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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남양주 내고장 전래 땅이름 조사요!!
비공개 조회수 887 작성일2009.08.26

저기... 제가 오남읍쪽에 사는데요

 

학교 방학숙제로 해오라네요 ㅎ_ㅎ

 

써야하는게..현재 행정명,지역이름(땅이름),지역이름의 유래

(땅이름이 생기게 된 이유,또는 이야기 등)

 

이게 좀 급해요..

 

빨리 해야 하거든요??

 

최대한 빨리 해주세요!!ㅋㅅㅋ

 

 

내공85걸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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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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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남읍

 

오남읍은 본래 풍양현 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한말까지 양주군 건천면과 접동면 일대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동폐합때 이 지역은 진건면에 편제되었습니다. 팔현리는 건천면 팔현리를 그대로 편제한 것이며, 오남리는 건천면 어남상(於南上)리/어남하(於南下)리/오산(梧山)리 전부와 단곡(丹谷)리의 일부를 합하였고, 양지리는 건천면 양지/단곡리/접동면 증포리 각 일부를 개편한 것입니다.

 

‘오남'이란 명칭은 이 때 오산의 ‘오'자와 어남의 ‘남'자를 따서 유래한 것,  또는 세조가 광릉묘지터를 찾으러 광릉방면으로 가는 길에 건너다 본 곳이라 하여 ‘어람리(御覽里)'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의냄리', ‘어냄이', ‘어남'이라고 불러오다가 ‘오남'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1983년 2월 11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거 진건면에서 진접면으로 이관되었고, 1989년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 1995년 5월 6일 시조례 제140호에 의거 오남면으로 승격되었습니다.

 

2001년 9월 12일 남양주시 조례 제454호에 의거 오남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02년 현재 양지/팔현/오남리의 3개 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 양지리

 

양지리는 중심마을이 '양지말', '양지편', '양지'라고 하는데 양지바른 곳이므로 붙은 이름입니다.

 

이곳 양지리에는 '삭다니·삭다리'라는 특이한 이름이 있는데, 옛날에는 '골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골말'에서 '삭다니' 혹은 '삭다리'로 바뀐 이유는, 이 마을에서 화재가 나서 마을 대부분이 타버려서 '모두 다 타버린 마을'이라는 의미의 '싹탄리'로 불리다 가 '삭다리' 혹은 '삭다니'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팔현리 [발안, 배라니, 배래 니, 팔현]

 

이곳은 벌판 안쪽이 되므로 '벌안', '배라니', '배래니'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조선조 유명한 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과 망세정 심선 등 여덟명의 선비가 이곳에서 항시 만나 강론을 하였다하여, '여덟 현인이 은거 했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여덟 선녀가 이 마을에 내려와 목욕하고 올라갔 기 때문에 '팔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그래서 이들 팔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팔현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원팔현 북쪽 팔현유원지에 '형제바위'가 있습니다. 옛날 남 양홍씨(南陽洪氏) 가문에서 사효성문(四孝姓門)을 받은 홍서구(洪瑞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우 주구(疇龜), 우구(禹龜), 응구(應龜) 등 4형제가 이 곳에서 사이좋게 놀던 자리라 해서 형제바위라는 이름이 붙 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이 바위에 돌을 던지고 기원을 하면, 아들 형제를 낳는다고 하여 '형제바 위'라 불린다는 유래도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 오남리

 

조선시대부터 한말까 지 이 지역은 양주군 건천면 지역으로 1914년 오산리의 '오(梧)'자와 어남리의 '남(南)'자를 따서 오남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오산'이라는 이름은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입니다. 그러나 낫을 가는 데 사용되는 숫돌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라 해서 '숫돌모루', 또는 '숫돌머리'라고도 하며,  이와는 달리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돌아 내려온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어남(於南)·오남(梧南)·어냄이'는 세조가 광릉 묘지터를 찾으러 광릉 방면으로 가는 길에  건너다 본 곳이라 하여 '어람리(御覽里)'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의냄리', '어냄이', '어남 (於南)'이라고 불러오다가 '오남'으로 되었다고 하며, 고종황제 때의 내시가 이 곳에 와서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200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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