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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미국 이라크 전쟁원인
비공개 조회수 26,363 작성일2014.03.19
미국 ㅡ 이라크의 1차 2차 전쟁의원인쫌가르쳐주세요
내공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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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출처는 엔하위키 미러입니다 여기가 가장 쉽게 설명되있어서 여기서 퍼왔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이 글은 엔하위키 미러의 글인것을 알려드립니다

 

 1차인 걸프전은요

1 개요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이라크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와 쿠웨이트 - 다국적군(Coalition Force) 사이에 벌어진 전쟁.

걸프(gulf)는 바다(灣, 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 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 중국, 북한에서는 각각 '만안전쟁(灣岸戰爭)', '해만전쟁(海灣戰爭)', '페르샤만전쟁(Persia灣戰爭)'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줄여서 '만전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잦은 듯. 사실 주변 국가들이 페르시아 만의 이름을 가지고 하도 싸워대서 페르시아 만은 아예 'The Gulf'라고 부른다. 그래서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이며, 전 과정이 TV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물론 충격과 공포란 단어는 10여년 후에 쓰였다만 …)[2].

2 전쟁의 원인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전쟁이었던지라 당시 국제정세 전문가들과 해외 언론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그 배경에 다양한 가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 1.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중동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원래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원래 하나의 나라였던 곳을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분할시키면서 영국의 식민유산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설.[3]
  • 2. 쿠웨이트의 석유가 탐났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더 많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으켰다는 설.[4]
  • 3. 협소한 자국의 해안 국경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가 더 넓은 해안선,영해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설,[5]
  • 4.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채들을 지게 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자국내 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6]
  • 5. 이란-이라크 전쟁때처럼 미국이나 영국등 서방국가들이 뒤를 봐줄거란 판단하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등등등
공식적으론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전비조달 등으로 지게된 막대한 차관상환 부담 등 국내외적으로 경색상태인 이라크의 국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훔쳐가는 건 물론 석유를 과잉 공급하여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며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2일 새벽 2시를 기해, 이라크군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30만 대군을 전 국경에 투입하는 총공세를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벽한 기습이었고, 이라크와의 갈등을 흔한 주변국과의 분쟁정도로 생각하고 전쟁은 생각치도 않던 쿠웨이트군은 전쟁준비도 안되어 있었던데다 급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해도 승리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3만에 달하는 쿠웨이트군은 곳곳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동시에 이라크군은 헬리본 부대를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공항과 활주로들을 점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한 데 이어 이름뿐인 쿠웨이트 해군을 격파하여 쿠웨이트를 외부와 차단하였다.

이 와중에 쿠웨이트의 왕실이 거주하는 다스만 궁으로 이라크군의 맹공이 펼쳐졌다. 개전과 동시에 벌어진 특수부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새벽 5시에 감행된 이라크 해군육전부대의 공격까지 막아낸 쿠웨이트군이었으나 결국 시가지를 장악한 이라크군이 탱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수비부대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나머지 왕족들을 피신시킨 후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하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국제연합은 쿠웨이트 주둔 이라크군에게 즉각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월 15일까지였다. 결국 이라크군은 철군하지 않았고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7]

3 전쟁 과정

3.1 개전 이전

당시 세간에는 (후세인을 포함해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걸프전이 베트남전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과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이라크군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면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의 북한군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도 바그다드의 방공능력은 저고도 구형 위주라고는 해도 웬만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뺨치는 수준으로, 바그다드보다 방공망이 강력한 곳은 모스크바, 바르샤바, 캄차카 반도 셋다 소련이다 등 모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미군베트남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8] 자국의 정예병력은 물론 다수의 최신예 병기와 동맹국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다국적군과 함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다. 이들은 '다국적군'으로 불리며 사령관은 미국 중부사령관인 H. 노먼 슈워츠코프(H. Norman Schwarzkopf)가 맡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드문 규모의 '다굴전'이기도 하다.[9]

미국은 이 전쟁을 길게 끌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베트남전의 악몽도 있었으며, 겨울(10월부터 4월까지)기간에 맞춰 전쟁을 끝내야 더운 기후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맞춰 철저한 작전 계획(헤일-메리 기동)과 분명한 목표(정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섬멸/ 쿠웨이트의 해방)가 세워졌으며, 속전속결을 의도하였다.[10]

미군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전사자들을 담기 위해 만 단위의 시체 주머니를 준비했고, 전문가들 역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11]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쓰였던 생화학무기가 위협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엔진의 열로 화학무기를 제독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것은 사담 후세인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미국을 소모전으로 몰아넣어 일정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이 손을 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1980년대까지 전세계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각국이 준비했던 전쟁의 양상인 소모전식 전쟁을 생각하면 심각할 정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3.2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전쟁이 발발하여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의 F-117이라크의 심장을 찔렀으며, 곧바로 토마호크의 대공세, B-52의 폭격, 그 외 다양한 공군기의 공격이 이라크의 중심부를 강타하였다. 39일간의 강력한 미 공군&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이라크는 생화학무기 생산처로 의심받는 공장들, 군의 지휘부, 발전소, 대공망이 무력화 되었다. 미군은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과는 또 다른 훨씬 발전된 정교한 화력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전과 달리 적의 목표물을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파괴하며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을 보복 공격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는 이미 다국적군이 배치되어 카프지 전투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막았고, 스커드 미사일은 상당 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요격되거나 특수부대&항공전력에 파괴되었다. 이라크군은 가질 수 없다면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식으로 쿠웨이트의 유전들에 불을 질렀고, 걸프전 내내 이러한 풍경이 목격되었다(진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공중 폭격이 주가 된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 4단계로 넘어가자 다국적군은 2월 24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20만의 지상병력과 장비를 수백km를 기동시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하게 했고, 뒤가 막혀 도망치던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하였다. 이 작전은 헤일 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로 이름 붙여졌으며,[12][13] 고대로부터 이어진 불후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전에서 전략적인 차원으로 적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헤일 메리 기동작전 막판에 미군 제1기갑사단과 제3기갑사단은 바스라 서쪽 50마일 근처에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함무라비 전차사단과 조우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800대, 이라크군 300대의 전차가 격돌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 일어난 쿠르스크의 프로호로프카 대 전차전(독일군과 소련군) 이후 최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해병대와 미 육군 기갑사단들은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와 기타 기갑사단들과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이라크군 T-72의 125mm 활강포 화력을 우려하여 야전에서 급히 열화우라늄 장갑과 열화우라늄 포탄으로 M1 에이브람스 전차를 보강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소련의 T-72와는 달리 이라크의 T-72는 텅스텐 탄심 포탄이 아니라 값싼 강철 탄심 포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공격력이 T-62 전차의 115mm 활강포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수준이었으며 때문에 열화우라늄 장갑과 포탄을 사용해 공격력과 방어력이 급격하게 강화된 에이브람스 전차들에게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리고 미 공군과 육군의 A-10AH-64 등도 전장에 투입되어 함무라비 사단의 전차를 대부분 파괴했으며, 함무라비 외에도 메디나 사단 등 정예사단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그후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수만 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14]만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특히 대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대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이라크 북부에 설치된 (즉 침공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만에 전투기와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15]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16]

