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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베트남 전쟁 일어난 까닭이요?
비공개 조회수 31,600 작성일2015.03.17

제가 논술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셔서 말인데요.

좀 갈켜주세요.

지식인 분들!베트남 전쟁 일어난 까닭과 어느 쪽이 이겼는지를 알켜주세요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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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작성했던 답변을 복사해 붙였습니다. 몇가지는 답변을 작성하면서 새롭게 첨가했습니다.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습니다. 일본의 점령기를 거치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호치민을 앞세워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됩니다.
베트남 전쟁의 최초 발단은 2차 대전이 끝나기 수개월 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를 금하고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결의를 바꾼데서 시작됩니다. 이유는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일의 점령으로 손상된 프랑스의 위신과 자존심을 회복하고 프랑스를 소련의 진출을 막는 서유럽의 보루로 삼고자 하는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묵인과 지원 아래 프랑스는 식민지 지배를 계속하고픈 욕심으로 1945년에서 54년까지 이어지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서 패한 것을 계기로 패전을 인정하고 물러나기로 하였습니다. 비로소 통일 국가를 달성하나 싶었는데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열이 일어나 통일 정치체제 수립에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1954년 제네바 협정을 계기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북베트남은 호치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체제 / 남베트남은 베트남 공화국으로서 자유주의 체제)
도미노식의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베트남이 공산화 되면 동남아는 물론이고 일본도 공산화될 우려가 있다고 확대해서 생각하였음) 프랑스를 대신하여 베트남에 군사를 개입합니다. 그러나 남베트남정부는 지주우대정책으로 농민들의 반감을 사고 부패하여 반정부 운동이 전개되는 등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마당에 설상가상으로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이 결성되어 게릴라 활동이 번번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에 우려를 느낀 미국은 64년 은밀히 조작된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후부터 중국, 소련의 지원을 받은 남북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군, 미군의 대결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전황은 나아지지 않고 승산과 명분이 없는 전쟁에 희생자만 늘어가자 미국 국내에서의 반전여론이 드세지고 결국 73년 철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75년 북베트남은 탱크로 사이공(현재는 호치민시)을 밀고 들어와 함락하고 다음해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성립합니다.

 

베트남 측에서는 베트남이 이긴 것으로 되어 있고 지금도 해마다 기념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쟁은 졌지만 전투에서는 이겼다고 말하며 자위를 한 일도 있었지만 당연히 미군이 개입하지 말았어야 할 지독한 실수라고 말하며 패배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실책, 아픈 기억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래는 질문과 관련 없는 이야기이고요 그냥 재미삼아 참고하시라고 덧붙입니다.

 

- - - - - - -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국은 최대 54-60만명의 병력을 투입했었고

지출한 전비는 2천억 달러, 전사자는 4만 7천명, 부상자는 25만명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정신질환과 후유증으로 스스로 자살한 참전군인의 숫자도 7 만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한국군 전사자는 4천명대. 부상자는 1만 5천명대입니다. 한국군이 사살한 베트콩은 4 만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피부병 환자같은 피해자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북베트남군의 총전사자는 90 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양국 민간인 희생자는 무려 100 만명이 넘습니다.

미군과 함께 싸웠던 남베트남군의 전사자는 20 만명 조금 넘습니다.

따라서 만약 이렇게 미군을 도와 싸운 병력까지 고려할 경우 미군 1 명 당 베트콩 3 명 안팎의 전사자 비율을 보이고 있는데 그만큼 못싸웠다는 얘기이지요. 당시에 적 한 명을 사살하는데 투입된 탄환이 적게는 1만발 많게는 10만발이라는 얘기마저 나돌 정도였습니다.

 

소련은 대략 10-20억 달러에 해당하는 원조를 하였었고 소련 파일럿이 직접 조종하는 공군기들도 일부 지원하여 미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소련이 제공한 레이더 역할을 하는 휴대용 소형 탐지기인가 뭔가 하는 장비와 SAM 2 미사일은 미군기를 격추시키는데 아주 주효한 무기였습니다. 소련이 준 ak 소총인가 뭔가 하는 기관총도 덥고 습도 높은 밀림같은 환경 속에서도 내구성이 좋고 고장이 없어서 아주 효율적인 무기였다고 합니다.

