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안데스 농민은 독일 에너지 대기업에 기후변화의 책임 따질 수 있나

이인숙 기자
독일 제2의 에너지 기업 RWE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운영하는 프리마스도르프 갈탄발전소. 세계자연기금은 2014년 낸 보고서에서 이 발전소가 유럽에서 두번째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뿜어내는 곳으로 지목했다. 세계자연기금

독일 제2의 에너지 기업 RWE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운영하는 프리마스도르프 갈탄발전소. 세계자연기금은 2014년 낸 보고서에서 이 발전소가 유럽에서 두번째로 이산화탄소를 많이 뿜어내는 곳으로 지목했다. 세계자연기금

페루 안데스 고산마을에 사는 농민이 1만㎞ 넘게 떨어진 독일의 에너지 대기업을 상대로 “당신 회사가 뿜어낸 온실가스로 빙하가 녹아 우리 동네가 침수될 위기에 처했다”며 피해를 배상하라고 따질 수 있을까. 독일 법원이 가능하다는 첫 판단을 내렸다. 부국들이 만들어낸 기후변화의 고통을 빈국이 감내해야 하는 ‘기후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의 중요한 선례가 되는 역사적 결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페루의 농민, 독일 에너지 기업에게 따지다

쥐트도이체차이퉁, 도이체벨레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독일 함고등법원은 30일(현지시간) 페루의 농민 사울 루치아노 릴루야가 독일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에센에 본부를 둔 에너지 대기업 RWE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주장에 근거가 충분하다”며 증거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에센지방법원이 “RWE와 릴루야 고향 마을의 상황이 관계가 있는지 법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각하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2015년 11월 릴루야는 ‘산업화 이후 RWE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에 0.47% 책임이 있다’는 보고서를 근거로 고향 우아라스의 홍수와 산사태 위협에 대해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갈탄발전소를 많이 돌리는 독일 제2의 에너지 기업인 RWE은 유럽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기업이다.

그는 고향 집이 침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쓴 6400유로(약 830만원)와 앞으로 들어갈 비용 1만7000유로(약 2200만원)를 청구했다. 우아라스는 페루 서부 앙카시주 해발 3051m에 위치한 고산 도시다. 우아라스 위로 23㎞ 떨어진 팔카코차 호수는 최근 안데스의 빙하가 녹아내려 2003년 이후 수위가 4배나 올라갔다. 인근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2011년에는 배수로를 설치해 수위를 3m가량 낮추는 응급조치를 취했다.

법원의 문턱을 넘는 데 성공한 사건은 이제 본안으로 들어가 증거 조사에 돌입한다. 릴루야의 집이 빙하로 녹은 홍수로 실제 심각한 위험에 처했는지, RWE가 정말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0.5%를 배출하는지, 이 온실가스가 우아라스의 홍수에 영향을 미쳤는지 등이 입증되야 한다.

함 고등법원은 “법에 맞게 행동한 사람도 그들이 끼친 손해에 책임질 필요가 있다”며 “이제 법원은 피고가 일련의 사건을 초래한 것이 측정되고 계산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13일 재판에 참석한 후 페루로 돌아간 릴루야는 전화로 소식을 듣고 “나뿐 아니라 우아라스의 사람들, 전 세계 기후변화 위험에 처한 모든 곳의 사람들에게 큰 성공”이라고 기뻐했다. 그는 “페루의 빙하가 줄게 만든 RWE의 책임을 입증하는 건 먼 길이 될 테지만 산악인인 우리는 멀고 험한 길에 익숙하다”고 의지를 보였다.

■기후변화 문제도 ‘정의’가 필요하다

2015년 6월24일 네덜란드헤이그지방법원 법정에서 정부의 이산화탄소 감축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환경단체 위르헨다와 시민들이 승소 판결에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위르헨다 사건’은 ‘기후정의’를 인정한 첫 판결로 평가된다. |위르헨다

2015년 6월24일 네덜란드헤이그지방법원 법정에서 정부의 이산화탄소 감축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환경단체 위르헨다와 시민들이 승소 판결에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있다. ‘위르헨다 사건’은 ‘기후정의’를 인정한 첫 판결로 평가된다. |위르헨다

독일 법원의 논리를 확장하면 남태평양에서 해수면 상승으로 잠겨가는 나라나 히말라야 고산지대 아래 홍수·물부족 피해 지역 주민 등 전 세계 기후변화로 피해를 보고 있는 개인들도 온실가스 배출에 책임이 큰 거대 에너지 기업이나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소송을 도운 독일 환경단체 저먼워치는 30일 보도자료에서 “기업이 기후변화 피해를 초래한 몫에 원칙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법원이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며 “기후변화 소송을 둘러싸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역사적 돌파구가 열렸다”고 밝혔다. 릴루야의 변호사 오다 바르하옌은 “증거조사 개시 단계에 들어간 것만으로 이미 사법 역사를 쓴 것”이라고 말했다.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은 1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지구 대기 중에 온실가스를 주로 배출하는 에너지 대기업이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제3세계 사람들에게 지고 있는 ‘생태부채’를 다툴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며 “몇 년 전부터 기후정의와 관련해 국제기후법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정의’라는 개념은 2000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6차 당사국 총회가 열릴 때 아프리카, 아시아, 북·남미 등에서 온 시민단체들이 기후정의 1차 정상회의를 열면서 탄생했다. 원주민네크워크, 세계우림운동, 지구의 벗 같은 단체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걸음마 단계다.

기후정의를 인정한 첫 판결은 2015년 6월 내려진 네덜란드의 ‘위르헨다 사건 ’이다. 네덜란드 환경단체 위르헨와 시민 900명이 정부를 상대로 “국민을 기후변화로부터 보호하는 조치가 불충분하다”며 낸 소송이다. 헤이그지방법원은 네덜란드 정부가 1990년과 비교해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당초 계획한 17%가 아니라 25%까지 감축해야 한다고 판결하며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가 항소해 내년 5월 항소심이 열린다. 정부의 법적 의무가 국제적 조약에만 묶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는 자국민에게도 독립적으로 법적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판단이었다.

같은 해 6월 미국 워싱턴주 킹카운티고등법원은 10대 8명과 9살 아동이 주 환경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청소년의 손을 들어줘 “주정부는 미래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한하기 위한 과학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듬해 스위스에서는 노인들이 나섰다. 70~80대 여성 150명이 기후변화로 인한 혹서로 노인 여성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다며 환경부를 고소했다. 정부가 1990년에 비해 2020년까지 이산화탄소를 20% 줄이겠다고 한 것은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학자, 의원 등 여성 지도자들이 주축이 됐다.

지금까지 내려진 판결이 주로 국내에서 자국 정부의 책임과 행동을 촉구하는 소송들이라면 30일 독일 법원의 판단은 다른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인과 관계가 매우 멀어보일 수 있는 지구상 어딘가의 기후변화 피해자와 다른 곳의 가해자인 거대 기업이 연결돼 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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