이라크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17] 또한 생화학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연합군의 핵보복 등을 우려해서인지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무기를 자주 써먹은 전력이 있어, 다국적군 측도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

3.3 불공평한 결과

이 전쟁에서 60만에 달하는 이라크군을 초토화 시키는 동안[18] 미군은 단 294명만 전사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나마 그중 145명은 사고사이고 실제 전투 희생은 149명이며, 이중 35명이 아군 오인사격 희생자였다. 그나마 이 오인사격의 숫자도 절대 많은게 아니다. [19]

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그 유명한 메이드 인 차이나였던 것. 과거 마오쩌둥의 교시를 받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이기는 전략을 생각하던 중국은 베트남과의 중국-베트남 전쟁 이후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쟁이 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과학 병기에 밀려서 정규전에서는 100% 진다며[20] 군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벌써 20년 전으로,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린 현재에 이르러선 중국군의 질적 팽창이 엄청나게 강화되는 중이며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달간 느려터진 해상 수송부대[21][22]가 주요 군사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23] 결국 나온 결과는 스트라이커.

참고로 미국은 한국전쟁이나 심지어는 베트남 전쟁까지 쓰고도 남아도는 구닥다리 폭탄들의 대부분을 이 전쟁에 사용함으로써 재고처리를 간단하게 해결했으며 막대한 전비까지 챙겨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전쟁 당시 다국적군은 종군기자단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실시했으며 민간인들에게 작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사막의 폭풍). 이는 이라크도 마찬가지였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라크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언론 중 하나가 CNN이었다는 사실. 실제로 당시 다국적군 병사 및 지휘관, 특히 미군은 CNN을 곱게 보지 않았다.[24]
걸프전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미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론史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쟁 전 과정이 전세계의 안방에 보도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0년대 이후 매스미디어가 전쟁에 관한 여론을 좌지우지하게 됨에 따라, 특히 민주국가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도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미군 몇 명만 잡아다가 TV앞에서 무릎을 꿇리거나 시체를 끌고 돌아다니거나 하면 반전여론이 비등하게 된다든지[25] 하는 식이다.

4 전쟁이 끝난 후

4.1 패배의 이라크. 그리고…

전쟁 후 이라크는 경제제재 조치를 받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했다. 결국 이라크는 그 때 망가진 군대를 다시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년 후 다시 벌어진 이라크 전쟁 당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더 커졌음에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얼마 후 지원은 다시 재개된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26]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이라고 쓰고 미군이라 읽는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하지만 이전에 언급했듯이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예상이 100%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이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은 셈이기 때문.

그러나 미군 역시 스스로는 패배자 반열에 들게 된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수가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희생자 수를 줄이기 위해 대규모 병력 투입을 꺼리고,[27] 다시금 적은 수의 병력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걸프전 승리의 가장 큰 핵심 전략인 '압도적 병력/화력'의 장점을 다시 세우기가 힘들어졌다는 의미. 미국은 이 때문에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 지배와 상명하복이니 슈워츠코프 장군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 다만 그 시점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는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의견도 생각할 수 있다. 이라크전 때와 달리 걸프전 당시에는 후세인에 대한 아랍국가들의 분노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를 추방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고 시아파 역시 미국에 등을 돌리기 전이라 통치도 용이했으며 압도적인 병력을 진주시킬 수 있어 이라크를 쉽게 안정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 이후 이라크전, 아프간전 등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미군은 끊임없이 미숙한 전후 처리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데 아직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함정이다.

끝으로 조지 부시도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은 승전했고, 지지율은 솟구쳤지만, 근본적인 문제. 즉 경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베트남전 후유증과 오일 쇼크, 누적된 무역적자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던데다 레이건이 강한 미국 만든답시고[28] 부채를 잔뜩 늘려놓고 이것이 재정절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금 인상을 강행했고 그 결과 부시의 지지도는 급락. 로스 페로가 갑툭튀, 이어 아칸소의 듣보잡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에게 광탈하면서 12년만에 지미 카터에 이어 재선에 실패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공화당으로 치면 제럴드 포드 이후 16년만.

4.2 잘못된 교훈

한편, 당시의 빛나는 승리에 고무된 21세기 초의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어차피 이라크군도 붕괴되었고[29] 희생자도 많이 안 생기는데 전투 병력을 조금만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라크전에서는 2~3만에 불과한 지상전투병력만으로 이라크에 돌입했다가 베트남 전쟁 시즌 2를 찍게 된다(…). 걸프전의 경우에는 쿠웨이트의 여론이 우호적이었고 테러집단이나 반미세력이 없기도 해서 치안유지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병력을 주둔한 후 쿠웨이트 정부에게 지배권을 이양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라크전의 경우에는 이라크 정부를 전복하는게 전쟁의 목표였고 이라크의 반발, 테러집단의 유입 등으로 치안공백이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기갑사단이나 공군으로 충분했지만 비정규군와의 전투는 공군이나 기갑사단이 아닌 병사와 게릴라들간의 전투가 주인데 럼스펠드는 걸프전의 전훈만 생각한 거지 베트남 전쟁의 전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두고 설계한 기본 뼈대가 달랐다. 당시 파월은 전쟁을 단시간에 종결짓고 바로 철수한다는 기본 전략 구상을 그대로 실천해 결과적으로 미군 주둔 및 기동으로 인한 후폭풍이나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반면 럼스펠트는 미군의 첨단장비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정예된 소수의 고기동 부대로 이라크를 일정 기간 점유하고 거기서 또 이를 기반으로 중동 전체를 컨트롤해 보려는 터무니없는 구상을 저질러 버렸다. 사실 이런식의 소수의 정예 기동부대를 통한 적 방어종심의 붕괴를 노리는 작전술은 전쟁의 목적에 따라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이스라엘군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다. 실제 전역의 전개에 있어서도 빠른 종전을 가능케 했고. 다만 이라크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 나아가서는 과도정부 구성까지의 안정적인 통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목표에 적합하지 않은 접근방식이었다. 아무리 럼즈펠드가 군인 출신이 아니라 해도, 국가의 대전략을 짤 책임이 있는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전쟁의 장기적 정치적 목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단을 택했다는 점은 백번 까여도 할말이 없다. 더군다나 베트남전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참고해 볼 만한 선례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럼즈펠드식의 점령 및 통치정책이 아예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북한처럼 장기간 항전이 불가능하고 외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안정화는 가능하기 때문. 하지만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을 한 나라 중에 북한 같은 케이스는 하나도 없었다.

4.3 이후의 쿠웨이트

그들은 나라를 되찾았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에 감사를 표했다.

