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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쌍벽을 이루는 다른 시대 인물이 있나요?
비공개 조회수 1,176 작성일2017.10.09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미술 뿐만 아니라 건축, 과학, 수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 있나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서요! 지식 좀 나눠주세요 부탁드립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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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

초대 황제

[Octavianus Gaius Julius caes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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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B.C. 63년 ~ 14년
재위기간B.C. 27년 ~ 14년
지역지중해 세계
왕조로마 제국

1세기 동안이나 에트루리아인에게 지배당했던 로마인들은 '왕'이라는 존재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카이사르조차도 목숨을 잃은 로마 공화정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은 가냘프고 병약한 한 청년이었다.

배경 -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

기원전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전제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에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폭정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태생 - 평민 출신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때에 카이사르는 로마 젊은이들의 영웅이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숭배하는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카이사르도 또한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연상의 경쟁자 - 안토니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으며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비어 있던 최고신기관에 레피두스를 앉히고 파트너가 되는 집정관에 같은 파인 드라베라를 임명했다.

역전()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 고심참담()하는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의 군단 - 모데나 전투

기원전 44년 10월 카이사르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예정이던 군단이 그리스에서 로마의 항구 프린디시로 귀환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추대하고 자신에게 대항하려는 구()카이사르파를 경계하고 자신의 사병()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프린디시로 향했지만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지명한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를 택함으로써 안토니우스의 휘하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파르티아 원정군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 안토니우스는 북이탈리아 속주() 총독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군대를 내놓으라고 통고했지만 카이사르 암살계획에 참가했던 데키우스는 자기의 신변을 지켜 줄 군대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산을 이용해 급하게 군대를 조직하여 데키우스의 총독직을 빼앗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로마의 원로원은 무도한 안토니우스의 전투를 제지하기 위해 전투지 모데나에 정규군을 파견했다. 착실히 군단을 편성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도 이 파견군에 참가하여 그의 군단과 로마 정규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안토니우스를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옥타비아누스 일족의 계보

카이사르의 후계자 - 이름의 위력

카이사르에 의해 후계자로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절대적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년 집정관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 공화정의 약체화를 암시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에 옥타비아누스는 염원이었던 양자 결연을 실현시킨다. 집정관이 되었고,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고뇌하는 젊은이'로 인식시켜 그러한 권력을 차지하면서도 안토니우스와 대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이탈리아로 출병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공동 전투 체제를 성립시켰는데 이 '제2회 삼두정치'는 정체()로서 시민 집회에서 공인되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등에 의한 '제1회 삼두정치'와 달리 공적인 통치 체계였고, 이는 원로원이 주도하는 로마 공화정이 실질적으로 소멸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전쟁터 - 군사적 재능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부하 장군이던 레피두스에 의한 삼두체제는 국내의 반()카이사르파를 뿌리뽑았고,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병력과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 근교에서 대치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정규군을 지휘했고 병력은 총 12만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를 무난히 격파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에게 밀리고 만다. 카이사르의 판단대로 그에게는 군사적 자질은 전혀 없었다.

패배한 카시우스에 이은 브루투스의 자살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군대 지휘는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카이사르의 복수를 한 두 사람은 이 필리피 전투 이후에 로마 세계를 분할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각각 통치했다.

결말 - 강적의 배제

기원전 38년, 시칠리아에는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로마에 이르는 바다의 제해권()을 쥔 그는 곡물의 운송을 방해하는 등 로마를 애먹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아버지를 닮아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힘겹게 레스보스 섬으로 추방했다. 이어서 삼두체제의 한 사람인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압력을 가해 온다. 전투에 자신이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의 병사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약체화시켜 전투력을 잃은 레피두스를 추방했다.

안토니우스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갔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이미 그 갈등을 해소할 생각은 없었다. 이집트의 왕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꼭두각시가 된 안토니우스는 시민들의 신뢰를 잃었고, 곧 로마의 적으로 여겨질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군사적 자질이 출중한 부하들도 생겼다. 한편 안토니우스측에서는 장군과 병사의 이반()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원전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원수제 - 제정의 개시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 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청중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이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과두제()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인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시민의 제1인자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기원전 27년 1월 원로원의 결의로 '원수제'가 출발한다. 이는 실질적인 제정을 뜻했지만 최고권력자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힘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므로 로마인들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시민의 제1인자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단의 수를 28개로 정했고, 이들이 로마 내외의 수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로마의 숙적 파르티아에 압력을 가해 제시한 조건을 전부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뛰어난 군인은 아니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중앙 유럽 정복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좌절된다. 또한 기원전 9년에 정복이 진행되던 게르마니아에서도 게르만인들의 게릴라전에 의해 3개 군단을 한꺼번에 잃고 로마의 경계선은 라인 강까지 후퇴했다. 그 이후에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으로는 수비에 전력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수도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해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다. 기와가 많던 로마를 아름다운 대리석 도시로 개조했으며 공공 건물, 수도 설비에 신경을 썼고 풍기를 단속하고 도시 내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 곡물을 운송하는 선단()을 편성하여 식료를 안전하게 공급하도록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41년 동안 과거에 로마인들이 그토록 싫어했던 '황제'로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을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후계자 - 의붓아들

아우구스투스는 병약한 편으로 소화기관이 약했으나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오래 살았다. 기원 14년 8월 19일 나폴리로 여행가는 도중에 76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 행복한 노인은 사랑하는 아내 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아내 리비아는 아우구스투스가 스물네 살 때 열렬히 사랑해 결혼한 여자였다. 당시 열아홉이었던 리비아에게는 이미 남편과 세 살 된 아들 티베리우스가 있었고 둘째아이를 임신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필사적으로 리비아의 남편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차지했고 평생 사랑했다. 그가 유언장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아내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였다.


초대 황제 - 빛나지 않는 위인

아우구스투스가 아직 청년 옥타비아누스였을 때 그가 동경해 마지않던 카이사르는 결코 잘생긴 남자는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연애면에서는 카이사르와는 정반대였다. 여성 편력이 심하던 카이사르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아내 리비아만을 깊이 사랑했다.

여인을 대하듯이 밝게 웃는 얼굴로 사태에 대처하는 카이사르와는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약해 보이게 함으로써 상대가 적의와 경계심을 갖지 않게 만들었다. 전투 지휘에도 서툴렀고 몸도 약한 편이었지만 '고뇌하는 청년'의 마음 속에는 카이사르에게 선택받았다는 자부심과 굳센 의지가 숨어 있었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로마 정치의 중심이 된 옥타비아누스는 실제로 보여지는 모습보다는 훨씬 지혜롭고 다부진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영광을 안으로 숨기고 외부에 그 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함으로써 영웅으로 빛나는 천재들이 결코 잡을 수 없었던 것을 차지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 Gaius Julius caesar] - 초대 황제 (제왕열기, 2002. 2. 28., 도서출판 들녘)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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