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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모짜르트에 대해서~ㅋ내공!
yi**** 조회수 13,803 작성일2004.03.24
모짜르트의 생애랑요

에피소드나...

아무노래나 골라서 그노래 설명해주시고

감상문 써주시면 감사...ㅋ

설명은 요약해서..ㅋ

이중에 하나면 해주셔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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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아저씨
중수
클래식음악, 노래, 연주, 팝, R&B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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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의 생애] Wolfgann Amadeus Mozart 1756~1791 오스트리아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악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36년간의 짧은 생애에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 의해 천재교육을 받았고 이미 5세 때 소곡을 작곡하였다. 6세 경부터 3년이 넘는 연주 여행을 하였고, 이후 많은 연주 여행을 하여 짧은 35년의 생애 중 10년 남짓을 여행으로 보냈다. 이러한 연주여행은 유럽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음악을

흡수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으며 그의 음악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마지막 작품 레퀴엠을 작곡하던 중 건강이 쇠약해져 1791년 11월 20일
병상에 눕게 되고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다음날 이루어졌으며 사망 원인은 병사설과 독살설 등 명확하게 밝혀진바 없다.

한편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1809년 덴마크의 외교관 G.N.니센과 재혼하여 이 부부에 의하여 모차르트의 악보와 편지류가 정리되었고, 니센은 그의 관한 전기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유작 레퀴엠은 제자인 쥐스마이어에 의해 완성되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며 단정하고 아름다워 동심에
가득찬 유희와 색채,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창작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음악을 궁정음악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그의 음악의 특징은 단정한 스타일, 맑은 하모니, 간결한 수법을 들 수 있다.
"멜로디는 음악의 에센스"라고 그 자신이 말했듯이 그의 선율은 아름답고 풍부하였으나

때론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듯 저변에는 가는 애수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향곡 제40번 g단조 K550]

 

개요
   
모차르트 최후의 3대 교향곡의 하나인 이 G단조 교향곡은 그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 단조가 지닌 그윽한 애수조차 도취적인 선율과 감각적인 화성으로 아름답게 순화된 절묘한 명작이다. 이 곡은 1788년 7월 25일에 완성하였으며, 이것을 포함한 3대 교향곡이 단시일 내에 작곡되었다.

이 교향곡은 정열적이며 또 정서에 넘친 악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비극적인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병적인 우울 감에까지 그 변모를 보여준다. 불우한 환경에서, 연주될 기약도 없이 오직 샘솟는 악상을 오선지에 담는 것으로 산 보람을 느꼈던 모차르트, 그는 이 작품에서 정서적인 매력뿐 아니라 고전적 교향곡으로서의 정교하고 대담한 구성 을 보여 준다.

G단조한 조성은 특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나, 하여튼 이 곡이 당시의 절대음악의 방향에서 한 걸음 앞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성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하고 이 격렬한 변화를 주름잡으며 주제는 매우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매력은 맑고 아름다운 선율과 아울러 그 분방하고 자재로운 악기법에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곡의 편성은 트럼펫과 팀파니조차 사용치 않는 소규모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 곡이 라이프찌히에서 연주될 때 전율적이고 공포감에 싸인 곡이라고까지 평을 받았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와 같은 느낌은 갖지 않는다. 다만 그의 악곡으로서는 감정이 풍부하고

서정적이며 정열적인 점에 특징을 보인다.  

제1악장 알레그로 몰토 

서주부가 없는 소나타 형식의 악장이다. 비올라의 리듬을 타고 하늘에서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듯한 아름답고 애수 에 잠긴 제1주제는 바이올린으로 노래된다.

이것은 길게 목관의 패시지에 의하여 연주된 다음 전합주에 의하여 격정적인 연주를 한다.

제2주제는 현과 목관에 의해 시작되는 것으로 부드러운 광채가 그윽한 사색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전개부는 제1주제를 활용한 다양스러운 전조의 변화로 아름다운 노래의 화답이 펼쳐지고

목관악기의 반음계적인 하강으로 탁월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와 같이 제1주제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나, 이번에는 파곳도 등장한다. 그리고 부주제의 약동 하는 듯한 스타카토에 의한 올라가기 악절은 확대되어 연주된다.  

제2악장 안단테 

이 악장도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었다. 단아하고 순도 높은 시상을 가진 악장이다.

비올라로 연주되는 제1주제는 기원에 찬 속삭임처럼 엄숙하게 노래되는데 간단한 대위법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연 주되어 화려하지는 않으나 리드미컬하게 전개된다.

