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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법정의 수필 뜻
rona**** 조회수 8,201 작성일2006.08.20

방학숙제에  '법정의 수필 1편 읽고 감상문 쓰기' 라고

 

되어 있는데요 뜻이 뭔지....

 

수요일 개학이라 급합니다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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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부천상일중 1학년분이신가요?

저도 1학년인데 개학일이랑 국어 과제내용 글이 하나도틀림없이 같네요 ㅎ

법정의 수필 뜻은 법정스님 이란분이 있는데, 그분이 지으신 수필 이라고 할수있죠

좀 어려울거여요~ ㅎㅎ

 

 

사실 저도 1편이 뭔지 모르고있어요ㅜㅜ

 

여백의 아름다움

 

지난 연말 조계사에서 종권을 둘러싼 못된 중들의 상상을 초월한 난동이 벌어졌을 때, 불교신자와 일반 사회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와 환멸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같은 옷을 걸친 인연으로, 산중에서 안거 정진 중인 무고한 스님들도 깊은 상처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마다 보도되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내 자신도 참괴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사흘동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국 흑룡강성과 유럽과 미주에 있는 신자들이 보내온 편지에도 한탄과 분노의 소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은 중으로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한동안 바깥출입을 자제했었다. 먹물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가 수행자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온갖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청정하게 지키고 남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아니면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길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저질들이 종교집단을 이루면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조직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심할 때 더러는 옛 사람의 서화에서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무심히 서체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옛 사람의 그 기개와 인품이 함께 들여다 보인다.
허균이 엮은 「한정록」에는 왕휘지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실려 있다. 중국 동진 때 그는 산음에서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여 온통 흰빛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의 '초은시'를 외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이때 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매사를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손익계산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날 밤을 새워 친구를 찾아 나선 그 흥겨운 기분과 마음을 삶의 향기로운 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 만약 친구집 문을 두드려 친구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얻어 먹고 돌아왔다면, 그 흥은 많이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와 산문의 세계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왕휘지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을 때다. 그전부터 환이라는 사람이 피리의 명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때마침 수레를 타고 둑 위로 지나가는 그를 보았다. 왕휘지는 이때 배를 타고 가던 중인데, 동료 중에 그를 아는 이가 있어 환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서로 알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피리 소리를 한번 들려 줄 수 없느냐고 청했다. 피리의 명인인 환이는 평소 왕휘지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수레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세 곡조를 불었다. 그리고 나서 급히 수레에 올라 떠나갔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주인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이에게 피리를 들려 주고,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는 것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피리를 불고 나서 번거롭게 수인사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떠나간 환이의 산뜻한 거동이 피리의 여운처럼 우리 가슴에까지 울려온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친구를 만나더라도 종일 치대고 나면, 만남의 신선한 기분은 어디론지 새어나가고 서로에게 피곤과 시들함만 남게 될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정의 밀도가 소멸된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바쁜 상대방을 붙들고 미주알 고주알 아까운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보다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無所有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 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 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 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침묵과  무소유의  달

 

자연의  신비에  싸여  지혜롭게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때  그들  둘레에  있는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하
여  그  달의  명칭을  정했다.  그들은  외부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동시
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잃지  않았다.  한해를  마감하는  달  12월
을  「침묵하는  달」  「무소유의  달」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산길을  터벅터벅  걷노라면  12월이  침묵과  무소유의  달이라는걸  실
감할  수  있다.  한동안  지녔던  잎과  열매들을  말끔히  떨쳐  버리고
차가운  겨울하늘  아래  빈몸으로  의연히  서있는  나무들은  침묵과  무
소유의  의미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깜짝깜짝  놀란  한해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남는  것은  피곤뿐인데,  나무들과  함께  있
으면  잔잔한  기쁨과  편안하고  아늑함을  느낀다.  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사람이  본
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
이  있는  생명체다.
그것들은  동물인  인간에게  유익한  에너지를  끝없이  발산해  주고
있다.  숲의  신비를  터득하고  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기운이
달리면  숲으로  들어가  양팔을  활짝  벌린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어
그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지나온  한해를  되돌아보면  깜짝깜짝  놀랐던  사건과  사고로  잇따른  
씁쓸하고  우울한  기억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  세월이  그렇
게  엮어진  것이다.  이  세상  만물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모
습을  드러내기  전에  안  보이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를  공의  세계라
고  한다.  있는  것은  없는  것에  의해서  유지  존속되고  앞과  뒤는  
서로  뒤따르면서  이어간다.  밝은  대낮은  어두운  밤이  그  배후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또한  밤은  낮이  없으면  그  장막을  펼
칠  수  없다.  이것이  우주의  리듬이요  음양의  조화다.
우리의  생각이나  언어  동작은  우리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긴다.
그것은  마음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나중에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
게  된다.
우리들의  모든  생각은  우주에서  영원히  진동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어두운  생각  속에  갇혀서  살면  그  사람의  삶이  어
두워지고  밝은  생각을  지니게  되면  그  삶에  햇살이  퍼진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낱낱이  그  예를  들출  것도  없이,  깜짝깜짝  놀
랄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잇따라  일어나는  바람에  서민들의  심장은  그
야말로  콩알만해졌을  것이다.  또  어디서  무슨  사고나  사건이  터지지
않을지  노상  불안한  마음이다.
 
