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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대 아시아
비공개 조회수 2,358 작성일2006.10.08

지금의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중에

예전 고대 아시아에서 부터 일어났던 일들이 뭐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인도의 계급제 정도가 되겠는데요.

그외에 뭐가 있을까요?

 

 

내공50겁니다.

답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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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Satī, 사띠)

인도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죽는 제도인데, 오늘날에도 가끔 발생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제도랍니다. <참고자료-1>은 네이버사전의 내용이고, <참고자료-2>는 연합뉴스 기사입니다.


<참고자료-1>

인도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함께 태워 죽이던 풍습.

본래는 '정숙한 아내'라는 의미로 남편의 시체를 화장하는 불에 몸을 던져 순사(殉死)한 여자를 말한다. 이런 풍습이 확립된 것은, 인도에 관한 고대 그리스인의 기록에 의하면 BC 4세기 무렵 펀자브지방에서 시작하였으며,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에도 사티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왕후의 사망에 따르는 순사 풍조에서 발전하여 상층 계급에서 행하였으며, 과부의 재혼 금지 풍습에 따라 점차 일반으로 확대한 것 같다. 인도 각지에는 남편을 따라 죽은 과부를 기리는 비(碑) 등이 남아 있으며, 순사한 과부의 영혼을 신으로서 숭배하는 토속신앙까지 생겼다. 이러한 폐풍은 1829년 금지법령이 선포된 이후 차차 소멸하였다.

 

<참고자료-2>

인도 칠순 할머니 남편 화장터에 몸 던져 [연합뉴스 2006-04-24] 

(뉴델리=연합뉴스) 정규득 특파원 = 한 인도 여성이 남편을 화장하는 불길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현지 언론이 24일 보도했다.

인도 비하르주 경찰은 시타 데비(78)라는 여성이 지난 22일 남편의 시신을 화장하던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장작의 불이 꺼진 이후 잿더미 속에서 까맣게 탄 데비의 시신을 발견했다.


인도에서 `사띠(sati)'로 불리는 이 관행은 힌두교 전통에 따른 대표적인 악습으로 여성의 정조와 헌신를 상징한다는 미명 하에 과거에 폭넓게 권장됐다. 영국 식민정부는 지난 1829년부터 사띠를 금지했지만 특히 교육수준이 낮은 농촌 지역에서는 아직 이런 관행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고 있다. 널리 알려진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지난 1987년 라자스탄주에서 한 젊은 여성이 결혼식때 입은 예복 차림으로 남편을 따라 불덩이 속에 뛰어든 적이 있다. 당시 이런 사실이 미리 알려지면서 수천명의 구경꾼들이 현장에 몰려들었고 이들중 일부는 "빨리 뛰어들라"고 부추기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국적인 분노를 촉발시켰고 결국 정부가 위반자에 대해 징역 7년형과 3만루피(62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한 이후에는 공개적인 사례가 많이 줄었다는 전언이다. 인도에서는 여성이 카스트제도의 4계급 가운데 최하층인 수드라와 동일시되고 있으며, 시집갈 때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을 내야 하고 과부들의 재혼도 금기시되는 등 여성억압이 여전히 심한 편이다.


교육과 사회발전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지금도 남편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기를 원하는 여성이 적지 않다는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사띠와 같은 비인간적 악습은 없어졌지만 남편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전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200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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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 중국의 형성과 통일 제국

-춘추 전국 시대의 성립

중국의 고대왕국인 주는 봉건 제도를 바탕으로 발전했다.그러나 이 봉건제도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세대가 내려갈수록 혈연 관계가 점차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의 제후들은 중앙에서 벗어나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때 주는 견융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호경을 빼앗기고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춘추 시대에는 춘추 5패가 주 왕을 도와서 이민족을 물리치고 중국 문화를 지킨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가지고 약한 제후국들을 통합해 나갔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이르면서 가신들이 제후의 지위를 찬탈하는 하극상(下剋上)이 만연하고, 강한 제후국이 약한 제후국을 힘으로 병합하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된다.(이 때 두드러진 나라들을 전국 7웅이라 한다.)