 

종전 후 600만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났고 대부분 미국, 호주 등지에서 보트피플을 비롯한 난민을 받아들였습니다.

보트 피플 난민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식수가 바닥이 나면 자기의 소변을 받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본의 국제 이미지가 실추되기도 했었습니다.

월남전 특수로 많은 경제적 이익을 보았으면서도 온갖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보트 피플을 거부했던 일본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비열한 행위는 당시 경제동물이라는 일본에 대한 비아냥을 더욱 조장하였습니다.

미국은 2천억 달러라는 엄청난 전비를 쏟아부은 바람에 전쟁 이전 존슨 행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미국 내의 '빈곤과의 전쟁'에 쓰일 돈줄이 마르게 되어 결국 빈곤 추방과 같은 복지 관련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직접적으로 투입된 전비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간접적으로 쏟아부은 물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남베트남 군부에서는 이런 물자들을 사리사욕을 체우는 일에 오용하는 부패가 만연하였었습니다. 총과 무기류를 베트콩에 돈을 받고 몰래 팔아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이 철수하면서 '우리는 떠나갈테니 나머지는 네들이 알아서 해, 우리가 너희들에게 준 무기들로 알아서 잘 싸워봐라' 하면서 지원한 F-5 전투기를 비롯한 여러 무기들을 남베트남군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였고 이 전투기들과 무기들은 종전 후 모두 통일 베트남의 수중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게 됩니다. 한마디로 전리품 꼴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만큼 미국은 멍청한 일을 저지른 것이었고 남베트남은 부패가 판쳤고 무능하고 무력한 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베트콩의 정신력은 대단했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수십 km 를 행군하는 것은 예사고 베트남전 승리의 근원지로 일컬어지는 호치민 루트의 복잡성과 땅굴의 규모도 대단합니다. 지금도 베트남의 주요 인기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땅굴의 총 연장은 250 km 이며 지하 30m 깊이에 위치한 은닉처와 땅굴도 있다고 합니다.

 

한국은 월남전 특수로 인한 이득을 보았던 나라입니다. 월남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비약이 아닌 현실적인 실상으로 거론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미국으로부터의 대략 60억 달러 가까운 달러 유입과 차관으로 SOC 등 인프라 기반을 구축하는데 쓰일 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 뿐만 아니라 건설노동자와 기술자들도 많이 파견되어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차관과 더불어 이 돈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중화학 공업 육성에 쓰일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이지요.

팬텀기와 m16 기관총도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팬텀기 도입에 대해 국민들 뿐만 아니라 팬텀기 조종사로 지정된 한국 조종사들의 특권의식과 자부심은 대단했었지요. 크아.. 맨날 고물 구닥다리 세이버 또는 F - 5 기만 몰다가 내가 이런 멋진 쌍발 엔진의 팬텀을 몰다니...이게 꿈이냐 생시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국민의 세금으로 돈을 마련하여 즉 방위성금으로 조달한 돈으로 팬텀 4 대를 더 들여오기도 했었습니다.

당시의 미국의 기술지원, AID 차관은 당시의 한국의 경제성장의 기초를 닦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참전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살인청부를 받아 비열한 일을 한다라는 비아냥도 있었습니다. 미국이 시키는대로 고분고분한다, 미국의 개가 되어서 같은 아시아 민족을 죽인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미군의 물량적 손실은 엄청난데 총 폭탄 투하량은 800 만 톤, 5700 대의 항공기의 손실을 보았으며 그중 단일 기종으로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f-105 썬더치프로서 400 대 가량이 격추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의 썬더치프 총 생산량 900 대의 절반에 가까운 수량입니다.