전쟁 초기에 왕궁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왕제는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장이자 IOC위원이었는데, 전쟁발발 얼마후 중동국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이라크의 아시아게임 회원자격 박탈과 동시에 왕제의 아들에게 부친의 자리를 계승시켰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내에서는 전쟁 전 쿠웨이트의 국정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전쟁 중에는 국내에 잔류한 인사들에게 암살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미국이 9.11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 때까지 이라크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었던 쿠웨이트[30]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4.4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과 미국의 악연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쪽은 걸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여러 문제로 골머리만 잔뜩 앓고 있는 중. 물론 이라크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전부터 알만한 사람은 다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5 이야깃거리

이라크는 종종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극히 안 좋을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미국의 브래들리 장갑차가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이라크 T-72 전차를 뒤늦게 보고는 기관포로 쏴서 잡은 일이 있다.(...) 이후 2대의 브래들리가 TOW로 4대를 더 잡아서 총 5대를 잡았다. 영상. 물론 영상에도 나오듯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25mm 기관포로 T-72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차 포탑 위의 얇은 장갑을 기관포로 때릴 수 있는 아주 운 좋은 상황이 펼쳐졌던 것.

당시 참전한 미군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 'Voices that care'도 눈길을 끌었다.

여담으로 전쟁 초반에 이라크군이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실상은 속이려고 만든 가짜 기사였고, 예상 상륙지점에 미국이 네이비 씰 팀1 대원들을 약 12명 정도 파견해 해변가에 C4를 무더기로 설치한 다음 터트려서 진짜 다국적군이 상륙해서 교전하는 것처럼 속였다.[31] 근데 이라크는 또 여기에 속아서 2개의 사단을 그 해변으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그후는 이라크군이 탈탈 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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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엄밀히 말하면 공군은 2차 세계대전 이래로 결정적인 전력 요소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공군력의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이너스 요인이 너무 많아 한국전쟁은 무승부, 베트남 전쟁은 패배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후세인은 이것을 잘못알고 공군력이 별것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낸 것. 망했어요. 게다가 애초에 지상군 전력도 다국적군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 [2] 심지어 미군이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에 부착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과정까지 선보일 정도였다 흠굉무.
  • [3] 하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이라크를 지배하기 전 역사적,문화적으로 이라크와 하등관계가 전혀 없는 나라였고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쿠웨이트의 이라크 강제 합병을 정당화하려고 지어낸 헛소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건 쿠웨이트 항목 참고.
  • [4] 이 가설은 전쟁 당사국이었던 이라크도 산유국인 이상 별 설득력이 없다.
  • [5] 실제로 이라크의 해안선은 이란과 쿠웨이트 국경 지역 부분에 약간의 해안가 영토만 있어 진짜 협소하다.
  • [6] 일본의 임진왜란, 아르헨티나포클랜드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 [7] 여담이지만, 첫 테이프를 끊은 게 누구냐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으로 따지자면 B-52ALCM이지만, 가장 먼저 이라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외곽지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돌아다닌 아파치들이다. 보통은 Fail-Safe Line을 최초로 넘은 B-52의 순항유도탄 발사한 시간을 개전 시점으로 보는 편.
  • [8]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중부사령부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은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1기계화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소모전을 예상한 것이다.
  • [9]링크 이걸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 [10] 콜린 파월이 유럽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 [11]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명에 달했으므로 바디백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삽질이었지만.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22만발 가량으로 어림잡고 미친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 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발 수준이었다. 아마 미군 역사상 전쟁규모 대비 전쟁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 [12] 미식축구의 초장거리 패스 플레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Mary)에게 바치는 듯 크고 아름다운 높이와 거리로 패스해 도박적인 면이 있는 한방 플레이에서 붙은 명칭이다.
  • [13] 군단을 넘어 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수백km 기동시키는 대규모 작전인지라, 이라크군과 직접 맞붙는 것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 준비/기동 중에 사고로 잃은 병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적국의 내로 크게 침투하여 우회하는 기동 특성상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특히 쿠웨이트 북쪽으로 포위한 부대의 경우 서남쪽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기동거리도 엄청났지만 측면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비록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 전쟁 피해복구에 열중해야 하는 관계로 미국과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지만 엄연히 적성 국가에 속하는 이란을 후방에 둔 형세가 된다. 이란 입장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는지라 상황에 따라 개입할 지도 모르는 불안요소였다. 헤일 메리 플레이란 이름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 [14] 콜린 파월 장관의 제안. 100시간은 정치적으로 써먹기에 적절한 상징적 시간(딱 100이니까)이었고 이를 부시정권이 받아들여서 작전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
  • [15] 비슷한 이유로 북한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 [16]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유도탄으로(…)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그대로 추락하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 [17]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 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 가량이 이 한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 [18] 다만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체계가 피해의 상당부분을 차지했고 실제 장비와 인명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전사자만 2만 명 정도고 사상자 도합 10만 명 안팎. 물론 현대전에서는 사상자가 10~20%만 발생해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여기서 '전멸'이라는 말은 부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대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상자가 10~20%라는 말은 부대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각종 장비가 아예 다 아작났으며, 탄약이나 각종 물자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19] 피아식별이 극도로 어려웠던 과거 전쟁,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선 야간에 오인사격으로 연대병력이 붕괴된(…) 사례도 간간히 나온다. 통계를 보면 오히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극도로 적어진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은 적이 워낙 형편없었던 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와 기동성으로 장비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막 지형의 특성 탓에 오인사격의 감소율보다 전투 사상자 자체의 감소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피아식별 기술이 훨씬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오폭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대규모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접전투의 비중이 올라가는데, 이때 아군의 화력지원에 오히려 아군이 당할 확률이 증가한다.
  • [20] 다만 이 시기부터 중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성장. 군사력 투자가 이전보다 수월해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중소분쟁과 중월전쟁을 통해 군 현대화의 필요성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 [21] 어디까지나 상대적. 사막의 방패 작전은 현대적 군수의 엄청난 위업으로 손꼽힌다. 단 몇 달 사이에 수 십만 규모의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양을 건너 수송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말고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엄청난 작업이다.
  • [22] 미 해군 소속의 알골급 고속수송함은 최고속도 33노트의 고속 수송함으로, 당시 취역중이었던 8척의 알골급을 모두 동원할 경우엔 완편된 1개 기계화사단을 단 18일만에 미국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해상수송에도 치트키를 갈겨대는 천조국
  • [23]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전쟁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전후 처리가 그만큼 골치 아파졌을 가능성이 높다.
  • [24] 때문에 바그다드 시내에서 CNN의 기사를 송출하던(기자는 별개의 호텔에서 숙식) 통신사를 F-117이 날려버릴때 해당 부대원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흠좀무.
  • [25] 이건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전장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장의 격렬함을 잘 아니 병력 수백, 수천명 정도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해도 필요하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사회는 그런 엽기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 [26] 물론 언론 통제를 했어도 어차피 질 전쟁으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포기한 상황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좀 더 오래 끌 수도 있었던 전쟁을 언론의 압박으로 조기 종결한 것 또한 사실.
  • [27] 대규모 병력 투입을 꺼린다기보다는 병력이 부족해서 못투입할 뿐이다. 오히려 현재의 미군은 가용가능한 전투병력을 한명이라도 더 늘리려고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당초 아프가니스탄에만 미군 전력을 투입했다면 어느정도 만족스러운 병력수를 확보했을테지만 조지 부시 행정부의 착오로 불필요한 이라크전을 벌이게 되면서 각 지역에 가용가능한 병력수도 둘로 쪼개져버린다. 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에서 항상 가용전력이 부족한 결과를 만들어냈으며, 전사자가 늘어나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경제까지 약화되면서 미군의 질적/양적 악화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 [28] 과거에는 이 때문에 냉전이 종식되었으니 레이건이 공을 세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평가는 냉정하다. 어차피 소련은 망해가는 나라였기 때문에 레이건이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되었고 오히려 미국의 국력만 깎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폐해는 클린턴 시절 군축과 IT 성장 정책을 통해 경제 사정을 개선하면서 좀 약해졌다가 아들 부시의 삽질로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재개. 글로벌 경제위기의 형태로 판을 더 키워서 지금도 진행중이다.
  • [29]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이었다.
  • [30] 이들은 비록 국토는 완전히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침공당한 원한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겨우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고.
  • [31] 당시는 지금처럼 전자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특히 속은 쪽은 미군도 아닌 이라크군이다.

