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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집트의 대해서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364 작성일2006.10.31

제가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데요

이집트의 대해서 알아오는 숙제가 있었거든요

 

1.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대해서 간략하게 알려주세요

2.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의 대해서 알려주세요 / 사진포함 간략하게요

3.이집트 사람들이 입는 전통의상이요 /이것두역시 사진이랑 간략하게요 남여다요 !

 

오늘저녁까지

답해주세요 ;;

그럼감사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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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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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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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푸왕 피라미드가 가장크고여

도굴꾼땜시 피라미드에는 복잡한 미로와 함정들이 많지요

하지만 도굴꾼의 지능은 이거보다 높아서

미로와 함정을 뚫고 피라미드안에잇는 보물을 거의나 도굴해갓습니다.

 

200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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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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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삼각형 생각하시면 되요

미이라를 보관하는 곳이죠

 

200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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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New Zealand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

국기
국가
지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1,600km 떨어져 있으며 수도는 웰링턴이다. 남위 33~53°사이(남북 길이 1,600km), 서경 162~173°사이(동서 길이 450km)에 있다. 폭 32km의 쿡 해협을 끼고 있는 2개의 주요 섬인 노스·사우스 섬과 기타 많은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특징 있는 발전을 이룩했다. 면적 270,534㎢, 인구 4,001,000(2003 추계)

자연환경

노스 섬과 사우스 섬은 모두 남부의 산들과 북부의 구릉지대로 양분된다. 노스 섬의 약 18%, 사우스 섬의 70%가 산악지대이다.

사우스 섬의 서부에 있는 서던알프스 산맥은 길이 480km에 이르는 긴 습곡산맥으로,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쿡 산(3,764m) 외에 높이 3,000m 이상의 봉우리 22개를 거느리고 있다. 서던알프스 산맥의 비그늘(rain-shadow) 효과로 생긴 목축지는 메리노 양모를 비롯한 양질의 뉴질랜드 양모를 많이 생산하는 대단위 지역으로 발전했다. 반면 섬 동부의 구릉들 가운데 높이가 1,800m를 넘는 것은 찾기 어렵고 캔터베리 평원 쪽으로 경사져 있다. 사우스 섬 북부의 구릉지대도 기복이 덜하다.

노스 섬은 사우스 섬보다 훨씬 완만하다. 섬 중부는 화산지대와 주변의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목양과 낙농이 행해진다. 일부 화산지대에 산림이 우거져 있으며, 노스오클랜드 반도에는 아열대 산림이 있다.

뉴질랜드의 강은 대부분 길이가 짧고 물살이 빨라 수력발전에 중요하게 쓰이는데, 가장 긴 강은 노스 섬에 있는 425km의 와이카토 강이다. 토양은 대부분 점토질로서 일반적으로 농업에 적합하지 않지만, 계곡의 저지대 곳곳에 비옥한 충적토 지대가 있다. 한편 지진과 화산폭발이 빈번하다.

연강우량은 635~1,525㎜로 풍부하며 해발 610m 이상 되는 곳에서는 눈이 많이 내린다. 해수면의 평균기온은 북쪽 끝이 15℃, 남쪽 끝이 9℃로 변화폭이 크다. 연평균기온은 10℃ 정도이며 연중 고르다.

한때 국토의 약 2/3를 덮었던 삼림은 재식림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현재 국토의 1/3 정도로 줄어들었다. 뉴질랜드 원산의 육지동물은 도마뱀·개구리·박쥐뿐인데, 유럽인들이 붉은 사슴과 오스트레일리아산 주머니쥐, 토끼 등의 많은 가축과 동물을 들여왔다. 날지 못하는 키위와 흰눈썹뜸부기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조류가 있으며, 참치·물퉁돔·대구·가자미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연안에 서식한다.

석탄·사철(砂鐵)·금이 상당량 채굴되고 있으나 뉴질랜드 경제에서 광물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고, 수력·지열(地熱) 등의 재생 에너지 자원이 뉴질랜드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국민

국민의 약 82%가 유럽계(그중 대부분은 영국계임)이며 폴리네시아 토착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약 9%, 그리고 태평양 도서군 원주민들과 화교, 인디언들이 나머지 소수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다민족 사회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인종 갈등은 피할 수 없으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비해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다수의 유럽계 국민과 마찬가지로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마우리족은 자신들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 뉴질랜드의 유럽형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공용어는 영어와 마오리어이지만 주로 영어가 사용된다. 사실상 모든 마오리족이 영어를 사용하며, 그중 약 1/3은 마오리어도 사용한다. 많은 학교에서 마오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영어와 마오리어 외의 주요 언어는 일부 국민이 사용하는 사모아어이다.

