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출처는 엔하위키 미러입니다 여기가 가장 쉽게 설명되있어서 여기서 퍼왔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이 글은 엔하위키 미러의 글인것을 알려드립니다
1차인 걸프전은요
1 개요 ¶
2 전쟁의 원인 ¶
- 1.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중동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원래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원래 하나의 나라였던 곳을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분할시키면서 영국의 식민유산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설.[3]
- 2. 쿠웨이트의 석유가 탐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더 많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으켰다는 설.[4]
- 3. 협소한 자국의 해안 국경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가 더 넓은 해안선,영해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설,[5]
- 4.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채들을 지게 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자국내 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6]
- 5. 이란-이라크 전쟁때처럼 미국이나 영국등 서방국가들이 뒤를 봐줄거란 판단하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등등등
3.1 개전 이전 ¶
3.2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
3.3 불공평한 결과 ¶
걸프전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4.1 패배의 이라크. 그리고… ¶
- 다만 그 시점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는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의견도 생각할 수 있다. 이라크전 때와 달리 걸프전 당시에는 후세인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분노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를 추방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시아파 역시 미국에 등을 돌리기 전이라 통치도 용이했으며 압도적인 병력을 진주시킬 수 있어 이라크를 쉽게 안정시킬 수 있었다는 것.
4.2 잘못된 교훈 ¶
4.3 이후의 쿠웨이트 ¶
4.4 이라크 전쟁 ¶
5 이야깃거리 ¶
- [1] 엄밀히 말하면 공군은 2차 세계대전 이래로 결정적인 전력 요소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공군력의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이너스 요인이 너무 많아 한국전쟁은 무승부, 베트남 전쟁은 패배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후세인은 이것을 잘못알고 공군력이 별것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낸 것. 망했어요. 게다가 애초에 지상군 전력도 다국적군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 [2] 심지어 미군이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에 부착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과정까지 선보일 정도였다 흠굉무.
- [3] 하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이라크를 지배하기 전 역사적,문화적으로 이라크와 하등관계가 전혀 없는 나라였고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쿠웨이트의 이라크 강제 합병을 정당화하려고 지어낸 헛소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건 쿠웨이트 항목 참고.
- [4] 이 가설은 전쟁 당사국이었던 이라크도 산유국인 이상 별 설득력이 없다.
- [5] 실제로 이라크의 해안선은 이란과 쿠웨이트 국경 지역 부분에 약간의 해안가 영토만 있어 진짜 협소하다.
- [6] 일본의 임진왜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 [7] 여담이지만, 첫 테이프를 끊은 게 누구냐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으로 따지자면 B-52의 ALCM이지만, 가장 먼저 이라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외곽지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돌아다닌 아파치들이다. 보통은 Fail-Safe Line을 최초로 넘은 B-52의 순항유도탄 발사한 시간을 개전 시점으로 보는 편.
- [8]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중부사령부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은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1기계화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소모전을 예상한 것이다.
- [9]링크 이걸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 [10] 콜린 파월이 유럽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 [11]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명에 달했으므로 바디백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삽질이었지만.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22만발 가량으로 어림잡고 미친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 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발 수준이었다. 아마 미군 역사상 전쟁규모 대비 전쟁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 [12] 미식축구의 초장거리 패스 플레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Mary)에게 바치는 듯 크고 아름다운 높이와 거리로 패스해 도박적인 면이 있는 한방 플레이에서 붙은 명칭이다.
- [13] 군단을 넘어 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수백km 기동시키는 대규모 작전인지라, 이라크군과 직접 맞붙는 것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 준비/기동 중에 사고로 잃은 병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적국의 내로 크게 침투하여 우회하는 기동 특성상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특히 쿠웨이트 북쪽으로 포위한 부대의 경우 서남쪽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기동거리도 엄청났지만 측면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비록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 전쟁 피해복구에 열중해야 하는 관계로 미국과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지만 엄연히 적성 국가에 속하는 이란을 후방에 둔 형세가 된다. 이란 입장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는지라 상황에 따라 개입할 지도 모르는 불안요소였다. 헤일 메리 플레이란 이름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 [14] 콜린 파월 장관의 제안. 100시간은 정치적으로 써먹기에 적절한 상징적 시간(딱 100이니까)이었고 이를 부시정권이 받아들여서 작전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
- [15] 비슷한 이유로 북한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 [16]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의 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유도탄으로(…)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그대로 추락하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 [17]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 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 가량이 이 한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 [18] 다만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체계가 피해의 상당부분을 차지했고 실제 장비와 인명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전사자만 2만 명 정도고 사상자 도합 10만 명 안팎. 물론 현대전에서는 사상자가 10~20%만 발생해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여기서 '전멸'이라는 말은 부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대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상자가 10~20%라는 말은 부대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각종 장비가 아예 다 아작났으며, 탄약이나 각종 물자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19] 피아식별이 극도로 어려웠던 과거 전쟁,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선 야간에 오인사격으로 연대병력이 붕괴된(…) 사례도 간간히 나온다. 통계를 보면 오히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극도로 적어진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은 적이 워낙 형편없었던 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와 기동성으로 장비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막 지형의 특성 탓에 오인사격의 감소율보다 전투 사상자 자체의 감소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피아식별 기술이 훨씬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오폭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대규모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접전투의 비중이 올라가는데, 이때 아군의 화력지원에 오히려 아군이 당할 확률이 증가한다.