2차 전쟁인 이라크전은요

1 개요

미국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 정부를 완전히 무너뜨린 전쟁. 테러와의 전쟁 중 두번째 전쟁이다. 1991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2차 걸프전쟁이라고도 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반미국가였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부는 붕괴되었고,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2 원인

조지 워커 부시가 전쟁을 일으킨 명분은 사담 후세인의 알 카에다에다 대한 노골적인 지지(실제로 여러 테러조직에 지원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와 불난집에 부채질하듯이 미국의 어그로 끈 것(여기까지는 사실이다. 그래도 전쟁을 해야할 필요는 없었다. 당연히 여기까지면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할 필요도 없었다.)과 더불어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증거들이 제시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이것은 당연하게도모두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미 전쟁 전에 사찰단과 CIA 등의 정보국 등지에서 이라크에는 대량살상 무기가 전혀 없다고 이미 보고를 했고 이런 정황이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도 다른 나라 언론에까지 보도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미국 정부와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극우언론들은 9.11 테러를 사담 후세인의 음모인 것처럼 보도했고,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먹혀들어갔다는 점이다. 이래서 특정세력에 의한 미디어 장악과 여론조작이 무섭다.

그러나 미국 주요 언론들도 전운이 감돌 때 대량살상 무기 그런 거 없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올렸던 걸 보면 당시가 9.11 테러가 지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 주전파에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을 수 밖에 없던 시기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를 감안해서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개전에 소극적인 것은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언론이 이라크에 대한 개전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허위보도를 한 것은 경우가 다른 문제다.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의 상식으로 봐도 9.11 테러는 사담후세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그렇다고 아주 관계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사담은 알카에다와 같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이 매우 증오하는 세속주의자인데도(그래도 돈 주면 받고 누구 살해해주거나 테러를 해주는 것이 테러단체이다. 그래도 알 카에다의 9.11테러에 결정적이지 않아았고 직접적으로 관여는 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FOX뉴스와 같은 극우언론을 동원하여 언플로 계속 9.11을 사담 탓으로 혹세무민을 하거나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이야기했다.[1] 그래서 9.11은 핑계고 그저 사담후세인에 대한 증오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 대외관계에 무지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을 기만한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또한 다른 "불량국가"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었는데, 이란이나 북한같은 국가들이 핵이 없으면 오히려 이라크꼴을 당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더더욱 이런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게 되었다. 대량살상 무기도 없는데다 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상대를 문답무용하고 조져버렸는데 그 충격이 오죽하겠는가. 미국의 이런 '공정하지 못한' 전쟁이 불량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셈. 덕분에 미국은 이란 등 여러 불량 국가들과의 대화에 몇배로 애를 먹고있다. 여기서 북한은 물론 처음부터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2] 적어도 이라크 전쟁 이전에 북한은 겉으로나마 핵의 평화적 운운하며 핵무기 보유는 부정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북한은 아예 보란듯이 핵실험을 하며 핵보유국을 천명하게 되었다. 북한이 본색을 드러내 노골적으로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하게 된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했다가 체제붕괴 크리를 맞은 이라크가 (그리고 리비아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여담이지만 2014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사태는 북한에게 더욱 "나쁜" 교훈을 주었는데,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면서 주권을 보장받았고, 이는 1994년 부다페스트 합의로 핵무기를 넘기는 대신 러시아, 영국,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보장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후, 핵이 없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개입으로 국가가 분열될 처지에 놓여 있다. 부다페스트 합의를 모델로 북핵문제를를 해결하려 했던 주변국들은 난감할 것이고, 북한은 이 사태를 교훈삼아서 더욱 핵무기에 집착할 것이니 북핵해결은 더욱 꼬인 셈이다.

3 전개

3.1 너무나도 쉬웠던 출발

미국은 이미 침공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대량살상무기 존재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여론전을 펴고 있었다. 안보리 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인 2002년부터 이미 CIA와 군정보부대의 정찰조를 이라크에 잠입시켜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전정찰은 물론 이라크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쿠르드족과 같은 소수민족을 부추켜 침공시에 미군을 돕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폈다.

이후 여러 경로로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보고서가 계속 부시에게 전달되었으나, 부시는 전술했듯이 이미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침공한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동안 유엔 안보리를 가지고 왔다갔다한 것은 눈가리고 아웅.

2003년 3월 10일, 미국은 사담 후세인에게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된(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최후통첩을 전달했고, 이라크는 이를 간단히 씹었다.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 현지시각 오전 5:34분미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침공군 총사령관은 토미 프랭크스 대장이었고, 작전명은 이라크 자유 작전 (Operation Iraqi Freedom). 총 침공군수는 미군 24만, 영국군 4만5천, 호주군 2천, 폴란드군 194명이었다. 이들은 공습뒤에 북부 쿠르드지역과 남부 쿠웨이트로부터 동시에 침공했다. 여기에 쿠르드반군 7만명이 가세했다.

이렇게 보면 정당한 선전포고가 없었던 것으로도 보이지만, 부시의 최후통첩에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 이건 최후통첩과 선전포고를 동시에 한 것이다. 보통 최후통첩을 적국에 전달하고 출병 직전 개전선언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부시는 조건부 개전선언을 넣은 것으로 이러한 부분을 처리했다.

이라크군과 민병대는 산발적 저항을 하기는 했으나 막강한 미군 및 동맹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침공 2주만인 4월 9일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사담후세인 정부는 붕괴했다. 4월 30일까지의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9200명, 민간인 사망자는 7299명, 그리고 미군은 139명, 영국군은 33명이 전사했다.

