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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만난 법정스님과 불일암…'길이 아니면 가지말라'

등록 2017.05.17 1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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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1979년 한 여인이 법정 스님이 머물고 있는 불일암에 나타났다. 아침나절에 찾아온 그녀는 법정 스님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암자의 잔일을 돌보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총총히 산을 내려갔다.

 잊을 만하면 찾아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서둘러 돌아가기를 되풀이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을 넘기고 십수 년의 시간이 쌓였지만, 불일암에서 그녀는 여전히 무명인(無名人)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순희.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화여대를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북으로 건너가 평양국립예술극장의 공훈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한국전쟁 때 광주로 향하다가 국군의 반격으로 지리산에 숨어 들어가 남부군 문화공작대 문화부장이 됐다.

 1952년 생포된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남부군의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와 방송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북에 두고 온 아들 때문에 그녀는 오랜 세월 고통스러운 시간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불일암은 최순희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고, 법정 스님은 거의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였다. 처음 불일암을 오를 때 오십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2015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는 최순희가 손수 찍은 오래된 사진과 법정 스님의 글을 엮은 것이다.

 "한 사람의 가치 평가는 죽은 후 얼마나 호화롭게 장례를 지내느냐에 달려 있지 않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생존시에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느냐, 또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로써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77쪽)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137쪽)

 근현대사의 아픔을 삶의 생채기로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여인과, 그 상처를 묵묵히 어루만져주었던 아름다운 만남이 소담한 사진과 법정 스님의 유려한 글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216쪽, 1만4000원, 책읽는섬(열림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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