진실한  기도  올릴때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도  있듯이  우리들의  생각이나  행위는  씨가  
되고  업이  되어  그에  걸맞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인과관계의  고리
다.  현정부에서는  전에  없이  이른바  「깜짝쇼」를  즐겨  연출하기  때
문에  깜짝깜짝  놀랄  일이  뒤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통치자의  고유권한에  참견할  바는  아니로되,  우리  시대를  함께  만
들어가면서  기쁨과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는  한  국민의  처지에서
진언이  허락된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깜짝쇼」라는  말이  최고통치
권자의  주변에서  사라졌으면  한다.  무고한  국민들에게  더이상  충격을
주지  말았으면  한다.  그  어떤  아름다운  문구를  쓴다  할지라도  말은,
특히  정치적인  말은  한낱  껍데기일뿐이다.  진실은  오히려  침묵

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  그  침묵  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  
존재의  바탕인  침묵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어떤  사람이  성당에  가서  한시간이  넘도록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신부가  다가가서  물었다.
『선생께서는  하늘에  계신  그분께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
을  뿐입니다』
『그럼  그분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그분  역시  가만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영혼의  
침묵  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듣기  좋은  말로  
할  뿐이다.  기독교식의  말,  불교식의  말,  힌두교식의  말,  회교식
의  말  등등.
그러나  진실한  기도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원초적인  침묵
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이  있기  전에  침묵이  있었다.
한해를  청산하는  이  침묵과  무소유의  달에  종파적인  신앙을  떠나
우리  모두가  저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침묵의  기도를  올렸으면  한다.
우리곁에서  온갖  재앙이  사라지고  이땅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도
록,  그래서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복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화제추적] '무소유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
                             "法頂이 있어 맑고 향기롭게 산다"
                    법정스님이 '무소유 정신'을 설파한 지 25년. 나이와 종교를 불문하고 스님의
                    글과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뜻을 따르는 이가 여럿이다. 그들이 전하는, '맑고
                    향기로운 사람' 법정스님 이야기.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필 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인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요란한 ‘잘 살아보세’ 구호 속에 너나없이 앞으로 앞으로만 내닫던 70년대 중반.
                    양(量)과 속도만이 모든 가치의 척도였던 그 메마른 성장지상주의 시대의 극점에서
                    ‘소유의 끝’을 경고하고 ‘더불어 살아가기’의 지혜를 깨우친 맑은 목소리가 있었다.

                    법정(法頂) 스님. 당시 막 40대에 접어든 젊은 수행자였던 그는, 그 시절엔 개념조차
                    생소한 ‘무소유’라는 제목의 작은 수필집 한 권을 통해 천 근 설법보다 그윽한
                    향훈(香薰)을 척박한 세상 가득 피워올렸다.

                    그 후 25년. ‘무소유’는 무려 80쇄를 넘기면서 세대와 세대를 잇는 등불 역할을 해
                    왔다. 서점가에서는 지금껏 변함없는 스테디셀러로 가슴 훈훈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서가에서 밀려나기엔 책 속에 담긴 메시지가 너무도
                    선지적이었을까.

                    이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신도와 비신도를 불문하고
                    법정스님의 글과 인품에 감화되어 그의 뜻을 따르게 된 속가(俗家) 제자들, 걷는 길은
                    다르지만 그와 오랜 친구처럼 따뜻한 교분을 나눠온 이도 여럿이다.