2003년 5월 1일 조지고 부시는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은 후세인 정권 붕괴와 종전을 선언[3]했지만 이라크 정부가 붕괴된 후, 이라크의 치안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지금도 폭탄테러와 게릴라전이 간간히 터지고 있다.

전쟁수행 자체는 굉장히 우수했다. 걸프전도 그랬지만 [4] 과 다르게 각각 공화국 수비대의 격멸(걸프전)과 바그다드 점령(이라크전)이라는 목표를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완수하였다.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지상군 전체 병력은 10만 이상의 대규모였지만 대부분이 비전투부대 및 이를 호위하는 병력으로 실제 전선에 적극 투입된 건 2~3만이라는 소수의 전투 병력이며 이들만으로 강력한 항공지원 아래 기동전을 펼쳐 이라크군을 연파. 단숨에 이라크의 전쟁수행 능력을 무너뜨렸다. 이는 5차 중동전에 이르는 다양한 기갑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을 벤치마킹 한 것.

그러나 이렇게 깔끔하게 보이는 전과는 사실 이라크군이 경제난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직후였던 걸프전쟁때 100만에 달하던 이라크군은 걸프전 당시 주력부대가 거의 다 소멸되고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대폭 감축. 당시 30만 안팎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는 부대는 수만명의 공화국 수비대 정도고 기타부대들은 동원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9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에 전차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고 작전가능기는 50여대 이하였다. 그러므로 미국의 전쟁수행이 차질없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빈사상태였던 이라크군을 일방적으로 두들겼다는 게 더 맞다. 이라크가 전쟁 직전에 서방의 평화운동가들과 개전반대 정치인들을 대거 자기네 돈으로 초청해서 자국의 이런저런 막장상황을 견학시켜주면서 국제사회에 개전을 저지해달라고 애처로울 정도로 애걸한 것을 보면[5] 이라크는 전의가 전혀 없었으며 미국이 작정하고 전쟁을 일으킨 뒤에도 처음부터 정면 대결보다는 비정규전으로 갈 생각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3.2 점점 꼬여가는 상황

다만 병력이 적은 탓에 점령지역의 뒷정리가 미흡했고 그 때문에 전투부대 뒤에 따라오던 비전투 병과의 피해가 컸다. 이유는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속도전 위주의 작전 때문이다. 선봉이 적진을 돌파하면 적 방어선을 뚫어놓고 유유히 다음 작전지로 돌진하면 그만이지만 뒤따라오던 후속부대는 정신차리고 반격준비를 마친 적 방어병력과 진짜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2차대전 때 미군의 조지 패튼이 벌인 기동전이 그랬듯이 선봉에 선 패튼의 뒤에는 후속부대의 희생이 뒤따랐고, 오마르 브래들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두고 패튼을 비판하였다. 물론 현재는 이러한 돌파전이 독일군의 보급선과 지휘체계를 사전에 약화시키고 상대의 방어선을 교란. 장기적으로 보면 미군의 희생을 크게 줄인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이었던 에릭 신세키[6] 대장이 럼스펠드에게 점령에 필요한 병력은 공세때보다도 많은 40-50만 정도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상신했는데, 럼스펠드는 이를 철저히 씹었을뿐만 아니라 "공세보다 점령에 병사가 더 필요하다니 그 사람 제정신인가"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신세키를 비웃었다.[7] 상관이 이렇게 씹었는데다가, 신세키의 임기가 1년 가까이 남았는데 예스맨 후임자를 지명해버림으로서 신세키의 리더쉽은 이후로 무너졌다고 한다.

소규모 정예 병력을 파견해 이라크군을 무너트리는 것은 당시 국방부장관인 도널드 럼스펠드가 결정한 전략에 따른 일이었다. 장군들은 모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고 이라크군을 유지해 치안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지만…. 전부 짤렸다. 안습. 럼스펠드의 전략은 상대가 북한이거나 미군 대 후세인의 전쟁이었다면 정말 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라크 대 미국의 전쟁. 그리고 자기 의견 안 따르는 장군들을 잘라내며 시작한 전쟁의 결과는 모두들 알고 있을것이다. 다만 럼스펠드가 장군들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국력이 더이상은 군비를 감당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전비로 돈을 퍼붓고 있는데, 그보다 더 병력을 늘리게 되면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8] 이는 작은정부를 추구하는 부시의 정책과도 모순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천조국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 점령 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나중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사담 후세인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은 미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너무 쉽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3.3 막장 전후처리

더욱이 전후 처리가 아주 심각할 정도로 개판이었다. 책 그린존(라지브 찬드라세카란 저, 북스토리)을 참고하시라.

