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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남준 일생과 업적.
kl**** 조회수 52,023 작성일2012.06.06

중1 도덕 수행평가로 a4한페이지정도 채워야되요.

옮겨서 적을거라 ㅎㅎ

백남준 일생과 업적 a4한페이지정도 간략하게 써주세요!!

사진첨부도 해주시면 채택해드릴게요!

금요일날까지라 7일까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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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우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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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로 본 백남준의 일생

▶1932년 7월 20일 서울 출생. 경기중 재학 때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로부터 음악 수업

▶50~56년 한국전쟁으로 부산 피란 뒤 일본 도쿄에 정착해 도쿄대학 문학부 미학미술사학과 졸업

▶58년 독일로 건너가 뮌헨대.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쾰른대에서 음악 공부 중 존 케이지 만남

▶61년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치우나스와 만나 창립 멤머가 됨

▶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열어 최초의 비디오 아트전으로 기록

▶84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재로 한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전 세계 방영

▶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나가 대상(황금사자상) 수상

▶96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작품 활동

-제5회 호암상 예술 부문과 제1회 월간미술 대상 수상

-독일 '포쿠스'가 뽑는 '올해의 100대 예술가' 선정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회고전, 이어 서울 호암.로댕 갤러리에서 '백남준의 세계' 회고전

-금관문화훈장 수상

▶2006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에 '백남준 미술관' 실시 설계중

▶2006년 1월 29일 74세로 타계

 

백남준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특징에서 출발했음. ㅡㅡㅡ아래 내용은 사상(?)

1. 비상업적: 작품을 만들어 돈 받고 파는 행위를 배격함. 작품은 그냥 작품으로써 끝날 뿐 거기에 금전적인 가치가 붙는 것을 용납치 않음. (그러나 이런 철학에 기반한 백남준을 비롯한 플럭서스 작가들 작품은 오늘날 수천 수 억원을 호가함.)


2. 재미: 대중성과 재미는 백남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 예술 작품에서 심각한 사상이나 철학을 배제하고, 오직 예술가 자신의 재미와 변덕, 즉흥성에 의해 작품을 창조함.


3. 저항: 그는 서양 전통 사상이나 예술에 철저하게 저항한 인물로, 평생 서양이나 동양 미술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오직 자기 중심적인 아이디어에서 작품을 생산함.


4. 다양성: 백남준에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이라는 별명이 있음. 한국, 일본, 홍콩, 유럽, 미국 등 이곳 저곳에 살면서 요란하고 다양한 개성을 미술 작품에 투영하는 것으로 유명.

 

주요작품과 활동 ㅡㅡ아래 내용을 요약하시면 더 좋겟죠~

 

비디오와 텔레비전의 예술적 가능성을 상상하고 실현하는데 있어서 어느 누구도 백남준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광범위한 설치 작업과 비디오 영상, 범세계적으로 TV망을 연결한 작업, 영화, 퍼포먼스 등을 통해 그는 현대미술에서 시간적인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형성시켰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현대작곡가 아놀드 쉔베르그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1956년 유럽을 여행하다가 아방가르드 음악과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자 독일에 정착했다. 1958년 다름슈타트 하계현대음악캠프에서 백남준은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를 만났다. 작곡과 퍼포먼스에 관한 케이지의 사상은 백남준은 물론 급진적 예술운동 그룹인 플럭서스의 창시자로 음악캠프에 초청된 조지 마치우나스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텔레비전이라는 대중매체에 대한 백남준의 최초의 탐구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그의 첫 개인전 <음악 전람회 - 전자 텔레비전;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에서 제시되었다. 비디오 아트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된 이 전시는 텔레비전을 기계적으로 조작한 작품,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비디오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최초의 전시 이후 40여 년간 그는 수많은 개념과 기계적 발명을 통해 전자 이미지가 미술의 영역으로 소개되고 수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비디오에 관한 탐구를 지속했고, 1960년대 말에는 텔레비전과 동영상이미지에 관한 미학적 논의를 불러 일으킨 신세대 작가들의 첨병 역할을 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그는 다른 작가들을 지원하고 새로이 부상하는 미술매체의 잠재성을 현실화 시키는데 몰두하면서 이 분야의 대표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경이로운 텔레비전 작업들과 로리 앤더슨, 요셉 보이스, 데이빗 보위, 케이지, 머스 커닝햄과의 협동작업으로 구성된 비디오 영상작업들을 통해 비디오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예술적인 관행을 재규정하는 설치작품 시리즈를 창조했다.

1974년 작품 은 작가의 예술적인 진수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1988년도 작품 <촛불 프로젝션>은 을 위한 일종의 배경 막으로 설치되었고, 불꽃을 폐쇄회로 비디오를 통해 벽에 투사시킴으로써 촛불의 색채와 움직임으로 인한 역동적인 공간을 구성한다.
<로봇 가족; 할머니>(1986), <로봇 가족; 할아버지>(1986), <로봇 가족; 하이테크 아기>(1986) 등의 작품들은 TV 모니터들로 인간 형상을 구성한 것이다.
1974년도 작품 에서는 시간과 인간 정신에 대한 명상의 방법으로서 인간 형상과 비디오라는 매체간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1968년도 작품 에서 그는 재치있게도 의자의 시트를 텔레비전 세트로 대치하여 텔레비전이 관객과 가지게 되는 관계를 탐구한다. 또한 두개의 조각작품은 로댕갤러리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상기시킨다.
1988년도 작품 <스위스 시계>에서 작가는 시간의 변화를 재현하는 문제에 천착하였고 은 로댕갤러리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전시되고 있는 로댕의 조각작품을 역설적으로 언급한다.

