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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생에 대해서
사람 조회수 5,725 작성일2018.07.13
알려주세요. 미술작품 말고 일생이요. 최대한 빨리 부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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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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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 모나리자와 수많은 예술작품을 남겼으며 전쟁터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갈끔찍한 무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인류 최초의 잠수복도 그의 아이디어 였으며 인류가 비행기를 발명하기 약 400년전에 그는 이미 하늘을 나는 기구를 발명하였다. 이밖에도 수많은 발명과 발견이 있었음에도 그의 아이디어는 오랜 세월동안 파묻혀 있게 된다.

1452년 이탈리아에서 빈치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의 이름은 "빈치사람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서출(첩이 낳은 아이)로 태어난 까닭에 당시 지식인들의 언어인 히랍어와 라틴어를 배울수 없었다.

정식교육도 받지 못한 다빈치는 왼손잡이였으며 이상하게도 글씨를 거울에 비쳐야만 볼수 있도록 거꾸로 글씨를 쓰는 버릇이 있었다.

이탈리아 빈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다빈치의 호기심을 자극한것은 물의 움직임과 식물의 성장 주기, 갖가지 짐승의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새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는 발명을 할때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곤 했다.

매일 생각했던것과 연구 했던것을 메모했던 그의 노트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윈져성의 왕립도서관으로

600쪽 정도가 보관되어 있으며 그 가치는 한화로 6조원이 넘는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해부학 스케치와 함께 그는 갖가지 기발한 기계의 설계도를 남겨 두었다.

그의 설계도 중에는 현대의 헬리콥터의 원리를 접목한 기계와 낙하산, 행글라이더 등도 있었다.

1460년대 초 다빈치의 아버지는 그를 취직시키기 위해 피렌체로 데려간다.

서출인 까닭에 법률가나 의사가 되지 못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그가 예술가가 되길 바랬다.

그때 당시 예술가는 신분은 높지 않지만 대장장이나 제단사처럼 장인으로 인정받는 직업이었다.

다빈치는 아버지덕에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베르키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된다.

다빈치는 그곳에서 몇년을 지내게 되고 직접 대작을 그리고 싶어 안달이난 레오나르도에게 스무살 되던해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스승 베르키오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게 된것이다. 베르키오는 중심인물을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변인물을 그리게 했다. 다빈치에게는 왼쪽에 있는 천사가 할당된다. 다빈치는 이기회를 활용해 동료들은 물론 스승 베르키오 마저 깜짝 놀라게 만든다. 당시만해도 계란 템페라로 그리던 화법을 과감히 버리고 물감에 기름을 섞어 그리는 유화기법을 썼던 것이다. 유화기법은 몇년전에 발명된바 있지만 아직 남부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법이었다.일설에 의하면 다빈치의 천재성에 감복한 스승 베르키오는 그후 인물은 모두 다빈치에게 그리게 하고 자신은 영원히 붓을 놓았다는 설도 있다.

1482년 서른살이 된 다빈치는 어느날 갑자기 짐을 꾸려 이탈리아의 또다른 대도시인 밀라노로 향한다.

그리고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악명높은 폭군 "루도비코 스포르차" 밑에서 일하게된다.

르네상스시대 통치자들이 다 그러했듯 스포르차 역시 최대의 관심사는 "무기"였고 다빈치는 이점을 공략하기 위해 스포르차에게 자신이 개발한 각종 무기와 병법등을 소개한다. 하지만 스포르차는 다빈치를 군토목기사로 임명하지 않는다.

대신 다빈치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공부인의 화장실 하수도와 성에 중앙난방시설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잡무가 주어지는데 그중에는 스포르차의 연회를 담당하는 일도 맡게 된다.

밀라노공의 연회에서 연출 및 감독의 일을 맡게된 다빈치는 정교한 의상과 가면을 만들고 신기한 기계를 선보여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곤 스포르차의 신임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연구를 하는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일 할일을 적어가며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통해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이 과정에서 과학의 한계를 넘나들며 놀라운 발견을 이룩하게 된다.

그는 대기중에서 작은 입자들이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인간의 눈이 사물을 보는 원리를 최초로 밝혀낸 사람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인간의 눈에서 빛이 나와 사물을 비춘다고 생각했지만 다빈치는 그 반대로 생각했다.

