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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인물

박태환

마린보이

2008년 8월10일, 13억 중국인의 ‘100년 숙원’이라는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수영의 오랜 꿈이 실현됐다. ‘마린보이’ 박태환(SK텔레콤스포츠단)은 중국 베이징 국가아쿠아틱센터(워터큐브)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남자자유형400m 결선에서 3분41초86(당시 아시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은메달은 장린(중국), 동메달은 라센 젠슨(미국)의 차지였다. 아시아에서 올림픽 수영 자유형 우승자가 나온 것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자유형1500m에 출전한 데라다 노보루(일본) 이후 72년 만에 처음이었다. 세계 유수의 언론은 박태환의 우승 소식을 앞 다투어 전했다. 남자자유형은 수영의 주요 종목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마린보이’의 올림픽 금메달은 세계 수영 역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 우승 직후의 박태환 모습 <출처: corbis>

열악한 인프라 속에서 태어난 수영천재

박태환 이전까지 한국 수영이 올림픽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남유선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개인혼영400m에서 기록한 7위였다. 수영은 올림픽에서 육상과 함께 가장 많은 금메달이 걸린 기초종목이다. 하지만 한국은 열악한 인프라 등으로 인해 세계 수준과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전문가들은 잠영이 박태환의 고질적인 약점이 된 이유로 한국 수영의 하드웨어문제를 꼽는다. 서울에서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은 서울체고, 한국체육대학, 잠실학생수영장 등 3곳이 전부다. 한 레인에서 8명 이상씩 훈련을 하는 일도 예사다. 5초 간격으로 출발하면 앞 선수와의 차이는 7∼8m 뿐. 앞 선수가 일으킨 파도의 영향, 앞 선수와의 거리 차 때문에 잠영거리를 늘리는 훈련이 쉽지 않다.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처럼 10m 이상 쾌속 잠영을 했다가는 앞서 출발한 선수의 다리에 부딪칠 것이다.

대부분의 수영장이 일반회원을 의식해 수심을 깊지 않게 만드는 것도 잠영훈련에는 장애물이다. 실제로 박태환은 4월 울산문수실내수영장에서 열린 제84회 동아수영대회에서 국제규격(1.8m이상)에 미치지 않은 낮은 수심(1.35m) 때문에 잠영에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을 뚫고 마린보이는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수영전문가들은 박태환을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칭한다.

대부분의 수영장이 일반회원을 의식해 수심을 깊지 않게 만드는 것도 잠영훈련에는 장애물이다.
<출처: corbis>

천식 때문에 맺은 수영과의 인연-노민상 감독과의 만남

박태환은 1989년 서울에서 색소폰 연주자 출신의 아버지 박인호씨와 무용을 했던 어머니 유성미씨의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박태환의 성공 이후 한국 언론은 “아버지의 폐활량과 어머니의 유연성을 물려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박태환은 사실 어릴 때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송곳이 호주머니를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천식을 앓은 덕이었다. 어머니 유성미씨는 의사로부터 “천식에는 수영이 좋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박태환이 수영을 시작한 것이 5세 때의 일이었다. 천재는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어머니는 전문적으로 운동을 시켜볼 결심을 굳혔고, 7세의 아들을 이끌고 선수들을 잘 키워낸다는 수영장을 찾아갔다. 그곳이 바로 노민상 감독이 코치를 맡고 있던 클럽이었다.

노 감독은 대학을 경험하지 못했고, 국가대표 출신도 아니었다. 온갖 편견을 뚫고 실력 하나로 국가대표 감독직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노 감독의 강도 높은 훈련에 박태환은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때 흘린 땀방울은 훗날 올림픽 금메달의 밑거름이 됐다. 체육과학연구원 송홍선 박사는 “남자수영선수의 지구력은 만14세 이전에 결정된다. 노 감독의 감각적인 훈련프로그램은 지구력을 쌓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유년기 때부터 노 감독과 호흡을 맞추면서 박태환이 세계최고 수준의 지구력을 연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노 감독과 운명적으로 만난 이후 박태환은 승승장구했다. 또래 중에는 적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9년 제27회 해군참모총장배 전국수영대회 개인혼영200m에서 대회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 등 4개 영법을 섞어서 하는 개인혼영이 박태환의 주종목이었다. 하지만 5~6학년이 되면서 자유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년체전 자유형 경기는 박태환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200·400·1500m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1등이었다. 마침내 대청중 3학년이던 2004년에는 아테네올림픽국가대표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나이는 만15세가 되기 전이었다. 한국경영사상 최연소 올림픽대표였다.