여림과 셈의 효과적인 대조로 반문하는 듯한 제2주제는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의 반주에

제1 바이올린으로 펼치지는 데, 이것은 제1주제와 더불어 조성의 변화로 은근한 색조를

빚어내기도 하고 바이올린의 속삭임과 목관악기의 구 김살 없는 가락이 얽혀가기도 하면서

아름답게 펼쳐진다.  

제3악장 미뉴에트. 알레그로 

 감미롭기는 하나 제1주제의 애수를 다시 나타내는 미뉴에트의 주제는 민요적이며 싱커페이션으로 되었다. 특히 교 묘한 대위법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트리오부는 전원적인 목가로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마지막의 호른의 2중주는 즐거운 익살을 느끼게 하는 매력적인 부분이다.  


제4악장 알레그로 앗사이  


 음악적인 기복이 심한 드라마틱한 소나타 형식의 마지막 악장이다.

이 악장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병적이고, 흥분되고, 정열적인 폭풍의 정취다.

달빛 아래 요정의 춤을 연상케 하는 제1주제가 전합주로 경쾌하게 나온다. 모두가 흥분되어 아름다운 춤에 도취된 다. 그러나 흥분된 분위기는 현으로 나타나는 귀여운 제2주제에 의해 중단되지만 다시 흥분된 춤은 계속 된다. 그러나 전개부에서 관악기와 현악기의 교체연주가 빚어내는 색채적 변화와 아울러 그것은 고통의 감정을 폭발시키 는 복잡한 열광이다.

갑자기 이 부분은 끝나고 다시 처음의 제1주제가 나오는 제2주제는 G단조로 나타나고 장대한 코다가 극적인 매듭 을 짓는다.  

 

1악장 한번 들어보세요

 

http://www.kunstderfuge.com/mid/mozart/symphony_550_1_(c)ishii.m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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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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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m****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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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큼 경지의 올라선 음악인들에게는 여러가지 별명이 붙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 악성...

이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어릴적 모차르트의 그야말로 '신동'적인

일화들은 여러가지가 남아있습니다. 누이가 치던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소리를 듣고 그 곡을

완벽하게 외워 연주하고, 아버지의 친구인 궁정 오케스트라 단원을 대신하여 바이올린을 연주.

그 친구분이 집에 왔을 때 1/8의 음이 흐트러진 것을 잡아낸것 등. 이 모든일은 6세 전후로

했다고 합니다.

 

이후 모차르트는 독일 뮌헨에 가서 누이와 함께 초연을 하게 되는데, 이 연주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기도 6세입니다. 이렇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모차르트는

이후 음악의 본고장 빈으로 가게 되는데,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왕실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실에 초청되어 연주를 하게 됩니다. 왕은 모차르트와 누이에게 공주와 왕자를

위해 준비했던 옷을 선물했으며, 한손으로 연주하거나 건반위에 천을 덮어놓고 하는 연주를 시키

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궁정에서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 모차르트에게 마리아 여왕이 소원을 한가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6세의 모차르트는 공주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는데, 그 공주가 마리 앙투와네트

였다는 사실은 유명합니다.

 

또다른 일화로는 지금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뭇 청춘남녀에 가슴에 일획을 그어놓은 괴테가

