1776년 모차르트는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마르티니에게 이 작품을 보여주면서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1779년 모차르트 이펙트의 테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작곡 후 [산타 마리아], 미사곡[대관식]
같은 해에 [주일을 위한 베스페르스], [키리에]K.322 등은 지속적인 영감, 특유의 종교적 색채가 각인되어있다.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곡이 바로 [대미사곡 Grande Messe] c단조. K.427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 때문에 뭐랄까..약간 당황스러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곡은 콘스탄체와의 결혼으로 얻게 된 결실이고, 오랫동안 예속되어 왔던 콜로레도 대주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서 모차르트는 자유로움을 맛볼 수있었다. 그래서 과장된 로코코풍의 양식을 뛰어넘어서 과감하고도 비약적인 기법을 도입하여 조화롭게 작곡하였는데 정교한 대위법 등은 바하의 구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물론 그 당시 J.S.바하는 거의 잊혀진 인물로 그의 b단조 미사곡이나 수난곡, 칸타타 작품을 모차르트는 듣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이 작품에서 바하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18세기 이전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모차르트가 시대를 요약하고 그것을 음악적 언어로 변화시킨 것"이라 하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A.Mozart, 1756~1791)


-생애-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拍車)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入會試驗)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初演)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帝)의 인자(仁慈)》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魔笛)》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의 동상.



-작품경향-
모차르트의 음악은 말할 수없이 수려하며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을 노래한다. 즐거운 가락 속에도 한가닥 애수를 품고 있으니 문득 여성적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돌연 전장에 나가는 기사인 양 결연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길지는 않았을 망정 그가 몸소 겪은 고난에 찬 인생의 기록이기라도 한 듯이.... 그의 음악을 가리켜 명암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음악이라고 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표작-

<레퀴엠 Requiem K.626>
모차르트의 불행한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레퀴엠」은 극적인 에피소우드를 수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레퀴엠이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곡인데, 모차르트의 죽음 직전 무명의 사자가 찾아와 이 곡의 작곡을 의뢰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그것을 죽음을 알리는 사자라 믿어버리고 자신의 명복을 비는 레퀴엠이라고 생각하여 통곡하면서 작곡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모차르트는 이 곡의 「라크리모사」의 장에서 미완성인 채 죽었다. 그래서 제자 쥐스마이어가 그 뒤 부분을 써서, 모차르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793년 12월 14일 빈에서 연주되었다.
전곡 12장은 제 1부 입제창(入祭唱):영원한 안식·제 2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제 3부 독송(讀誦)·제4 부 봉헌문·제 5부 「거룩할진저」·제 6부 「신의 어린 양(야누스 데이)」제 7부 성체배령창(星體拜領唱)으로 나뉘며, 모차르트에 최후를 장식하면서 그 명복을 빌기에 어울리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 '귀하신 몸' Motet-Ave verum corpus K.618>
1791년, 35세 때의 작품으로, 유명한 레퀴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비참하게 죽은 천재의 마지막 기도를 담은 종교 합창곡이다.
합창이 그리는 화성의 아름다움과 높고 낮게 기복하는 선율의 변화는, 듣는 이에게 신에 대한 강한 기도의 마음을불러 일으킨다.
성자에게 고개를 숙여 무릎을 꿇고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바치는 곡이다.

<가곡 「클로에에게」 An Chloe K.524>
이 곡은 31세 때인 1787년 6월 24일 빈에서 작곡했는데, 이 날에는 또 한 곡의 가곡을 썼으므로 모차르트의 창작력은 무서울 정도이다.
「푸르고 밝고 둥근 그대의 눈동자에 사랑이 빛날 때/그 눈동자를 보는 기쁨으로/내 마음은 설레며 타오르네」
요한 게오르크 야코비의 시에 의하고 있다.