-춘추 전국 시대의 사회와 경제

춘추 전국 시대에는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시기였지만, 사회·경제·사상의 측면에서는 발전이 있었다.각 제후들은 자기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유능한 인제를 경쟁적으로 등용하였다. 이 때의 사회적 신분은 출생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획득되었다.
춘추 전국 시대의 또 다른 큰 특징은 바로 철기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보급됨으로서 농업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소는 인간보다 큰 힘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전보다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관개나 개간에 훨씬 수월했다. 소 한마리만 있으면 혼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전 처럼 농사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가족 단위의 소농 경제와 토지 사유제가 대두되었다. 또한 소금, 철 등을 매매하는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성장하고 화폐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편, 철제 무기가 사용되면서 각국의 군사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고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기병과 농민 보병이 등장하게 되었고, 각국은 새로 획득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중앙 집권적인 관료 제도를 도입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직접 그 지역을 다스리기도 했다.

-제자백가의 출현

춘추 전국 시애데 각국은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하는데, 각각 독창적인 학술과 사상을 전개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1)유가
예절은 유가에 의해 중시되었다. 유가 사상의 시조는 공자로, 인(仁)과 예(禮)를 중심으로 한 도덕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유가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면서 점차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2)도가
도가 사상의 대표적 인물은 노자와 장자였다. 이들은 유가 사상을 인위적인 것이라 하여 배척하고 무위 자연을 주장하였다. 도가 사상을 후에 중국인의 자연관, 화화, 종교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3)법가
법가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주의 권위를 존중하고 엄격한 법과 처벌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상앙과 한비자에 의해 발전된 법가 사상은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이 된다.
4)묵가
묵가는 차별 없는 인류애(겸애)를 주장하였으며, 사치와 낭비를 비판했다.묵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5)명가
명가는 논리학이며 공손룡에 의해 발전되었다.
6)병가
병법, 전술에 관한 사상이며 손자, 오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외의 제자백가로는 종횡가(외교술), 음양가(자연 법칙) 등이 있다.


-진(秦)의 중국 통일

진의 시황제는 기원전 221년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것은 서북쪽에 위치한 진이 북방 민족으로부터 기마 전법과 철제 무기 사용법을 배워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고, 법가 사상가인 상앙의 개혁에 따라 부국강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통일에 성공한 진시황은 전국에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 하였다.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 아래 현을 두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전국의 도로를 정비하고, 문자·화폐·도량형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수많은 사상을 법가 사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분서갱유를 단행하기도 했다.(분서갱유: 유생들을 산 채로 매장하고, 법과 관련 서적과 실용 서적을 제외한 책들을 불태운 사건)또한 북으로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남으로는 화남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하였다.
엄격한 법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만리장성, 아방궁, 여산릉과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에 자주 동원하였다. 이러한 가혹한 통치로 인해 농민들은 점차 불만을 갖게 되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난 후, 진승·오광의 난 등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기원전 20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漢)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202년 장안을 수도로 삼은 한은 진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처음에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후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자(오·초 7국의 난), 난을 진압한 후 무제는 군현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영토 확장에도 노력하여 북으로는 흉노,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를 정벌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 4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비단길을 개척했다.

-후한의 성립과 변천
무제가 죽은 후 외척과 환관들의 계속된 권력 다툼으로 한은 쇠퇴하여, 결국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고 신을 세운다.(A.D 8년) 그는 주의 제도를 모범으로 삼아 토지를 국유화하고 노비 매매를 금하는 등 복고 정책을 펴다가 호족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족의 지지를 얻은 유수는 적마의 난을 틈타 한을 부흥시키고 낙양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후에 유수가 후한의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전한의 정치 제도를 계승하고, 유학을 존중하는 정치를 편다. 또한 반초에게 서역 정벌을 명하여 비단길의 경영권을 회복했다. 이 시기에는 대진국(로마)과 한 사이의 교역도 행해졌었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하게 되자, 환관과 외척이 설치고, 지방 호족 세력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후한은 위·촉·오로 나누어지고, 결국은 위의 조비에게 멸망하게 되었다(A.D 220)

-한대의 사회와 경제
한대에는 철제 농기구 보급의 확대와 기술 발전으로 농업 생산량이 크레 증가하고,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었다. 한대는 호족이 활약하는 시대로, 호족은 대지주이면서 무력을 가진 지방 유력자들이었다. 한대의 호족들은 향거리선제(향거리선제:지방관의 추천을 받다 관리를 뽑는 제도.선발할 때 유교적인 도덕,효(孝)가 가장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에 의해 관직을 독점하거나, 대토지 소유자로서 소농민을 자신들에게 예속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무제는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국가재정난에 빠졌다. 무제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전매제, 균수법, 평준법, 화폐 관리를 실시했다.