조종사 등 공군과 관련된 전사자도 8000 명이나 됩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군수 회사들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당시에 새로 투입된 팬텀 전투기의 관제시스템, 미사일 만능주의에 대한 과신으로 기관포를 장착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초기의 근접전에서 많은 손실을 입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나 나중에 기체 하면에 포드를 장착하거나 노즈 밑에 기관포를 다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당시의 열추적 미사일 사이드 와인더의 성능도 형편 없어서 표적기를 향해 발사해도 빗나가거나 엉뚱하게 열을 발산하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사일을 다 써버리고 나서도 한 대도 맞추지 못하고 기관포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날렵하고 가벼운 미그기가 오히려 근접전에서 더 우세할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미군기 1 대당 북베트남기를 2.5 대  비율로 격추했는데 이런 아주 약간의 우세한 전적마저도 조종사의 기량이 아닌 전투기의 성능 덕분이었을 정도로 당시의 미군 조종사의 실력은 일부의 에이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형편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스마트 폭탄과 같은 정밀 유도 무기가 없었다가 전쟁 막판에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 예로 어떤 교량을 폭파시키기 위해 매번 전투기가 동원되어 폭탄을 투하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매회의 출격마다 전투기만 격추되어 총 4 대의 전투기 손실을 보던 작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스마트 폭탄을 장착한 전투기를 출격시켜 투하한 끝에 교량 폭파를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쟁을 통한 시행착오로 종전 후 미군의 전술, 전략, 훈련프로그램(대표적인 예로 top gun), 무기 개발 측면에서도 많은 수정과 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 중에서 A-10 은 베트남의 경험을 토대로 연구, 설계된 기종입니다. 

미군의 작전 중 많은 비난을 받았던 것은 네이팜 폭격과 북폭 작전 중 시행된 B-52의 융단폭격입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사건은 바커 기동타격대가 베트콩 토벌작전 과정에서 밀라이 마을의 비무장 주민 6 백명을 사살한 밀라이 학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전모가 밝혀지고 보도되었을 때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네이팜 폭격에 대한 거센 비난은 베트남 소녀가 네이팜 폭격을 받고 불타는 마을에서 화상을 입은 알몸으로 울면서 뛰어가는 보도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보도 사진은 반전 데모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네이팜 폭탄은 한국전쟁에서도 투입되어 북한의 무슨 수력 발전소를 파괴하는데 쓰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전쟁이 끝나가는 마당의 몇주간 사이에 3 년간의 총폭격량을 능가하는 크리스마스 폭격을 진행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폭격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리석고 무모한 작전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단 며칠 동안 10 만 발이 넘는 폭탄을 투하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26 대의  B 52 가 대공포화와 샘미사일로 격추되고 36 명의 조종사가 전사하였습니다.

베트콩은 1000 기에 가까운 샘미사일을 다 써버릴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B 52 의 가격은 800 만 달러 조금 안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고가격이었습니다. 조종사들조차도 불평을 터뜨릴 정도였는데 폭탄을 투하하는 곳에 아무런 군사시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무익한 작전을 밀고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여러 복잡한 사정을 떠나서 단순하게 본다면 우선은 과잉반응으로 인한 오판이 크게 작용했었습니다. 내전에 불과한 것을 냉전구도로 인해 조성된 불안감 때문에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이 세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과신, 아시아의 정서에 대한 무지, 베트남 민족성과 베트남 지형과 자연환경에 대한 통찰, 연구의 결여, 심지어는 음모론 등 여러가지 원인들이 작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거 1950년 초에 미국의 국무장관 에치슨이 한반도를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하기로 한  에치슨 선언 또는 에치슨 라인이 북한의 남침 동기를 자극한 것을 보아도 미국의 외교력에 치명적인 실수가 드러난 예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미래의 형세를 놓고 사리분별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과 선견지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줍니다.

또한가지 베트남 전쟁의 동기로 간과하기 쉬운 것은 60년대의 미국 군대는 '고도의 기술공학'으로 대변할만한 기술만능주의, 기술에 대한 신념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승리를 쉽게 예견했던 것이고 단기간에 종결지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습니다.

원시적인 아시아 군대를 상대로 이기지 못할 것이 뭐냐 우리에게는 헬리콥터 등 많은 신무기가 있는데 이런 것을 갖고서 어떻게 이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신했던 것입니다.