뉴질랜드는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교 국가이다. 성공회,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 감리교 신자가 인구의 약 3/5에 이르고,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 동방정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마우리족에게 전래된 그리스도교인 라타나교회와 링카투교회의 신자도 상당수에 이르기 때문이다. 신자 수는 성공회, 장로교, 로마 가톨릭교 순으로 많다. 그러나 인구의 약 1/4은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낮고, 출생률과 사망률은 알맞은 수준이다. 국민 보건 수준은 매우 높고, 평균수명도 남자 74세, 여자 80세로 상대적으로 높다.

인구의 85%는 도시에 거주하며, 국내 이주의 대부분은 도시간 이주이다. 사우스 섬에서 가장 큰 도시는 크라이스트처치이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노스 섬에는 마누카우·오클랜드·웰링턴 등의 대도시가 있다.

경제

뉴질랜드의 경제는 농업·중소기업·서비스업에 기반한 선진적인 시장경제이다. 경제규모는 작고 발전 도상에 있다. 연료·자본재·소비재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더딘 편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선진국 수준이지만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에 비해 생활수준은 낮은 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뉴질랜드의 생활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과거 뉴질랜드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영국의 낮은 경제성장률과 버터·육류 등 뉴질랜드산 농산물에 대한 주요 산업국가들의 높은 관세장벽 때문에 경제성장률이 선진국들 가운데 최하위 수준에 머물렀다. 20세기 후반 뉴질랜드는 이들 국가의 보호주의 장벽을 피하기 위해 정부의 대대적인 개입과 시장경제의 자율기능을 통해 농업의 다각화와 제조업 기반의 확충에 진력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9%를 차지하며, 노동인구의 10% 가량이 농업에 종사한다. 영농은 고도로 과학적이며, 농산물은 뉴질랜드의 주요 수출품이다. 버터·치즈·육류·양모·사과·배 그리고 기타 일부 농산물의 판매는 조합별로 관리된다. 목초지가 전국토의 1/2을 차지하지만 경작지는 2% 정도에 불과하다.

목양업이 뉴질랜드 농업을 주도하며 생산성이 매우 높다. 동물을 과학적으로 사육·관리하고 있으며, 인산비료를 사용해 목초지가 상당히 비옥하다. 20세기 말 현재 양 6,000만 마리, 소 800만 마리가 있으며, 육류·양모·버터·치즈는 대개 수출된다.

밀 생산량은 국내 수요를 충당하는 정도이며 보리·옥수수·콩·감자는 주로 국내 소비용으로, 다래(키위)·사과·배는 수출용으로 재배된다. 임업은 주요 외화 수입원으로서, 특히 제재용 침엽수를 비롯해 목재, 목재 펄프를 수출한다.

어업은 수출 증가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1978년 뉴질랜드는 200해리(370km) 경제수역을 선포했다.

광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정부는 뉴질랜드석유회사(Petrocorp)를 통해 석유와 천연가스 탐사를 장려하고 있다. 뉴질랜드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가운데 상당량은 발전소에서 사용한다. 원유는 타라나키 반도에 있는 몇 군데의 유전에서 생산된다. 석탄은 매년 200만t 이상 채굴되는데, 그중 소량은 수출된다.

제조업은 GDP의 거의 1/5을 차지하며, 노동인구 비율도 그 수준이다. 공장은 중소 규모인데, 주로 내수용 제품을 생산한다. 생산비는 다른 선진 산업국들에 비해 훨씬 높다. 전력은 주로 수력발전에 의해 생산되나 대규모 지열발전소와 화력발전소도 몇 개 있다.

뉴질랜드에서 금융·보험에서 폭넓은 사회복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해 온 역사는 길다. 198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행정부는 이러한 국가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그후부터는 사회보장의 기본 요소마저 무너뜨리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개입 정책에서 선회했다. 농산품·공산품에 대한 수출보조금과 세금 혜택이 없어지고 우체국 등 국영기업은 보다 영리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정부 보조금도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일부 직종에 대한 진입 제한과 의무적 노동조합 가입 등 노동시장에 대한 제반 규제의 철폐라는 난제의 해결을 도모했다.

