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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구례장씨 수...
비공개 조회수 5,634 작성일2017.09.07
구례장씨 수가 장씨중에 제일 몇 없나요 ㅠ ,,, 인동장씨가 젤 많다고 하는데요 ㅠ 장씨 수 많은 순서대로 써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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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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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구례장씨 수가 장씨중에 제일 몇 없나요 ㅠ ,,, 인동장씨가 젤 많다고 하는데요 ㅠ 장씨 수 많은 순서대로 써주세요 ㅠㅠ

 

답변 : 아래는 장씨 많은 인구수 대로 올려드립니다. 구례 장씨는 장씨의 10위입니다.

 

먼저 장씨의 유래입니다.

 

 

덕수 장씨(德水 張氏)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張氏) 비조(鼻祖) () 도시조(都始祖) 모든 장씨(張氏)는 장정필(張貞弼) ()이다.

 

장씨(張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 63개 본()이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현재(現在) 30본 미만(未滿)으로 추정(推定)된다.

 

그 중에서 덕수 장씨(德水 張氏)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씨(張氏)는 도시조(都始祖)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손(後孫)으로 알려져 있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등에 의하면 장정필(張貞弼)은 중국(中國) 절강성 출신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덕수장씨(德水張氏)는 뿌리를 회회계(回回系)에 두고 있으며,덕수장씨족보(德水張氏族譜) 고려사(高麗史)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덕수현(德水縣)에 살게된 원()나라 사람 장경(張卿:일명 장백창)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통일신라(統一新羅)의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를 그의 부 백익의 1대로 하여 신라(新羅)시대(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현전하는 문헌(文獻)들과는 상충되는 바가 있어 이들을 '13세 별록'이라 하여 별도(別途)로 취급(取扱)하고 있다.

 

하여! 우리나라 장씨(張氏)는 덕수(德水)와 절강 장씨(浙江 張氏)를 제외한 인동(옥산), 안동, 순천, 구례, 봉성, 단양, 목천, 울진, 결성, 흥성(흥덕), 하산, 려흥, 부안 등 제장씨는 장정필(張貞弼)의 혈손(血孫)으로서 그를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으나 각() 관계(關係)보간에 연대의 차이(差異)가 있으니 박고 정정함이 좋을 것으로 안다.

 

하나 다른 말씀 드리고 싶지만 너무 모르는 본관(本貫)이 많이 밑에 몇 대() 본관(本貫)의 시조(始祖)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인동 장씨(仁同 張氏)

 

시조 : 장금용(張金用)

仁同(인동)은 우리 仁同 張氏(인동 장씨) 始祖(시조)이신 三重大匡公神虎衛上將軍(삼중대광공신호위상장군) (諱金用(휘금용))府君(부군)께서 肇基(조기) 卜居(복거)하신 고을로 千有餘年(천유여년) 世居(세거)해온 祖上(조상)의 얼이 심어져 있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仁同 張氏(인동 장씨) 貫鄕(관향)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인동 장씨는

2000년에는 총 184,863가구 591,3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 안동 장씨(安東 張氏)

 

시조(始祖) : 장길(張吉)

시조(始祖)의 초() ()는 길()이요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을 높이는 것은 의가 아니라고 정필(貞弼)이라 개명 하였다. 관직(官職)은 통합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統合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公信) 태사(太師) 충헌공(忠獻公)이시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 장씨는

2000년에는 총 25,552가구 83,96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 흥성 장씨(興城 張氏)

 

시조(始祖) : 장청계(張淸溪)

始祖 中始祖, 派祖 (시조와 중시조, 파조)

선조(先祖) 중에는 시조(始祖)가 있고 또 중시조(中始祖)가 계신다. 시조(始祖)는 우리 흥성(興城) 씨족(氏族) 중 가장 윗 선조(先祖)를 말한다. 현재(現在) 전국(全國)에 살고 있는 흥성(興城) 장씨(張氏)는 모두 시조(始祖)의 후손(後孫)들인 것이다.

시조(始祖) ()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歷任)한 분으로 자()는 청계(淸溪)이시다.

중국어(中國語)에 매우 능통(能通)하여 항상 중국(中國) 사신(使臣)을 맞이하여 외교(外交)를 담당하시었다.

그의 아들이신 연우(延祐)께서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공신(功臣)으로 호부(戶部) 상서(尙書, 현재의 재무부 장관)를 역임(歷任)하였고 돌아가신 후() 나라에서는 충숙공(忠肅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흥성 장씨(興城 張氏)

2000년에는 총 14,023가구 44,70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 단양 장씨(丹陽 張氏)

 

시조(始祖) : 장순익(張順翼)

시조(始祖) 순익(順翼)은 도시조 정필(貞弼)의 현손(玄孫)으로, 고려(高麗)에서 시랑을 역임한 지현의 세째 아들이다.

