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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페루에 대해서
sang**** 조회수 15,425 작성일2009.10.18

저의 학교에서 사회2단원을 이제 곧 나가서요~
제가 조사할 나라는 공중도시 페루입니다

페루에 대해서 많이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미저리 같은것들 신고 아시죠?(내공냠냠,엉터리 답변,성의없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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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
은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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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공식 이름은 페루 공화국(Republic of Peru/República del Perú.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수도는 리마이다. 남위 0∼19˚(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2,132km), 서경 68∼82˚(917km)에 걸쳐 있다. 북서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쪽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는 브라질·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인접해 있다. 면적 1,285,216㎢, 인구 27,148,000(2003 추계).

 

 

페루국기에 대해서

페루 : 독립의 영웅인 호세 산 마르틴의 군대가 피스코에 상륙했을 때, 붉은 날개와 흰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새가 갑자기 날아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빨강과 하양은 이 새에서 유래한다. 문장은 특산인 라마 ·키나나무, 국부(國富)의 상징인 풍요각(豊饒角) 등으로 되어 있다. 1825년 제정.

 

자연환경

 

지형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3개 지역, 즉 코스타(해안)·시에라(고지대)·몬타냐(동쪽의 광대한 산림지)로 구분된다. 길고 좁은 건조 저지대인 코스타(460m)에 페루의 주요도시들이 있다. 시에라는 옥시덴탈 산계, 센트랄 산계, 오리엔탈 산계 등 안데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리엔탈 산계는 고도가 2,750∼5,800m에 이른다. 페루 최고봉은 페루 중서부에 있는 우아스카란 산(6,768m)이다. 시에라 지역의 너비는 북부에서 95km, 남부에서 320km 이하이다. 몬타냐는 해발 915m 이하의 습한 저지대이며,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을 포함한다. 페루를 흐르는 아마존 강의 본류로는 마라뇬 강과 우카얄리 강이 있다. 남부의 티티카카 호(8,288㎢)는 고도가 3,810m로 항행할 수 있는 수역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 페루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기 쉽다. 마지막 화산 분출이 186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진은 보다 잦은 편이다. 페루의 기후지역은 고도 및 안데스 산맥에 의하여 구분되는 기후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에서 19∼22℃, 안데스에서 1∼14℃, 동부 삼림지대에서 24∼35℃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다. 강수량은 동부에서 1,900∼3,175㎜로 가장 많고, 건조한 서부 해안에서는 50㎜로 가장 적으며, 설선은 4,480∼5,000m의 분포를 나타낸다.

 

서부해안지역은 식생이 희박해 선인장과 메뚜기콩 정도만이 자란다. 시에라의 식생에는 다년생 관목, 선인장, 후추나무, 키 큰 초본류 등이 포함되며, 페루에서 가장 식생이 풍부한 몬타냐 지역에서는 야생고무·마호가니·기나수·코코아·바닐라·쿠라레나무 등을 주로 볼 수 있다. 낙타와 모습이 비슷한 라마·알파카·비쿠나·과나코 등 유명한 페루 특유의 동물들이 모두 고지대에서 방목된다. 아마존 강 유역에 앵무새·원숭이·나무늘보·재규어·카피바라·악어 등이 서식하며, 강에는 피라니아가 산다. 페루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구리·철광·인산염·망간 등이 매장되어 있다. 북부 사막, 아마존 강 유역, 좁은 대륙붕에는 석유와 천연 가스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 수력발전의 개발 가능성도 매우 크다.

 

국민

 

가장 큰 민족은 케추아 인디언으로 전체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밖에 메스티소와 백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흑인과 아시아인(특히 일본인)도 소수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와 케추아어이다. 인디언 주민 가운데 다수는 아이마라어도 사용한다. 주민의 약 70%가 스페인어를 쓴다. 국민의 9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연평균 인구성장률은 라틴아메리카 평균치이며, 국민의 2/5가 15세 미만이다. 인구밀도는 적당한 편이며, 해안도시지역으로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2·3차 도심지들의 발전이 방해를 받고 있다. 수도인 리마에 인구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아레키파·카야오에 인구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인구의 70%가 도시에 살고 있다. 젊은 세대에 의한 엄청난 출산율로 인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이며, 사회적·경제적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성장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1976년 수많은 여성들을 노동력화시키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일반인 및 유아 사망률이 높고, 특히 시골지역에서 더 심각하다. 평균수명은 남자 58세, 여자 62세이다.

