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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말레이시아 인구가 얼마에요?
icep**** 조회수 8,648 작성일2012.03.03

 제가 숙제를 해야하는 데 말레이시아 인국 가엘마에요. 3월 5일 까지... 급해요.

내공 30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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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25,347,000명-2005년 어림
23,953,136명-2000년 조사
77명/㎢ (115위)-인구밀도

인구

말레이시아의 인구는 약 2,500만 명으로 인구의 60% 이상이 말레이 반도에 살고 있다. 다민족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여러 종교를 축으로 각각의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부미푸트라, Bumiputra)이 인구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슬람교에 기반을 둔 계율을 따른다. 중국계가 약 25%, 인디아계가 약 8%, 전통 가옥에 살면서 각 부족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독특한 전통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원주민들인 오랑아슬리(Orang Asli)들을 포함한 기타가 약 10% 정도이다. 중국인과 말레이인의 혼혈 인종인 페라나칸인, 그리고 유럽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 유럽계는 주로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의 후손들이며 대부분 말라카에 있는 주거 지역 내에 살고 있다. 각각의 지역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말레이시아 만의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한다.


언어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는 말레이어(Bahasa Melayu, Bahasa Malaysia)이며 영어가 널리 통용된다. 중국어타밀어아랍어,이반어(사라왁의 원주민인 이반족의 언어)도 사용된다. 말레이시아는 적어도 70여 개의 다른 어족(語族)에서 생성된 다양한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국어인 ‘바하사 멜라유(Bahasa Melayu)’ 외에도, 영어는 말레이시아의 공용어로써 상업과 공업에서 널리 쓰이며 말레이시아 학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어 교육을 받는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영어는 말레이어와 함께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이며, 집에서 자라날 때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영어를 구사한다면 의사소통에 별다른 불편함 없이 말레이시아를 여행할 수 있다. 말레이어와 영어 이외에도 만다린(중국어), 타밀어(인도어)가 사업, 여행, 산업, 라디오, TV 뿐만 아니라 교육기관 등에서 쓰이고 있어 최근 말레이시아를 자녀들의 유학 목적지로 선택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말레이시아(말레이어: Malaysia)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남중국해로 나누어진 말레이 반도지역과 보르네오 섬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인도네시아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국경은 싱가포르와 베트남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지만,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는 18세기부터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된 말레이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은 해협식민지로 불리었고, 다른 곳들은 보호령이 되었다. 1946년, 말레이 반도의 주들이 연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세웠다. 1948년, 연방은 재편성되어 말라야 연방이 설립되었고, 1957년 8월 31일 독립을 하게 되었다. 1963년 9월 16일, 말라야 연방은 사바 주사라왁 주싱가포르와 연합하면서 Malaya란 이름에si를 추가해 Malaysia가 되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싱가포르는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아시아에서 최고의 경제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50년동안의 GDP 성장률이 평균 6.5%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천연 자원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과학, 관광, 무역, 의료관광등의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국이며, 국가 원수는 9개 주의 세습군주들이 5년마다 투표를 해서 그들 가운데 선정한다. 군주의 칭호는 양 디 페르투안 아공이며, 지금 군주는 압둘 할림이다. 정부의 장은 수상이다. 정부체제는웨스트민스터 체제에 가깝고, 법체계는 영국의 법에 기초한다. 말레이시아는 민족과 문화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는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라시아의 최남단 지역인 탄중피아이가 있고, 적도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열대 기후의 국가이다. 다양한 동식물군이 있어 생물 다양성이 큰 국가이다. ASEAN이슬람 회의 기구의 창립멤버이며, APEC,영국연방비동맹 운동의 회원국이다.





201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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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구 : 2,527만명 (2008년 통계)


말레이시아의 국기 이미지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교의 상징

파랑·하양·빨강의 3색은 영국국기인 유니언 잭에서 취했다.

별과 달의 노란색은 왕실의 색깔이며,

파랑 직사각형은 국민간의 단합 또는 이 나라가 영국연방에 속한 국가임을 나타낸다.