올림픽 무대의 첫발-2004년 아테네 대회의 시련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박태환의 아버지 박인호 씨는 아들과 함께 집 앞 햄버거 가게에 갔다. 조촐한 축하의 자리였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올림픽에 나가는 아들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햄버거를 베어 먹는 아들의 입만 봐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태환아, 긴장하지 말고…. 이안 소프, 그랜트 해켓(이상 호주), 마이클 펠프스(미국) 다 네가 좋아하는 선수들이었잖아. 걔네랑 한 번 겨뤄본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니?” 갑자기 햄버거를 먹던 아들이 움찔움찔 했다. “소프”라는 말이 나올 때 한 번. “해켓”이 나오니까 또 한 번. 이 정도면 아연실색 할 정도. 아들은 햄버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빠는 참. 내가 어떻게….” 겉으로 표현은 못했지만 그 때는 아버지도 속으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하긴…. 몸만 건강히 다녀와라.’

시간이 좀 흘러 처음으로 호주전지훈련을 갔을 때의 이야기다. 박태환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몸이 부딪힐 까봐 어깨도 움츠리고 다녔다. 수영장에 다녀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마디를 했다. “아빠, 몸이 흔들려.” 워낙 체격이 좋은 선수들이 물살을 가르니, 옆 레인에서도 그 물살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먼저 박태환에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유명인사가 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박태환은 작은 존재였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자유형400m예선. 긴장한 박태환은 출발 버저가 울리기도 전에 물 속에 뛰어들었고, 부정출발로 실격 처리됐다. 수영인들이 하는 말로 “물에 몸만 담그고 돌아온 것”이다. 한국에 남아있던 아버지는 노민상 감독과 차디찬 소주를 들이켰고, 박태환은 아테네 수영장의 탈의실에 꼭꼭 숨어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화가 나 눈물이 흘렀다. 바로 그 때 ‘다음 번에는 꼭 정상에 서리라’고 다짐했다. 박태환은 종종 “2004년의 실패가 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부정출발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을 법도 했지만, 부단한 반복훈련 끝에 박태환은 세계에서 가장 스타트가 빠른 선수 중 한 명이 됐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3관왕,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금메달,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0m 자유형 메달 수여식 직후 박태환, 마이클 펠프스, 피터 반더카이
<출처: corbis>

시련을 딛고 선 박태환은 2006년부터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25m)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1500m에서 2개의 은메달을 수확했고, 8월 캐나다에서 열린 범태평양수영선수권에서는 200·400m에서 아시아신기록을 수립했다. 12월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자유형 200·400·1500m에서 3관왕에 오르며 대회 최우수선수상(MVP)까지 거머쥐었다. 도하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박태환은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마침내 2007년에는 세계무대까지 정복했다. 3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자유형400m 결선에서 ‘호주의 수영영웅’ 해켓을 꺾고 3분44초30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300m까지 5위였던 박태환은 350m지점에서 4위로 턴한 후 마지막 50m에서 3명을 제쳤다. 이를 두고 외신은 ‘기적의 스퍼트’라고 표현하며 경외감을 드러냈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도 동메달을 따며, 이 대회에서 2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박태환의 400m레이스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다. 막중한 부담감 속에서도 박태환은 2007년 세계선수권에서의 활약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400m결선에서 초반선두추격, 중반 이후 스퍼트, 후반스피드유지의 전략이 주효했다. 초반 50m를 4위로 통과한 박태환은 50~100m 구간에서 힘을 내며 1위 해켓을 따라붙었다. 100~150m 구간에서 1위로 올라선 박태환은 200m부터 다시 한 번 튀어 나갔다. 해켓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박태환과의 거리는 벌어졌다. 박태환의 페이스에 말린 ‘최고경쟁자’ 해켓은 녹슨 어뢰가 됐다. 결국 금메달은 박태환의 차지였다. 박태환은 자유형200m에서도 ‘수영황제’ 펠프스(미국)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하며, 베이징올림픽에서 2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9로마세계선수권의 실패…가족의 품속에서 완벽부활

하지만 수영천재는 또 한번 부침을 겪었다. 동기부여의 결여로 인한 훈련부족, 후원사의 관리소홀 등이 겹치면서 2009로마세계수영선수권에서는 자유형200·400·1500m에서 모두 결선진출에 실패했다. 박태환은 당시를 “수영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로 꼽는다. 팬들의 악성 비난이 겹치면서 “밖에 나가기가 싫었다”고 할 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 이면에는 극도의 외로움과 피로감이 존재한다. 박태환은 “그럴 때 항상 나의 버팀목은 가족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 박인호 씨와 어머니 유성미 씨, 누나 박인미 씨는 나락에 빠진 박태환의 손을 잡았다.