 

경제

 

농업·제조업·서비스업·광업 등이 근간을 이루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체제를 이루고 있다. 석유산업과 기타 산업 대부분은 1960년대말과 1970년대초 사이에 국유화되었다.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하도록 한 정부의 방침으로 외국회사의 투자가 위축되어왔다.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 심각한 상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인구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농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자의 1/3이 종사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는 주로 자급 수준의 영세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개지역 또는 해안가의 오아시스에 있는 농장에서는 수출용 곡물이 대량 재배된다. 전 국토의 3%만 경작이 가능하다. 가뭄이 잦으며 관개시설이 불충분하다. 1969년 토지개혁법을 제정하여 1만 500㏊의 토지를 몰수했으나 소수의 농민들만이 이득을 보았다. 작은 소작지는 협동농장에 합병되었다. 주요농작물은 사탕수수·목화·커피·감자·옥수수·벼·플랜틴 등이다. 코카인 채취를 위해 코카나무가 재배되며, 코카인은 콜롬비아에서 미국·유럽으로 밀수출된다. 양·라마·알파카·비쿠나 등이 양모를 얻기 위해 사육된다. 1972년 이전까지 페루는 세계의 주요어업국이었으며, 주요어획품종은 멸치류였다. 1972년의 엘니뇨(남아메리카 열대지방의 서해안을 흐르는 페루 한류에 이상난류가 유입되어 바닷물이 따뜻해지는 현상으로 플랑크톤·멸치류가 떼죽음을 당하며, 연안에는 집중호우·홍수 등의 재해가 유발됨) 현상으로 인해 어장이 큰 피해를 입었고, 어획고도 갑자기 떨어졌지만 여전히 세계 굴지의 어업국으로 남아 있다. 보존 조치를 통해 1980년대 이후 점차 회복되었다.

 

광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에서는 2%의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가 페루광물회사·페루중앙광물회사·페루석유회사를 통해 대부분의 광업을 통제한다. 판매는 페루광물상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페루는 주요석유생산국이며, 석유수출액은 대략 구리와 맞먹는다. 송유관이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해안과 북동부 정글 지대에 있는 유전을 연결한다. 티티카카 호 북쪽에는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철·아연·구리·비스무트·납·은 생산도 세계적이며, 광물이 페루 전체 수출액의 2/3를 차지한다. 공업은 리마와 인접한 카야오 주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제조업이 GNP의 약 1/3, 노동력의 1/10 이상을 담당한다. 주요제품으로는 시멘트·직물·강철·텔레비전·가공식품·정유·타이어·자동차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말부터 실제 구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결과 제조업의 국내수요는 줄어들었다.

 

전력은 정부가 통제하며 주로 수력발전에 의존한다. 그러나 국민의 3/4 미만에 해당하는 정도에만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도로는 1/10이 포장되어 있다. 1972년 공공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카야오는 페루의 수많은 해항·하항·호항들 가운데 가장 크며, 페루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이 있다. 수출품에는 광산물·농산물·수산물·석유 등이 포함되며, 수입품은 주로 식량, 소비재, 국내 기타 산업을 위한 조립부품 등이다. 미국·일본·독일 등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다. 수출관세가 터무니없이 높았지만 간접세 징수를 위해 줄이고 있다. 수입할당액은 높은 관세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 이후 외화획득에 큰 몫을 해온 상품의 국제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페루는 외채를 상환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외채상환이 심각할 정도로 연기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차관을 제한했다. 1987년에는 금융조직을 국영화했다.

 

정치·사회

 

20년 이상의 군부통치가 끝나고, 1980년 문민정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1979년 공포된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선출된 5년 임기의 대통령에게 행정권이 주어진다.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대통령을 보좌한다. 입법권은 180명의 하원의원과 60명의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의회에 있다. 의원은 임기 5년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나 상원의원은 지역구로 하원은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된다. 주요정당은 중도파인 아메리카 혁명 인민동맹(APRA)이다. 사법부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며, 고등법원·원심법원을 포함한다.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질병·임산부·신체장애자에게 금전적 혜택과 의료혜택을 제공하며, 노인, 병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 무능력자, 무의탁자에게는 연금을 지급한다. 고용조건은 노동법에 의해 보장된다. 그러나 장티푸스·결핵·위장질환·백일해·말라리아·감기를 비롯한 전염병이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 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영양결핍이 특히 심각하며, 시골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하며, 물과 하수설비가 부족하며, 도시 외곽의 무허가촌과 시내의 값싼 도시빈민 아파트에는 증가하는 도시빈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문맹률이 낮은 편이다. 6∼15세의 아동들에게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성인문맹퇴치 프로그램과 기술교육이 다른 정책보다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리마의 산마르코스국립대학교(1551)를 비롯해 30여 개의 대학이 있다. 1791년에 첫 신문사가 창립된 페루는 남아메리카 최고(最古)로 손꼽히는 신문의 역사를 자랑한다. 군사통치시기에 신문은 검열법이 도입되기도 했으나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폐지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전체 또는 일부가 국가 소유로 되어 있다.

