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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대전 문화재
비공개 조회수 2,442 작성일2017.11.20
대전에 있는 문화재 4개 알려주세요! 이름과 간단한 특징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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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preewald
절대신
2019 스포츠, 레저 분야 지식인 남성 건설/건축업 #재난지도사 #건축기술자 #조류애조가 새, 조류 3위, 날씨 2위, 재난재해 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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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덕 동춘당


종 목 보물 제20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송촌동 19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2.대덕 계족산성

종 목 사적 제355호

지 정 일 1991.10.25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장동 산85

시 대 삼국시대

대전시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3.회덕 쌍청당

종 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중리동 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학자인 쌍청당 송유(1389∼1446) 선생이 지은 별당이다. 건물 이름은 선생의 호인 ‘쌍청’을 따다 붙였는데 청풍과 명월의 맑은 기상을 마음에 담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세종 14년(1432)에 지은 뒤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지만 원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대청마루로 꾸몄다.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로 다른 주택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단청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또한 근처에 남아 있는 이와 비슷한 별당 건축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4.남간정사

종 목 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동구 가양동 65

시 대 조선시대

 낮은 야산 기슭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남간정사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은 것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 때 서재를 짓고 능인암이라 하여 학문을 연마하였다. 숙종 9년(1683) 능인암 아래에 이 건물을 지었는데, 많은 제자를 기르고 그의 학문을 대성한 유서깊은 곳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양식이다.

건물 앞에는 잘 가꾸어진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뒷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또한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목판을 보관한 장판각이 맞은편 언덕에 있다.

송시열과 관련된 건물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5.월평동산성

종 목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서구 월평동 산12-2

시 대 백제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에 있는 해발 137.8m의 야산 정상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둘레는 약 710m이다. 포곡식 산성은 성곽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며 쌓은 산성을 일컫는다.

성벽은 거의 붕괴되었지만 성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서벽의 일부에서는 바깥벽·안벽이 남아있다.

성문터는 동·서·북벽에 각각 한 곳씩 남아있는데, 동문터의 너비는 5m이고, 서문터는 너비 3.6m로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북문터는 너비 3m로 성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있는데, 부근에 매우 평탄한 곳이 있어 물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성벽을 따라 너비 7∼12m의 물길인 도랑이 있으며, 곳곳에는 평지가 많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5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을 때 백제의 집자리, 저장구덩이, 성벽, 말뚝을 박아 생긴 구덩이 등 유구가 확인되었다. 또한 세발토기(삼족토기), 그릇받침(기대), 기와, 말안장이 출토되어 월평동 산성의 사용시기와 성격을 알 수 있게 하였다.



6.보문산성

종 목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0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중구 대사동 산3-45

시 대 백제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보문산(해발 406m) 정상 부분의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300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다듬은 네모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성벽 바깥면은 조금씩 안쪽으로 둘러쌓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암반으로 형성된 동쪽과 북쪽의 급경사면에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터가 확인되었고, 현재 통행로로 사용되는 북문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성문폭을 좁혀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동쪽 성벽 아래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주거지 유적과 민무늬토기, 덧띠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이 성은 백제 말에 신라와의 전투가 치열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산성들과 쉽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7.송용억가옥

종 목 대정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송촌동 198-4

시 대 조선시대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이곳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안채와 큰사랑채·작은사랑채,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다. 큰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안채 앞에 위치한 작은사랑채는 오른쪽 끝에 툇마루를 한단 높게 두어 운치를 살렸다.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다. 최근 대청에 유리덧문을 달아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구릉 위에 가묘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가 2동이나 있어 사랑채의 기능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개방적인 배치를 하고 있어 기호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8.진잠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6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유성구 교촌동 15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진잠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에 처음 지은 뒤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와 서재 등의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9.삼매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동구 가양동 11

시 대 조선시대

삼매당은 조선 선조때 연원도 찰방을 지낸 박계립(1600∼?)이 지은 건물이다.