노동자들은 강력한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화되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에서는 정부 주도의 강제조정 제도가 발전했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 역대 정부는 임금·물가 동결정책과 노사간 자율교섭 정책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전문직종을 위시한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시장의 강력한 연계는 일괄적인 노동정책의 수립을 가로막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뉴질랜드의 국세 과세율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특별히 높지는 않지만, 직접 과세(개인소득세) 의존율이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그래서 1986년의 부가가치세 도입은 소득세를 낮추는 한편 저소득 가정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늘이는 재정 혁명에 해당한다. 20세기 말 현재 재정지출이 재정수입을 약간 초과하고 있으며, 총재정지출액의 약 1/3은 사회복지 사업에 쓰인다.

정치·사회

뉴질랜드는 영국연방 내의 민주 독립국가로서 입헌군주국이다.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원제 의회가 입법권을 행사하며, 의원은 3년 임기로 선출된다. 지지기반이 다른 국민당·노동당의 2대 정당이 있는데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고, 다수당의 총재가 내각수반인 총리가 된다. 행정권은 내각에 속한다. 대부분의 법안은 내각의 결정에 입각해 의회에서 발의되며, 의회가 다수결로 통과시켜야 법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각은 광범위한 법규·법령 제정권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 의회는 제한적인 심사만 한다. 내각 각료가 의원직을 갖고 있고 당 규율이 거의 변함없이 강력한 까닭에 의회와 내각은 효율적으로 융화한다.

국가원수는 형식상으로는 영국 국왕이며, 뉴질랜드 정부의 추천으로 영국 국왕에 의해 지명되는 5년 임기의 총독이 국왕을 대리한다. 총독의 권한은 제한적이지만, 예컨대 일정한 상황 아래에서 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는 등 헌법을 보호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뉴질랜드의 정치구조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헌법 규정은 매우 복잡하다. 뉴질랜드의 헌법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성문법과 관습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둘이 충돌할 경우 관습법이 우선시된다. 1986년의 개정 헌법은 1852년에 제정된 헌법 규정을 통합·확대한 것으로, 헌법 규정의 단순화를 위한 조치였다.

18세 이상의 국민은 참정권을 갖고 있다. 선거구는 5년마다 실시되는 인구조사에 따라 재조정되는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선거구도 조금씩 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의 선거구 수는 마우리족에게 배정된 5개 선거구를 포함해 총 95개였으며, 1999년 5월 현재 총 99개에 이른다. 정당원만이 총선에 입후보할 수 있는데 1선거구에서 다수표를 얻은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2대 정당인 국민당·노동당 외에 군소정당들이 있으나 선거제도가 2대 정당에게 크게 유리해 군소정당 후보가 당선되기는 어렵다. 또한 총선 총득표수에서는 2위에 머문 정당이 원내에서는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도 있다.

뉴질랜드는 1947년 이전에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몇몇 관습법을 차용하고 있다. 대체로 영국법의 판례를 따르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보다 독립적인 입장으로 돌아서서 공법(公法)·행정법 분야에서 상당한 헌법적·정치적 역할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부 법률가들은 일부 관습법이 의회의 의지보다 상위에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법률은 법무부가 소속 법원을 통해 운용된다. 민사·형사 소송은 지방법원·고등법원·상소법원을 거쳐 진행되며, 영국 추밀원이 최종 상소법원 역할을 한다. 법 집행은 경찰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뉴질랜드 경찰은 내각 차원의 한 부서로서 법 집행과 관련해 행정 당국으로부터 매우 독립적이다.

뉴질랜드의 사회복지 제도는 전세계적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미 1898년에 정부 예산에서 지급하는 비(非)갹출 노인연금을 채택한 데 이어 1920년대에는 미망인·광부 연금과 어린이 수당을 채택했으며, 1938년에는 무상 치료와 무상 의약조제, 개인병원 진료에 대한 넉넉한 국가 보조금 지급 등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연금·복지 제도를 채택했다. 그후 뉴질랜드의 사회복지 제도는 일부 쇠퇴한 면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지금도 '전국민 퇴직연금제'라는 포괄적인 제도가 있어, 60세가 넘어 퇴직할 경우 자신의 임금에서 세금을 공제 금액의 80%에 이르는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1984년에는 다른 소득원에서 벌어들인 금액이 일정한 금액을 초과할 경우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많은 사람들이 연금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결손가정·장애인·환자 수당과 16세까지 지급되는 어린이 수당, 저소득 가정에 지급되는 생활보조금 등 많은 연금·복지수당이 있다.

