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조폭관련 질문!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1,261 작성일2013.11.08

 에... 제가 요즘 조폭쪽으로 관심이 막 쏠려서 궁금증이 생겨서..하핳;

 

1.조폭들의 서열을 알려주세요!

2.창원에는 조폭이 있나요?(있다면 어느쪽에 있는지좀..ㅎㅎ;;;)

3.조폭들은 듣기로 마약밀매 등을 한다고 들어는데 진짜인가요??

 

하하... 답변..부탁드립니다!!하핳;;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서라벌 대명리철학원
달신
정신건강의학과, 불교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양승식 기자yangsshik@chosun.com

 

 

입력 : 2012.02.02 11:40 

수정 : 2012.02.02 17:06

 

 

2009년 ‘양은이파’의 창시자
조양은(62)이 일선 은퇴를 선언했다.
‘원로’를 자처한 조양은은 후계자로 김모(50)씨를 지목했고
김씨는 ‘
양은이파 재건’의 기치를 휘날리며 강남 일대의 ‘풀살롱’을 운영했다.
2년 만인 2012년 1월,
검찰은 폭행·협박·금품 갈취 등을 일삼은 혐의로 김씨 일당을 검거했다.
그들이 1년여동안 벌어들인 돈은 331억. 한 달 평균 20억여원이 넘는다.

사람들은 “
양은이파가 도대체 언제 시절의 이야기이냐”며 놀라워했지만,
이는 실상을 모르는 이들의 반응이다.
조직폭력배는 사라진 게 아니다.
떼 지어 몰려다니고,
각목이나 흉기를 들어야만 조폭이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은 사채업,
풀살롱,
주식 투자 등으로 음성화·합법화 돼 우리 곁에 있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조폭 난동 사건처럼 무리지어 난투극을 벌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문가들은 “
집단 난투극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조폭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익혔다.
그들이 터득한 요령은 ‘조용히’
음지를 지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인포그래픽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낭만·정치 조폭의 시대 우리나라에 현대적 의미의 ‘

조폭’을 처음 결성한 사람은 김두한 전(前) 국회의원이었다.

1930년대 후반 서울 종로 우미관 일대를 무대로 삼아 ‘

주먹계’를 장악했으며 해방 직전까지 일본 야쿠자에 대항하는 ‘항일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 손과 두 발을 자유자재로 썼다는 전설적 싸움꾼이었던 그는 의리를 중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라이벌은 명동 일대의 일본인 상인을 보호한

한국계 야쿠자 ‘하야시’.

하지만 둘은 영화에서처럼 ‘죽일 듯’ 싸우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물러간 하야시의 자리에는 평양 출신의 이화룡이 자리 잡았다.

동대문에는 자유당의 ‘정치깡패’로 잘 알려진 이정재가 터를 잡았다.

조폭계는 김두환,

이화룡,

이정재의 3각 구도로 재편된 것이다.

이들은 해방과 6·25 등으로 혼란한 정국에 뛰어들어 스

스로 정치인이 되기도 하고(김두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이정재)을 하기도 했다.

1960년 4월18일,

정치화된 조폭들은 이승만 정권에 항의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각목 등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

정치깡패’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고,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에게는 ‘본보기’ 척결대상이 됐다.

 
 

◆칼을 든 조폭,

유혈낭자(流血狼藉)의 시대가 시작됐다 ‘

정치깡패 소탕’으로 서울은 한동안 조용했다.

하지만 곧 ‘

명동파’ 이화룡의 중간 두목급으로 활약했던

신상현이 중심이 된 신상사파가 서울 명동·충무로·을지로 일대를 장악했다.

주로 호남 지역을 연고지로 둔 ‘상경(上京)’ 조폭들도 등장했다.

이른바 범(凡)호남파가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울에 뿌리를 둔 신상사파에 열세를 면치 못했다.

수년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신상사파의 독재가 끝난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뒤다.

1975년 1월2일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신상사파 거두(巨頭)들의 신년회장.

당대의 ‘주먹’이 모두 모인 ‘

위풍당당’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범호남파의 행동대장 조양은이 회칼,

쇠파이프를 든 장정 10여명과 함께 들이닥쳤고,

신년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검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조폭계에 ‘칼’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보고 있다.

신상사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범호남파는 비록 검찰의 표적이 됐지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렇게 ‘

호남 3대 패밀리’의 시대가 왔다.

 

2009년 ‘양은이파’의 창시자 조양은(62)이 일선 은퇴를 선언했다.