사실 아버지는 박태환이 중학교에 진학하자 운동을 그만두게 할 심산이었다. 그것이 아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운동 해봐야 ‘놈팡이’밖에 더 되겠어? 수영이 장래가 있어? 아니면 프로팀이 있기를 해? 우리가 돈이라도 많이 벌어두었으면 모를까…. 이제 그만두게 합시다.” 하지만 어머니 생각은 달랐다. “여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재능도 있다는데….” 어머니의 열정은 마린보이가 처음으로 풀장 속에 발을 딛는 날부터 대단했다. 어린 아들의 수영장 등록을 위해 밤 새 기다리는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암과 투병하면서도 초시계를 들고 초등학생 아들의 곁을 지켰다. 지금은 아버지의 성원이 더 열렬하다. “내 아들이지만 참 불쌍할 때가 많아요. 로마세계선수권 이후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어요. 2009년 크리스마스 때는 밖에 나가지도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로마세계수영선수권 직후였다. 서울의 모 삼계탕 집에서 박태환의 가족은 오랜만에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선수권에서의 부진 때문인지 밝지만은 않은 분위기였다. 테이블에서는 닭을 훑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들이 먼저 적막을 깼다. “아빠, 이제 첨단수영복을 못 입게 된다잖아. 그러면 세계기록 깰 사람이 나 밖에 더 있겠어?” 박태환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보다 아버지의 처진 어깨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일부러 호기를 부렸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너털웃음. 박태환의 가족을 알아본 옆 테이블에서도 응원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또 한 번 웃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박태환은 결국 옆 테이블의 식대까지 치렀다. 마린보이는 가족의 품 안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며, 부활을 위한 재충전을 했다.

잠영과 돌핀킥 기술 향상으로 런던올림픽 2관왕 도전

2010년 1월 대한수영연맹과 박태환의 후원사인 SK텔레콤스포츠단은 마이클 볼(호주) 코치를 박태환의 전담지도자로 영입했다. 볼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3관왕 스테파티 라이스(호주)를 지도한 세계적인 수영코치. 선진수영에 대한 갈망이 컸던 박태환에게 볼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박태환은 볼의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 속에 수영에 대한 재미를 다시 찾았다. 그 결과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나타났다. ‘라이벌’ 쑨양(중국)을 연파하며 자유형200·4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자유형100m에서도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2006년에 이어 2번째 아시안게임 3관왕이었다. 박태환은 2011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 남자자유형400m에서도 1위에 오르며, 2년 전 로마참패를 말끔히 씻었다.

완벽하게 부활한 박태환은 2012런던올림픽에서 남자자유형 200·400m에서 2관왕에 도전한다. 자유형400m는 사실상 박태환과 쑨양(중국)의 대결로 압축돼 있다. 반면 200m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8관왕 펠프스, 2011상하이세계선수권 5관왕 라이언 록티(미국), 200m 세계기록보유자 파울 비더만(독일) 등 내로라하는 스타선수들이 총출동한다. 박태환은 최근 200m 금메달의 열쇠인 잠영과 턴 기술이 향상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본인의 표현대로 “이제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실전에서 훈련 때 가다듬은 잠영기술이 나온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볼 코치는 최근 박태환에게 킥을 강조하고 있다. 5월부터는 킥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보통 자유형에선 스트로크로 70%, 킥으로 30%의 추진력을 낸다. 스트로크 기술은 이미 세계적 수준인 박태환은 상대적으로 킥에 보완할 점이 있다. 볼 코치는 “특히 200m에선 킥이 (400m보다)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태환은 4월 동아수영대회 직후, “볼 코치께서 ‘마지막 50m에선 킥만으로도 스피드를 내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강 훈련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며 웃었다. 이어 “전담팀 형들이 ‘200m에서 네가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 정말 멋있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아주 잠깐’ 그런 상상을 해봤다”며 올림픽 2관왕 도전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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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2. 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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