줄무늬의 수는 연방을 이룬 13주와 연방정부(Federal Government)를 나타내며,

파랑 직사각형 안에 있는 별의 14개 빛살은 13주와 연방정부의 조화 및 통합을 의미한다.

가로세로 비율은 2:1이다.

1963년 9월 16일 제정하였다.

1997년 8월 31일 독립 40주년맞아

‘영광스러운 스트라이프(stripes)’라는 뜻의 ‘Jalur Gemilang’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레이시아 국기 / 동남아시아에 있는 입헌국주국

 

☞수 도 :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 
☞인 구 : 2,527만명 (2008년 통계)
☞위 치 : 말레이반도 및 보르네오섬 북부 
☞기 후 : 고온 다습의 열대성(21℃~34℃) 
☞면 적 : 329,733㎢ (한반도의 약 1.5배) 
☞주요도시 :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 페낭(Penang), 조호바루(Johor Bahru), 쿠칭(Kuching), 코타키나바루(Kota Kinabalu)
☞주요민족 : 말레이(61%), 중국계(29%), 인도파키스탄계(9%)
☞주요언어 : 말레이어(공용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 
☞종 교 : 이슬람교(주교),기독교, 기타

 

축제
(축제일은 음력을 사용하므로 해마다 바뀐다)

1월 1일     양력설 (English New Year) 
1월 17일   타이푸삼(Thaipusam;힌두교의 축제) 
1월 31일   음력설 (Chinese New Year;중국계 사람들의 설날) 
2월 1일     연방특별시 제정 기념일(라푸앙 섬에 국한) 
3월 1일     술탄 탄생일 (켈란탄 주) 
3월 3일     하리 라야 푸아사(이슬람교의 축제) 
4월 1일     성금요일 (Good Friday) 
5월 1일     메이데이 
5월 10일   하리 라야 하지 (이슬람교의 축제로 단식한다.) 
5월 14일   베삭데이 (Vesak Day;석가탄신일) 
6월 3일     국왕 탄생일 
6월 11일   마르 히자라프; 이슬람교의 설 
8월 9일     마호메트 탄생일 
8월 31일   독립기념일 
10월23일   디파바리 (힌두교의 설) 
12월25일   크리스마스

 

선사시대 말레이시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약 1만년 전에 오랑아슬리(Orang Asli)가 남서 중국쯤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기원을 전후하여 말레이는 유럽까지 알려졌다.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그의 초기 지도에서 말레이반도를 ‘황금반도’로 표기했다.

황금이라고 표기한 것은 로마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인도와 중국의 무역업자들이 금을 찾아 이곳에 도착한 후,

미니왕국들이 말레이의 강을 따라 형성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말레이 인들은 민족학적으로는 수마트라, 자바 그리고 필리핀 인들과 비슷하다.

그리고 때때로 다양한 동남아시아의 왕국들이 말레이반도를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지배했었다.
1405년 중국인 제독인 정화가 황제의 칙령을 가지고 말라카에 도착했다.

그리고 북쪽에서 침범하는 시암왕국을 막아주겠다는 중요한 약속을 해주었다.

그 결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라카는 말레이반도 전역에 세력을 확장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말라카에 이슬람이 도래했고 곧 말레이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말라카의 부와 번영은 곧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1511년에는 포르투갈이, 1641년에는 네덜란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795년에 영국이 말라카를 차지했다.
오랫동안 영국은 그들의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말레이의 항구에만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주석의 발견은 그들의 관심을 내륙으로 이끌었고,

그에 따라 전체 반도가 영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면 백인 라자(raja; 지방 왕)인 Charles Brooke과 북보르네오 회사(North Borneo Company)는

영국이 차지한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사라왁과 사바를 각각 차지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관습을 유지했고,

인도인과 중국인들을 말레이반도에 이주시킴으로써 말레이의 인종 혼합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말레이는 1957년 독립(머르데까; merdeka)을 쟁취했다.

