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도 쓸리지 않는 결심을…삼척 갈남항·갈남 마을

정유미 기자

새해 다짐, 겨울 바다로~

삼척 갈남항은 사람 손 때가 묻지 않아 옛 포구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하얀 파도가 맑은 바람을 안고 바위를 휘감아돌면 검푸른 갈남항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삼척 갈남항은 사람 손 때가 묻지 않아 옛 포구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하얀 파도가 맑은 바람을 안고 바위를 휘감아돌면 검푸른 갈남항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무섭게 휘몰아치던 겨울 파도가 잠시 멈춰 서는 곳, 삼척의 항구 마을이다. 삼척은 백두대간의 힘찬 산맥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빚어낸 작은 포구를 안고 있는 항구 도시다. 해안가 암석 사이사이 천혜의 절벽과 고요한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다. 삼척의 항구 마을에서 큰 산을 등지고 눈은 감은 채 수평선을 당겼다 풀었다 해보자. 흩어진 마음은 다잡고 새로운 결심은 단단하게 세울 수 있다. 새해 일출을 맞기 위해 삼척에 갔다면 항구 마을을 둘러볼 일이다. 뭇 섬들이 뿌리를 내린 검푸른 바다와 맑은 바람을 안고 사는 따뜻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 옛 포구 그대로 간직한 갈남항

“갈남항이오?”

삼척시 김태수 삼척문화센터 소장에게 사람 발길이 드문 한적한 항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이름도 낯선 ‘갈남항’을 추천한다. 옛날 포구의 풍경을 오롯이 안고 있는 곳, 갈남항에는 ‘월미도’도 있다고 했다. 손때가 덜 묻은 동해 바닷가의 조용한 항구라니 보물지도를 얻은 듯 들떴다.

갈남항의 해안 절벽은 벽돌을 쌓아올린 듯 정교했다. 물길은 잔잔하고 그윽했다. 산과 바위가 에메랄드빛 바다에 비치는데 마치 호수 같다고 해야 할지 몸과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마을의 보물섬 ‘월미(越美)도’는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월미도는 밤도 아름답지만 낮달이 뜰 때는 더 황홀하단다. 무지개가 뜨는 월미도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수많은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 나왔지만 아는 사람들이 드물어 호젓하기 그지없다.

월미도 앞바다의 너울은 장관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애틋한 그리움을 격렬하게 떨쳐내는 듯 양쪽에서 파도가 달려오다가 사랑의 하트 모양을 그리더니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바위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전복과 멍게, 가리비는 모두 자연산이다. 94가구가 정을 붙이고 사는 마을은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월미도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어귀에는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알록달록 작고 예쁜 나무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잘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자는 의미에서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60년 전만 해도 갈남항에는 배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습니다. 명태잡이 목선들이 하도 많아 밧줄을 풀어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저기 월미도에 가려면 낫으로 미역을 베어 가면서 건너야 했다니까요.”

무료 해설사 마을 주민 이옥분씨는 “마을 어민이 배양장을 기증해 박물관을 만들었는데 민속 조사 마을로도 뽑혔다”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우리 농촌과 어촌의 생활사를 기록해 갔다”고 자랑했다. 문을 연 지 3년이 넘은 박물관이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어 스산했다.

■ 옛 사람 정취 남아 있는 갈남 마을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사람 어깨보다 낮은 아담한 담장이 골목을 안내하는데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집과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은 소박했다. 시계를 30년 전으로 돌려놓은 듯 빛바랜 지붕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시멘트를 살짝 덧발라 쌓은 담벼락 끝에 갈남 슈퍼가 보였다. 빨간 우체통이 환하게 웃고 있는데 지금도 손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는지 아련했다.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여관 표시(♨)는 정겨웠다. 1980년대만 해도 온수 시설을 갖춘 숙박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등대가 마주보는 갈남항은 밤도 아름답지만 낮달이 뜰 때 더 황홀하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등대가 마주보는 갈남항은 밤도 아름답지만 낮달이 뜰 때 더 황홀하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갈남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바위들은 독특했다. 반쯤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주상절리 백화점’ 같았다. 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에 우뚝했는데 100년 전에도 키가 똑같았다고 한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더 자라지 않고 저 모습 그대로 살아 내는 것이 신기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또 달라 보였다.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먹이를 찾는가 하면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었다. 파도가 몰아치면 점점이 흩어져 있던 바위들이 고개를 쑥 내밀었고 이내 검푸른 바닷속으로 숨어들었다.

갈남항은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마을 주민이 고정간첩으로 몰리면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됐다. 간첩 마을로 불리면서 이웃의 온정까지도 송두리째 빼앗겼다. 다행히 최근 억울한 누명을 벗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넓은 바다를 삶터로 하자면 사람의 힘만으로 거친 파도와 해풍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논과 밭의 곡식이 잘 익기를,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이 건강하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새해 갈남 마을을 찾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보자. 아직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사람이 있어 차가운 겨울이 쉬이 녹는 곳, 갈남 마을에서 작은 소원 하나 이루고 오시길.

▶따사로운 포구 마을에서 한적한 하룻밤

1980년대 어촌분위기가 물씬한 초곡항에 그물망이 널려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1980년대 어촌분위기가 물씬한 초곡항에 그물망이 널려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삼척 갈남항 외에 옛 정취를 간직한 포구는 어디일까. 삼척에는 10여개의 항구가 있다. 삼척~덕산~대진~궁촌~초곡~용화~갈남~신남~장호~임원~호산항 등이다. 묵직하고 단단한 기암괴석들이 큰 산에 기대어 넓은 바다를 따사롭게 안고 있는 작은 항구들이다. 1980~1990년대 포구 모습을 간직한 궁촌, 초곡항 마을에도 가보자. 아직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호젓하다.

■ 궁촌항 궁촌마을

궁촌항 추천마을은 삼척 레일바이크의 빛에 가려진 조용한 동네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묻혀있다는 묘지를 지나 차로 500m쯤 더 오르면 “라이트 꺼, 시동 꺼, 운전자 하차”라고 쓰인 군부대 표지판이 나오는데 여기가 도로 끝이다. 해안 철책을 등지고 바다를 내려다보면 운치 있는 마을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벌초를 하고 풍어를 바라는 제를 이어오고 있다. 삼척 레일바이크 매표소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둘러봐도 좋다. 여유가 있으면 건너편 산자락에 있는 선흥마을에도 가보자. 공양왕이 유배를 와서 여생을 보냈던 마을로 가시가 많은 엄나무가 있는데 귀신을 물리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에 공양왕의 신위를 모셨던 영은사도 있다.

■ 초곡항 초곡마을

7번 국도를 따라 파도를 안고 달리다 보면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철길 아래 마을이 보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황영조 공원’을 지나야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자칫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를 놓칠 수 있다.

파도에도 쓸리지 않는 결심을…삼척 갈남항·갈남 마을

진한 바다 내음에 그물망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포구는 한 폭의 그림 같다. 1980년대 항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순수했던 옛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마을 한쪽에는 횟집 5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물회, 아나고회, 회덮밥을 판다고 적혀 있다. 마을 한복판에 웬 체육시설일까 싶을 만큼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운동기구도 가득하다. 한적하게 하룻밤 민박을 하기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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