14세때 순회공연을 다니던 7세의 모차르트를 보고 남은 강렬한 인상을 말한 것입니다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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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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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국적 :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요수상 : 황금박차(拍車)훈장
주요작품 :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마적》(1791)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拍車)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入會試驗)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初演)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帝)의 인자(仁慈)》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魔笛)》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1.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피가로의 결혼은 18세기 블란서의 극작가 보마르세가 쓴 희곡을 대본작가인 다 폰테가 전 4막의 오페라 부화로 고친작품이다. 다 폰테가 "내가 대본을 쓰고있는 동안에 뒤따라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을 붙여 6주간에 모두 완료했다"고 말하는 점으로 보아 작곡이 매우 순조로웠음을 알 수 있다. 초연은 1786년 5월 1일, 빈의 부르크 극장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초연에는 황제까지 참석하여 관람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가 상연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까닭은 보마르세의 원작이 블란서 혁명 전야의 부패 타락한 지배층을 통렬하게 비판 조소한 내용이 희곡이며, 본국은 물론이고 빈에서도 기피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용의 오페라를 그런 대로 상연할 수 있었던 것은 다 폰테의 뛰어난 솜씨와 정치적 역량 때문이었다. 문제가 될 부분을 삭제하고 재치있게 대본을 만들어 황제의 허가를 받은 작품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줄거리로 보자면 로씨니가 작곡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속편이 되는 셈이다. 스페인의 귀족 알마비바 백작은 피가로의 노력으로 지금의 부인 로지나와 결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바람기는 조금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때 거론된 것이 지금은 그의 시종이 되어있는 피가로와 하녀 수잔나의 결혼 이야기이다. 물론 백작은 이 결혼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단지 수잔나처럼 귀여운 처녀를 고스란히 피가로에게 넘겨주기가ㅣ 아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로지나와 결혼할때, 폐지했던 초야권을 부활시켜 수잔나를 합법적으로 첫날밤만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초야권이란 유럽의 봉건 시대에 성행했던 악습이며 서민의 결혼때 영주,촌장, 성직자 같은 이들이 신랑에 앞서 신부와 동침하는 권리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못 할 관습이지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2.요술(마술)피리 (Zauberflote)]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요술피리'는 징슈필형식이다. 징슈필이란 보통 연극과 마찬가지로 대사가 줄거리를 끌고 나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음악이 들어가는 노래극을 말한다. '요술 피리'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와 함께 징슈필 오페라의 걸작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갖가지 다른 양식이 섞여 있기도 하다. 가령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노래에는 빈의 민요 투와 이탈리아의 부화가 혼합되어 있고 타미노와 파미나의 노래에는 이탈리아풍의 영창과 독일풍의 가곡조가 섞여 있으며, 또 밤의 여왕의 노래에는 분명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의 양식이 돋보인다. 이 밖에 어떤 부분은 글루크 투의 가락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분에는 바로크풍이 엿보인다. 이렇듯 여러 가지 요소를 뒤섞은 점이 이 오페라의 특징이다. '요술피리'의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프리 메이슨의 사상이다. 프리 메이슨은 세계주의 운동의 비밀결사이며 진리,성실,신의,국제적 형제애를 신조로 삼는 종교 단체이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기묘한 의식 장면은 바로 그러한 밀교적인 프리 메이슨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모차르트는 물론 대본을 쓴 쉬카네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브 2세, 괴테, 그리고 모차르트의 선배인 하이든도 모두 비밀 결사의 회원이었다. '요술피리'는 모차르트 자신도 무척 좋아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모차르트가 죽은 날은 '요술 피리'를 완성한 지 약 두달 남짓 뒤인 1791년 12월 5일 새벽 0시 55분이었다. 그가 죽기 전날 오후 2시경 그는 병문안 온 성악가들과 함께 아직 완성이 안 된 '레퀴엠'을 노래했다. 이윽고 곡이 '라크리모자'에 이르렀을 때 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더 이상 노래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번에는 '요술피리'를 듣고 싶다고 하면서 직접 파파게노의 아리아 1절을 흥얼거렸다. '요술 피리'중 가장 즐겁고 유쾌한 이 아리아를 모차르트 제자의 아버지인 린쯔 교회의 악장 요한 게오르크 로저가 클라비어로 반주하며 따라 불렀따. 이 때 모차르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어쨌든 '요술 피리'는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따. 베토벤은 '모차르트 최고의 가극'이라고 극찬했고, 괴테는 너무 매혹되어 속편을 쓰려고까지 했다.


[3. 레퀴엠(지식검색)]


1. 레퀴엠의 의뢰와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가 죽던 해인 1791년 여름, 회색 옷을 입은 사나이가 나타나 난데없이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즉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했다. 작곡료는 50 두카덴이고 선불로 그 절반인 25 두카덴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오페라 한 편의 작곡료가 100 두카덴이고 궁정작곡가로서의 모차르트의 연봉이 800 굴덴(180 두카덴에 해당)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좋은 조건이었다. 단 의뢰자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실제 이 작품을 의뢰한 사람은 스투파하의 프란츠 폰 발제그 백작으로 1791년 2월 14일에 죽은 그의 아내를 위해 위촉한 것이었다. 의뢰자를 비밀에 부친 것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신이 작곡한 것인 양 발표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당시 아마추어로 음악을 즐기던 귀족들 사이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한 모차르트 스스로의 언급은 없지만, 적어도 의뢰를 승낙했던 시점에서는 이런 사정을 다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두 개의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와 '마술피리'의 작곡에 쫓겨 '레퀴엠'의 작업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특히 '티토 황제의 자비' 같은 경우는 그의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레치타티브들을 작곡했을 정도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발제그 백작의 하인은 다시금 '레퀴엠'의 완성을 종용하러 방문했고, 이때부터 모차르트의 정신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 자신이 독살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829년에 영국의 노벨로 부부가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를 방문했는데,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죽기 6달 전에(아마도 6주가 맞을 것이다) 그는 독살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곧 죽을거요. 누군가가 나한테 아쿠아 토파나(약효가 서서히 나타나는 독약의 일종)라도 먹인거요. 내가 정확히 죽을 때도 계산했소. 그들은 이를 위해 레퀴엠을 의뢰했겠지만, 이걸 쓰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거요.'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너무 아파서 그런 것일 뿐,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 들 리가 없다고 말하며 잠시 접어둘 것을 간청했고, 그도 찬성하여 프리 메이슨 찬가(작은 프리 메이슨 칸타타 K.623, 1791년 11월 15일 완성)가 작곡되었다. 곡을 받은 프리 메이슨 동료들은 매우 기뻐했고 그도 기분이 나아졌다. '맞아요, 나는 아파서 독약을 먹었다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했었소. 레퀴엠을 주시오, 계속 쓰겠소.' 하지만 며칠만에 그는 다시 아프게 되었고 똑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또 모차르트 스스로의 이런 편지도 남아있다.