하지만 곧이어 국내 공산세력의 준동과 이웃 나라인 인도네시아와 ‘대결국면’의 상태에 빠짐으로써

나라가 상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1963년 보르네오에 있는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싱가포르가 말레이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말레이시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와의 관계는 즉시 냉각되었고 2년 후에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수카르노의 사망으로 인도네시아와의 불편한 관계는 끝이 났으며,

현대화와 더불어 공산주의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판명되어 간단하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1969년 인종폭동이 발생하였으며, 특히 쿠알라룸푸르에서 그 강도가 심했다.

리고 폭동 결과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정부는 말레이와 중국인 사이의 긴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

방향은 다른 민족보다 말레이 인에게 더 많은 경제적 혜택을 주는 것으로 정해졌다

(경제적 소외감 때문에 발생한 폭동이었다).

결국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인종 간에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서로 협동하면서 살고 있다.
1974년 선거에서는 바리산(Barisan)으로 불리던 국민전선(National Front)이 다수표를 얻었으며,

그 중에서도 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sation)가 핵심 정당 역할을 했다.

그 때부터 모든 선거의 승리자는 UMNO가 되었다.

마하티르모하마드(Dr Mahathir Mohamad) 수상은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을 주도했으며,

범아시아주의의 지도자로서 세계 무대에서 그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링깃화의 약세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그의 위치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8년 9월 영연방 경기가 말레이시아에서 열렸지만 학생들이 불법구금과

안와르(Anwar Ibrahim) 부총리의 체포에 대해 항의하면서 연일 데모를 벌여 공공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데모대는 마하티르 총리의 사임까지 요구하고 나서

동남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였던 말레이시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1. 위치

말레이시아는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서 말레이시아 또는 말레이 반도 는 북쪽으로는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싱가포르 조호르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은 11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2. 정치

말레이시아는 입헌 군주국으로서 9개 각  술탄(Sultan)이 교대로 5년의 임기를 가진 국왕(Yang Di-Pertuan Agong)직을 수임한다. 그리고 실권은 국민이 선출한 의회와 총리가 쥐고있다. 말레이시아의 정당으로는 민중운동의 성과인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PSM) 등이 있다.

 

3. 경제

이 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98년 9월 초 환율을 고정시키는 조처와 함께 자본통제에 들어갔다. 자기나라 통화인 링깃화의 달러화 환전을 못하게 하고, 나라 밖에 있는 링깃화는 2달 안에 모두 국내로 갖고 들어오도록 했다. 그뒤에도 외국에 그냥 놔둔 링깃화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또 국내 증권을 산 외국인이 그 증권을 다시 팔려면 1년을 기다리도록 했다. 자본통제는 국내경제를 해외 금융·외환시장과 차단한 뒤 경기부양 정책을 펴기 위한 사전조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런 조처 뒤 통화량 확대공급, 금리인하, 공공지출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기부양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취해 나갔다. [1]

IMF의 통계에 의하면, 말레이시아의 2008년 국내총생산(GDP)은 2216.06억 달러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고무의 플렌테이션과 주석의 채굴, 천연가스의 채굴 등 특정한 농작물과 광물의 생산이 번성하였으나,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전 수상의 지도하에, 종래의 농작물과 광산물의 수출, 관광업에 의존하였던 체질로부터 탈피하여 결과적으로, 2020년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목표 "와와산 (말레이어로 비젼의 뜻) 2020"을 내걸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0년 6월,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위해인프라 프로젝트에 700억달러 규모의 자금 투입과 연 경제성장률 6% 달성 등을 핵심으로 하는 향후 5년간의 제10차 말레이시아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나지브 총리는 “말레이시아는 해외 투자자들을 더 많이 유치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재능있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현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역사