그는 인간태아의 모습을 최초로 그린 사람이었으며

20세기 들어서야 밝혀진 인체의 수수께끼를 일찌감치 발견한 사람이었다.

인체를 연구해 동맥경화가 심장질환과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도 사상 최초로 밝혀냈다.

그는 인간이 최초로 심해 잠수에 성공하기 300년에 이미 그 방법을 제시했으며

인류 최초의 행글라이더가 비행에 성공하기 490년전에 이와 유사한 글라이더를 설계했다.

이처럼 다빈치가 당대의 관념과 지식을 뛰어넘은 발견을 이룬것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토지를 대규모로 개발하기 위해 준설기와 굴착기를 발명하는가 하면 새로운 농사법과 관개법을 개발해 내었고

다양한 무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무보수로 진행했던 다빈치는 마침내 스포르차의 허영심을 자극할만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그것은 스포르차 가문을 빛낼사상최대 규모의 청동으로 만든 말 조각상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때문에 다빈치는 16년간 애를먹게 되고 실험삼아 진흙으로 조각상을 만들지만 결국 청동말 조각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스포르차가 청동말 조각상을 만들기위해 모아놓은 60톤의 청동은 프랑스군이 쳐들어오면서 모두 포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만든 조각상도 그자체로도 엄청난 예술품이 될수 있었으나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밀라노에 있는 동안 다빈치는 자크모 카프로티 라는 어린 제자를 한명 두게 되고 어린 제자의 말썽투성이 행동에 다빈치는 세일라(악마)라고 부르게 된다. 하지만 다빈치는 세일라의 행동에 매우 관대했고 평생 가족과 자식이 없었던 다빈치에게는 딱히 애정을 쏟을 만한 대상이 없었고 세일라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붓게 된다.

세일라는 다빈치의 일생에 가장중요한 인물이며 장난기 많지만 사랑스런 소년이었다. 그리고 다빈치가 세상을 떠날때 그의 유산은 세일라에게 상속된다. 이때까지 다빈치는 중요한 작품 몇점을 남기게 된다.

"동굴의 성모"와 스포르차의 애첩을 그린 "에르마인을 안고있는 숙녀" 가 여기에 포함된다.

다빈치가 스포르차 밑에서 일한지도 13년, 항상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기로 유명한 다빈치였지만 스포르차는 다빈치에게 큰일을 맡겨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바로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 수도원에 최후의 만찬을 묘사하는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최후의 만찬은 전에도 몇번 제작된바 있지만 다빈치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기로 한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제자들의 표정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너무도 유명한 대작 "최후의 만찬"이 탄생하게 된다.

얼마후 프랑스군은 밀라노를 침공하게 되고 다빈치는 밀라노를 떠나게 된다

후원자를 잃은 다빈치는 일자리를 찾아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베네치아로 가게 된다.

1500년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중 하나였다.

돈에 쪼들리던 그는 잔혹하기로 소문난 폭군이자 교황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지아를 찾아간다.

체사레 보르지아는 자기 형제를 죽였으며 누이를 범했고 사람을 만찬에 초대해 놓고 독살시키기 일수인 당대인들이 이름만 떨어도 떨정도의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그는 다빈치를 군 토목기사로 임명하고 막강한 권한을 보장해 주는가 하면 개인 호위병 까지 파견해 준다. 그밑에서 다빈치는 여러가지 대규모 공사를 벌이게 된다.

배수공사를 하는가 하면 도시를 둘러싼 성곽을 축조하고 심지어 프랑스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흐름을 바꾸는 계획까지 한다. 어느날 다빈치와 친해진 병사가 보르지아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되고 친구를 잃은 다빈치는 이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달후 체사레 보르지아 곁을 떠나게 된다.

피렌체로 돌아온 다빈치는 그림에 진저리가 났다고 말하면서도 "리사드 지오콘데"라는 이름의 부인을 그리는 일을 착수하게 된다. 그후 10년에 걸쳐 완성된 이 작품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으로 꼽히게 될 "모나리자"였다.

이 작품이 그토록 오래걸린 이유는 다빈치가 여러가지 관심 분야의 연구를 동시에 추구했기 때문이다.