박계립은 이곳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나 관직을 물러난 후 인조 22년(1644) 이곳에 집을 짓고 정원에 매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으며, 사방에 정자를 세워 버드나무 다섯그루를 심어서 그 이름을 오류정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호를 삼매당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원래는 소제동의 기국정과 서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었으나, 1930년 하천변이라 침수의 우려가 있어 선생의 9대손 박태흥이 남간정사의 맞은편 언덕인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삼매당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 현판과 팔경시(八景詩), 여러 문인(文人)들의 시가 조각되어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10.회덕 동춘선생 고택(정침,가묘,별묘)

종 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송촌동 192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곳으로 동춘당 뒤쪽에 있다. 동춘당은 조선시대 대표적 별당 건축물로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춘당 왼쪽의 대문을 들어서면 一자 모양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사당인 가묘와 별묘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옆면 6칸이다. 부엌 위는 다락으로 꾸몄고, 앞에는 1칸 살림집을 달아 집안의 여러가지 일을 맡아보던 청지기가 사는 방을 두었다. 대청마루와 큰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작은 사랑방 앞에는 누마루처럼 높여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안채는 건물 가운데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넓은 대청마루와 왼쪽에 2칸의 마루방, 1칸 반의 안방, 1칸씩 자녀방과 바느질 방인 침모방 그리고 부엌이 연결되어 있다. 대청마루의 오른쪽에는 각 1칸씩 건너방과 웃방, 부엌, 반찬을 두는 찬방, 그리고 행랑방이 붙어 있어 전체적으로 ㄷ자를 이룬다.

가묘와 별묘는 모두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11.옥류각

종 목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비래동 산1-11

시 대 조선시대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2층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계곡의 바위 위에 지은 건물로 골짜기에 4계절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온다는 뜻에서 ‘옥류’라고 이름지었다. 이곳에서 송준길 선생은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계곡 사이의 바위를 의지하여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짠 특이한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면이 계곡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옆면으로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입구쪽부터 2칸은 마루, 1칸은 온돌방이다.

건물 위쪽에는 비래암이 있고, 왼쪽에는 ‘초연물외’를 새긴 바위가 있는데 선생이 직접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건물의 ‘옥류각’현판은 곡운 김수증 선생의 글씨이다.



12.박팽년선생 유허

종 목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동구 가양동 16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1417∼1456)이 살던 곳이다.

박팽년은 세종 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 복위 운동을 꾸미다 세조 2년(1456)에 처형되었다.

죽은 후에 유림의 학자들이 선생의 집터가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현종 9년(1668)에 주춧돌을 모아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비문을 세웠다. 현종 13년(1672)에는 비각을 지어 장절정이라 하였다.



13.대덕 법동리 석장승

종 목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9.03.18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법동 77-8, 95-2

시 대 고려시대

거친 자연석에 눈·코·입 등을 다듬어 표현한 남·여 한 쌍의 돌장승으로, 높이는 각각 153㎝, 126㎝이다. 예전에는 법천골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냇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천하대장군, 왼쪽에 지하여장군을 두었는데, 이 일대를 재개발 하면서 현재는 법동입구 도로 양쪽으로 옮겨 놓았다.

남장승의 몸체에는 ‘천하대장군’, 여장승의 몸체에는 ‘지하여장군’이라 새겨 놓았고, 둘다 머리 위에 모자 모양의 돌을 새겼다. 각진 얼굴 형태를 가진 남장승은 강인함이 엿보이고 굳게 다문 입은 무언가를 다짐하는 듯하다. 작은 입과 턱선을 둥글게 처리하여 순한 인상을 주는 여장승은 남장승과는 달리 귀를 만들어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남장승과 여장승 옆에는 각각 선돌이 서 있는데 남장승 옆의 것은 길쭉하여 남성을 상징하는 듯하고, 여장승 옆의 것은 펑퍼짐하여 여성을 상징하는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원래는 나무장승이었던 것을, 약 300여 년 전에 다시 돌로 세운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장승은 선돌이 같이 있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시대의 장승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치있는 민속자료이다.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경이면 산신제를 지낸 후 장승제를 지내는데, 마을의 액운을 막고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라 한다.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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