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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태권도를 만들은 사람은?
sang**** 조회수 993 작성일200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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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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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고 평가받는 태권도 서적 [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 이호성 저. 1995]에서 인용.발췌 하면...


광복이 되자 한국의 고유 무술인 태껸이 소수의 전승자(송덕기옹 등)에 의해 다시 나타났지만, 고유 무술의 자리를 채운 것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로 건너온 당수도(가라데)와 유도였다. 1950년대 말에도 우리나라에서 체계화된 우리무술이 존재하지 않았고,무술이라면 당수도.유도외에 소수의 중국권법등이 있었다. 당수도, 즉 공수도는 일제시대에 한반도의 일본도장에서 수련한 이들과 일본에서 귀국후 도장을 연 이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기록으로 보면 한국최초의 도장은 광복되기 두달전에 문을 연 '당수도 청도관'이다. 청도관은 초대 관장 이원국씨에 의해 세워졌고 6.25후 손덕성씨에 의해 재건되었다.손덕성씨는 그후 최홍희씨와의 마찰에 의해 도미하였고 엄운규씨가 그 뒤를 이어 청도관 관장이 되었다.

2대 '당수도 청도관'의 관장이 된 손덕성씨는 도미하여 미국에 태권도를 널리 전파한 분이시고, 엄운규씨는 후에 WTF(세계 태권도 연맹)의 부총재를 연임하셨던 분이다.

청도관에 이어 용산에 '철도국 도장'이 생겼다.관장은 황기로 3년뒤에 당수도 도장인 '무덕관'을 개관하였고, 청도관과는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황 기 관장은 1960에 홀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사단법인 수박도회라는 협회를 만들었으나 1961년 5.16군사 정변이후,모든 관이 태수도 협회로 통합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광복 후의 한국 민간 도장은 청도관,무덕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등 5대 문파가 있었다.이 오대 문파의 관장 중 실종된 전장섭,윤병인을 제외하고,청도관의 초대 관장 이원국,2대 관장 손덕성.무덕관의 초대 관장 황기,창무관의 2대 관장 이남석,송무관의 초대 관장 노병직 등 이른 바 관의 '원조'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여기에다 한국 전쟁 후 만들어진 군대 도장 오도관의 초대 관장 최홍희와 역시 오도관 관장을 역임한 남태희도 포함된다. 한국 태권도의 뿌리들이 모두 미국에 옮겨져 있는 셈이다.'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이 호성]

광복후 민간의 5대 문파에 이어 1954년 강원도 용대리에 국군 사상 처음으로 '오도관'이란 군 무도관이 창설되었다. 관장은 보병 제29사단 사단장이었던 최홍희씨와 사범은 남태희 중위였다.이 최홍희 관장은 '국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국군 태권도를 보급시켰고, 북한계 ITF 태권도를 설립한 인물로 초기 태권도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남한계 WTF태권도에서 최홍희씨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소외되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반정부 활동을 한 경력과 친북 활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도관이 창설되었고, 그해 5월 용대리와 가까운 속초에서 제1군단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오도관 1.2기생 50여 명이 당수도 시범을 보인 것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술을 매우 좋하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30분 동안의 시범을 줄곧 서서 관람했으며,특히 남태희가 기왓장 13장을 겹쳐 놓고 일격에 박살 내는 것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시범이 끝나자 이승만은 최홍희를 돌아보며 "저게 예로부터 전해 오던 우리 태껸이야 태껸! 앞으로 전군에 보급시켜야겠어."했다. 이 한마디로 태권도라는 말을 확정시키고,미래의 태권도 발전에 전기가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최홍희씨는 남태희와 함께 태권도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명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이형근 합참 의장.조경규 국회 부의장.한창완 정치 신문사 사장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태권도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런데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에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 후 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몇 달후 대통령이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림으로써 명칭은 확정되었다. 바로 이 날이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대 태권도의 세력은 전쟁 이후의 안보 의식과 1960년대의 군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강성해졌다.

한마디로 이승만의 무술에 대한 무지와 박정희 시절의 무식할정도로의 태권도 역사
날조로 관련도 없는 태껸과 엮어 붙이는 만행아닌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그리고 일부 태권도인들 중에 무예도보통지와 태권도의 역사를 엮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박제가가 조선의 무술에 대한 지식도 없이 중국의 무예서를 그대로 배

껴오다 시피한 그 엉터리 무술서때문에 정작 중요한 조선의 전통무예는 놀이 형태로

씨름, 태껸이라는 형태로 전승되고, 각기 개별적인 신체의 단련을 위해 제기차기,

중방울놀이, 자치기놀이의 형태로 숨겨져서 전승되었습니다. 그래도 해방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무예의 전통은 그 형태를 감추어 민간에 전승되긴 했지만 (ex 평양의

박치기등은 아직도 유명합니다. 이때의 박치기는 박치기를 했을때 대문이 나가떨어지

는 위력이라고 합니다.) 어느순간 그 맥이 단절된 것으로 보입니다.

200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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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는 가라데에서 나왔고 가라데는 오키나와에서 중국무술로 부터 나왔습니다.

태권도는 최홍희라는 육군 소장이 가라데를 보고만든 무술입니다.
최홍희장군이 태권도를 만들고 대한택권도 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이승만에게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때 이승만이 그걸보고'거~ 택견이구만' 이라고 말을하고나서부터
태권도의 근본은 택견이며 고구려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왔다고 그렇게 우기는식으로
됐습니다.

최홍희장군이 태권도협회를 만들때 참가한 6대 관장중 한명인 황기선생은
'당수'라고 하자고 했다고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敗亡)하고 해방을 맞게 되였고
그들에게서 최홍희와 더불어 가라데도 를 배운 사람들이 (윤병인-공수도연무관,
로병직-공수도송무관, 황기-당수도무덕관, 이원국-공수도청도관,
이남석-공수도창무관, 이종우- 공수도지도관) 6대관장입니다.
이렇게해서 태권도가 여러가지 관으로 갈라지는 형태가 됩니다.
관이라는건 사람으로치면 태어나면서 아버지의 성씨를 부여받듯
가문의 성격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 나오는 6대관장과 최홍희를 태권도1세대라고 합니다.

최홍희는 군대 전역후 말레이시아 대사와
제3대 대한태권도협회장까지 지냈으나 7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친북인사로 변신해 김일성 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80년에는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고자 본격적인 접촉도 가졌었습니다

태권도는 전통무술이라기보다는 정통무술입니다.

200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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