                                            법정을 따르는 사람들


                    법정과 교분이 두터운 인물로는 김종서 전 교육개혁위원회 위원장, 한국화가
                    서세옥씨, 장익 천주교 춘천교구장, 한국화가 송영방씨(동국대 미술학부 교수),
                    이성용 세무사, 김유후 변호사(전 청와대 사정수석), 방송작가 윤청광씨, 동화작가
                    정채봉씨(‘샘터’ 주간), 방송인 이계진씨, 고현 조선대 디자인학부 교수, 출판인
                    김형균씨(도서출판 동쪽나라 대표), 소설가 정찬주씨, 판화가 이철수씨, 시인
                    류시화씨, 박지훈 경기대 인문학부 교수, 작곡가 노영심씨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종서 박사는 법정 스님이 회주로 있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매일
                    찾아 참선하고, 스님이 홀로 수행중인 강원도 산골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서울 나들이를
                    할 때면 찻잔을 놓고 마주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산정 서세옥 화백은 대기업들이 여러 차례 거액을 제시하며 자사 달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해왔다. 그러나 ‘맑고 향기롭게’에서
                    회원들에게 나눠줄 달력 그림을 부탁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서화백의 작품 12장의 가치는 값으로는 환산하기조차 어렵다. 서화백의 후학인
                    송영방 화백도 ‘맑고 향기롭게’에 달력 그림을 기증한 바 있다.

                    장익 주교는 스님과 종교의 벽을 넘어 20여년간 교우해 왔다. 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은 “내가 수행자라거나 상대방이 사제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만나는”
                    사이. 스님은 몇 해 전 장주교의 안내로 로마의 가톨릭 성지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94년 법정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사단법인을 설립, 정신계몽운동과 봉사활동,
                    환경보존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김유후 윤청광 정채봉 이계진 김형균씨 등은 ‘맑고
                    향기롭게’에서 이사를 맡아 스님의 뜻을 돕고 있고, 세무공무원 출신 이성용 세무사는
                    감사를 맡고 있다. ‘맑고 향기롭게’ 로고는 고현 교수가 디자인했다.

                    정찬주씨는 샘터사에서 근무할 때 스님의 책 10여권을 펴내면서 그의 성품과 언행에
                    가슴을 데웠고, 그 인연으로 법명과 오계를 받았다.

                    류시화 시인은 스님의 법문과 말씀을 모아 지난해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책을 펴냈고
                    최근에 나온 ‘무소유’ 개정판 기획 진행작업에도 참여했다. 판화가 이철수씨는 이
                    책들의 제자와 표지 판화를 만들었다.

                    노영심씨는 몇 년 전부터 스님의 지방 강론을 수행하며 강론에 앞서 피아노를 연주한
                    인연으로 ‘법정 팬클럽’의 막내둥이가 됐다. 노씨는 지난 5월 부처님 오신 날
                    길상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를 준비하면서 연주뿐 아니라 출연자 섭외와 플래카드
                    문안 만드는 일까지 도우며 뛰어다녔다.

                    대부분 전문직에 종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왜 법정 스님의 일이라면
                    기꺼이 달려와 발 벗고 나설까. 도대체 스님의 어떤 면모가 강력한 자기(磁氣)처럼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그들은 스님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자신의 삶을
                    살찌웠을까.

                    이들이 무엇보다 존경해 마지않는 스님의 면모는 무소유의 청빈정신을 책에 쓴
                    그대로 실천하는 ‘필행일치’의 삶이다.

                    92년, 법정 스님이 17년간 수행해온 조계산 불일암을 떠나 전기도 전화도 수도도 없는
                    강원도 오지, 화전민이 남기고 간 작은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잘 알려진 일.
                    겨울이면 개울이 워낙 두껍게 얼어붙어 물을 길으려면 도끼로 몇 번씩 얼음판 위를
                    내리쳐야 하는 곳이다.

                                             몸에 밴 무소유의 삶


                    이곳에서 변변한 가구나 생활도구도 없이 자급자족해 살면서도 그는 늘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찻잔 몇 벌, 책 몇 권이 굴러다녀도 ‘너무 많다’며
                    부담스러워한다.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이들은 좋은
                    친구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려는 데 자꾸만 뭔가 갖다주는 사람은 달갑지 않은
                    친구다”라고까지 한다.

                    그래서 더러 ‘참지 못할 만큼 많다’고 여겨질 때는 주변을 정리, 읽고 난 책이나
                    거절하지 못한 선물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편지 같은 것들은 태워 없앤다.
                    부엌에는 ‘반찬은 3가지가 넘지 않게’라는 부엌훈을 써 붙여놓았다.