뉴질랜드인들은 주택 마련을 갈망한다. 대도시의 경우 용지난 때문에 그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주택을 얻기는 어렵더라도 아파트 위주의 주거공간이 대세를 이룬 적은 없다. 저소득층의 주택 임대 보조금은 물론 주택 구입·개조 자금을 국가기관이 일정 한도로 지원한다.

6~15세의 어린이들에게 무상 의무교육이 행해지는데, 사실상 거의 모든 어린이가 국영 유치원에서 취학 전 교육을 받은 다음 5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교육 관장 기관은 교육부이며, 선출직 위원들로 구성되는 교육위원회가 초등·중등 교육을 통제한다. 고등교육의 기반은 기술대학, 지역대학(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대학 과정을 가르치되 학위는 수여하지 않음), 사범대학이며, 그밖에 몇몇 종합대학과 농업대학이 있다. 식민지 초기부터 교육사업에 역점을 둔 까닭에 사실상 문맹자는 없다.

뉴질랜드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의 보도 수준은 높고, 주로 외국 통신사들로부터 뉴스를 공급받는다. 일간지 가운데 전국지는 없으나 대도시에서 발행되는 일부 일간지들은 외국에도 보급되고 있으며, 많은 지역에서 지방지가 발행되고 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뉴질랜드방송회사와 뉴질랜드라디오회사의 감독을 받는다. 다양한 프로가 제작·방영되며, 대부분은 국내에서 제작된다.

문화

뉴질랜드의 문화 환경은 복합적이다. 매우 유럽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민족, 특히 마오리족의 문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럽적 생활에 동화된 반면 통가족·사모아족을 비롯한 대다수의 태평양 도서군 종족은 여전히 전통적 관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유럽적 환경으로의 동화 압력과 전통 문화의 보존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 왔다. 마오리족의 정치적 구조는 19세기에 대부분의 토지를 상실함으로써 약화되었고 많은 구성원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전통 종교마저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의 문학·예술은 유럽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장식도안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구전에 의존해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특히 20세기 후반에 마오리족의 예술적·사회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졌다. 그 결과 목각과 베짜기, 그리고 그들의 회합 장소인 '와레 와카이로'의 건축에서 르네상스기를 맞았고, 마오리족의 춤과 노래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엄밀히 고증을 받은 옛 개회사와 함께 전통 의상 차림의 전통 회합과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또한 마오리족의 예술작품은 많은 화랑·박물관에 전시되어 일반 대중에게 낯익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시와 산문은 물론 새로운 노래와 주문(呪文)들도 마오리어로 기록되고 있다.

뉴질랜드의 유럽적 문화는 20세기 초부터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뉴질랜드 역사상 최초의 토착 작가인 캐서린 맨스필드와 R. A. K. 메이슨이 나타난 것은 1920년대의 일이었다. 뉴질랜드의 문학·예술은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듯이 뉴질랜드의 독특한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개인의 성격 분석이나 자기 성찰에 관한 작품을 창작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인으로는 J. K. 백스터와 K. 스미시먼 등이, 소설가로는 재닛 프레임, 케리 흄 등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뉴질랜드는 1940년대부터 예술 지원 정책을 펴 왔다. 20세기 후반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예술위원회'가 연극·음악·현대무용·발레·오페라 발전을 위해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뉴질랜드 도서관 기금'은 출판사·작가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또한 도서관 대여 도서에 대한 작가의 인세를 벌충해 주기 위한 기금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도입했다. 정부는 뉴질랜드방송회사를 통해 국립교향악단과 주간 문화지 〈뉴질랜드 리스너즈 New Zealand Listeners〉를 지원하고, 또한 점점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화 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국민 대부분이 여가시간에 스포츠를 즐기는데 특히 럭비는 가장 많은 저변 인구를 갖고 있으며, 경마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 기후와 다양한 지형의 특성상 연중 많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역사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000년경이었으며, 그보다 2~3세기 전의 일 가능성이 크다. 폴리네시아 시대 말기인 18세기에는 약 10~20만 명의 마오리족들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에서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 아벨 타스만이 이끄는 탐험대가 1642년 12월 웨스틀랜드 해안을 발견하고 사우스 섬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마오리족과 충돌이 일어났다. 1769~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 주위를 항해한 후 지도를 만들었다. 쿡 선장도 처음에는 마오리족과 충돌이 있었으나 다시 와서 접촉할 때는 보다 협조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유럽인의 초기 뉴질랜드 정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고래잡이와 그밖에 다른 활동들의 부산물이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회사들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의 해안 주위에 고래잡이 기지로 작은 부락들을 건설한 것이다. 1839~41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속해 있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했으며 그들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마오리족과의 간헐적인 전투는 1847년 식민주의자들이 마오리족을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1852년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식민지는 6개 주로 나뉘고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마오리족이 중요한 땅을 팔지 않으려 하자 정착민들과 마오리족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0년 백인들이 강제로 매각한 땅에서 마오리족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전쟁이 일어나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국 군대와 민병대 그리고 정부편에 선 마오리족이 연합하여 토지매각에 반대하던 부족들을 패배시켰다.

