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아웃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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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화이트아웃 속으로
  • 입력 : 2018. 05.10(목) 21:00



지난 겨울 유독 눈이 많이 왔다. 모처럼 찾은 제주도는 도착하자마자 폭설로 난리 통이었다. 이름은 난폭한 폭설일망정 관광객에게는 실상 눈이 눈을 호강한 황홀한 재난이기도 했다. 번잡한 홍진이 온통 하얀 빛이라니 설경만의 매혹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며칠, 자유롭고 멋진 여행에 대한 꿈은 구속과 암담함으로 바뀌었고, 숙소에 머무는 날이 길어질수록 무사히 귀향할 수나 있을까하는 불안과 공허가 엄습했다.

북극 이누이트족은 생업은 사냥이다. 북극을 지배하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혹한이나 사냥 실패가 아니란다. 사냥 중에 만난 갑자기 만난 눈 폭풍, '화이트아웃'( whietout)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눈 폭풍,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설원은 맑은 날에도 자칫 방향을 잃기 쉽다는데, 온 세상이 백설인 낯선 곳에 만난 화이트아웃은 방향을 잃게 하고, 길을 지워버려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 치도 볼 수 없는 시계(視界) 제로 상태인 블랙아웃, 화이트아웃인 것이다.

화이트아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과도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조선업 폐업과 GM 군산공장 사람들처럼 예상 밖의 흐름에 따라 크레바스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갑자기 교통사고나 지병으로 인해 화이트아웃을 만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오늘이다.

생(生)을 파자하면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외통수에서 만나는 난관이 화이트아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운명에 순응하거나 방기하는 이도 있고, 신을 호명하거나 운명에 맞서 대결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 중, 역사적 삶을 산 사람들은 그 위기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여 긍정의 에너지로 바꾼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들은 인류의 빛으로 승화시킨 선지자들이고, 어린 나이에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은 스티븐 호킹과 궁형을 당한 사마천, 80년 5월 총칼을 마주한 광주시민 또한 절망이나 포기 대신 극한 상황을 반전시켜 긍정의 에너지로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성당을 뛰어나와 거리로 나선 조비오 신부님, 불일암에 스스로를 가두고 구도의 길을 고집했던 법정스님, 모두 폭풍우 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지혜를 찾고자한 현자들인 것이다.

유년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헐벗은 삶 속에서 생을 단단히 붙잡고 화이트아웃을 견뎌내셨고, 일곱 번이나 수술을 받고도 스케이트를 포기하지 않은 임효준 선수가 그랬다. 그가 딴 것이 금메달이어서가 아닌 여러 번의 화이트아웃을 극복했기 때문에 우린 금메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메달을 달고 있는 그의 가슴을 보는 것이다.

화이트 아웃은 시야 제로의 절망만이 아니다. 살다보면 늘 힘들었던 시기가 실상 끝처럼 느껴졌지만 끝은 시작점이 아니던가. 땅끝이 그렇고 절망이 그렇지 않던가. 터닝 포인트로써의 그 지점이 지나고 보면 가장 스릴 있고 가장 값진 지점, 자신을 한 차원 더 성장시킨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주변에 지인들이 지병으로 때론 실직이나 퇴직으로 화이트아웃에 빠진 모습이 안타깝다. 고결한 삶을 사신 분들임에도 불행은 예외 없이 지나치질 않는다. 그들에게 용기 백배 응원을 보낸다. 동물들은 굶주림이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가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지 않던가. 눈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들판은 가히 명경인 것처럼 화이트아웃 너머에는 멋진 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지길 기원해 본다.

더불어, 간혹 내 삶이 나태해지고 지루해질 때, 관계에 실증이 날 때, 나 스스로를 화이트아웃 속으로 밀어 넣고 싶다. 아니, 애정과 연민이 고갈되었다고 느꼈을 때, 거침없이 화이트아웃 속으로 밀어 넣어 나를 단련하고 싶다.


박용수

광주 동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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