                    스님은 길상사의 회주이자 창건자이면서도 이 절에 자신의 방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어쩌다 길상사를 찾은 날이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절에서 머물지 않고 산중의
                    오두막으로 총총히 돌아간다.

                    지난해 자신의 출판사에서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를 펴낸 김형균씨는 스님에게
                    밀짚모자를 선물했다가 혼이 났다. 스님의 밀짚모자가 하도 오래 되고 낡아 군데군데
                    구멍까지 났기에 새 모자를 사드렸더니 “있는 모자를 뭐하러 샀는가. 자네나 쓰게”
                    하면서 한사코 받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쓰고 다닌다.

                    정찬주씨도 잊지 못할 추억을 갖고 있다.

                    “스님이 불일암에 계실 때 가끔씩 찾아 뵈면 국수를 삶아주시곤 했습니다. 스님 국수
                    삶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다 암자의 물이 좋아 맛이 기가 막혔죠. 하루는 스님이 삶은
                    국수를 우물물에 담가 식히는데, 국수 두어 가닥이 그릇에서 흘러 떨어졌어요. 그걸
                    보시더니 얼른 주워서 드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러세요. ‘신도들이 나더러 수행
                    잘하라고 보내준 정재인데, 국수 한 가닥도 가볍게 여겨선 안 되지…’.”

                    그렇다고 스님이 실천하는 가난한 일상이 궁상맞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삶
                    곳곳에 독특한 천연의 운치와 지혜가 배어 있다. 스님이 손수 지었다는 불일암도
                    그러했다. 정채봉씨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불일암의 ‘뒷간’이었다.

                    “들어가 앉으면 듬성듬성하게 끼워놓은 창살 사이로 대나무밭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눈만 즐거우라고 그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대밭에서 불어온 신선한 바람이 창살
                    사이로 들어왔다 화장실을 한 바퀴 돌아 나가게 한 통풍시스템이죠. 벽에 걸린
                    대나무통에는 늘 붉은 참밀 가지 하나가 꽂혀 있어 스님의 단순하고도 은은한 미적
                    감각을 보여줍니다.

                    또 화장실 한쪽에는 바구니가 놓여 있는데, 그 안에는 낙엽이 가득 들어 있어요.
                    볼일을 보고 나서 그 위에다 낙엽을 한 줌 떨어뜨리면 보기 흉한 것도 가려지고,
                    낙엽과 변이 함께 잘 삭아 거름이 되지요.”

                    ‘주어진 가난은 극복해야 할 과제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라는 스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절제하지 않는 베풂


                    그토록 넘침 없는 절제력이 몸에 밴 스님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베풂에
                    있어서는 그다지 절제를 모르는 듯하다. 출판사에서 인세를 받거나 신도들로부터
                    시주를 받으면 봉투도 열어보지 않고 자선기금이나 ‘맑고 향기롭게’ 사업비, 혹은
                    학승들의 뒷바라지 비용으로 내놓는다.

                    이성용 세무사는 “‘맑고 향기롭게’ 감사업무차 스님의 수입과 지출내용을 살펴보면
                    언제나 수입 대부분이 자선기금으로 지출된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이계진씨는 방송가에서 법정 스님을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지만, 스님이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스님에겐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해 연말, 이웃돕기 프로그램인 ‘사랑의 리퀘스트’ 스태프들이 너무
                    간절하게 스님의 출연을 부탁해왔다. 더는 거절하기 어려워 스님에게 어렵사리 뜻을
                    전했더니 스님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내 말 한 마디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데 내가 왜 못 나가겠는가”면서. 뒤에 들으니 스님은 그 전부터 이
                    프로그램을 보다 눈물을 흘린 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씨가 방송국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나선 후 광고출연 등으로 수입이 늘었다.
                    그래서 한 번은 스님에게 “저는 이제 돈을 많이 법니다. 스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는
                    거지요”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바로잡았다.

                    “무소유란 돈을 벌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번 돈을 움켜쥐고 있지 말라는 뜻이지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남을 위해 잘 쓰면 되는 겁니다.”

                    ‘전염성’인 것일까. 스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는 이웃과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많다. ‘맑고 향기롭게’의 실천과제 중의 하나도 ‘나누어 주며 삽시다’이다.