마침 다빈치의 관심을 끈 새로운 분야가 등장한다. 바로 "인체"였다.

그는 해부학을 공부하고 뼈와 근육의 움직임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곧 근육보다 더 깊이 들어가 연구하게 된다. 다빈치는 사상 최초로 인체의 장기를 해부한 인물이다.

당시 인체해부는 교회의 허가를 얻어 이따금씩 이루어 졌다. 대개 범죄자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예술가들이나 학생들이 곁에서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1500년대 초 산타마리아 누오보 수도원 부속병원, 다빈치는 이곳에서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발견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훗날 20세기가 되서야 그의 발견은 의학계에서 재발견 된다. 바로 "동맥경화"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는 해부를 하면 할수록 인체가 놀랍도록 훌륭하게 만들어졌다는걸 깨닫게 된다. 그는 해부학을 통해 인간이 팔다리를 움직이는 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연구끝에 그는 인조인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을 계획한다. 해부학을 통해 쌓은 지식과 기계에 대한 열정을 합쳐 세계최초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설계한다.

실제로 오늘날 나사의 우주정거장에서 사용되는 로봇중 일부는 500년전 다빈치의 설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것도 있다.

하지만 1500년대 초에 다빈치에게는 후원자도 돈도 떨어져가면서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1513년 그는 새로 즉위한 교황 레오10세 밑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다빈치를 불러 들인 것은 교황이 아니라 교황의 동생이었고 정작 교황은 다빈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교황은 다빈치에게 특별한 임무는 주지 않았고 조수라고 붙여준 자는 다빈치가 이상한 짓을 꾸밀까봐 파견한 교황의 첩자였다. 이 첩자는 해부학을 연구하던 다빈치를 음모에 빠뜨렸고 다빈치는 교황의 명으로 해부학을 더 공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부학 역시 다빈치의 또다른 실패중 하나였다. 다른 분야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역시 출판되지 못하고 파묻혀 있다가 인류가 비슷한 발견을 이룩한 후에야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많은 업적을 이루고도 정작 인류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한 여인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업적하나를 남겼다. 그녀는 다빈치가 로마를 떠날때도 함께했고 15년간을 그와 함께하다가 그가 세상을 떠날때도 곁을 지켰다. 그리고 온세상이 그를 잊고 말았을때 다빈치를 재발견하게 해준것은 바로 그녀였다.

"모나리자"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이 다음세대로 전해지는 사이 어느덧 호기심이 더이상 죄가 되지 않는 시대, 자유로운 사고가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모나리자의 오묘한 미소, 그안에는 모든것을 알고자 했던 영원한 천재,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신비가 담겨있다.

최후의 만찬, 1495~1498년작,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면에 그려진 벽화로 레오나르도다 빈치가 밀라노에 거주하던 마지막 무렵인 149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은 그림을 그리는데 사용한 독특한 기법 때문에 이 그림은 빠른 속도로 훼손 되었는데 여러번에 걸쳐 섬세한 복원 작업을 시도했지만 작품의 원래 색깔은 살리지 못하고 전체 색상이 어둡게 되었으며 표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최후의 만찬의 프레스코 기법

전통적인 벽화는 회벽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그 위에 색을 칠해서 급하게 완성해야만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장시간에 걸쳐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를 원했는데 <최후의 만찬>역시 세밀하게 작업하려고 색을 칠해 놓은 벽이 다 마른 후 다시 덪칠을 하는 정교한방법을 사용했다.

그 방법은 템페라와 유화를 혼합한 새로운 물감이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벽화는 쉽게 변질된다는 사실을 그 당시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이미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생존해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이 이렇게 빨리 변형된 원인은 프레스코 기법의 원인도 있지만 근본 원인은 습기 때문이라고 한다.

1796년 나폴레옹 군대들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벽화가 있는 수도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습기가 많아 썩기 시작한 벽을 보수 공사하면서 원작을 많이 손상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1943년 2차세계대전 중에는 공중 폭격의 유탄에 맞아 식당 자체가 무너지기도 했는데 사려깊은 수도장이 벽화 위에 천을 걸쳐 파편을 어느 정도 막아주어 훼손을 조금은 줄일 수 있었다.