그가 고려조(高麗朝)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지내고 단양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순익(順翼)의 아들 3형제(兄弟) () 맏아들 재일이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차남(次男) 유일은 시랑(侍郞)을 역임(歷任)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人口調査)에 의하면

단양 장씨(丹陽 張氏)의 인구수(人口數)는 약33.000여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5. 결성 장씨(結城 張氏),

 

시조(始祖) : 장사(張楒)

결성장씨(結城 張氏) 350여년 전()부터 세거(世居)하기 시작(始作)했다.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 장사(張楒) 18세손(世孫)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 ()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장씨 8(八貫)의 족보(族譜) 10년간에 편찬(編纂)한 장취오(張聚五, 1684~1770)가 그의 부친(父親)인 절충장군 장시서(張時瑞, 1653~1706)의 묘()를 쓰고 서울에 살았다. 그후() 취오의 장손(長孫) 장이검(張履儉)이 광주에서 3대를 살다가 충청도(忠淸道)로 이주(移住)하였다.

통계청의 인구조사(人口調査)에 의하면 결성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708가구 21,06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6. 덕수 장씨(德水 張氏)

 

덕수 장씨(德水 張氏) 시조(始祖) 장백창(張伯昌, 일명 장순용(張舜龍:일명 ), 시호는 공숙)은 아랍(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世祖)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1275(고려 충렬왕 1)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德水縣)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았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덕수(德水)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덕수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531가구 21,00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7. 울진 장씨(蔚珍 張氏)

 

시조(始祖) : 말익(末翼)

강원도(江原道) 울진(蔚珍)은 본래 우진야현(于珍也縣)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때에 경덕왕(景德王)이 울진(蔚珍)으로 개칭(改稱)하여 군()으로 삼았으며, 고려(高麗) 때 강등(降等)하여 현()을 만들어 영()을 두었다. 고종 32(서기 1895)에 군()으로 고쳤다.

울진 장씨(蔚珍 張氏) 족보(族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말익(末翼)은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 5세손으로 고려(高麗) 정종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 상주국으로 울진부원군(蔚珍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울진(蔚珍)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천일(天鎰)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하여 추밀직하사(樞密直學士)를 지냈으며, 천일(天鎰)의 아들 원흡(元洽)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말익(末翼) 8세손 양수(良手)는 희종(熙宗)때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歷任)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선조(先祖) 16(서기1583)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158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울진 장씨는

2000년에는 총 6,664가구 20,79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8.  옥구 장씨(沃溝 張氏) :

 

시조(始祖) : 장익(張榏)

옥구(沃溝)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북서부(北西部)에 있는 지명(地名)이다.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마서량현이었으며 통일(統一)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옥구(沃溝)로 고쳐서 임피에 속()하게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에 군산(群山)창이 되면서 옥구현(沃溝顯)이 되었다.

옥구장씨(沃溝張氏)는 도시조 장정필(張貞弼) 14세손인 장익(張榏)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고려(高麗)에서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歷任)하였으며 옥성(옥구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正確)한 계대(繼代)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다만 그의 후손(後孫)으로 판도판서를 역임(歷任)한 장송을 1세조(世祖)로 하고 옥구(沃溝)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손(後孫) 가운데 장송의 손자(孫子) 장화가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를 지냈고, 장화의 아들 장대유가 부사를 역임(歷任)했다. 장대유의 아들 장한이 판서를, 장윤이 참의를 역임(歷任)하여 아버지와 함께 가문(家門)을 중흥(中興)시켰다.

군수를 지낸 장승조와 현감 장현손도 옥구장씨(沃溝張氏) 후손(後孫)이다. 어모장군을 지낸 장희와 장순명을 비롯 효자로 이름난 장만건, 장만준과 학자 장만웅, 현감 장위한도 가문(家門)을 빛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옥구 장씨는 2000년 현재는 5,70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9. 거창 장씨(居昌 章氏)

 

시조(始祖) : 장종행(章宗行)

본관은 거창(居昌)과 보성(寶城) 2본이 전()해지나 사실상 거창장씨(居昌 章氏) 단본(單本)으로 알려져 있다. 거창장씨(居昌 章氏)의 시조(始祖) 장종행(章宗行:忠獻公)은 원래 송()나라 건주(建州) 사람으로 700여 년 전에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는데, 충렬왕(忠烈王)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예문관대제학 겸 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兼春秋館事)를 지냈고 안향(安珦)의 사위로 장씨보(章氏譜)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그의 아들 두민(斗民)은 충숙왕(忠肅王) 때 광정대부 판삼사사(匡靖大夫判三司事)를 지냈으며,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 때 배행하였고,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고 아림군(我林君)이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恭讓王) 때 돈령부부정(敦寧府副正)을 지낸 삼장(參莊)이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거창군 화면(火面:熊陽面)으로 퇴거함으로써 거창(居昌)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現在) 장씨(章氏)는 대부분(大部分)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과 함양군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거창 장씨는

2000년에는 총 1,751가구 5,55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0. 구례(봉성) 장씨(求禮(鳳城)張氏).