‘원로’를 자처한 조양은은 후계자로 김모(50)씨를 지목했고

김씨는 ‘

양은이파 재건’의 기치를 휘날리며 강남 일대의 ‘풀살롱’을 운영했다.

2년 만인 2012년 1월,

검찰은 폭행·협박·금품 갈취 등을 일삼은 혐의로 김씨 일당을 검거했다.

그들이 1년여동안 벌어들인 돈은 331억. 한 달 평균 20억여원이 넘는다.

사람들은 “양은이파가 도대체 언제 시절의 이야기이냐”며 놀라워했지만,

이는 실상을 모르는 이들의 반응이다.

조직폭력배는 사라진 게 아니다.

떼 지어 몰려다니고,

각목이나 흉기를 들어야만 조폭이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은 사채업,

풀살롱,

주식 투자 등으로 음성화·합법화 돼 우리 곁에 있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 조폭 난동 사건처럼 무리지어

난투극을 벌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문가들은 “

집단 난투극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못박았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조폭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익혔다.

그들이 터득한 요령은 ‘

조용히’ 음지를 지향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조폭 르네상스…호남 3대 패밀리가 떴다
1967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국을 주름잡은 ‘

호남 3대 패밀리’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동재파’를 일컫는 말이다.

세 집단은 계획개발이 시작된 서울 강남 일대를 근거지로 유혈 폭력을 일삼았다.

1980년대 서울 밤거리를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때를 ‘

조폭 르네상스’ 시기라 부르기도 한다.

조양은은 광주 OB파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했다가

1970년대 초반 상경해 범호남파의 두목 오종철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

사보이호텔’ 사건을 주도했으며,

1976년 김태촌(63)에 의해 오종철이 불구가 되자 서로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1978년 ‘양은이파’를 결성한 뒤 서울 강남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한 때 조직원 수가 1만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0년 신군부 출현 이후 범죄단체 조직 등의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막후에서 조직의 운영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0년 12월 부산지역 양대 폭력조직인 칠성파와 2차례 집단 난투극을 벌인 재건20세기파 두목과 행동대원들이 부상한 조직원이 입원한 부산시내 한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는 모습.

보안요원을 폭행(사진 왼쪽)하는가 하면 칠성파의 보복폭행에 대비해 응급실 입구를 차지해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

 /연합뉴스

범호남파계(系) 박종석의 행동대장이었던

김태촌은 1976년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조양은의 보스 오종철을 습격해 불구로 만들며

전국 3대 조폭의 한 축인 ‘

서방파’ 결성의 초석을 다졌다.

같은 해 신민당 총재직 선출 전당대회에 개입,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 사건을 주도하며 ‘

정치깡패’의 부활을 알리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에 의해 투옥됐다가

1986년 출옥한 뒤 최고의 조폭으로 명성을 날렸다.

1980년 조양은과 김태촌이 동시에 감옥에 갇히자

이동재를 중심으로 한 OB동재파도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동재는 조양은·김태촌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유력 조폭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 말 서초구의 한 온천장에서 양은이파 조직원들의 습격을 받은 뒤

미국 이민을 떠나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후반 서울 강남 일대는 ‘

호남 3대 패밀리’를 필두로 한 조폭의 유혈 난투극장이었다.

급기야 1986년 8월. ‘

서진 룸살롱’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강남 유흥업소의 이권을 두고 ‘진석이파’와 ‘맘보파’가 부딪쳤고,

맘보파 조직원 4명이 회칼에 난자당해 숨졌다.

이 사건으로 전 국민적인 반(反) 조폭 정서가 대두했고,

계속되는 조폭 관련 사건에 급기야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지난해 인천 길병원 장례식장에서 폭력배가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

이들은 출동한 형사들 앞에서 칼부림까지 했다. /SBS 캡처
◆범죄와의 전쟁 이후…
그들은 더 영악해졌다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3년 후,
전국의 두목급 조폭 200여명이 체포됐다.
1998년까지 적발된 조직폭력원 수는1만1000여명.
‘호남 3대 패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소 조폭 몇개만 ‘
조용히’ 활동했으며 한동안 거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정부도 이들을 영원히 잡아 둘 수 없었다.

2000년을 전후해 하나,
둘 출소하기 시작한 조폭들은 새로운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국제조직범죄연구소의 안흥진 대표는 “
대대적 단속이 있은 뒤,
조폭들이 ‘지나치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했다”고 했다.
때마침 ‘벤처’ 붐이 일었고,
일부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했다.
사채업을 운영하며 정·관계 로비스트가 되기도 했다.
조직은 더욱 합법화·체계화 됐다.