  • 괴상한 정책. 소위 바보 짓만 남발했다. 이를테면 기존의 배급제를 완전 철폐하고 충전식 현금 카드를 나눠준다는 것, 실행만 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2003~2004년 당시 이라크 국내에는 현금 인출기나 카드 리더기가 한 대도 없는 상황이었고 전기나 통신 사정도 엉망이었다. 이런 나라에서 카드 사용을 하라고 하는건 무리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에 가까운 일. 당장 이라크 거리에만 나가봐도 대번에 사정을 알수 있었겠지만 그것조차도 하지 않은게 분명하다. 그외에도 부상자로 넘쳐나는데 약이 모잘라서 쩔쩔매는 병원들은 내버려두고 금연 캠페인에만 열을 올린다거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일 투성이였다. 한마디로 철저한 책상물림 및 비전문가들 뿐이라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 급기야 CPA의 이런 짓 때문에 골치를 썩던 미군들은 자기들끼리 있을때에는 CPA가 Can't Produce Anything(아무 것도 못만드는 녀석들)의 약자라고 비아냥 거렸다.
  • 계산하기 귀찮다고(…)[9] 이라크 국영기업들의 예금과 부채를 죄다 0(!)으로 해버리기 까지했다. 이건 국제법 위반일 뿐더러 망해야할 기업을 살아남게 하고 반대로 장사가 잘 되던 기업은 한순간에 거지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담이지만 빚을 빌려가서 정당한 이유 없이 갚지 않을 경우 법률상 사기죄에 해당되는데 이런 죄를 스스로 저지른 셈. 미국 본토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아마 최소 몇백년 징역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부임하면서 입에 올린 자결권은 온데간데 없이 총선거, 지방선거를 무효화 하고 지도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뿌리뽑는 일을 벌여서, 내심 선거를 통해 영향력 확대를 기대하면서 미군을 환영하던 시아파의 지도자들도 적으로 돌렸다.[10]
  • 전쟁 직후의 혼란통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이라크 경찰을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그결과 2003년~2004년 당시 9만명이 넘는 이라크 경찰관들은 제대로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장비도 형편없었다.[11] 그 결과 온갖 범죄가 판을 치더니 급기야 2004년 중반부터는 이라크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도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반면 이들을 공격하는 반군은 농민들을 시켜 수입을 어느정도 나눠주는 조건으로 양귀비를 재배케하여 밀매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 압도적인 무장과 화력으로 이라크 경찰을 공격했다. 게다가 미국을 몰아내려는 이라크 국민들의 여론 및 주변국의 대규모 지원 역시 무시할 수 없었으니[12] 이라크 경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찰서는 심심하면 반군의 공격을 받아 근무중이던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경찰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장비수준이 반군들에 비해 한참을 밀리는 수준이라 암시장에서 본인의 자비를 들여 무장을 해야했다. 물론 그럼에도 경찰이 꾸준히 충원되긴 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 게다가 CPA는 미군과도 제대로 협조체제가 구축되지 않아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물어보거나, 혹은 이를 미리 통보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킬때도, 알 사드르의 신문사를 폐쇄하고 심복들을 잡아가둘 때도 미군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13] 그 결과 CPA와 미군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음은 물론 이라크 복구나 재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갖 국제분쟁에 개입한 경력이 있는 미군이니 만큼 전후 복구나 재건에 경험을 갖춘 이들이 여럿 있었으며 이들을 잘 활용하면 괜찮은 결과를 얻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CPA는 막무가내였다.
  • 게다가 전후 복구 사업도 기업들에게 맡겨놨는데 사업을 따낸 기업이 하청을 주면서 일부를 떼먹은데다가, 하청을 받은 업체가 다시 하청을 주는 식으로 몇다리를 건너버리니(…) 실제 작업 결과물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어느 건설회사는 의료시설 142곳을 짓기 위해 1억 8600만 달러를 받았지만 완공된게 달랑 6개, 그것도 제대로 이용이 가능할지 의심되는 상태였다고 하니 더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그나마 일부는 사기혐의로 버지니아주 법원이 1000만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우리는 미국 정부의 일원이 아니라 연합군 임시행정처 소속이니 미국법 즐이라고 반박했는데 이게 재판에서도 통했다. 민영화를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
  • 한편 미군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수준 이하의 병사들이[14] 검문에 불응하면 무조건 쏴대는 방침을 고수하고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이라크인을 생까면서, 민간인 피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게다가 미군이 전사하면 미군들이 주위 이라크인을 화풀이로 때리거나 가축을 쏴죽이는 일도 꽤 있었다. 이게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군과 다를게 뭔가? 김혜자의《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자를 보면 이라크 전쟁 당시 기행의 나라 영국군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이라크 소년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소년이 폭탄 테러를 가할 것 같아 정당방어로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럼 왜 총으로 쏘는 것도 아니고 수십여분에 걸쳐 웃으며 패죽였을까...? 그나마 다행히도 사건을 저지른 영국병사는 바로 구속되어 재판 후 교도소로 보내졌으며 소년의 유족에겐 양 90마리의 보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결국 이 일로 미군에 대한 증오가 터진다고 부랴부랴 단속에 나서고 처벌도 이뤄졌지만 이미 미군에 대한 증오는 깊어진 뒤였고, 반군만 열심히 늘려준 꼴이 되었다.

3.4 들어오는건 쉬워도 나가긴 어렵다

군사잡지 플래툰지의 종군기자인 태상호 기자가 06년 플래툰 컨벤션에서 꺼낸 말에 따르면, 당시 미군도 철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나 자신들이 치안을 박살내 놓았고, 주변국의 '자유의 투사'들까지 미군을 잡으러 온 상황에서 손을 빼면 정말로 개막장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 철군을 하고 싶어도 못한 상황이었다.[15] 그냥 있자니 주위 놈들은 죽여도 시원찮은 침략자 취급하고(아니, 뭐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털고 나가면 지옥이 펼쳐져서 국제적으로 욕 퍼먹을게 뻔하기 때문.

그렇게 전쟁에, 그리고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덕분에 F-22나 크루세이더 자주포 등 미군이 개발중이던 차세대 병기들이 차례차례 취소당했고 결국 살아남은 건 얼마 안 된다. 아, 옷값 많이 들어서 만든 ACU도…. 일반적 인식과 달리 군산복합체에게도 전쟁이 손해를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 행정부는 2009년 7월부터 미군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해 교외로 병력을 돌렸고, 2010년 8월 20일, 마지막 전투부대가 떠났으며(참모단과 훈련단은 2011년까지 주둔 후 철수) 9월 1일,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그러나 이미 미군이 나간다고 사태가 안정될 단계는 지난 듯 싶다. 이라크 저항세력도 하도 많이 터져서 그나마 몇 년 전보단 안정화되었다는 평가가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고도 과연 그럴까?

미군이 나가면 당연하지만 이라크군과 경찰이 치안을 대신하게 되는데, 이라크 경찰에게 미국이 지급한 글록 권총이 며칠 뒤에 암시장에서 발견된 걸 보면(…) 글쎄올시다...한술 더 떠서 이라크의 군/경찰/민병대에 입대했다가 무기를 든 채로 탈영후, 이라크군이나 경찰의 제복을 입고 저항세력에 합류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16] 이러다 보니 이라크의 치안은 암담하기만 하다. 일단은 정부가 자리 잡는데 성공했고 속도감은 느리긴 하지만 어느 정도 여러분야의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배척도 이뤄지고 있고 주변 이웃국가들도 그리 막장은 아니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심심치 않게 폭탄테러가 벌어지며 안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라크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꼴이 날 거라는 의견도 꽤 많다. 설사 그 꼴이 안나더라도 워낙 부시 시절의 미국이 이라크에서 진상짓을 너무 많이 한지라 서방 세계에 우호적인 정권이 나오긴 힘들 듯.

특히 수니파시아파의 해묵은 갈등, 쿠르드족의 독립 움직임과 엄청난 양의 석유 및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관심 갖는 나라들이 많다는 것도 문제...잘못하면 엄청난 지옥이 펼쳐질 수 있다. 이미 이라크 내 소수 종교인들은 지옥을 겪은지 오래되었다.

앨런 그린스펀은 자서전에서 석유 때문에 벌인 전쟁이라고 언급했으며, 미국, 유럽계 다국적 석유메이저들이 많은 채굴권을 따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국의 정유회사나 건설회사도 돈을 생각보다는 크게 얻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니깐

4 국제적 반응

한편으로 이라크 전쟁은 국제사회의 모든 나라들을 전쟁찬성과 전쟁반대로 갈라놓는 등 큰 찬반논란도 불러 일으켰다. 이라크전에 찬성한 나라와 반대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 찬성한 국가 - 영국, 덴마크, 폴란드, 이탈리아, 일본, 불가리아, 쿠웨이트, 오스트레일리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네덜란드
  • 반대한 국가 -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국가들(쿠웨이트 제외), 독일, 프랑스, 그리스,[17] 인도네시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러시아, 인도, 방글라데시, 뉴질랜드, 멕시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터키, 캐나다,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이라크전에 반대한 국가들로는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권 국가들이 많았다. 1991년 걸프전쟁에 참전했던 이집트와 시리아, 오만, 카타르, 모로코 같은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석유 자원을 노린 미국의 명분없는 침략 전쟁이라며 참전을 거부했고[18] 아랍권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에 참여하지 않은 요르단, 튀니지, 리비아, 예멘, 알제리 등 일부 아랍국가들도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미국과의 회담 취소 등으로 대응하며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그나마 아랍국가들중에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게 침공당한 원한이 있었던 쿠웨이트만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지만 쿠웨이트 한 나라만으로 미국은 아랍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매우 역부족이었다.