당신의 권고에 따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저의 머리는 혼란스럽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습니다. 또한 내 앞에 나타나 작품의 완성을 재촉하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의 환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쉬는 것보다는 작곡을 하는 것이 피곤하지 않기 때문에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제는 아무 것에도 흥미가 없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진 것을 느낍니다. 정말로 마지막입니다. 나의 재능을 즐기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아름다운 것이지만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고 생명 또한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일 따름입니다. 이 곡은 나의 죽음의 노래로 생명과 바꾸어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편지의 진위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는데, 가짜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낭만주의자들이 창조해낸 전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며,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단짝 대본작가였던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모차르트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주변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서 사실임이 확인되고 있다. (중략)


2. 떠도는 레퀴엠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슬픔에 잠긴 아내 콘스탄체에게 <레퀴엠 designtimesp=17704 designtimesp=19585>은 남편이 남긴 또 하나의 부담거리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미 선금으로 절반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완성된 총보를 넘겨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 쥐스마이어 대신 아이블러(1765-1845)에게 '레퀴엠'의 보필을 의뢰했다. 여기에 대해 콘스탄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차르트는 '내가 오래 살아있을 수만 있다면, 이것은 나의 걸작이자 백조의 노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굉장한 열정으로 작곡했다. 몸이 약해진다고 느낄 때에는 쥐스마이어, 나, 그리고 그이가 함께 작곡한 것을 종종 노래불렀다. 결국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에게서 진짜 레슨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나는 모차르트가 쥐스마이어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에이, 너는 또 다시 벼락맞은 오리같이 서 있구나. 언제나 이해할 수 있나?' 깃펜을 들고 주요 부분을 써 내려가는 것은 쥐스마이어에게 무리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에 의해 남겨진 것들을 발견했다 가정해보면, 그것은 레퀴엠이 전부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이블러에게 악보를 주어 완성을 시키게 하려 한 것은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당시에 쥐스마이어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모차르트 스스로도 아이블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스스로는 모든 주요 부분이 작곡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블러를 불러 나의 소원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히 용서를 빌면서 즉시 거절했기에 악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콘스탄체는 아이블러에게 실제 악보를 전달해 주었고 12월 21일에 계약서까지 썼던 사실을 잊고 있었다. 대신 모차르트 스스로가 아이블러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나는 요셉 아이블러가 그의 선생인 알베르츠베르거의 뛰어난 제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작곡의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와 실내음악의 양쪽에서 균등한 기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성악가창에도 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짧게 말해서 아이블러는 그에게 필적한 만한 젊은이가 얼마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이다.

그렇다면 아이블러가 넘겨받은 모차르트의 자필 원고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을까? 여기에서 잠시 '레퀴엠' 전곡의 차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략) 모차르트는 1부 입례송의 작곡은 오케스트레이션까지 완전히 마쳐 놓은 상태였다. 실제로도 모차르트가 죽은지 5일 후에 거행된 장례 미사에서 이 부분이 간단히 연주되기까지 했다. 2부 키리에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아이블러가 넘겨받은 악보에는 이 부분도 완전히 완성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실제 오케스트레이션은 모차르트가 한 것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4성부의 성악과 첼로, 베이스, 오르간으로 구성된 콘티누오 부분만을 작곡했으며 나머지 관현악 부분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라이슈타틀러(1768-1835) 및 쥐스마이어가 써넣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 작업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프라이슈타틀러는 모든 관현악에 성악 및 콘티누오 부분을 그대로 중복하여 써넣었고, 쥐스마이어는 트럼펫과 팀파니 파트를 맡았을 따름이다. 이런 수준의 작업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그의 지시에 따라 제자들이 대신 해준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까지 키리에는 완전히 모차르트가 완성시킨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3부와 4부에서 모차르트는 성악 및 콘티누오 파트를 완전히 작곡했지만 관현악은 여기저기 특징적인 부분만 제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또 12/8 박자의 30마디로 완성되어 있는 '라크리모사'는 8마디까지만 작곡되어 있었다.