943년 폭격 당한 수도원 내의 식당 모습. 천이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수난을 당한 <최후의 만찬>은 벽에서 떼어지고 캔버스에 옮겨져 습기와 차단을 시켰는데 1977년 이후부터 보수 작업과 청소작업을 단행하면서 5백년 동안 쌓였던 먼지와 곰팡이 그리고 보수 작업을 하면서 덧칠한 오일 등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서 원작의 화려한 색과 생동감이 있는 인물들의 개성 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대대적인 작업을 통해 원래 색깔을 찾았다고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작업을 거친 <최후의만찬>은 현재는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광객들이 가지고 온 공해, 먼지 등을 유리로 된 방에서 기계로 털고 그 다음 방에서 신선한 공기를 다시 공급 받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과학적인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자료>

템페라기법 - 안료를 물과 달걀 노른자에 개서 그리는 기법으로 매우 쉽게 마른다.

그래서 화가들은 색을 칠할때마다 전에 칠한 물감 위에 덪칠을 해야 한다.

유화 - 염료를 호두나 아마 기름에 개서 사용하는데 건조 속도가 매우 느려 장시간에 걸쳐 작업을 해야 한다.

템페라에서 유화로 - 1400년대까지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템페라 기법은 달걀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즉 안료 가루를 물에 탄 다음 그것을 다시 달걀과 섞어 쓰는 방식인데 주로 달걀 노른자만을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템페라로 색칠한 면은 거의 동일한 색상으로 칠한 것 같은 효과를 냈다.

그래서 1400년대 화가들은 더 다양한 색과 단계적으로 변하는 색의 효과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달걀보다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면 더 많은 색상을 얻을수 있으며, 색의 농도 조절도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 플랑드르의 유화방식은 1400년대 중엽에 이탈리아에 전해졌다.

*작품 설명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과월절)을 기념하려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장소에서 제자들 중 한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알린 후 성체 성사를 했던 일화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주제를 나타내고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배반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배반의 소식을 듣고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도 잘 표현하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 제가 배반할 것인가요? 주님 "하고 묻고 있으며 배반자가 누가 될 것인지 모르는 제자들은 자신만은 무죄라는 표정으로 서로에게 질문하면서 웅성이고 있다.

그 동안에도 예수는 움직임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표정과 행동으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는 인상학을 연구했던 레오나르도는 사람의 성격과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과 행동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서로에게 묻는 장면들을 만들어서 동일한 사실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들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다양한 만큼 사람들의 행동도 여러 가지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무대위의 배우를 다루듯 레오나르도는 만찬장에 제자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특정적인 배치 방법은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제자들을 세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는 방법으로 배치를 했는데 세 사람과 다음 사람의 그룹을 어떤 인물의 팔이나 제스처로 다음 그룹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 여섯명의 제자를 연관시켜 감정이나 동작, 제스처 등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예수가 희생되기 전날 저녁 열두제자들이 느꼈던 기분을 다시 느낄수 있도록 했다.

*구성효과

중세시대의 최후의 만찬 장면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시작해 예수가 무덤에 묻히는 장면으로 끝나는 예수의 희생 여정을 일부분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1400년대 후반부터 최후의 만찬 장면은 작품의 독립적인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이 소재는 수도원에 있는 식당의 한 벽면을 모두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그런데 이 <최후의 만찬>은 주제가 지니는 중요성 이외에도 놀라운 구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식당의 건물 구조를 고려해 그린 것이기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이 작품을 만들때 바닥에서 4미터 높이에서 스케치를 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작업한 높이인 4미터에서 <최후의 만찬>을 바라보면 그림의 중심에 있는 예수의 머리 부분으로 원근선이 모아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휠씬 낮은 위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실제 공간과 그림 속의 공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똑같이 받는데 이와 같은 신기한 효과는 레오나르도다 빈치가 그림의 장면을 사람들이 무대를 보는 것처럼 구성했기 때문인데 그림을 경사지게 그려 식탁의 윗면을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원근선을 조정해 깊이감을 주었다.

또한 수도원의 식당 왼쪽에 있는 실제 창문에서 빛이 비추는 것처럼 처리해 그림 속 장면을 더 실감나게 표현했다.

최후의 만찬을 감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점은 식당에서 수도원장이 앉는 맨끝자리인데 그 자리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실현한 이중의 효과가 있다.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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