- [20] 다만 이 시기부터 중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성장. 군사력 투자가 이전보다 수월해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중소분쟁과 중월전쟁을 통해 군 현대화의 필요성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 [21] 어디까지나 상대적. 사막의 방패 작전은 현대적 군수의 엄청난 위업으로 손꼽힌다. 단 몇 달 사이에 수 십만 규모의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양을 건너 수송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말고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엄청난 작업이다.
- [22] 미 해군 소속의 알골급 고속수송함은 최고속도 33노트의 고속 수송함으로, 당시 취역중이었던 8척의 알골급을 모두 동원할 경우엔 완편된 1개 기계화사단을 단 18일만에 미국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해상수송에도 치트키를 갈겨대는 천조국 - [23]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전쟁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전후 처리가 그만큼 골치 아파졌을 가능성이 높다.
- [24] 때문에 바그다드 시내에서 CNN의 기사를 송출하던(기자는 별개의 호텔에서 숙식) 통신사를 F-117이 날려버릴때 해당 부대원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흠좀무.
- [25] 이건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전장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장의 격렬함을 잘 아니 병력 수백, 수천명 정도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해도 필요하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사회는 그런 엽기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 [26] 물론 언론 통제를 했어도 어차피 질 전쟁으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포기한 상황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좀 더 오래 끌 수도 있었던 전쟁을 언론의 압박으로 조기 종결한 것 또한 사실.
- [27] 대규모 병력 투입을 꺼린다기보다는 병력이 부족해서 못투입할 뿐이다. 오히려 현재의 미군은 가용가능한 전투병력을 한명이라도 더 늘리려고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당초 아프가니스탄에만 미군 전력을 투입했다면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병력수를 확보했을테지만 조지 부시 행정부의 착오로 불필요한 이라크전을 벌이게 되면서 각 지역에 가용가능한 병력수도 둘로 쪼개져버린다. 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에서 항상 가용전력이 부족한 결과를 만들어냈으며, 전사자가 늘어나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경제까지 약화되면서 미군의 질적/양적 악화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 [28] 과거에는 이 때문에 냉전이 종식되었으니 레이건이 공을 세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평가는 냉정하다. 어차피 소련은 망해가는 나라였기 때문에 레이건이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미국의 국력만 깎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폐해는 클린턴 시절 군축과 IT 성장 정책을 통해 경제 사정을 개선하면서 좀 약해졌다가 아들 부시의 삽질로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재개. 글로벌 경제위기의 형태로 판을 더 키워서 지금도 진행중이다.
- [29]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이었다.
- [30] 이들은 비록 국토는 완전히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침공당한 원한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겨우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고.
- [31] 당시는 지금처럼 전자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특히 속은 쪽은 미군도 아닌 이라크군이다.
2차 전쟁인 이라크전은요
1 개요 ¶
2 원인 ¶
3.1 너무나도 쉬웠던 출발 ¶
3.2 점점 꼬여가는 상황 ¶
3.3 막장 전후처리 ¶
- 괴상한 정책. 소위 바보 짓만 남발했다. 이를테면 기존의 배급제를 완전 철폐하고 충전식 현금 카드를 나눠준다는 것, 실행만 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2003~2004년 당시 이라크 국내에는 현금 인출기나 카드 리더기가 한 대도 없는 상황이었고 전기나 통신 사정도 엉망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카드 사용을 하라고 하는건 무리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일. 당장 이라크 거리에만 나가봐도 대번에 사정을 알수 있었겠지만 그것조차도 하지 않은게 분명하다. 그외에도 부상자로 넘쳐나는데 약이 모잘라서 쩔쩔매는 병원들은 내버려두고 금연 캠페인에만 열을 올린다거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일 투성이였다. 한마디로 철저한 책상물림 및 비전문가들 뿐이라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 급기야 CPA의 이런 짓 때문에 골치를 썩던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있을때에는 CPA가 Can't Produce Anything(아무 것도 못만드는 녀석들)의 약자라고 비아냥 거렸다.