19세기 중반 금의 발견은 이 식민지에 번영을 가져왔고 그리고 더 많은 유럽인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노스 섬의 경제성장은 마오리 전쟁으로 지장을 받았다. 1880년대 초 냉동선 개발로 농부들이 영국으로 버터·치즈·육류를 출하할 수 있게 되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1891~1912년 집권한 자유당은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고(1898), 노동조합 결성을 장려했으며(1892~96) 성공적인 토지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기간의 대부분을 리처드 존 세든이 총리로 활약했다. 1912년 자유당은 개혁당에 밀려났으며, 개혁당의 당수 윌리엄 퍼거슨 매시는 1925년까지 총리로 집권했다. 1920년대 개혁당 정부는 생산자와 국가가 권한을 함께 가지고 있는 수출판매대리제도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뉴질랜드의 유제품 및 다른 제품들에 대한 판매 협조 체제가 확립되었다. 뉴질랜드는 제1·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양모·식량을 제공하여 영국을 지원했다. 뉴질랜드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수출무역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막대한 인명손실도 가져왔다. 뉴질랜드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유럽의 전쟁터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1년 이후 일본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면서 뉴질랜드는 태평양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1907년 뉴질랜드는 대영제국 내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에 따라 자치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었으나 자치국으로서의 정식 인정은 1947년에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 노동당이 몇 차례 집권했을 뿐 주로 국민당이 집권했다 . 뉴질랜드는 1970~80년대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에너지 비용의 상승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은 인플레이션의 급등과 실업의 증가로 나타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강력한 개입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1980년대 초 임금·가격 동결 및 이자율 제한 등의 조치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가져왔다.

그 영향으로 1984년 선거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정책을 급선회하여 기업활동 규제 철폐, 농업보조금 폐지, 소득세 삭감, 임금·가격·이자율 등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의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핵무기 확산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노동당은 이러한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1987년 재집권하게 되었지만, 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총리와 장관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90년 총선에서 짐 볼저가 이끄는 국민당은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과 의무적 노동조합 가입 등의 노동 관행의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하는 한편 핵무기 확산 문제에 대해서는 노동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반대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은 1996년 총선에서도 재집권에 성공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영국의 역할이 줄고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됨에 따라 독자적 입장이 강화되었고,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蔡奎元 옮김

한국과의 관계

뉴질랜드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한 후 1950년 6·25전쟁 때는 육군·해군 5,350명을 파병해서 119명의 사상자를 냈다. 1962년 3월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1971년 6월에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과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지금까지 양국간에 체결된 주요 협정으로는 무역협정(1967)·무역경제기술협력협정(1976)·어업협정(1978)·국제운수소득면세협정(1978)·이중과세방지협정(1981)·항공협정(1993) 등이 있다. 경제·통상 관계는 1998년 현재 대한수입액은 2억 900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5억 500만 달러에 이른다. 한국은 섬유류·철강제품·의류·자동차·전자제품 등을 주로 수출하고, 쇠고기·양모·펄프·원목 등 제1차 산품을 주로 수입한다. 뉴질랜드에는 1997년 현재 교민 9,841명과 체류자 2,147명이 있다.


 

200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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