                    수많은 자선음악회를 비롯, 다일공동체 무료병원 설립운동,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봉사활동, 선천성 얼굴 기형아를 위한 사랑의 시술 캠페인, 터키 지진 피해자 돕기
                    운동 등에 참여해온 노영심씨는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대단하게 볼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할 기회는 꽃잎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그걸 피하지 않고 그냥
                    받아쥐는 거죠. 누군가를 직접 돕거나 돕기 위한 통로 혹은 연결망의 역할을 하는
                    과정에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의미가 더해집니다. 그중 한 분이 법정 스님이죠.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고개 숙일 줄 알되, 그 부족함이 남에게 줄 게 없는 부족함이
                    돼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수행정진 한 길 걷는 원칙주의자


                    정채봉씨가 어느 한여름 낮 불일암을 찾았을 때였다. 하도 더운 날이라 이런 날은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암자로 들어서니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낮잠을 주무시나 싶어 방 앞에 다가가 스님을 부르자 스님이 암자 뒤쪽에서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이 더운 날 뭘 하고 계셨습니까?”

                    스님의 대답은 이랬다.

                    “졸음을 쫓느라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었습니다.”

                    졸음이 쏟아지는 한여름날, 그것도 혼자 기거하는 암자에서 맑게 깨어 있기 위해
                    날카로운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는 수행자의 모습. 그 서슬 시퍼런 자기 감시. 정씨는
                    스님에게 그 순간보다 더 강렬하게 매료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스님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의 정도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다.
                    그만한 법랍이면 더러 곡차도 한두 잔 하고 가끔은 예불을 건너뛰는 ‘융통성’을
                    보일 만도 한데,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혼자 살면서도
                    아침 저녁 예불을 빠뜨리지 않는다.

                    10여년 전 모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법정 스님은 불일암에서
                    안거(安居·스님들이 석 달 동안 사문 밖을 나가지 않고 수행하는 것)중이었다.
                    주변에서 임종을 지켜드리라고 하자 스님은 “출가 이후 한번도 속가를 찾은 일이
                    없다. 하물며 지금은 안거중이지 않은가”라며 절을 나서지 않았다.

                    다음날 모친이 그예 사망했다는 전갈이 오자 주변에선 “이제는 가보셔야 하지
                    않겠느냐”며 스님을 떠밀다시피 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 내가
                    간다고 살아오시겠느냐”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홀로 목탁을 두드리며 기도만 올릴
                    뿐이었다. 대아(大我)를 위해 소아(小我)를 버리라는, 그래서 피붙이의 죽음에조차
                    초연하라는 계율에 묵묵히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인근의 한 스님이 부친상을 당하자 법정 스님은 이 스님을 데리고 함께
                    그의 속가로 내려가 염불을 하고 왔다. 스스로에겐 추상같이 엄격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겐 그렇듯 너그럽게 마음을 열어 보인다.

                    원칙을 중요시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하며 쉼 없이 수행정진하는 스님의 자세는 때로
                    차갑고 인정머리 없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가령 방문객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법당에 절이나 하고 그냥 가시오” 하며 매정하게
                    뿌리친다.

                    스님을 글로만 접해본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좀체 이해하지 못한다. 스님의 글이 품은
                    온기 때문에 그를 늘 우리 곁에서 따뜻한 말씀을 전해주는 ‘부처의 분신’쯤으로 여기는
                    탓이다.

                    언젠가는 지방에서 스님을 만나러 올라왔다가 외면당한 사람이 “스님이 몇 시간이고
                    마주앉아 좋은 얘기를 들려주리라 기대했는데, 저렇게 박정한 분인 줄은 몰랐다”며
                    발길을 돌렸다. 정채봉씨가 나중에 스님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스님은 허허 웃으며
                    “때로는 인정이 없어야 하는 게 수행자다. 만나자는 사람 다 만나주면 내 공부는 언제
                    하라는 말이냐”고 했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가르침
                    그대로였다.

                    누군가 예고 없이 찾아와 말을 시키면 스님은 대꾸도 않고 주머니에서 호두알만한
                    알사탕을 꺼내 쥐어줬다. 군말 늘어놓지 말고 산이나 바라보다 내려가라는, 산처럼
                    말없이 살라는 묵언(默言)의 알사탕이었다.