유럽의 경우 전쟁에 찬성한 국가와 반대한 국가들이 극렬하게 엇갈렸다. 영국은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강행하자 미군과 연합하여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탈리아, 덴마크, 네덜란드는 미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거기다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친미,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서려던 일부 동유럽 국가들도 이라크전에 자국군 병력을 파견하고 노후 무기들을 이라크에 판매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부와 석유 사업을 벌이고 있던 독일과 프랑스 등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고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도 미국을 비난했다. 이밖에도 그리스,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 기타 유럽 국가들도 이라크전에 반대하였다.

한국의 경우 초기 미국의 파병요구에 찬성과 반대측이 격렬하게 맞섰다. 반대측에서는 불필요한 전비의 사용은 물론, 이라크전이 명분없는 전쟁이므로 참전하였다가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며, 자칫 테러의 위협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반면 찬성측에서는 미국이 한국과는 각별한 관계의 최우선 우방국이며, 이라크에 대한 민주주의 전파 및 아랍지역의 평화라는 깃발 아래에 유럽의 국가들 역시 참전의사를 밝히는데 한국만 외따로 빠진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이후 미국과의 외교가 난맥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찬성을 주장했다. 결국 당시 정부이던 참여정부는 양 쪽 어느 의견도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 치안 유지 및 시설재건. 즉 평화지원차의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고 그 주둔지도 아르빌 등 사실상 '쿠르드 지역' 으로 정함으로써 전쟁에서는 발을 뺐다. 개입을 아예 안 하자니 미국이 원망하고 특히 당시 정부는 간신히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협조가 절실한 가운데 미국을 자극할 수 없었으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극적으로 파병하자니 아랍국가들의 반감을 살 것은 물론 테러의 위협이 높아지는 결과가 올 수도 있었으니 나름의 현명한 타협안이었던 셈이다.

당시 보수 표방 언론도 반응이 매우 달랐는데 우선 친미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던 조선일보는 참전을 적극 지지하며 월간조선에서 이라크 전쟁 초기에 특집 기사로 사담 후세인을 김일성 뺨치는 독재자랍시고 상당한 분량으로 보도했으나 후세인을 미국이 지지하던 이란-이라크 전쟁 이야기라든지 럼스펠드가 당시 이라크에 가서 후세인을 격려했던 이야기는 쏙 빼먹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파병지로 처음 거론되던 키르쿠크 유전지역을 취재하며 안정적이니 한국군이 주둔하고 전투병 보내도 문제없다고 개드립쳤다가 한겨레에게 이뭐병 까였다. 달랑 며칠동안 있어서 안전하다고? 키르쿠크라면 더 위험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한국 정부에서도 위험하다고 판단해 쿠르디스탄 자치령이 있는 아르빌로 파병지를 옮겼고 결국 키르쿠크에서 연이은 폭탄공격이 벌어지면서 조선일보만 천하의 멍청이 보도를 한게 드러났다.

동아일보는 미국이야 중요한 우방이지만 이번 전쟁은 너무 억지라며 참전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도 아니지만 전투병 파병은 아랍권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만 늘인다며 대충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로 타협하자는 투로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이해하는 보도를 했고 이라크 전쟁 이후에 게릴라전이 커지면서 전쟁이 길어지자 주간동아에선 만화로 거봐, 이라크 전쟁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잖아~라는 태도를 싣기도 했다. 중앙일보도 동아일보랑 비슷한 보도를 하며 우방 미국이야 중요하지만 이번 전쟁은 베트남 전쟁과 달리 너무 국제적으로 부정적이라 이런 태도를 보였고 컬럼에서도 아랍권 분위기도 생각해야 한다며 평화유지군 파병 정도민 해도 낫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한겨레는 닥치고 파병반대였지만.

전쟁을 주도했던 미국의 국내 여론도 2003년만 해도 마돈나를 비롯한 자국 가수들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뜻을 보이자 생매장할 듯이 분노하며 전쟁을 지지했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모습과 막대한 군비 소모에 미국 여론도 지겨운 전쟁 싫다고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확 달라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부시가 저지른 삽질 때문에 어차피 오래가지는 못할 전쟁이었다.

한 미군은 그야말로 겨우 살아돌아와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치뤘는데 결혼사진이 국제세계에서 동정을 샀을 정도이다. 그 미군은 온 몸이 화상을 입어 그야말로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채로 화상을 당한 얼굴이었기 때문.[19] 하지만 미군이 불쌍하기보단 비참한 미군의 현실이라는 동정이란 모습으로 비쳐져서 이 사진을 보도하던 미국 우익 언론이 기대하던 미군의 희생, 이라크 박살내자 하는 전쟁 지지에 반대로 반전적인 인식만 더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반전여론이 거세지고 찬성하던 다국적군도 하나둘 줄줄이 철군 및 반전으로 간 지 오래되었다. 적극적으로 찬성하던 스페인은 2004년 3월 마드리드 지하철 폭탄테러를 당해 2백명이 넘게 죽었다. 당시 아즈나르 정권은 이게 ETA 짓이라고 멋대로 발표하다가 알 카에다가 우리가 한 짓이라는 발표를 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재선에서 참패했다. 반전과 이라크 철군을 공약으로 내세운 야당이 집권하자마자 스페인군을 전면 철수했는데 스페인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장기전 상황을 보고 그 때 철군하길 잘했다는 반응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다만 이 일을 계기로 이슬람에 대한 혐오도 강해졌다. 동기가 어쨌건 간에 엉뚱한 민간인들에게 폭탄 던져 수백명이나 죽인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알 카에다는 이슬람권 내부에서도 맛간 근본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더럽게 욕을 먹는 단체다.

더불어 찬성한 나라들이 설마하니 아랍권 반발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일본 자위대는 이라크에 가서 자위대원들에게 모두 수염을 기르게하여 현지인 남성 비슷한 모습으로 최대한 배려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둔지 비용을 너무 적게 지불하고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대신 미군, 네덜란드군과의 치안활동에만 치중하여 이라크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타협한 셈.

5 종결?

2010년대 들어서 미국은 이라크 문제는 좀 해결된 셈이라고 판단하고 서서히 발을 빼려하고 있으나 지금도 이라크에서 종종 폭탄 테러나 충돌이 남아있으며 여기 갈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에 견주면 안정적일 뿐 여전히 상당수 여러 지역은 극히 위험하다.