<가곡「자장가」 Wiegenlied K.350>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전세계에서 많이 부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요람에서 자는 아기에 대한 노래라기보다는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긴 어린이를 위해 부른 듯한 느낌이 든다.
멜로디는 독일의 오래된 민요이다.
「잘 자라, 우리 아기야 / 정원과 목장에 새도 양도 모두 잠들면 / 달은 창으로 은빛을 비추는 이 밤 / 잘 자라, 우리 아기야, 잘 자거라」

<돈 조반니 Don Giovanni>
2막. 1787년 다 폰테의 대본에 의해 작곡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29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에스파냐의 호색 귀족 돈 조반니(돈 후안)를 주인공으로 한 것으로 탕아에다 무신론자인 돈 조반니는 사랑의 편력을 하던 중, 돈나 안나에게 추근거리다가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騎士長)의 질책을 받고 결투 끝에 그를 찔러 죽인다. 그 후에도 시골 처녀 체리나를 유혹하는 등 못된 짓을 계속한 그는 묘지에서 기사장의 석상(石像)을 보고 만찬에 초대하였는데, 그날 밤 집으로 찾아온 석상을 보고도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마침내 업화(業火)에 싸여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이탈리아풍의 희가극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정가극(正歌劇)풍의 노래도 있고, 특히 인물의 성격묘사에 있어 독특한 묘미를 보이고 있으며, 서곡을 비롯하여 《카탈로그의 노래》 《당신의 손을》 《샴페인의 노래》 등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62년 12월 국립오페라단(임원식 지휘)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마적 魔笛>
2막. 가창(歌唱)과 대사를 포함한 이른바 징슈필에 속한다. 슈카네더의 대본에 의하여 1791년 3월부터 작곡, 9월 30일 완성하고 빈에서 초연하였다. 큰 구렁이에게 쫓긴 왕자 타미노는 밤의 여왕의 시녀 세 사람에게 구출되어 여왕의 딸 파미나의 아름다운 화상(畵像)을 보고 나쁜 수도자 자라스트로에게서 그녀를 구해 내려고 결심한다. 새장수 파파게노를 데리고 자라스트로에게로 가는데, 실은 자라스트로가 덕이 높은 인물이고 여왕이 악의 화신인 것을 알게 된다. 자라스트로가 내놓은 시련을 이겨낸 타미노는 파미나와 맺어진다. 파파게노도 파파게나라는 상대를 얻는다. 한편 밤의 여왕과 그 부하들은 복수를 하려고 찾아오지만, 천둥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고 막이 내린다.
이 오페라는 서곡을 비롯하여 뛰어난 아리아 등이 많으며, 모차르트는 이 작품에서 독일 전통 오페라로서의 징슈필을 하나의 장르로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요소도 도입, 종합적인 작품을 완성하고, 이 작품 초연 2개월 후에 죽었다. 한국에서는 1973년 6월 연세대학 오페라단(정희석 지휘)에 의해 초연되었다.

<파리 교향곡 Paris Symphony>
만하임 ·파리 등지를 여행하던 도중 1778년 봄 파리에서 완성, 유명한 공개연주회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초연되었다. 만하임악파의 영향이 현저하게 담긴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취한 유일한 정규의 이관편성(二管編成)으로 파리풍의 갤런트스타일에 의해 화려한 효과를 올리고, 3악장에서는 관현악법의 효과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피가로의 결혼』은 로렌초 다 폰테가 쓴 대본에 의해 모차르트가 작곡하여 1786년 빈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의 서곡은 오페라 전체에 흐르는 재치와 유머를 절묘하게 하나의 작품안에 담아낸 걸작이다. 이 악곡은 소나타 형식으로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모차르트가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이 서곡은 줄곧 현악기의 제주에 의한 경쾌한 주제와 질투하는 듯한 베이스, 웃어제치는 듯한 오보에의 합주로서 쉴틈없이 전개된다. 이 서곡은 오페라의 서곡에 주로 쓰이는 관습적인 작곡 방법에서 탈피하여 오페라에서 쓰인 멜로디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도 오페라의 분위기를 충분히 표현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여기까지입니다.

채택바랄께요..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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