                    스님이 불일암 생활을 청산하고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돌연 산골행을 감행한 것도
                    수행정진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상좌들의 보살핌을 마다하고
                    “나는 혼자 죽 끓여 먹을 팔자”라며 굳이 불편하고 힘겨운 만년의 삶을 택한 것은
                    무엇보다 수행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이름값’ 때문에 관광지가
                    되다시피 한 불일암에서는 더 이상 수행다운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라’는 불교의 요체를 참으로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는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산 속 오두막 생활을 기꺼워하고, 그처럼 수행에
                    진력하면서도 ‘중은 밥값을 해야 한다’며 때때로 산을 내려와 ‘맑고 향기롭게’ 중생을
                    보듬기 때문이다.

                                              ‘군더더기’가 싫다


                    이계진씨는 “법정 스님은 ‘까다롭고 괴팍스러운 할아버지’라는 표현에 꼭 들어맞는
                    분”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런 까다로움과 괴팍스러움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거리낌 없이 행하고,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차원 높은
                    ‘자유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오히려 마음 깊이 공감한다는 것. 명리에 대한 집착
                    때문에 어정쩡하게 스스로를 구속하는 이들이 좀 많은가.

                    젊은 수도승 시절부터 스님은 무원칙한 것 앞에서는 자비로운 은자(隱者)가 아니었다.
                    ‘무소유’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개발독재의 광풍이 춤을 추던 70∼76년에 쓴 것인데,
                    더없이 부드러운 메시지로 가득한 듯한 이 책에서도 잔뜩 날선 펜끝이 느껴진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탯줄이다. 그 길이 증오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
                    없다’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당시 스님은 불교계 인사로는 드물게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스님에게서 원고를 받아본 기자들이나 출판편집자들은 그의 완벽주의에 두 손을 들고
                    만다. 오자가 나오거나 자신의 허락 없이 토씨 하나 고치는 것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글쟁이들은 어지간히 길이 들 때까지는 스님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스님이 자신과 교분이 깊은 한
                    신문기자에게 원고를 전하는 장면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기자가 스님에게 절을 올린 뒤(기자는 천주교 신자다) 무릎을 꿇고 앉는다. 스님이
                    원고를 건네준다. 기자는 원고를 소리 내어 읽는다. 스님은 기자가 글자를 잘 알아보지
                    못해 잘못 읽은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아준다. 이때 기자도 ‘이런 표현은 이렇게 바꾸는
                    게 좋겠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한다.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되면 스님도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일단 원고를 넘긴 뒤에는 ‘무허가 교열’은 물론, 받침 하나만 틀리게 인쇄되어
                    나와도 불호령이 떨어진다. 원고지 열댓 장짜리 신문 칼럼 하나 받는데도 이렇게 피를
                    말릴 판이니 책이라도 한 권 엮어내려면 편집자의 스트레스가 오죽할까.

                    스님은 최근 ‘무소유’ 개정판을 펴내면서 ‘…것이다’ ‘…해버렸다’ 같은 구식 표현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를 죄다 뜯어고쳤다. 스님의 한 속가 제자는 “스님이 세속에
                    계셨다면 아마도 시인이 됐을 것”이라며 웃었다. 지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를 가졌지만
                    손톱만한 ‘군더더기’도 용납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결코 입심좋은 소설가가 되진
                    못했으리라는 것.

                                           고고하기에 거울은 맑고


                    법정 스님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처럼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스님의 면모야말로
                    스님을 스님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믿는다. 자신의 질서를 지키려는 그렇듯 철저한
                    자세 때문에 스님이 지금껏 흐트러짐 없이 올곧게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형균씨는 “과거에는 ‘왜 저렇게 곧기만 하실까’ ‘더러는 보고도 못 본 척하시면 안
                    되나’ 하는 불만도 많았는데, 나도 나이가 들어 생각하니 평생을 그처럼 일관되게 사실
                    수 있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고 털어놨다.

                    잔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되는 대로 살았다면 스님이
                    지금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맑은 거울이 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행승의 매력은
                    그렇듯 정갈하고 고고한 처신에서 풍겨나오는 게 아닐까.

                    스님이 그래도 요즘은 많이 푸근하고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면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다음엔 그러지 마라’고 슬쩍
                    눈감아주기도 한다.

                    스님의 양철지붕 오두막은 천장이 낮아 방을 드나들 때 문머리에 부딪히기 쉽다.
                    더욱이 스님은 육척 장신인데다 성격이 하도 급해서 비호같이 후닥닥 방을 드나들다
                    수도 없이 머리를 부딪힌다고 한다. 그러니 머리 위쪽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스님
                    머리에 연고가 발라져 있는 모습은 못 본 이가 드물다.