2013년 3월 19일, 전쟁 10주년을 맞은 미국 분위기는 이라크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 당시 개전을 찬성한 칼럼니스트들중 몇몇은 사과하기도 했다. 전쟁은 승리했지만, 미국이 전반적으로 침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지나친 강경책이 이러한 후유증과 상처를 불렀다는 비판도 있었다.

2008년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오바마힐러리 클린턴에 가장 내세울수 있었던 점이 본인이 흑인이라는 것도 있지만, 바로 이라크전을 반대했다는 점이었다. 이라크전 개전 당시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주상원의원으로서 개전을 반대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동안 항상 이를 강조하며, "나는 미국이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을 용감히 반대했다"는 것을 내세웠다. 당시 연방상원의원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개전에 찬성표를 던졌다가 나중에 이에 대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이는 진보적인 지지자가 많은 민주당원들에게 큰 약점으로 비춰졌다. 당시 수렁에 빠지고 있던 테러와의 전쟁을 볼때, 본선에서도 오바마의 이런 반대경력은 매파인 매케인에 대해 큰 이익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6 평가

요약하자면 이라크 전쟁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최대 실수 중 하나이자 국력 침체에 허덕이는 현재의 미국을 만든 대표적인 전쟁 중 하나로 손꼽힐수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그것도 저항의사가 없는 상대를 침공함으로서 양다리를 걸쳐서 전선을 두 개로 늘리는, 2차 대전 독일군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실책을 저질렀으며, 그 결과 두 전선에서 양적으로 심각하게 부족한 전쟁을 치름으로서 '전투에서 이길지라도 장악은 못하는', 결말이 안보이는 전투만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속출하는 전사자와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방비 지출로 필요없는 전쟁을 벌인 대가를 현재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나마 독재자 후세인의 목을 친 것으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이전에 벌인 진상짓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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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엘리트 정치를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를 추종하는 네오콘의 논리로 정당화된다. 예네들의 논리에 의하면 이런 진리는 두가지이며 우매한 대중을 향한 이런 거짓말은 숭고한 목적이라면 합리화될수 있단다. 문제는 그 숭고한 목적이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 [2] 세계적인 북한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3] 그리고 부시는 자신이 이라크의 평화를 가져왔다면서 2004년 미국 대통령 재선에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이라크 축구팀 사진을 홍보에 썼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축구 아니었다면 우린 저항군 들어가서 미군을 죽였을 것이라는 증오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 [4] 정치를 잘 모르는 일부 밀덕후들이 깔끔한 이라크 전쟁의 전과를 지적하면서 베트남전에서 목표만 확실했다면 미국이 이길수 있었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목표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세계대전 또는 핵전쟁을 각오하지 않은 이상 목표를 확실하게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개입이 잘못된 정책판단이었기 때문에 군사적 레벨로 잘못된 정치를 만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우제비츠가 괜히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한게 아니다.
  • [5] 한국의 의원 몇명도 그곳에 갔다.
  • [6] 일본계이다.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군 대장에 오른 인물. 현재 오바마 행정부에서 보훈성 장관(한국의 국가보훈처장에 해당)으로 재직중.
  • [7] 이는 신세키의 임명자가 클린턴이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진짜 정신나간 인간은 럼스펠드가 되고 말았다.
  • [8] 징병제인 한국의 현실때문에 많은 밀덕후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국방예산의 주요부분은 장비가 아니라 , 인건비다. 여기서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병력이 10만 정도인 병력을 이라크에서 두세배 늘린다는 것은 그 병력뿐만 아니라 이들과 순환할 수 있는 병력까지 합해서 수십만을 늘리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미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9] 회계, 재정관련 서류들이 혼란통에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찾거나 증언을 활용해서라도 계산을 하는 방법이 있었다. 얼마나 전후처리가 엉망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 중 하나.
  • [10]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민주적인 기준 하에 이라크인들을 지지를 받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게 될 경우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39 이런 법을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으니.
  • [11] 140명의 경찰관이 있는 경찰서에 소총은 고작 열 자루, 차량은 세 대, 사령실 무전기는 두 대 밖에 없었다.
  • [12] 사실 이 부분이 결정적이었다. 특정 국가가 가진 저항 여력은 한계가 명백했지만 외부에서 계속 지원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
  • [13] 이 덕분에 영화 그린존의 주인공이 이라크군의 알라위 장군을 찾아갔다가 빡돈 알라위와 그의 부하들에게 죽을 뻔했다. 물론 알라위는 미군이 나선다 쳐도 독재정권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 어차피 살려둘 수 없었고, 처단해야 할 자이긴 했지만.
  • [14] 이라크전이 미국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면서 군대에 지원하는 이들이 줄어들자 장병 선발 기준을 대폭 낮춘 결과로 심지어 사회 생활조차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정신병자나 양아치, 갱스터, 인종차별주의자도 꽤 많았다고.
  • [15]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전 미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느냐? 라는 말을 하자 미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 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 [16]미군이 초기 이라크군과 달리 현재 이라크군 무기 지급을 모조리 미제로 교체한 것은 이 때문.
  • [17] 개전 초 전쟁을 강행한 미국을 비난하였으나 이후 장갑차 같은 무기 판매등으로 어느 정도 개입하기도 했다.
  • [18] 덕분에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랍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거기다 심지어 옛날 걸프전때 쳐맞고 가만히 닥치고 있는 이라크 왜 패냐며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했었다.
  • [19] 이마저도 엄청난 수술을 여러번 하여 최대한 화상을 지운 상태였다.

입니다 출처는 엔하위키 미러입니다 여기가 가장 쉽게 설명되있어서 여기서 퍼왔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이 글은 엔하위키 미러의 글인것을 알려드립니다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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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걸프 전쟁

(1990 8 2 - 1991 2 28) 사담 후세인  이라크 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의 영토였다며 침략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30여개 나라가 국제 연합의 결의와 미국 주도하에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지원함으로써 벌여진 전쟁이다. 당시의 구 소련도 쿠웨이트를 지원했습니다

 

 

미국 아프카니스탄 침공작전(2001 11)

1993  소말리아와  수단 의 미국대사관이 알카에다로부터 공격당하는사건이 있었는데 미국은  알카에다 소행으로 판단 이를체포하기위해  노력하는중 2001  9 11테러사건이 발생하게됩니다  이때 알카에다 은거지가 아프카니스탄였기에  미국이 침공작전을 개시 현재까지  전쟁중

 

2차걸프전(미국 이라크 침공) (20033-20111231일 완전 철수)

 

이때 이스라엘 첩보부대인 모사드가 계략적으로 이라크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언론에 허위 유포하였으며 이라크 사담은 이를 부정도 시인도하지않은 상태에서 IAEA(국제원자력기구)  가 이를 사찰한다고하는과정에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배후를지원한것이 드러나  미국이 알카에다 체포작전 과 함께 사담정권 붕괴를위한 침공작전을 전개한것이  2차 걸프전입니다 

2014.03.20.

  • 출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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