- 계산하기 귀찮다고(…)[9] 이라크 국영기업들의 예금과 부채를 죄다 0(!)으로 해버리기 까지했다. 이건 국제법 위반일 뿐더러 망해야할 기업을 살아남게 하고 반대로 장사가 잘 되던 기업은 한순간에 거지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담이지만 빚을 빌려가서 정당한 이유 없이 갚지 않을 경우 법률상 사기죄에 해당되는데 이런 죄를 스스로 저지른 셈. 미국 본토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아마 최소 몇백년 징역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부임하면서 입에 올린 자결권은 온데간데 없이 총선거, 지방선거를 무효화 하고 지도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뿌리뽑는 일을 벌여서, 내심 선거를 통해 영향력 확대를 기대하면서 미군을 환영하던 시아파의 지도자들도 적으로 돌렸다.[10]
- 전쟁 직후의 혼란통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이라크 경찰을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그결과 2003년~2004년 당시 9만명이 넘는 이라크 경찰관들은 제대로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장비도 형편없었다.[11] 그 결과 온갖 범죄가 판을 치더니 급기야 2004년 중반부터는 이라크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도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반면 이들을 공격하는 반군은 농민들을 시켜 수입을 어느정도 나눠주는 조건으로 양귀비를 재배케하여 밀매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 압도적인 무장과 화력으로 이라크 경찰을 공격했다. 게다가 미국을 몰아내려는 이라크 국민들의 여론 및 주변국의 대규모 지원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니[12] 이라크 경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찰서는 심심하면 반군의 공격을 받아 근무중이던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경찰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장비수준이 반군들에 비해 한참을 밀리는 수준이라 암시장에서 본인의 자비를 들여 무장을 해야했다. 물론 그럼에도 경찰이 꾸준히 충원되긴 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 게다가 CPA는 미군과도 제대로 협조체제가 구축되지 않아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물어보거나, 혹은 이를 미리 통보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킬때도, 알 사드르의 신문사를 폐쇄하고 심복들을 잡아가둘 때도 미군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13] 그 결과 CPA와 미군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음은 물론 이라크 복구나 재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갖 국제분쟁에 개입한 경력이 있는 미군이니 만큼 전후 복구나 재건에 경험을 갖춘 이들이 여럿 있었으며 이들을 잘 활용하면 괜찮은 결과를 얻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CPA는 막무가내였다.
- 게다가 전후 복구 사업도 기업들에게 맡겨놨는데 사업을 따낸 기업이 하청을 주면서 일부를 떼먹은데다가, 하청을 받은 업체가 다시 하청을 주는 식으로 몇다리를 건너버리니(…) 실제 작업 결과물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느 건설회사는 의료시설 142곳을 짓기 위해 1억 8600만 달러를 받았지만 완공된게 달랑 6개, 그것도 제대로 이용이 가능할지 의심되는 상태였다고 하니 더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그나마 일부는 사기혐의로 버지니아주 법원이 1000만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우리는 미국 정부의 일원이 아니라 연합군 임시행정처 소속이니 미국법 즐이라고 반박했는데 이게 재판에서도 통했다. 민영화를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
- 한편 미군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수준 이하의 병사들이[14] 검문에 불응하면 무조건 쏴대는 방침을 고수하고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이라크인을 생까면서, 민간인 피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게다가 미군이 전사하면 미군들이 주위 이라크인을 화풀이로 때리거나 가축을 쏴죽이는 일도 꽤 있었다. 이게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군과 다를게 뭔가? 김혜자의《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자를 보면 이라크 전쟁 당시
기행의 나라영국군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이라크 소년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소년이 폭탄 테러를 가할 것 같아 정당방어로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럼 왜 총으로 쏘는 것도 아니고 수십여분에 걸쳐 웃으며 패죽였을까...? 그나마 다행히도 사건을 저지른 영국병사는 바로 구속되어 재판 후 교도소로 보내졌으며 소년의 유족에겐 양 90마리의 보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결국 이 일로 미군에 대한 증오가 터진다고 부랴부랴 단속에 나서고 처벌도 이뤄졌지만 이미 미군에 대한 증오는 깊어진 뒤였고, 반군만 열심히 늘려준 꼴이 되었다.
3.4 들어오는건 쉬워도 나가긴 어렵다 ¶
4 국제적 반응 ¶
- 찬성한 국가 - 영국, 덴마크, 폴란드, 이탈리아, 일본, 불가리아, 쿠웨이트, 오스트레일리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네덜란드
- 반대한 국가 -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국가들(쿠웨이트 제외), 독일, 프랑스, 그리스,[17] 인도네시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러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뉴질랜드, 멕시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터키, 캐나다,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5 종결? ¶
6 평가 ¶
- [1] 이는 엘리트 정치를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를 추종하는 네오콘의 논리로 정당화된다. 예네들의 논리에 의하면 이런 진리는 두가지이며 우매한 대중을 향한 이런 거짓말은 숭고한 목적이라면 합리화될수 있단다. 문제는 그 숭고한 목적이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 [2] 세계적인 북한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3] 그리고 부시는 자신이 이라크의 평화를 가져왔다면서 2004년 미국 대통령 재선에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이라크 축구팀 사진을 홍보에 썼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축구 아니었다면 우린 저항군 들어가서 미군을 죽였을 것이라는 증오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4] 정치를 잘 모르는 일부 밀덕후들이 깔끔한 이라크 전쟁의 전과를 지적하면서 베트남전에서 목표만 확실했다면 미국이 이길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목표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세계대전 또는 핵전쟁을 각오하지 않은 이상 목표를 확실하게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개입이 잘못된 정책판단이었기 때문에 군사적 레벨로 잘못된 정치를 만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우제비츠가 괜히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한게 아니다.