                    그런데 스님은 “내가 불일암에 있을 때만 같아도 당장에 문짝을 뜯어내고 공사를
                    벌였을 거다. 하지만 이젠 자연에 적응하면서 고개도 좀 숙이고 살자 싶어서 그냥
                    내버려둔다”며 웃어 넘긴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말이다.

                    불일암 시절, 갑자기 거세진 바람에 풍경(風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자 한밤중에
                    잠자리를 박차고 나와서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기어이 풍경을 떼어낸 스님이었다.
                    자신의 질서를 흩트리는 것은 한 순간도 참아내지 못했던 성미를 떠올려보면 작은
                    변화가 아니다.

                    하지만 스님이 원칙주의자라고 해서 형식이나 절차에 얽매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스님은 본질에 다가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분별을 멀리 한다. 불교 전통에
                    따라 삼배(三拜)를 올리려 하면 그렇게 쑥스러워할 수가 없고, 주지도 방장도
                    마다하고 그저 수행승의 본분에만 충실하다.

                    박지훈 경기대 교수는 20여년 전인 여고 2학년 때 스님의 글을 읽고 감화되어 당시
                    스님이 수행중이던 서울 봉은사 다래헌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한 스님에게 법정
                    스님이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안 계신다”고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법정 스님, 전화 왔습니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까 그 스님이 전화를 받으러 오는
                    것이었다. 통화를 끝낸 스님에게 법정 스님이 맞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이 답했다.

                    “나는 법정이 아니고 그냥 나입니다.”

                    뒤에 스님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어린 여학생이 온갖 우주고를 다 짊어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그랬다”고 했다. 본질이 아닌 허상에 미혹되지 말라는, 찬찬한
                    가르침이었다.

                    박교수는 대학시절 해인사에서 여덟 시간 동안 삼천배를 하고 성철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해인사에서 하루를 머물고 뿌듯한 기분으로 불일암을 찾았다. 법정스님은
                    묵언수행중이었다. 그래서 삼천배를 했다는 얘기를 필담으로 전했더니 스님은 씩
                    웃으면서 종이에다 이렇게 써보였다. ‘다리운동 한 번 잘하고 왔구나.’

                                           충격적인 생명중심사상


                    스님은 편협한 종교의 벽으로 울타리를 두르지도 않는다. 그는 “진정으로 불교를
                    알려면 불교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부처에 얽매이면 참부처를 볼 수 없고,
                    보살에 얽매이면 진짜 보살행을 할 수 없다”고 설법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명동성당을 방문했을 때 스님은 “나를 이 자리에게 서게 해주신 천주님께 거듭
                    감사드린다”고 강론의 서두를 열었다.

                    길상사를 자주 찾는 한 주부 불자는 스님으로부터 “소리없이 내면과 집안부터
                    정갈하게 하고, 바깥에 나가 있는 식구들 생각 한 번 더하는 게 절에 열 번 오는 것보다
                    낫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절 출입이 잦은 나머지 주부 불자들이 행여 가정을 소홀히
                    할까봐 염려했던 것이다.

                    스님이 추구하는 본질은 생명에 대한 경외와 맞닿아 있다는 게 많은 이들의 시각이다.
                    그의 책이 오래 읽히는 것은 감성적인 문체보다는 오랜 수행으로 걸러진
                    생명중심사상이 저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정찬주씨는 “스님의 감성이
                    ‘살’이라면 생명중심사상은 법정을 법정이게 하는 ‘골수’”라고 단언한다. 정채봉씨는
                    “충격적이기까지 한 스님의 생명중심사상이 작가생활에 커다란 기둥뿌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겨울에 눈이 쌓이면 스님은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짐승들을 위해 콩이며 빵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오두막 근처에 놓아둔다. 고구마도 짐승들과 나눠 먹는다. 박새가 먹는
                    좁쌀은 장에서 사다 준다. ‘산에는 꽃이 피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눈 쌓인 데 보면 개울에 발자국이 있다. 토끼 발자국도 있고, 노루 발자국도 있고,
                    멧돼지 발자국도 있다. 물을 찾아 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질녘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구멍을 만들어 둔다. 물구멍을 하나만 두면 그냥 얼어 버리기 때문에
                    숨구멍을 서너 군데 만들어 놓으면 공기가 통해 잘 얼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스님의 애정과 존경은 불일암을 찾은 이들에게도 자주 목격됐다.
                    정찬주씨의 회고.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더니 스님이 산 아래를
                    굽어보며 멋들어지게 휘파람을 불고 계시더군요. 조금 있으니까 어디선지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와서는 스님 주위를 돌며 공중제비를 해요. 새 이름을 여쭤봤더니
                    멀리 주암호에서 날아온 호반새래요. 암자 근처 오동나무에 구멍을 파고 산다는데,
                    스님이 휘파람을 불어주면 이 놈도 기분이 좋아서 어떤 때는 어깨에 살짝 내려앉기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이 강원도로 떠난 뒤부터는 호반새도 날아오지 않았고, 오동나무는
                    오동나무대로 호반새가 살던 세 개의 구멍을 자신의 살로 메워버렸대요.”