말레이시아에 사람이 거주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이동식 화전농업에 종사했다. 기원전 1,000년 경 강가나 해안가를 따라 어로 행위를 하는 철기 사용자들이 출현하였고, 2~3세기에 들어서 북부 께다(Kedah)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왕국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초기 말레이인들의 문명은 인도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들의 문화는 힌두교와 불교가 융합된 형태를 띠었다. 인도네시아 역사와 다소 공유되는 스리위자야 왕국이 7~8세기 경 성립되었다.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의 무역로를 통제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14세기 말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는 말라카(Melaka)왕국을 건국하였고, 직접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15세기 말라카왕국 아랍인, 중국인, 인도인들의 무역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1511년 포르투갈의 포병부대에 의해 말라카가 함락되면서 잔존세력들은 조호르(Johor)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17세기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이 말레이반도를 두고 대립한 시기였고, 18세기에 들어서는 술라웨시(Sulawesi)에 기원을 두고 있던 부기스(Bugis) 종족의 라자 께실(Raja Kecil)이 조호르를 점령하고 이 지역의 술탄을 폐위시킨 뒤 1세기 가량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말레이반도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786년 영국은 뻬낭(Penang)을 점령한 후 조지타운(Georgetown)을 건설하였고, 1819년에는 레플스(Sir Stamford Raffles)에 의해 싱가포르에 영국 무역항이 건설되었다. 1824년 네덜란드는 말라카를 영국에 내어주는 대신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이남지역의 모든 영토를 통제하는 조약을 영국과 맺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해안과 반도의 섬 지역만 통치했을 뿐이었지 말레이반도 내륙 지역에는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한편 영국은 1841년부터 사라와크도 통치하기 시작했다. 1840년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브루나이의 술탄을 도와 반란군을 무찌른 대가로 사라왁의 왕으로 봉헌된 것이었다. 1874년 영국은 뻬락(Perak)왕국과 빵꼬르(Pangkor)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영국은 말레이 왕국의 술탄 상속에 대한 동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간단히 말해 영국의 말레이시아에 대한 간접지배를 사실상 인정받은 사건이었다. 1888년 브루나이, 사라와크, 북보르네오가 영국 보호령으로 편입되었고, 20세기 초반에는 께다, 끌란딴(Kelantan), 뜨렝가누(Trengganu) 등 북부 말레이시아로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말레이시아를 점령했고, 이듬해 1월 31일 영국군은 싱가포르를 포기했으며 2월 15일 영국군은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말레이시아로 재진주한 영국은 1946년 싱가포르를 제외한 말레이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말라야연합(Malayan Union)안의 도입을 시도했다. 말라야연합이 술탄의 권력을 박탈하고, 화인과 인도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레이인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1948년 2월 1일 말라야연방(Federation of Malaya)이 결성되었다.

압둘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76)이 이끄는 UMNO는 1950년대에 들어 화인, 인도인 집단과 선거협약을 맺어 1954년 동맹당(Alliance Party)으로 확대되었다. 동맹당은 1974년 국민전선(Barisan Nasional)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현재까지 집권 여당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1955년 총선에서 동맹당은 총 52석 중 51석을 차지하여 독립 이후 주도 정당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선거 결과를 배경으로 말레이시아의 독립과 헌법 제정에 관한 사항을 영국과 신속히 협상하였고, 1957년 8월 31일 드디어 독립하였다.

1961년부터 말레이시아 정부는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말레이연방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책에 착수하였고, 1963년 브루나이를 제외하고 말레이시아연방을 수립하였다. 1965년 싱가포르는 연방에서 탈퇴하였다. 1969년 말레이인과 화인 간의 종족폭동이 발생하자 정부는 말레이인을 경제적으로 우대하는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을 실시했다.

1997년 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는 곧 말레이시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IMF의 구제금융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2003년 10월 마하티르는 압둘라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에게 총리직을 물려주며 22년간의 장기집권을 종결지었다.
5. 문화

말레이시아는 다민족국가이다.

주류 민족인 말레이족 뿐만 아니라, 중국인, 인도인도 거주한다.