기술의 발달도 무리지어 다니는 조폭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줬다.
안 대표는 “
‘예전에는 1시간 만에 100명을 모을 수 있다’거나 ‘
조직원 수가 수백명이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조폭들의 자랑거리였으나 이제는 달라졌다”고 했다.
휴대전화로 문자 한 번만 돌리면 수백명의 조폭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비회사’
간판을 내걸고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조폭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경비회사 직원처럼 보이며,
민간인 앞에서는 웬만해서는 싸우지 않는다.
“튀면 죽는다.”
과거로부터 생존법을 배운 것이다.
안 대표에 따르면 이들이 명시적으로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는 장례식이나 결혼식 때다.
‘세(勢)’를 과시하고,
새로운 ‘사업’ 정보를 얻으며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유혈참극의 시대는 끝났지만,
조폭들은 새로운 사업을 하며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는 말이다.
 
  키워드 |
조폭의 계보,
양은이파,
강남 풀살롱,
범죄와의 전쟁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짧게 깎은 머리와 검은색 양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젊은 청년들.
유흥가를 무대로 칼을 휘두르고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조직폭력배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조직폭력배의 이같은 모습을 예전처럼 볼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건 아니다.
철저히 음지(陰地)에서 조용히 일한다.
수십,
수백명의 집단 난투극은 더 이상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욱 치열한 암투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조폭도 세대교체

 

  • 김재곤 기자

입력 : 2013.10.04 03:03 

수정 : 2013.10.04 10:34

 

 

[양은이파·범서방파 위축되고, 충북 파라다이스파 급부상]

 

 

경찰 블랙리스트에 가장 많아 전국 조폭조직216개, 5425명…

경기 最多,

서울·

경남·

전북順

 

 
 
 
 
 
 
 
 
 
 
 
 
 
 
 
 
 
 
 
 
 
 
 
 
 
 
 
 
 
 
 
 
 
 
조직폭력배 세계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과거 대표적 조폭으로 꼽혔던
양은이파·범서방파 등은 위축되고
충북 파라다이스파 등이 실세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누리당 강기윤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경찰이 관리하는 폭력조직은 전국적으로 216개,
관리 대상 조직원 수는 542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221개 조직, 5413명이 관리 대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5년 새 규모 면에서 별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관리 대상은 과거 조폭으로 규정돼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공식적인 조폭들이다.

지역별로는 경기도에 31개 파, 893명이 관리 대상에 올라 있어 가장 많았고,
이어 서울(22개 파·479명),
경남(18개 파·411명),
전북(16개 파·408명) 등 순이었다.
경찰의 관리 대상에 가장 많은 조직원이 올라 있는 조직은 충북을 거점으로 하는 '파라다이스파'였다.
파라다이스파는 1980년대 청주 일대를 주름잡던 '
야망파'가 내부 분열로 갈라지면서 나온 분파(分派)다.
전과 20범인 행동대장이
2011년 충북의 한 전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뒤
학생회비 등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 7월 경찰에 붙잡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총 76명이 경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지난달 두목이 다른 조폭 조직원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대구 향촌동파(75명)가 그 뒤를 이었고,
영화 '친구'의 모델로 알려진
부산 최대 폭력조직 칠성파(71명),
인천 부평신촌파(65명),
광주 국제PJ파(65명) 등도 요주의 관리 대상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
과거 조폭들이 유흥업소 등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활동했다면
최근에는 이권(利權)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부동산이 활황이면 분양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오락실이 장사가 되면 오락실로 몰려가는 식이다.
또 조직 전체가 한 사업에 매달리기보다는 조직원들끼리도 상황에 따라 각자 움직이는,
일종의 '유닛' 활동을 하는 추세인 것으로 분석됐다.

 

 

 

신상사파 신상현 "호텔기습 조양은 나중에 무릎꿇어…

김태촌 가엾은 영혼" 첫 인터뷰

 

  • 조선닷컴 
    • 입력 : 2013.03.18 10:52

      수정 : 2013.03.18 10:53

       

       

      195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40년간 명동을 중심으로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명동 신상사파의 대부 신상현(81)씨가 생애 최초로 언론 인터뷰를 했다.