                    산길을 걷다 길 가운데 죽순 하나가 발에 밟힐 듯 아슬아슬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스님은 “얘야, 미안하지만 여기는 네 길이 아니구나”하고 속삭이며 죽순을 뽑아냈다.
                    스님과 산길을 함께 걸어본 사람들은 별의별 나무와 풀, 새들의 이름은 물론 그
                    속성까지 두루 꿰는 스님의 현란한 ‘생명학 강의’에 혀를 내두른다.

                                        법명과 오계는 신호등 같은 것


                    생명을 대하는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스님과 ‘치수’가 맞아 오래 교유해온 이들은 한결같이 스님을 ‘겉으로는 냉기가 서린
                    듯해도 안으로는 따스한 봄바람이 숨어 있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스님은 서울에 오면 꼭 서점에 들러 이들에게 선물로 줄 책과 아이들에게 줄
                    일기장이며 공책들을 손수 골라 보내주고, 연말이 다가오면 달력도 꼬박꼬박
                    챙겨준다.

                    이계진씨 부부가 몇 년 전 프랑스 여행을 갔다가 파리에서 우연히 법정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아주 반가워하면서 “내가 파리를 다 둘러봤으니 가장 경제적이고 볼거리 많은
                    여행코스로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자신은 이미 다 둘러본 관광지를 두 사람을
                    위해 굳이 한번 더 찾아다녔던 것.

                    그러다 점심때가 되어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는데, 스님은 자리에 앉자 마자 “목이
                    컬컬하니 맥주나 한 잔 할까?”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시켰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씨 부부였다. ‘아무리 보는 눈들이 없다고 스님이 이러셔도 되나…’ 싶었는데,
                    정작 스님은 잔만 받아 뒀을 뿐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전생에 많이
                    마셨습니다”고 하면서. 두 사람이 스님을 의식해 맥주 한 잔 마음대로 못 마실까 봐
                    스님이 미리 선수를 쳤던 것이다.

                    스님은 친근한 이들과 마주앉은 자리에서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씩 툭툭 던지거나 한지에다 짤막한 글을 써주곤 하는데, 이런 것들에
                    실린 메시지는 상대방의 ‘눈높이’를 너무도 섬세하게 배려한 것이어서 두고두고
                    여운을 남긴다.

                    이성용씨가 국세청에서 근무할 때 스님은 이런 글을 써 보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 밑을 뚫어도 물 외엔 흔적조차
                    없다.’

                    곧게 뻗은 대(竹) 그림자가 뜰을 쓸고, 환한 달빛이 물 밑까지 샅샅이 비추는데 정작
                    대와 달은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남이 없다…세무공무원에게 이보다 의미심장한 경구가
                    또 있을까. 지난해 국세청에서 퇴직, 세무사 사무실을 낸 이씨는 지금도 이 글을
                    액자에 담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속가 불자인 정찬주씨는 93년 단오날, 스님을 찾아가 평생의 좌우명이 될 법명을
                    지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스님은 밤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무염(無染)’이라는
                    법명과 오계를 내렸다.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저잣거리에서 물들지 말고 살라는 뜻 아닙니까. 스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법명과 오계를 받는 것만도 공덕이다. 세상에 나가 길을 잘못
                    들면 법명과 오계를 생각하고 바로잡아라. 법명과 오계는 신호등 같은 것이다’고. 미로
                    같은 경전더미에 파묻혀 헤매기 딱 좋은 게 불교인데, 이 한 마디로 구도의 길을
                    환하게 밝혀주신 거죠.”

                    류시화 시인은 ‘산에는 꽃이 피네’의 마지막 장 서두를 이렇게 맺고 있다.

                    ‘고백하건대, 법정 스님에 대해 내 자신이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그분과 하룻밤도
                    한방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참인간’과 함께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200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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