- [5] 한국의 의원 몇명도 그곳에 갔다.
- [6] 일본계이다.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군 대장에 오른 인물. 현재 오바마 행정부에서 보훈성 장관(한국의 국가보훈처장에 해당)으로 재직중.
- [7] 이는 신세키의 임명자가 클린턴이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진짜 정신나간 인간은 럼스펠드가 되고 말았다.
- [8] 징병제인 한국의 현실때문에 많은 밀덕후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국방예산의 주요부분은 장비가 아니라 , 인건비다. 여기서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병력이 10만 정도인 병력을 이라크에서 두세배 늘린다는 것은 그 병력뿐만 아니라 이들과 순환할 수 있는 병력까지 합해서 수십만을 늘리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미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9] 회계, 재정관련 서류들이 혼란통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찾거나 증언을 활용해서라도 계산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얼마나 전후처리가 엉망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 중 하나.
- [10]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민주적인 기준 하에 이라크인들을 지지를 받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게 될 경우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39 이런 법을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으니.
- [11] 140명의 경찰관이 있는 경찰서에 소총은 고작 열 자루, 차량은 세 대, 사령실 무전기는 두 대 밖에 없었다.
- [12] 사실 이 부분이 결정적이었다. 특정 국가가 가진 저항 여력은 한계가 명백했지만 외부에서 계속 지원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
- [13] 이 덕분에 영화 그린존의 주인공이 이라크군의 알라위 장군을 찾아갔다가 빡돈 알라위와 그의 부하들에게 죽을 뻔했다. 물론 알라위는 미군이 나선다 쳐도 독재정권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 어차피 살려둘 수 없었고, 처단해야 할 자이긴 했지만.
- [14] 이라크전이 미국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군대에 지원하는 이들이 줄어들자 장병 선발 기준을 대폭 낮춘 결과로 심지어 사회 생활조차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정신병자나 양아치, 갱스터, 인종차별주의자도 꽤 많았다고.
- [15]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전 미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느냐? 라는 말을 하자 미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 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 [16]미군이 초기 이라크군과 달리 현재 이라크군 무기 지급을 모조리 미제로 교체한 것은 이 때문.
- [17] 개전 초 전쟁을 강행한 미국을 비난하였으나 이후 장갑차 같은 무기 판매등으로 어느 정도 개입하기도 했다.
- [18] 덕분에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랍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거기다 심지어 옛날 걸프전때 쳐맞고 가만히 닥치고 있는 이라크 왜 패냐며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했었다.
- [19] 이마저도 엄청난 수술을 여러번 하여 최대한 화상을 지운 상태였다.
입니다 출처는 엔하위키 미러입니다 여기가 가장 쉽게 설명되있어서 여기서 퍼왔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이 글은 엔하위키 미러의 글인것을 알려드립니다
2014.03.19.
-
채택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차 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 - 1991년 2월 28일)은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의 영토였다며 침략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등 30여개 나라가 국제 연합의 결의와 미국 주도하에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지원함으로써 벌여진 전쟁이다. 당시의 구 소련도 쿠웨이트를 지원했습니다
미국 아프카니스탄 침공작전(2001년 11월)
1993년 소말리아와 수단 의 미국대사관이 알카에다로부터 공격당하는사건이 있었는데 미국은 알카에다 소행으로 판단 이를체포하기위해 노력하는중 2001년 9 11테러사건이 발생하게됩니다 이때 알카에다 은거지가 아프카니스탄였기에 미국이 침공작전을 개시 현재까지 전쟁중
2차걸프전(미국 이라크 침공) (2003년3월-2011년12월31일 완전 철수)
이때 이스라엘 첩보부대인 모사드가 계략적으로 이라크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언론에 허위 유포하였으며 이라크 사담은 이를 부정도 시인도하지않은 상태에서 IAEA(국제원자력기구) 가 이를 사찰한다고하는과정에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배후를지원한것이 드러나 미국이 알카에다 체포작전 과 함께 사담정권 붕괴를위한 침공작전을 전개한것이 2차 걸프전입니다
2014.03.20.
-
출처
세계사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