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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상주의 음악
라플란드 조회수 9,217 작성일2008.11.03

인상주의 음악에 대해서 자세하게좀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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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도 같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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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서의 '인상주의'는 독일 낭만주의에 대한 프랑스의 반동적 제스추어로서 나타났다.

청년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가 그의 칸타타 'The Blessed Damozel'을 파리음악원의 교수들에게 제출했을 때  그들은 심사 보고서에서 '예술적 진실의 가장 무서운 적의 하나인 인상주의를 경계할 것이 몹시 요망된다' 라고 기록했다.

미술비평에 이미 확고히 정착되어있던 이 명칭은 이렇게 음악분야에 이식되었다.

그러나 드뷔시 자신은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서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명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대할 때 느끼는 바를 표현해 주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대로 정착되었다.

모네나 베를렌느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드뷔시에게 있어서도 음악은 윤리적, 지적(知的)경험 이라기보다는 감각적 경험이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서사적 주제들은 그의 기질에는 낯선 것들이었다.

드뷔시는 프랑스인들의 그 특유의 투명하고도 우아한 기질을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스스로 지루하고 답답한 게르만의 영향에 복종해버린다고 불평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게르만의 답습에서 탈피하여, 과거 프랑스의 거장들을 재발견할 것을 권하였다.

'쿠페랑 Couperin 과 라모 Rameau 야말로 진정한 프랑스인이며, 프랑스 음악은 무엇보다도 먼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뷔시는 독일의 구조적 천재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소나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바그너의 '악극'에 대한 날카로운 반발로서 서주(Preludes), 야상곡(Nocturnes), 아라베스크 등 짧은 서정적인 형식에 이르는 길을 찾아냈다.

이 음악들은 정제된 분위기를 가진 선명한 소품들이 되었다.

그가 영상(Images), 조각(Estampes), 소묘(Asquisses) 등의 미술용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드뷔시가 낭만주의의 유산에 어느면에선가는 반동의 기치를 들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겠지만, 아름다운 음향에의 탐닉, 고전주의적 형식 개념의 거부, 서정성 선호 등 여러가지 면에서 인상주의는 낭만주의 운동의 근본흐름을 유지하였다.

표제음악과 시적인 표제의 선호, 자연에의 경외심과 상상력이 풍부한 회화적 음향 등 분위기의 강조는 역시 낭만적인 것이었으며, 음악, 회화, 그리고 시를 되도록 밀접히 연결시키려는 욕구야말로 더할나위없이 낭만적인 경향이었던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이 이룩해놓은 것은 실로 독일적 다양성을 세련된 프랑스적 낭만주의로 대치하는 일이었다. 

드뷔시보다 열세살 아래인 라벨 (Maurice Ravel 1857-1937) 은 드뷔시의 영향권 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갖고있었던 고전주의적인 관점을 인상주의적인 특색에다 덧붙여놓았다.

라벨이 가지고있는 음의 조화에 대한 섬세한 감각, 오선지의 선 (line)에 대한 정확성, 그리고 정돈되어 있는 듯한 우아함은 프랑스의 고전적인 전통과 일치한다.

그의 감성은 그가 지니고 있는 지성에 의해 지배된다.

라벨은 내심 낭만주의자였다.

생각에 잠긴듯한 정취와 유연성이 그의 음악세계 곳곳에 나타나있으며, 그것은 조금씩이기는 해도 극도로 의식있는 예술적 기교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라벨은 프랑스에서 항상 낭만주의보다 우세했던 고전주의적인 성향을 훌륭하게 표현해주었다.

라벨은 후기인상주의 화가였던 세잔느가 모네의 예술세계를 끝까지 고수했던 것처럼 어느정도는 드뷔시를 고집했다. 즉 그는 후기 인상파였다.

그러나 두 음악가 사이에는 오히려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았었다.

라벨음악에서 맛볼 수 있는 한낮의 광채는 드뷔시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황혼의 부드러움과 대조를 이룬다.

라벨의 음악은 보다 박진감 있는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드뷔시는 환상적이다.

라벨의 기질은 건조기와도 같으며, 그의 화음은 보다 날카롭다.

그의  선율은 드뷔시의 것보다 더욱 윤곽이 명료하다.

그의 조성에 대한 감각은 드뷔시보다 견고하다.

그는 드뷔시가 그랬던 것처럼 온음계에 이끌리지 않았고, 구성쪽으로 더 집착했다.

드뷔시 음악의 관능적인 분위기를 그의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라벨은 그가 형식을 존중하기는 했어도 불협화음을 보다 과감히 시도하고 있다.

드뷔시가 영혼을 불러 일으키고 꿈꾸는 듯한 분위기르 자아내는 반면에, 라벨은 조각된 선을 얻고자 노력했다.

주제발전을 두려워했던 드뷔시와는 달리 라벨에게는 주제의 전개가 전혀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의 '피아노 소나티네',. '피아노 3중주', '현악 4중주' 와 두개의 피아노 협주곡에 나타나있듯이, 고전주의 형식을 철저히 고수함으로서, 그는 예술적인 충동과 그것의 실현과의 사이에서 그가 추구했던 것을 성취했던 것이다.