      육군 상사출신으로 주먹계를 은퇴한 뒤 외제차 사업을 하다 현재 그만둔 그는
      월간중앙 4월호와 인터뷰에서 “
      지금 주먹세계는 돈과 폭력만 있을 뿐 낭만과 가치가 사라졌다.
      청소년들은 그 세계를 절대 동경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중앙일보가 18일 보도했다.

      ‘명동파’ 이화룡의 중간 두목급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진
      신씨는 신상사파를 결성해 1960년대 서울 명동·충무로·을지로 일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1975년 이른바 ‘명동사보이호텔 사건’으로 몰락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1975년 1월2일 호남 출신인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씨가 회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조직원들과 함께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열렸던
      신상사파의 신년회장을 습격했고,
      이 사건으로 신상사파는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조폭계에서 ‘
      낭만파 주먹시대’가 끝나고 ‘칼’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조폭계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OB동재파’ 등 이른바 ‘호남 3대 패밀리’시대가 열렸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신씨는 “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을 겪으며 신상사파가 몰락했다는 설이 있다”는 질문에 “

      그 사건 이후 호남 주먹이 커진 것이 사실이지만

      명동파는 90년대 초반까지 조금도 세가 위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명동사보이호텔 사건’에 대해 “

      세계 챔피언 김기수씨의 매니저를 했던 서모씨가 우리 사람이었는데

      그를 호남 주먹들이 납치해 구출해온 적이 있다”며 “

      이 사건에 대해 호남 주먹들이 사과하러 온다기에 그날 사보이 호텔에서 기다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나는 호텔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행동대장 조양은이 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

      그러나 그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배후였던 염천시장 주먹 조창조는 우리의 추적을 피해 3년이나 도망다니다

      내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조양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고 했다.

      신씨는 최근 사망한 김태촌씨에 대해서는 “

      김태촌은 35년 넘게 감옥 생활을 했다.

      선악을 떠나 가엾은 영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

      내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가 오랜 기간 보스로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신세 진 정치·경제·연예계 인물이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칠었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사내다운 면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신씨는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주먹계의 대부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

      자질구레한 이권을 밝히지 않고,

      잔인한 폭력을 무분별하게 휘두르지 않았다”며 “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됐지만

      전국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지금도 내게 자문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일대일 싸움에선 진 적이 없었다는데’라고 묻자 “

      가장 중요한 건 ‘선빵’(선제공격)이다.

      체구가 아무리 커도 주먹으로 턱을 한 번 정확하게 맞으면 단번에 쓰러진다”며 “

      기술도 중요하지만 속도와 담력이 승패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50년대 서울의 주먹계에 대해 “

      당시 서울의 주먹들은 3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로의 김두한,

      명동의 이화룡과 이정팔,

      동대문의 이정재가 그들”이라며 “

      이화룡씨는 선배로 존경했지만 알려진 것처럼 그의 행동대장 역을 맡은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50년대를 ’낭만의 주먹시대‘로 불렀던 이유에 대해 “

      당시엔 피를 부르는 싸움이 드물었다.

      여러 명이 한 명에게 몰매를 가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위 ’다구리(몰매)‘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

      당시 주먹들은 태권도·씨름 등 전통 무술이나 복싱·레슬링 등 격투기를 익혀 몸을 단련했다”고 했다.

      이어 “

      미리 사시미 칼 같은 흉기를 준비하는 일은 수치로 생각했다.

      싸움은 주로 일대일 ’맞짱‘으로 이뤄졌다.

      싸우다 상대방이 다치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갔다”며 “

      다친 사람을 길거리에 방치하고 자리를 뜨는 일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일로 치부됐다”고 했다.

     

    [단독]

    요즘 신참 조폭들,

    대부분 고등학교 '일진' 출신

     

    • 곽래건 기자
    • 입력 : 2013.01.17 03:02

      수정 : 2013.01.17 14:25

       

      [20년간 서울 강북구에 기생한 수유리파 판결문 봤더니]

      서른 살 아래는 합숙생활,

      바이크·래프팅 단합대회…

      맞담배는 1년 터울끼리만

       

      <STYLE>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STYLE>
      "맞담배는 1년 선후배끼리만,
      형님을 부모로 동생을 자식으로…."