★전매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소금, 철, 술 등의 상품을 국가가 전매했는데, 꼭 필요한 물품을 국가가 독점하여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였던 것이다. (쉽게말하자면, 국가가 독과점 기업의 역할을 했다고 보면된다.)
★균수법
물건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법으로 국가에서 각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부족한 지방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고 차익을 취하는 것이다. 물자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고 재정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평준법
물가를 평균적으로 맞추는 법이다. 국가에서 값이 쌀 때 각지의 물자를 사두었다가 비쌀 때 팔아서 물가를 조절하고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다.
★화폐 관리
국가에서 오수전 등을 주조하고, 지역적인 화폐의 주조는 금지하였다.

한 무제의 이러한 통제 경제 정책의 목적은 국가의 재정을 확보(대외 원정으로 생긴 재정 결손 보충)하고 대상인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유교의 성립과 한대의 문화
한 무제는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학을 설치하고, 5경 박사를 선발하는 등 유가 사상을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 삼고 유교 교양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 때부터 유교는 학문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고, 출세와 처세의 원리가 되었다. 이 시기에 발달한 유학은 경전을 정리하고 주석을 붙이는 훈고학이었다.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가 유교의 경전으로 중시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민간에서 신비주의가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도가 사상과 결합되어 태평도, 오두미교와 같은 민간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비단길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역사서로는 전한 때 사마천의 「사기」가, 후한 때 반고의「한서」가 대표적인데, 모두 기전체로 서술된 것이었다. 이는 후에 정사를 서술하는 데 모범이 되었다.그리고 후한 때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함으로서 학문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2.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

-흉노적의 활동
진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부터 흉노족은 중국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였다. 몽골 고원에서 일찍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흉노족의 압박에 중국은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대처했다. 진의 시황제는 몽념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밀어내고 만리정성을 쌓아 그들을 막았고, 한의 초기에는 흉노에게 물자를 대주고 침입하지 않도록 사는 세폐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 무제는 다시 흉노 토벌을 강행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경에는 흉노의 세력 중 일부가 중국으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게르만 족의 이동을 촉진하게 된다.(게르만 족의 이동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는 큰 계게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상황
단군에 의해 건국된 고조선은 철기 문화가 유입된 위만 조선을 거치면서 발전을 하다가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한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은 한반도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4개의 군을 설치하지만, 한민족의 반격을 받고 물러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 진한, 변한) 등이 등장하여 중국 세력과 싸우기도 하고 가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일본 역사의 시작
일본에 형성된 신석기 문화를 조몬 문화라고 한다. 이는 1만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 일본에서는 간석기와 조몬 토기를 사용하였으나, 아직은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획득 경제 단계의 사회였다. 일본의 농경은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와 중국 애륙에서 철기와 벼농사가 전파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대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는 아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체 형태의 정세가 펼쳐진다.


3. 인도와 불교의 발전

-불교와 자이나 교
기원전 7세기부터 갠지스 강 유역에서는 도시 국가가 영토 국가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크샤트리아 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한편, 상업이 발달하여 바이샤 계급의 영향력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너무 형식적으로 변한 브라만 교에 대한비판이 일어났고, 우파니샤드 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우주의 본체(브라만)와 인간의 본체(아트만)가 하나라고 보았다. 즉, 신이 아닌 인간에 주목을 하게 된것이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과거 행위의 축적인 업(業)으로 말미암은 윤회의 구속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우파니샤드 철할을 바탕으로 기원전 5세기경에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해 불교가, 바르다마나에 의해 자이나 교가 성립되었다. 이 두 종교는 브라만 교에서 주장하는 운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카스트제도를 극복하고나 하였다. 자이나 교는 고행을 통한 구제와 철저한 불살생주의를 지본으로 하여 엄격한 계율을 요구하였고, 불교에서는 지나친 권위주의와 엄격한 신분 차별에 반대하면서 인간의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을 가르쳤다. 불교와 자이나 교는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층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불교는 인도의 문화적 통합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다.