아이블러는 디스 이레부터 시작하여 라크리모사까지 모차르트의 자필 원고에 직접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넣었다. 하지만 '라크리모사'에 이르러 그는 8마디 이후 2마디의 소프라노 파트를 작곡해 넣은 후 기권을 하고 말았다. 오케스트레이션과 직접 멜로디를 작곡해 넣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콘스탄체가 기억하는 '정중한 용서'는 이것이었으리라.

콘스탄체는 다시 이 악보를 들고 여러 작곡가들에게 의뢰를 했다. 이들 중 막시밀리안 슈타틀러가 이 의뢰에 응하여 4부의 두 곡 '도미네 예수' 및 '호스티아스'를 오케스트레이션했지만 그도 곧 포기하였다. 하는 수 없이 콘스탄체는 쥐스마이어에게 작품의 완성을 부탁했다. 쥐스마이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이 작품의 완성에는 많은 수의 작곡가가 관여를 하였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부담 때문에 이 작품을 감당하지 못했고 다른 자들도 모차르트의 재질 및 명성과 타협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이 일은 나에게 떠맡겨졌다.

콘스탄체는 아이블러 및 슈타틀러가 보필한 원고와 함께 모차르트가 남긴 여러 장의 악보 스케치들도 같이 쥐스마이어에게 넘겨주었다. 다음은 슈타틀러의 증언이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은 그가 죽은 후 내게 말하기를 그의 책상 위에서 몇 개의 작품 원고를 발견했으며 그것을 쥐스마이어에게 주었다고 했다. 거기에 포함된 것을 쥐스마이어가 사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모른다고 했다.

쥐스마이어는 슈타틀러의 보필은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아이블러의 것은 일부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 오케스트레이션을 해 나갔다. 또 라크리모사의 뒷 부분을 새로 작곡해 넣었으며,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를 완전히 새로 작곡했다. 여기에 대해 쥐스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입례송', '키리에', 그리고 '디스 이레'부터 '도미네 예수'까지에서 모차르트는 사성부와 숫자 저음부를 완전히 마치었다. 그러나 관현악은 여기 저기에 매우 간단히 제시되어 있었다. '디스 이레'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은 마지막 행인 'qua resurget ex favila'였다. 그리고 나는 바로 앞 부분과 비슷하게 정리하였다. 나는 '라크리모사'를 'judicandus homo reus'부터 시작하여 완성하였다. 상투스와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는 내가 새로 작곡하였으며 이 작품에 일체감을 주기 위하여 '쿰 상티스'의 구절에 첫 '키리에'를 다시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입례송을 완전히 오케스트레이션했고 'judicandus homo reus'도 작곡해 놓았으며, 아이블러와 슈타틀러의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쥐스마이어의 언급도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을 100% 신뢰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완전히 쥐스마이어의 것으로 여겨지는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 부분까지도 그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아뉴스 데이는 다른 두 부분 - 상투스, 베네딕투스 - 에 비해 무척 완성도가 높아 쥐스마이어의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략)

또 다른 가능성은 모차르트가 살아 있던 때의 쥐스마이어와의 대화이다. 분명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쥐스마이어와 어떤 형태로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또 직접 피아노로 연주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쥐스마이어가 이를 기억해내어 자신의 보필 작업에 이용했으리라는 짐작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 것이다.

모차르트가 쥐스마이어에게 했던 말도 콘스탄체는 약간 기억하고 있다.

만일 내가 완성하지 못한 채로 정말로 죽는다면, 마지막 악장에 첫 푸가를 반복하라.

이에 대해 쥐스마이어 스스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생님과 더불어 완성된 성부를 연주하기도 했고 노래도 불렀다. 선생님은 레퀴엠의 완성과 적합한 기악 편성 과정에 대해 나와 자주 논의하셨다.

200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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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1756 ~1791]

오스트리아에 잘츠부르크 에서 태어났으며, 하이든 그리고, 베토벤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5~6세 때 작곡을 시작하여서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렸다. 35세에 젊은 나이에 세상에 떠날 때 까지 거의 모든 음악장르에 1,000곡이 넘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명랑하며 자연스러운 가락과 부드러운 선율 그리고 대중성이 잘 느껴지는 곡이 특징으로 뽑혀지고 있으며, 모차르트의 주요작품으로는 제 41악장인 주피터’등 41개의 교향곡과 요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등 21개의 오페라가 있다

 

200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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