      조직폭력단 '수유리파' 행동 강령 중 일부다.
      수유리파는 서울 강북구 일대에서
      1980년대 후반~2010년 초반 활동한 조직폭력단으로,
      서울경찰청에서 추적하는 22개 폭력 조직 중 하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김재환)는 수유리파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며
      불법게임장·환전소 등을 운영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모(44)씨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
      범죄단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성이 크며 선량한 다수 시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며 "
      개인적인 범죄 행위에 비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번 판결문에는
      1980년대 이후 폭력 조직 수유리파의 각종 악행과 조직 운영방식의 변천사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다음은 판결문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STYLE>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STYLE>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wd = 450; var ht = 296; var rate = 0; if(wd>540){ rate = (540/wd); ht = ht*rate wd= 540; } </SCRIPT> <STYLE> /*기사 본문 유형별 포토 팝업 탭 div*/ a.pop_btn_mov { width:90px; height:90px; display:block; position:absolute; top:50%; left:50%; margin-top:-45px; margin-left:-45px; background: url(http://image.chosun.com/cs/article/2012/type_mov_onoff.png) no-repeat 0px 0px; } a.pop_btn_mov:hover { background-position: 0px -98px;} a.pop_btn_mov img {display:none;} </STYLE>

      <SCRIPT>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width = wd; document.getElementById("artImg1").style.height = ht; </SCRIPT>
      수유리파는 1987년 '인디안파'로 시작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노원구 상계동 일대에 유흥가가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이들은 유흥업소를 돌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냈다.
      유흥업소 출연 연예인도 이들에게 출연료를 내야만 했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1990년대 이후 수유리파는 쇠락을 시작했다.
      1998년도엔 검찰 수사가 조여오자 부두목 등 5명이 일본으로 도피했다.
      조직을 본격 재건한 것은 2007년부터다.
      서울 강북구·성북구·도봉구 일대는 당시 재개발·경전철 등
      사업으로 유동인구가 늘고 상권이 커지고 있었다.
      이들은 재개발 조합 선거에서 유세장을 점거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등 각종 이권에도 개입했다.
      이어 사행성 PC방·게임장·도박장·퇴폐 유흥업소·사채 사무실 등을 직접 운영하거나 지분에 참여했다.
      정씨를 비롯한 이들의 범죄 행각은
      지난 2010년 경찰이 수유리파 조직원들을
      일망타진(7명을 구속·12명을 불구속 입건)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들은 조직 유지를 위해 매달 단합대회를 가졌다.
      술집이나 식당에서만이 아니다.
      경기도 가평 대성리 유원지에서 낮에는 축구·족구·산악 바이크·래프팅 등을 하고
      밤에는 회식을 하는 2박 3일짜리 단합대회도 수차례 가졌다. "
      수유리파 파이팅!
      흩어지면 죽으니 똘똘 뭉쳐 조직생활 하자"가 회식 구호였다.
      명절 때마다 하부 조직원에게는 떡값과 과일박스를 돌렸다.

      신규 조직원 양성을 위해 서울 강북구 한 빌라 지하층에 합숙소도 마련했다.
      서른 살 아래로는 합숙생활을 했다.
      2009년 충원된 20대 초·중반 신규 조직원 8명가량도 합숙 생활을 했다.
      대부분은 고등학교 '일진' 출신이었다.
      서른 살 이상 조직원은 매달 10만원,
      행동대장급은 20만원씩 조직 운영비를 내
      조직원들의 변호사비와 교도소 영치금(속칭 '옥바라지' 비용), 합숙소 운영비 등에 썼다.

      행동 강령도 있었다.
      ▲선배들을 보면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
      ▲맞담배는 1년 선후배 간에만 가능
      ▲다른 조직과 이권 개입 시 절대 밀리지 말 것
      ▲형님을 부모로, 동생을 자식으로 생각
      ▲선배 말에는 무조건 복종 등 여섯 가지다.
      이를 어기거나 조직에서 이탈하려면 야구방망이나 쇠파이프로 일명 '줄빠따'를 맞았다.

      경찰 관계자는 "
      최근 조폭 집단에 새로 가입하는 폭력배들은 대부분 고교 때 '
      일진' 출신으로 보면 된다"면서 "
      학교 등을 매개로 일진들도 선후배 관계가 있어 서로 끌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도소 옮기기 귀찮다"는 이유로 부하 시켜 고소 자작극, 결국 재판 끌다 출소한 조폭 대구=최재훈 기자
    단독 20년간 서울 강북구에 기생한 수유리파 판결문 보니 곽래건 기자
     

    2013.11.22.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비공개 답변
    영웅
    창원에 당연히 있죠.

    보스 부보스 행동대장 등등 있지요.

    마약밀매를 하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어요.

    2013.11.08.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