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선 ()

목차
관련 정보
근대사
인물
개항기 동학농민군의 영솔장으로 활동한 천도교인. 농민운동가.
이칭
경선(卿宣), 경선(慶善)
이칭
경선(敬善), 영창(永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9년(철종 10)
사망 연도
1895년(고종 32)
관련 사건
동학농민운동
정의
개항기 동학농민군의 영솔장으로 활동한 천도교인. 농민운동가.
개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 지도자.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동학 관련 자료에는 경선(敬善, 慶善)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1894년 정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부민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동학교도 300명을 집에 집결시켰다가 고부농민 1,000여 명과 합세해 고부관아를 습격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제1차 농민봉기 백산(白山)에서 농민군을 조직할 때,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돌아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할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한편, 5월 7일의 주1으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7월에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접주 오권선(吳權善)의 군대와 합세, 총공격을 단행했으나 집강소 설치에는 실패하였다. 8월 13일 전봉준이 단신으로 나주성에 입성해 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해 집강소 설치가 가능해지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진 그 해 9월에 제2차 농민군봉기가 삼례회의(參禮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전봉준을 수행, 정읍 · 장성 · 담양 · 동복 · 벽성 등지로 순행하며 농민군 봉기를 독려하는 한편,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봉기에 참여하였다. 우금치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12월에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수성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 · 손화중(孫華中) 등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개화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참고문헌

『오하기문(梧下記聞)』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동학사(東學史)』(오지영, 영창서관, 1938)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최영창판결선고서원본(崔永昌判決宣告書原本)」(1895)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1895)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1(이이화,『역사비평』7, 1989)
「동학농민군의 나주성싸움과 금성정의록의 문헌적 고찰」(최현식,『전라문화연구』2, 1988)
「고부민란의 연구」하(정창렬,『한국사연구』49, 1985)
「고부민란의 사발통문」(신용하,『노산유원동박사화갑기념논총』, 정음문화사, 1985)
「갑오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사회신분」(신용하,『한국사연구』50·51합집, 1985)
주석
주1

1894년 5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이 주장한 폐정 개혁안을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맺은 조약. 이 조약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관군에게 돌려준 뒤 자진 해산 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박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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