베트남은 이런 기술적 백그라운드에 대한 과신으로 기술집약적인 신무기들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이상적인 시험대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기술을 전장에 투입하하면서도 전세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손실만 늘어가고 베트콩의 교묘한 속임수, 적인지 아군인지 믿을 수 없는 주민들, 폭탄 테러, 스파이, 뒤통수를 때리는 배신, 남베트남 군부의 부패 등 스트레스가 누적되다보니 미국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종전에 다다르기까지 엄청난 물량의 폭격을 한 것도 이런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베트남과 거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도착 첫날 공항에서부터 베트남 택시 운전사의 바가지 요금으로 인해 기분이 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현지 거래처가 자기에게 단지 금전적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전 대화와 조율도 없이 무조건 일방적으로 거래 관계를 끊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매너 없는 행동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물론 일부에 국한된 경험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웬지 잘난 척하는 듯한 일부 베트남 사람을 보면 역겹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젊은 인구층이 많습니다. 그래서 kpop 을 듣는 팬들도 많다고 합니다.

아뭏튼 자부심에 차 있는 듯한 모습들과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엿볼 수 있는 베트남 민족성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과도 싸워서 이길 정도의 교묘하고 결연한 이 나라 국민의 성격을 음미해 보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 총각에게 시집 온 베트남 주부들은 대개 온순하고 착하다고 하더군요.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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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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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일어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독립전쟁부터 알아야 합니다.

 

베트남은 오랜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호치민이라는 사람(우리나라 김구나 김좌진같은 분임)은 레닌주의자였지만 독립전쟁을 위해서

모두 합심하여 싸우던 중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군이 베트남을 장악합니다.

베트남 독립군은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이제는 일본군과도 싸우게 됩니다.

 

1945년 8월 2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우리나라와 똑같은 상황이 발생됩니다.

중국군과 영국, 프랑스군이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서 남과 북에서 베트남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인들은 종주권을 주장하는 프랑스군과 인도차이나전쟁을

시작하고 1954년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하여 완벽한 독립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서로 이념이 달라서 사람들이 반으로 갈려서 결국 1954년에 제네바협정에 따라

베트남도 한반도처럼 남과 북으로 분열이 됩니다. 북은 공산주의 남은 민주주의가 되었죠.

 

이후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해서 소규모 전투를 지속합니다.

이에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서 북베트남으로 진격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통킹만 사건은 따로 알아보세요.)

 

부패에 찌든 남베트남은 이미 사상으로 단결된 북베트남(베트콩)을 이길 수 없는 정신상태였고,

돈 있는 부르조아와 정치인들은 속속 해외로 빠져 나갔습니다.

미국은 반전운동과 게릴라전으로 힘든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죠.

 

결국 미군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1975년 베트남에서 떠나면서 베트남은 공산주의로 통일이

되었고 전쟁은 종결됩니다.

201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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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베트남, 캄보디아, 번역, 통역, 기타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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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느 전쟁을 말씀하시는지요 ?


베트남은 외세침략이 무척이나 많았던 나라입니다.


중국에 천년을 지배당했고,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었고,

프랑스가 독일이랑 힘겨루기하다가 밀릴때 그틈을 타서 일본군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구요.

전체적인 스코어로 따지만, 진전쟁이 훨씬 많습니다.


근대 베트남을 보면,


1) VS 프랑스 : 베트남 완승, 프랑스군 3만이 완전 개박살났죠.

2) VS 미국 : 베트남승

   (하지만,이건 미국이 싸움에서 졌다기 보다, 해봤자 득도 안되고, 미국내부에서도 반전여론이 거셋고,

    일단 돈이 많이 들어가죠. 남베트남정부에 지원을 해봤자, 효과도 없고, 남베트남군에게 무기를 지원하면, 이걸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에게 돈받고 팔아먹었대네요.. 이러니 전쟁이 안되는거죠..

어떤 나라든 짜증나서 전쟁때려치고 집에 갈듯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지형이 약간 사기 지형입니다. 전쟁하기에 빡쎈지형인거죠. 

정글에다가 중간지역도 협소하고, 아무튼 일단 남의 나라에서 전쟁하는건 득보다 실이 많죠.

그래서 미국이 물러난거죠. 베트남 남부지역에 보면 땅굴이 있는데, 이것때문에 전쟁이 이겼다기보다는

이렇게 해서 게릴라로 미군을 짜증나게 답답하게 한거죠. 

제 생각에는 미국이 베트남중부지역위로 진격하지 않은것은, 아마도 한반도처럼 북/남 쪼개서 통치하려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3) VS 중국 : 국경지역에서 한달간 소규모 전투 결과는 비김

4) VS 캄보디아 : 베트남 완승


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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