라벨의 멜로디는 드뷔시의 것보다 폭이 훨씬 넓고 직접적이다.

라벨은 근대 역사상 위대한 관현악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악기 감식전문가'로 불렀다.

또 라벨은 빠른 연주, 생기와 유창함이 가득찬 힘찬 피아노 음악 스타일로 20세기의 뛰어난 피아노 음악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프랑스인 이외의 다른 인상파 음악가중에서는 레스피기 (Ottorino Respighi  1879-1936) 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멋진 장식을 함께 조화시켰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의 수학기간 동안에 그에게 동화되어 이국풍의 성격과, 이탈리아인으로서의 광대한 서정주의의 이미지를 같이 보여준다.

자연적인 요소가 인상파에 결합될 수 있음을 증명해보인 폴란드의 작곡가 치마노프스키 (Karol Szymanowsky  1882-1937) 는 슬라브적인 강렬함과 풍부한 반음계주의의 특색을 스스로 만들어내었다.

그의 음악은 폴란드의 민속적 멜로디의 원시적인 힘과 그것의 불규칙적인 리듬, 그리고 악구의 선법적인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 더 윤택하게 되었다.

치마노프스키의 훌륭한 음악들은 시적인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상주의는 드뷔시라는 한 개인의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정념 Pathos 과 웅장한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인상주의는 음악의 인간적 매력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 음악은 꿈과 환상의 세계를 활짝 열어준 매력적인 에술을 창조시켰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되는 새로운 화성진행을 소개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인상주의와 함께 유럽문화는 황혼기에 우아한 아름다움의 순간을 누린 것이다.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1862.8.22~1918.3.25]

파리 근교 출생. 어려서 양친을 따라 파리로 나와 1871년 칸에 사는 고모의 주선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시인 베를렌의 숙모 모테 부인에게 정식 레슨을 받았으며, 그 덕택으로 1872년 가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4년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까지 솔페즈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 부문에서 2등상, 피아노 반주과에서 1등상 등을 받았으나, 화성법에서는 관습적인 규범에 반발한 이유로 아무 상도 타지 못하였다.

한편,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폰메크 부인의 피아노 반주자로 3년간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 감수성과 취미를 기르고 바니에 부부와 알게 되어 교양을 쌓았으며, 바니에 부인을 영감을 주는 여성으로 받들어 《만돌린》(베를렌의 시)과 그 밖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로마 대상의 로마 의무 체류기간 2년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로마 유학시절의 작품에는 《봄》과 《선택받은 소녀》(프랑스어로 번역된 로제티의 시에 의함)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파리에서 작곡된 《선택받은 소녀》는 1893년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는 《현악 4중주곡》, 이듬해 겨울에는 출세작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 걸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하였으며, 그 무렵까지 몇 해 동안은 전에 열중했던 바그너에 대한 비판과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가믈란음악의 계시, 말라르메, P.루이스상징파 시인들과의 교우 등이 그의 미학과 작풍의 발효를 촉진시켰다.

베를렌의 시세계와의 접촉(가곡집 《화려한 잔치 제1·2집》 등)도 마찬가지 뜻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 앞서 말한 《현악4중주곡》 및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빌리터스의 노래》(루이스의 시)와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관현악을 위한 《녹턴》을 거쳐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3∼1903)의 완성에서 초연에 이르는 10년간은 드뷔시의 개성적인 양식이 확립·확인된 시기에 해당된다.
그 양식은 단적으로 말해서 현상적()으로는 선법(교회선법·온음음계 등)에 의거, 음색적인 계기를 뚜렷이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바로크 후기 이후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기능화성법에 의한 고전적 조성(調)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주제법()·율동법 분야에도 점차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음색적 계기를 인상적 계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자주 불려오고 있듯이 인상파의 음악이지만, 이 감각과 이미지(영상)의 음악은 음악학자 쿠르트도 지적한 바와 같이 “수단으로서 가장 현저하게 음향감각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나 시종 음향을 초월한” 예술로 상징파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양식을 대표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월한 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1905년에 작곡된 관현악곡 《바다》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한걸음 더 앞선 작품이다. 《바다》와 그 전후에 작곡된 피아노곡집 《판화()》, 《영상 1》, 《영상 2》에 의하여 그의 원숙기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피아노모음곡 《어린이의 세계》와 관현악을 위한 《영상 3》(《이베리아》 포함), 가곡집 《프랑스와 비용의 시에 의한 3개의 발라드》, 피아노곡 《전주곡집 1》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전주곡집 2》, 신비극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와 함께 만년의 자기 완성시기로 들어갔으며, 그것은 다시 새로운 음향형식을 발견하려는 흔적이 엿보이는 발레곡 《유희》, 피아노곡 《12의 연습곡》, 프랑스적 고전주의를 지향하는 3곡의 《소나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자기 경신()을 계속 꾀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끊임없는 경신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걸쳐 음악사의 진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암으로 생애를 마쳤다.

200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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