 

시조 : 장악(張岳)

 

시조 장악(張岳, 시호(諡號)는 양간)은 장정필(張貞弼) 21세손(世孫)이다. 그는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며 왕()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나이 70에 고향(故鄕)을 생각하고 근심이 가득하자 왕()이 봉성군(鳳城君)에 봉()하고 봉성(鳳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하였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구례(求禮)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 장악(張岳)의 묘소(墓所)는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백운동에 있다.

 

인구수 구례 장씨 10,670.(1985) 봉성 장씨 760명 2000년도 17,241명(봉성 장씨포함) 한국 전체 인구수에 279위로 되어 있다.

 

 

※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인구수 99 2,721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9위이다.

 

문헌에 250여 개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으로는 인동(仁同안동(安東흥성(興城, 興德단양(丹陽결성(結城덕수(德水울진(蔚珍나주(羅州목천(木川구례(求禮순천(順天옥구(沃溝창녕(昌寧부안(扶安절강(浙江진주(晉州전주(全州예산(禮山영동(永同진천(鎭川청송(靑松진안(鎭安옥천(沃川지례(知禮흥양(興陽해풍(海豊태원(太原, 忠州영천(榮川흥해(興海천녕(川寧) 등이 있다.

 

 

님은 구례 장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구례 장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구례 장씨(求禮 張氏)에 대()하여

 

1. 구례 장씨(求禮 張氏) 시조(始祖) : 장악(張岳)

2. 구례 장씨(求禮 張氏) 유래(由來) :

 

시조(始祖) 장악(張岳 시호는 양간)은 장정필(張貞弼) 21세손(世孫)이다. 그는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며 왕()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나이 70에 고향(故鄕)을 생각하고 근심이 가득하자 왕()이 봉성(구례)군에 봉()하고 봉성(鳳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하였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구례(求禮)를 본관(本貫)으로 봉()하였다.

시조(始祖) 장악(張岳)의 자()는 악(), 시호(諡號)는 양간(襄簡)이며, 장악(張岳)은 왕()의 총애(寵愛)를 받은 그는 봉성(鳳城.구례의 옛 이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구례를 본관(求禮)으로 했다. 그러나 일설에는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지낸 뒤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진 장을용(張乙用)을 시조(始祖)로 하기도 한다.

 

- 장악의 묘소는 전남 구례군 백운동에 있다.

 

 

3. 구례 장씨(求禮 張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구례(求禮)는 전라남도(全羅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구지차현(仇知次縣) 또는 구차례현(求次禮縣)이었으나, 757(신라 경덕왕 16)에 구례현(求禮縣)으로 고치고 곡성군(谷城郡)에 속()하게 하였다. 1413(태종 13) 구례현(求禮縣)으로 승격(昇格)하였고 현감(縣監)이 파견(派遣)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고달면(古達面)을 곡성(谷城)으로 이속(移屬)시켰고, 현내면·가사면을 구례면(求禮面)으로, 간전면·문척면을 간문면으로, 방광면·소의면을 광의면으로, 용강면·중방면을 용방면으로 통합(統合)하고, 토지면·마산면·외산면·내산면은 그대로 소속(所屬)시켰다. 1932년에 내산면·외산면을 산동면으로 합()하였다. 1963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에 따라 구례면(求禮面)이 읍()으로 승격(昇格)되었다. 봉성(鳳城)은 구례(求禮)의 별칭(別稱)이다.

 

 

4. 구례 장씨(求禮 張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장필무(張弼武)는 중종(中宗) 38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했다. 부산진첨절제사, 만포진첨절제사를 역임했고 주로 북방경비를 강화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 5년에는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만주족을 격퇴했다.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아 죽은 뒤 청백리가 되었다. 그의 두 아들 장의현, 장지현도 널리 이름을 날렸다. 장의현은 해남현감을 지내고 선조 16년 부령부사로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활약하여 경기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장지현은 선조 23년 전라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부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황간(黃澗)의 추풍령에서 적을 공격하다 포위당해 전사했다. 그 공로로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참판을 지낸 장영, 참의에 오른 장규 등이 집안을 빛냈다.

 

- 장필무(弼武) : 조선시대(朝鮮時代) 무인(武人)으로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구례 장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1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분야별로는 문과 2, 무과 4, 사마시 5명 등이다.

 

 

5. 구례 장씨(求禮 張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영동-옥천-무주-선산-보은파,

구례-무주파,

장수-용담-회인-청산파 등이다.

 

 

6. 구례 장씨(求禮 張氏)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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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례 장씨(求禮 張氏) 집성촌(集成村)

 

충북과 전북에 있었다. 실제로 1930년경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일원과,

전북 무주군 안성면 일원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8. 구례 장씨(求禮 張氏) 인구수(人口數)

 

구례 장씨 10,670, 봉성 장씨 760명이 있다.(1985)

2000년도 17,241명(봉성 장씨포함) 한국 전체 인구수에 279위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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