 

문화

 

페루의 고대문화는 스페인-잉카 도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쿠스코에서 80km 떨어진 해발 2,450m의 고지에 있는 잉카 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의 유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민속문화에 스페인 통치 이전과 메스티소 전통에서 유래된 요소들이 풍부하다. 고대 페루인들은 건물을 자연경관에 조화시키는 훌륭한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축물은 리마 대성당이며, 리마산프란시스코 교회와 수도원도 중요하다. 19세기말 이후의 저명한 작가로는 세사르 바예호, 호세 마리아 아르궤다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이 손꼽힌다. 주요음악작품으로는 바예 리에스트라의 〈오얀타 Ollanta〉와 빈센테 스테아의 〈Sinfonía autóctona〉 등 19세기의 작품들이 있다. 미술은 쿠스코파가 활동하던 17∼18세기에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역사

 

페루에는 적어도 BC 8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피었다. 1438년경 잉카 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를 탐험했다(→ 스페인사).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잉카의 왕인 아타우아이파를 죽였다. 스페인은 페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했고, 약 300년간 페루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9세기초 독립운동 당시도 페루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836년 안드레스 산타 크루스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만들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병시켰으나 이 합병은 1839년 페루군이 칠레에 패하자 깨어졌다. 1844∼62년 라몬 카스티야 장군의 페루 통치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카스티야는 공공교육을 발전시켰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대를 강화시켰다. 1870년대에 시민당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통제권이 군(軍)에서 민간정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혼란은 칠레와의 전쟁(1879∼84)에서 패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공공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회복을 돕기 위해 채권자들이 1889년 페루회사를 설립했다. 1895년에 민주당이 성립되고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질서정연한 발전을 이룬 후에 시민당의 아우구스토 레기아 이 살세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1908∼12) 통치했다. 레기아는 1919년 재선되어 미국 출자공공사업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재선되었지만 인기가 하락했고,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군의 지도자인 루이스 산체스 세로 대령은 1931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33년 암살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장군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마누엘 프라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누엘 오드리아가 정권을 장악했다(1948). 1956년 오드리아의 뒤를 이어 프라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63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대통령이 되어 효율적인 농경지 이용, 조직적인 지역사회 개발을 시작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다. 1969년 군사평의회가 정권을 잡고 난 뒤 많은 외국상사 재산을 국유화했고, 대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소작농이 수용하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8월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군사평의회를 대체했고, 문민정부를 회복하는 기반을 닦았다. 새 군사평의회는 1978년 새헌법 초안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980년 벨라운데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5년에는 APRA의 알란 가르시아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 두 정부는 모두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엄청난 외채, 테러리스트 전술을 사용하는 신(新)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 게릴라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마약 거래와 만연해진 코카나무 재배로 경제개혁도 난관에 부딪혔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조치, 의회와의 대결 및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현재는 진정되어가는 추세이다.

 

한국과의 관계

 

페루는 한국정부와 1963년 4월 1일 국교를 수립했다. 1971년 8월 1일 주(駐)페루 상주공관이, 1980년 2월 8일 주한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현재 양국간에는 통상협력(1976. 5)·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81. 12)·투자보장협정(1993. 6) 등이 체결되어 있다. 1982년 페루의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12월 페루에서 자원협력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1993년 6월 2일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2박 3일간 공식 방한했다. 북한은 1974년 7월 11일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1989년 11월 21일 국교를 수립했다. 페루는 동광석을 수출하고 한국은 주로 텔레비전·철강제품 등을 수출한다. 1991년 대한 수입액은 2,000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1억 3,500만 달러이다. 1990년 6월 현재 교민 476명, 체류자 49명이다.

2009.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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