 
6. 생활
1957년의 말라야 연방 성립 때까지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교적 위계제도()는 말레이인 사회에만 존재하였으나, 그해에 제정된 ‘독립헌법’에 의해서 중국인·인도인도 국적 취득의 조건으로서 술탄의 충성스런 신하여야 한다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 조건은 1963년 말레이시아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중국인·인도인으로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적다. 이들의 일상회화는 중국어·타밀어이며, 각 인종간의 통혼도 별로 예가 없다. 중국인의 생활에서는 동향() 조직인 방()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푸젠방[]·광둥방[]이 최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동업조직적 성격도 겸하며, 푸젠방의 경우 고무농장 경영자가 많다. 말레이시아에는 불교·힌두교·이슬람교가 잇따라 전해졌기 때문에, 현재에도 말레이반도 북부에는 불교 사원·힌두교 사원이 있다.

오래된 이슬람교 사원은 정부에서 관리하며, 새로운 이슬람교 사원이 국비로 건립되고 있다. 교육은 초등학교(6년), 중학교(초급 3년, 상급 2년),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며, 의무교육은 아니나,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초급과정 3년간은 무상으로 실시된다. 초등학교·중학교에는 말레이어 학교 외에 영어·중국어·타밀어 학교가 있으나, 1969년 이래 말레이어 교육이 강력히 추진되어, 현재는 어학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수업은 말레이어로 행하여지고 있다.

대학교육은 초급대학·교육대는 3년, 대학교는 4년이며, 대학의 수업도 1981년까지 완전히 말레이어화되었다. 대학은 말라야대학교(1962), 이과대학(1969), 국민대학(1970), 농업대학(1971), 공과대학(1972) 등 국립대 12개교, 사립대학 7개교가 있다. 인구에 비해 대학수가 적고,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 간의 대학 입학정원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2000년 조사에 따르면 문맹률은 11% 수준이다.

언어는 말레이어(Bahasa Malaysia)가 공용어이며 이외에 영어와 각종 방언을 포함한 중국어가 널리 통용된다. 인도에서 이주한 주민들은 타밀어, 펀자브어를 사용하고, 태국과 국경 지역은 태국어도 통용 가능하다. 사바와 사라와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이들의 고유언어인 이반어와 까다잔어를 사용한다.
7. 그외
종교: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종교가 혼재한다. 2000년의 정부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전체의 60.4%가 무슬림 (수니파, 시아파 전부)이며, 불교 신자가 19.2%, 힌두교 신자가 6.3%, 기독교인이 9.1%(이 가운데 대부분은 동 말레이시아에 거주)를 차지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지만, 국민, 특히 이슬람 교도에 대한 선교활동은 할 수 없다.

 

주민: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부미푸트라, Bumiputra)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계가 약 25%, 인디아계가 약 7%, 오랑아슬리(Orang asli)들을 포함한 기타가 약 10% 정도이다.

 

행정구역: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부미푸트라, Bumiputra)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계가 약 25%, 인디아계가 약 7%, 오랑아슬리(Orang asli)들을 포함한 기타가 약 10% 정도이다.

 

대한관계:

말레이시아는 1960년 2월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1962년 5월 말레이시아에 한국 상주 대사관을, 1964년 4월에 한국에 말레이시아 대사관을 각각 설치했다. 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은 무역협정(1962), 문화협정(1965), 항공협정(1967), 이중과세 방지협정(1983), 사증면제협정(1983), 과학·기술협력협정(1985), 투자보장협정(1988), 해운협정(1988)이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 1997년 고건 국무총리, 1998년 김대중 대통령, 2005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였으며, 1993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1996년 부총리 안와르, 1999년 외무장관 사이드 하미드, 2000년 10월 총리 마하티르, 2001년 5월 국왕 살라후딘, 2004년 8월 압둘라 바다위 총리가 방한하였다.

2006년 현재 한국의 말레이시아 수출은 52억 달러, 수입은 72억 달러로 아세안 국가 중 우리나라와 2대 교역국이다. 주요 수출품은 컴퓨터, 반도체, 무선통신기 등이며, 수입품은 반도체, LNG, 원유, 목재 등이다.

2007년 현재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교민은 약 1만5천 명 가량이다.

201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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