 

 업적>>>

 

그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당시에 길거리 예술가들은 백인들이 이었습니다.

흑인들도 흔치 않았는데 동양인이 길거리에 바이올린을끌고 다니고 멀쩡하게 소리나는 피아노를 무스는 공연은 참 해괴, 어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짓들을 하는 이가 왜소한 동양이다 보니 비교적 쉽게 논란꺼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초창기의 반응은 우려와 비난이었죠. 또 유색 인종에 대한 조소도 섞여 있고요.

그의 악기 퍼포먼스는 나름 주목을 끌게 되고 중반 이후 시작한 브라운관에 반복, 무의미한 신호들을 실어 보내고 이 브라운관을 탑 또는 로봇 비슷한 모양을 꾸민 조형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각종 영상들을 대충 조합하여 컴퓨터에서 대충 펴집한 후 TV 브라운관을 뿌려주고 대충 쌓아 올리면 되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상 작품들을 보면 설명을 들어도 대충 의미 없이 만든듯 보여서 쉽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비디오아트라는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배불뚝이 브라운관에 신호를 보내기 위한 장치는 비디오플레이어가 다 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장테이프에 기록된 영상을 편집기에서 편집하거나 아예 아세테이트 자기 필름을 접착하는 등의 작업으로 영상을 제작해야 했습니다. 몇 십대의 브라운관에 골고루 영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상 분배기의 설계도 해야 했습니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가 하고 나니 사람들에게는 영상을 화면에 뿌려주는 일련이 퍼포먼스라는 장르가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기준에 다 알려진 기술이지만 그는 이 것을  예술의 한 분야로 만들었습니다.

이 것이 그가 존경 받는 이유입니다.

201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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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사회, 도덕, 한국사, 국어, 한문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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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32년 7월 20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서린동에서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보통중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1949년 그는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했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했다. 2년 후 미학 및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정하고, 주로 작곡음악사를 공부했다.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이다.

1956년 백남준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대학교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 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했다. 1958년 그 곳에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자유로운 음악적 실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음악 퍼포먼스의 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머로 활약했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을 만나 플럭서스 활동을 전개했다.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는 헤라클레이투스가 주장한 ‘변화 생성의 흐름’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이벤트와 퍼포먼스 그리고 음악에 주력했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아 2년여 동안 홀로 TV 실험에 착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 TV를 통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에는 ‘총체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같은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같은 파괴적 에너지의 설치 및 참여적 형태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종합적인 큐레이팅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연구자들 사이에 점차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74년부터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설치 작업을 다양하게 진행했으며, ‘TV 부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자연물을 음악적으로 혼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혼합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졌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했고, 이는 예술 세계의 영역 확장이었다. 나아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이 참여했으며, 전 세계 2천 5백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하였다. 이후에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졌다.

1993년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최고 전시관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전시에서 그는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라는 명명 하에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한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다수 내놓았다.

1995년 백남준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INFO art’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한국 미술이 세계 진출을 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백남준은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 유해가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작품

 
다다익선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다.
1003개의 텔레비전을 쌓아 만든 탑이다.
높이 18.5 미터, 지름 7.5 미터, 무게 16

201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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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한국의 비디오아트 작가이다. 그는 1932년 7월 20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서 일본 동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작업을 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발전시켰다. 

 

1982년에는 뉴욕에서 그의 첫 회고전이 열렸고,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되었으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도시와 영상전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98 교토상을 수상했으며, 이어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 1월 30일 미국 자택에서 사망했고 그 후 2008년 10월 경기도 용인시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개관하게 되었다.

  

백남준 [白南準, 1932.7.20~2006.1.29]

비디오 아티스트.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9년 홍콩 Royden School을 졸업하였다.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미학문학부에서 공부하고 1956년 독일로 유학하여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를 수료하였다.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전위적·실험적 미술집단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음악공연(뒤셀도르프, 1959), 피아노포르테 연구공연(1960), 심플공연(스톡홀름, 1961), 뮤직일렉트로닉TV전(1963) 등 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다.

1963년 독일 부퍼달 파르니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Sharlotte Mooreman)과의 공연을 통해 비디오 아트를 예술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들었다. 1977년 위성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였고,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신경이 모두 마비되었으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도시와 영상전(서울시립미술관, 1996), 교과서 미술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독일 비디오조각전(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97), 97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개인전(국립미국미술관,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한국현대미술전-시간(호암갤러리, 1998)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1996년 10월 독일《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8위로 올랐다. 1998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예술과 비디오의 접목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을 수상하였고,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다. 2000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도움되었길 바랍니다.^^

201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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