-고대 통일 국가의 성립
기원전 5세기경 마가다 왕국은 갠지스 강 유역을 통이하고, 불교와 자이나 교를 보호하였다.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 자극을 받아서 마우리아 왕국의 찬드라 굽타가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고 북인도를 통일한다. 마우리아 왕조는 3대 아소카 왕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소가 왕은 강력한 상비군과 관료 조직을 바탕으로 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한다. 또한 그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는데, 불경을 결집하여 경전을 정리하게 하고 스투파(불탑)를 제작하였다. 이 때의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소승 불교로 실론, 타이 등 동남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아소카 왕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에 북인도는 서북 이민족의 침공을 받아 또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기원전 1세시경 남인도의 데칸 고원에서는 안드라 왕조가 건국되었다. 안드라 왕조는 브라만 교를 보호하고 카스트 질서를 회복하였으며, 로마·동남 아시아와의 해상 무역으로 3세기 정도까지 번영하였다.
북인도에서는 1세기 중엽에 이란 계통의 쿠샨 족이 쿠샨 왕조를 수립한다. 쿠샨 왕조는 중국·인도·이란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중계 무역으로 번영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도 불교를 장려하는 정책을 편다. 크러나 아소카 왕때는 조금 다르다. 이 시기에 발달한 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지향하는 대승 불교였다.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던 서복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는 인도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아 불상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간다라 미술은 후에 대승 불교와 함께 중국, 한국, 일본 등지로 전파되었다.

-인도 문화와 동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는 아시아 대륙 남단의 반도와 해상의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대체로 열대 기후가 나타나고 일찍이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무역풍대에 위치하여 해상 무역이 발달하였다. 여러 민죽이 계속 이동한 탓에 민족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동남 아시아 지역 중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중요한 고대 국가로는 캄보디아 지역에 있었던 부남과 베트남 지역에 있었던 참파이다. 두 나라는 모두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해상무역으로 발전하였다.
부남은 크메르 인이 메콩강 하류에 건국한 나라로 힌두 교가 발달하였다. 부남의 건국 설화는 인도와의 관련성을 보여 주고 잇다. 또한 부남의 도시 유적에서는 로마의 금화, 인도의 불상, 시바·비슈누 신상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이 지역이 인도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파는 참 족이 후한의 지배로부터 독립해서 건국한 나라이다. 참파는 인도로부터 불교 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들은 인도, 중국 등과의 교역을 통해 발전하면서 15세기까지 이어졌지만, 잦은 왕조 교체와 중국의 간섭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4. 서아시아의 세계

-아시리아의 오리엔트 통일
철제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기병대를 앞세운 아시리아는 주변 지역들을 정복해 시리아,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것이 오리엔트 최초의 통일 국가였다(기원전 671). 아시리아는 정복지에 총독을 파견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를 행하였으나, 피지배 민족에 대해 지나치게 강압적이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의 반란을 초래했다. 결국은 이로인해 멸망하여 이집트·신바빌로니아·메디아·리디아의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아시리아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서 군용 도로와 통상로를 정비하였다. 도한 수도 니네베에 왕립 도서관을 세우고 각지에 학자를 파견하여 많은 문헌을 수집하게 하였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아시리아가 망한 이후에 분열되었던 오리엔트 세계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인더스 강에서 지중해 동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운 그는 전국을 20개의 속주로 구분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한편, '왕의 눈', '왕의 귀'라고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도한 그는 도로와 역전제를 정비하기도 했다.
이전의 아시리아가 이민족에게 강압적인 정책을 취하다가 멸망하였기 때문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아시리아와는 달리 이민족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치면서 200여년간이나 번영하였다, 피지배 민족에게 공납을 징수하는 대신에 그들의 전통이나 신앙의 존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에게 패하고, 총독들의 반란으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말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파르티아
알렉산더 제국의 붕괴 후, 서아시아의 대부분의 영토는 그리스 계의 시리아 왕인 셀레우코스가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 그리스 인들이 서아시아에 그들의 문화를 전파ㅏ였고, 헬레니즈 문화와 인도 문화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중엽에 그리스 계의 박트리아와 이란 계의 파르티아가 독립하였다. 파르티아는 점차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를 잠식해 갔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영토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동서 무역로의 요지를 장악하고 중계 무역으로 발전하던 파르티아는 로마의 동방 진출로 쇠퇴하여 이란 고원에서 일어난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226).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동사 무역을 독점하면서 번영해갔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과의 계속된 분쟁과 궁정의 내분, 속주의 반란으로 인해 쇠퇴하여 갔고, 마치내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되었다(651).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 교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파가 크리스트 교나 불교 등의 외래 종교가 전래되면서 이들을 융합한 마니 교가 창시되기도 했다. 이 나라에서는 금·은 세공, 유리, 도자기와 같은 공예를 비롯하여 궁전 건축등이 크게 발달하여 유럽과 동아시아에까지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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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두되겠나염??? ( 이거 맞나 모르겠넴..;;)

200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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