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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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더 있었습니다.
한번은 시베리아출병입니다.
1차대전중에 러시아가 혁명이 일어나서 소련이 되었는데요.
이 러시아땅에 아직 저항하고 있는 백군세력들이 있었는데요. 이때
이 백군들을 돕기위해서 또 체코슬로바키아,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등이 출병한 전쟁이 있었는데 여기에 일본도 한몫끼어서 전력을 과시
했습니다. 특히나 바이칼동쪽지역이 일본이 전력을 과시했던 곳입니다.
한번은
2차대전직전까지 몇달간 했던 할힌골전투(노몬한전쟁)입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웠고 몽골은 소련을 섬기면서
세계에서 두번째의 공산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이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요.
국경이 제대로 확정되지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중에 몽골기마병일부가
만주국의 국경을 넘어오게되자 이를 침략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했던것을 시작으로 만주와 몽골의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곧 일본과 소련의 대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이 노몬한전쟁이 난 해는 2차대전이 일어난 1939년이었습니다.
안그래도 독일,이태리와 방공협정을 맺어놓은 상태였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는 독일이 소련과 폴란드땅의 반을 줘서 소련에게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거래하고있던 시기였는데요.
이 전쟁이 다 끝나가는 시기에 소련의 전력이 만만치않다는 것을
안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는데요. 독일이 동쪽을 공격해
달라고했을때도 중립조약을 들어서 거절하고 미국과 대결하는데
집착했습니다.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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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백내전)(일본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등등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수많은 자본주의국가들이 개입함)
1917년부터 시작된 러시아내전
적백내전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내전에 일본이 개입
명분은 공산주의확대저지이다.그래서 공산주의자인 적군을 공격 백군을 지원하였다.
허나 사실상 일본은 이 기회에 영토확장이 목적이었다.
일본은 사할린일대와 블라디보스톡으로 진격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엔 8만의 일본군이 잠시 점거하지만
얼마못가 뺏긴다.
일본명 노몬한사건(러시아명:할힌골전투)
주제의 이름처럼 일본은 노몬한에서 일어난 작은사건이라고 표현한반면
러시아는 전투로 보고있다.
허나 규모로 보나 피해자로 보나 사건으로보기엔 규모가 크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었지만
만주북쪽의 소련과 소련지원하에 건국된 몽골과의 국경이 애매했다.
그러던중 몽골군이 애매하던 국경사이를 지나건것을 빌미로 일본군이 몽골군에 공격을 개시
이에 같은 공산주의국가인 소련도 나서게되며 규모가 커졋다.
일본군8만 소련군9만
일본군은 대다수가 깡보병이 주류
일본은 80여대의 전차가 전부다.
소련은 800여대의 전차 및 장갑차
600여대의 항공기의 지원이 따르던 사실상 육군면에서는 최강의 소련군이었다.
초반에 승기를 잡아 우세했으나
소련군의 탱크가 속속 지원오자 패하였다.
일본군의 피해가 큰건 맞으나
소련군의 피해도 막상막하였다.
일본군피해 전사8000 부상8000
소련군피해 전사9000 부상15000
단지 소련은 인구 및 자원면에서 월등하기때문에
이러한 전사자규모면에서 일본의 피해가 사실상 더큰것또한 사실이다.
결론은 한국내에서 일본을 좀 까내리려는 경향과 일본이 소련탱크에 대한 공포심에 대한 이미지가 겹치며 소련을 과대하게 포장한 사례이다.
그리고 그당시 소련의 명장으로 유명한 주코프가 참전한 전투였다는점에서 일본도 꽤 전과는 올린셈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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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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