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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진시황제가 제방축조로 지은 제방 이름
dbwk**** 조회수 2,025 작성일2008.09.29

진대에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제방축조' 축조된 제방의 이름

(관중분지가 있는데 정국구가 존제했었다는 지역에 사람의 손으로 쌓은 기다란 토벽하나가 존제하는데 이것은 판축법을 이용해서 쌓아올린 제방이었고 제방은 강쪽으로 뻗어있었고 이 제방은 강을 막는 큰 댐과같은 역활을 했는데 자세한 조사결과 진시황제가 만든 이 토벽제방은 총 연장 길이가 2650m 되는 거대한 댐이었음이 밝혀졌다 댐은 강상류 쪽으로 거대한 호수를 만들었고 이 호수에서 나오는 물은 관중분지를 비옥한 토지로 밖아 놓았다)

 

 

p.s 다큐멘타리에서 들리는 그대로 작성해서 관중분지 인지 관동 분지인지 잘모르겠습니다 이점 유의해 주시구요 댐 이름 말해주세요 어떤분이 영거라고 그러던데 정확하진 않다더군요 확실한 제방(댐) 의 이름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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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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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국거(鄭國渠)


원래 전국시대 초기에는 진나라와 국경을 직접 접하고 있던 나라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압박에 못 이긴 위나라가 황하 양안의 땅 하서와 하동의 땅을 모두 진나라에 바치고 그 도읍을 한나라 동쪽인 대량으로 옮겨버리자 한나라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춘추 때 정나라를 합병하고 그 영토 내에 천자국인 주나라를 포함하고 있었다. 때문에 진나라는 항상 한나라를 공격하여 자기들의 영토로 삼아 주나라가 가지고 있던 하왕조(夏王朝) 이래로 내려오던 전국(傳國)의 보기(寶器)인 구정(九鼎)을 탐내고 있었다. 한나라는 전국 때 국세가 가장 약한 나라였다. 진나라로부터 계속해서 시달림을 받은 한나라는 한 가지 계책을 냈다. 한나라의 유명한 토목기술자를 진나라에 보내어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면 그 공사에 국력을 쏟아 붇게 되어 한나라는 한 숨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그 토목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재정이 파탄이 나 버리면 더욱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나라의 유명한 토목기술자인 정국(鄭國)이라는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 위수 북안의 황토고원에 토목공사를 벌려 관개수로를 만들 경우 그곳에서 생산되는 농업생산물로 인하여 진나라의 재정은 넘쳐 날 것이라고 당시의 진왕(秦王)인 진시황을 설득하게 했다. 진시황이 정국의 말에 혹하여 수리시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렸다. 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하거서(河渠書)에 나오는 기사이다.

 

< 한나라는 진나라가 토목공사를 벌이기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국력을 소모시켜 동쪽으로 나와 한나라를 공격할 여력이 없도록 진나라를 설득하여 경수(涇水)를 파서 그 물을 동쪽으로 끌어 중산(中山)의 서족 호구(瓠口 : 자금의 산서성 경양(涇陽) 서북)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고 다시 북산을 따라 동으로 300여 리를 연장하여 락수(洛水)와 연결시켜 수리시설을 위한 토목공사를 벌리게 만들었다. 공사를 하던 중에 정국이 한나라의 간첩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진시황이 정국을 처형시키려고 하자 정국이 말했다. “ 처음에는 제가 한나라의 간첩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공수로가 완성되면 진나라에 커다란 이로움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진시황이 정국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공사를 마무리 짓도록 했다. 이윽고 수리시설이 완성되자 황토가 침전된 물로 염분이 많은 토지 4만여 경에 물을 댈 수 있었는데 무당 일종(一鐘)의 수확을 낼 수 있었다. 이 후로는 관중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로 변했고 흉년이라고는 들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진나라의 국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마침내 나머지 제후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그래 이 운하의 이름을 정국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전국시대 때의 일경은 한국 평수로 5,500평이고 일경은 100무이다. 그리고 일종(一鐘)은 10섬이다. 즉 정국거를 건설함으로 인하여 새로 생긴 농경지는 4만 경 즉 2억 2천만평에 그곳에서 난 곡식의 량은 4천만 섬에 달했다는 이야기이다. 전국시대 후반부 내내 진나라가 몇 십만 명의 대군을 일으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저력은 도강언 및 정국거를 이용하여 생산된 농업 생산물에 의한 재화의 확충 때문인 것이다.


2. 기원전 2200년 전에 건설된 갑문식 운하 영거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창건한 지 2년 후인 기원전 219년 호남성에 순수 나갔을 때 호남성을 남서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훌러 동정호로 흘러 들어가는 상강의 상류지역에 이르렀다가 주강의 지류인 계강(桂江)과 연결했던 영거(靈渠)라는 운하이다. 영거는 착공한지 5년 만인 기원전 214년에 완성되었다. 총 길이가 33키로에 달했던 이 운하는 장강과 주강(珠江)을 수로로 연결한 것이다. 진시황은 이 운하를 건설하여 50만의 대 병력과 군수물자를 강남으로 운송하여 당시 백월이라고 부르던 중국의 남쪽 지역을 점령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특이한 것은 상강과 계강의 수위가 서로 달라 선박의 왕래가 불가능한 것을 갑문식 운하를 만들어 배가 다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갑문식 운하로 유명한 것이 파나마 운하다. 파나마 운하의 전장은 85키로라 하나 주로 평지를 굴착하여 만든 것에 비해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제 만들어진 중국의 상수와 계강의 상류지역인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산악지역에서 행해졌다는데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20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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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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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거(鄭國渠)


정국거는 전국시대 말의 진왕 정(政)(시황제)때, 위수로 흘러가는 경수(涇水)의 물을 끌어들여서 만들어진 큰 관개용수로이다.

그런데, 이 이름높은 수리시설은, 7국쟁패에서 통일을 향하여 움직여 나가는 세상에서 따지고 보면 한(韓)나라의 대진정책(大秦政策)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나라의 동쪽에 이웃하고 있는 한나라는 호전적인 진나라의 대한진공(大韓進攻)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하든 그 관심을 다른데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수리관개의 기술이 뛰어난 정국을 진나라에 보내어 경수에서 물을 끌어서 중산(中山)의 서쪽에서 호구(瓠口)에 이르고, 다시 동쪽 낙수(洛水)로 흐르는 3백여리의 거(渠)(큰도랑)을 만들어서 전답을 관개하도록 은밀히 역설케 했다.

과연 진은 그 건언을 받아들여서 착공했는데, 공사의 중도에서 한나라의 책략이 발각되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죽음을 당할뻔한 정국은, "나는 한나라의 첩자로서 시작했지만, 거가 이룩되면 진나라에 있어서 큰 이익이 됩니다." 라고 그 만대의 이익과 공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10년을 걸려서 거를 완성시켜, 염분이 함유된 석로( 鹵)의 땅 4만여 경(頃)(일경은 백무(畝))에 물을 대고, 불모의 황무지는 1무마다 백 종(鍾)(6곡(斛) 4두(斗))의 수확을 올리는 옥야(沃野)가 되고, 흉년도 없어졌다.

정국거라는 이름은 이 수리관개사업을 완성시킨 수공(水工) 정국(鄭國)에서 온 것으로, 진왕 정은 이 비옥한 땅을 배경으로 국력을 축적시켜 마침내 부강(富强)으로써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정국거는 후에 한나라 무제가 그 남쪽에 만든 백거(白渠)와 함께, 그 다한 역할이 크며 중국 고대에 있어서의 수리관개의 유산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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