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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페루 파나마에대해서....
whdw**** 조회수 14,327 작성일2005.10.10
페루 파나마에 대해서좀 알려주세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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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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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루

 

공식 이름은 페루 공화국(Republic of Peru/República del Perú.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개요

 

지도

수도는 리마이다. 남위 0∼19˚(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2,132km), 서경 68∼82˚(917km)에 걸쳐 있다. 북서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쪽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는 브라질·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인접해 있다. 면적 1,285,216㎢, 인구 27,148,000(2003 추계).

 

자연환경

 

지형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3개 지역, 즉 코스타(해안)·시에라(고지대)·몬타냐(동쪽의 광대한 산림지)로 구분된다. 길고 좁은 건조 저지대인 코스타(460m)에 페루의 주요도시들이 있다. 시에라는 옥시덴탈 산계, 센트랄 산계, 오리엔탈 산계 등 안데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리엔탈 산계는 고도가 2,750∼5,800m에 이른다. 페루 최고봉은 페루 중서부에 있는 우아스카란 산(6,768m)이다. 시에라 지역의 너비는 북부에서 95km, 남부에서 320km 이하이다. 몬타냐는 해발 915m 이하의 습한 저지대이며,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을 포함한다. 페루를 흐르는 아마존 강의 본류로는 마라뇬 강과 우카얄리 강이 있다. 남부의 티티카카 호(8,288㎢)는 고도가 3,810m로 항행할 수 있는 수역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 페루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기 쉽다. 마지막 화산 분출이 186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진은 보다 잦은 편이다. 페루의 기후지역은 고도 및 안데스 산맥에 의하여 구분되는 기후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에서 19∼22℃, 안데스에서 1∼14℃, 동부 삼림지대에서 24∼35℃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다. 강수량은 동부에서 1,900∼3,175㎜로 가장 많고, 건조한 서부 해안에서는 50㎜로 가장 적으며, 설선은 4,480∼5,000m의 분포를 나타낸다.

 

서부해안지역은 식생이 희박해 선인장과 메뚜기콩 정도만이 자란다. 시에라의 식생에는 다년생 관목, 선인장, 후추나무, 키 큰 초본류 등이 포함되며, 페루에서 가장 식생이 풍부한 몬타냐 지역에서는 야생고무·마호가니·기나수·코코아·바닐라·쿠라레나무 등을 주로 볼 수 있다. 낙타와 모습이 비슷한 라마·알파카·비쿠나·과나코 등 유명한 페루 특유의 동물들이 모두 고지대에서 방목된다. 아마존 강 유역에 앵무새·원숭이·나무늘보·재규어·카피바라·악어 등이 서식하며, 강에는 피라니아가 산다. 페루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구리·철광·인산염·망간 등이 매장되어 있다. 북부 사막, 아마존 강 유역, 좁은 대륙붕에는 석유와 천연 가스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 수력발전의 개발 가능성도 매우 크다.

 

국민

 

가장 큰 민족은 케추아 인디언으로 전체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밖에 메스티소와 백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흑인과 아시아인(특히 일본인)도 소수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와 케추아어이다. 인디언 주민 가운데 다수는 아이마라어도 사용한다. 주민의 약 70%가 스페인어를 쓴다. 국민의 9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연평균 인구성장률은 라틴아메리카 평균치이며, 국민의 2/5가 15세 미만이다. 인구밀도는 적당한 편이며, 해안도시지역으로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2·3차 도심지들의 발전이 방해를 받고 있다. 수도인 리마에 인구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아레키파·카야오에 인구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인구의 70%가 도시에 살고 있다. 젊은 세대에 의한 엄청난 출산율로 인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이며, 사회적·경제적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성장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1976년 수많은 여성들을 노동력화시키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일반인 및 유아 사망률이 높고, 특히 시골지역에서 더 심각하다. 평균수명은 남자 58세, 여자 62세이다.

 

경제

 

농업·제조업·서비스업·광업 등이 근간을 이루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체제를 이루고 있다. 석유산업과 기타 산업 대부분은 1960년대말과 1970년대초 사이에 국유화되었다.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하도록 한 정부의 방침으로 외국회사의 투자가 위축되어왔다.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 심각한 상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인구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농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자의 1/3이 종사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는 주로 자급 수준의 영세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개지역 또는 해안가의 오아시스에 있는 농장에서는 수출용 곡물이 대량 재배된다. 전 국토의 3%만 경작이 가능하다. 가뭄이 잦으며 관개시설이 불충분하다. 1969년 토지개혁법을 제정하여 1만 500㏊의 토지를 몰수했으나 소수의 농민들만이 이득을 보았다. 작은 소작지는 협동농장에 합병되었다. 주요농작물은 사탕수수·목화·커피·감자·옥수수·벼·플랜틴 등이다. 코카인 채취를 위해 코카나무가 재배되며, 코카인은 콜롬비아에서 미국·유럽으로 밀수출된다. 양·라마·알파카·비쿠나 등이 양모를 얻기 위해 사육된다. 1972년 이전까지 페루는 세계의 주요어업국이었으며, 주요어획품종은 멸치류였다. 1972년의 엘니뇨(남아메리카 열대지방의 서해안을 흐르는 페루 한류에 이상난류가 유입되어 바닷물이 따뜻해지는 현상으로 플랑크톤·멸치류가 떼죽음을 당하며, 연안에는 집중호우·홍수 등의 재해가 유발됨) 현상으로 인해 어장이 큰 피해를 입었고, 어획고도 갑자기 떨어졌지만 여전히 세계 굴지의 어업국으로 남아 있다. 보존 조치를 통해 1980년대 이후 점차 회복되었다.

 

광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에서는 2%의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가 페루광물회사·페루중앙광물회사·페루석유회사를 통해 대부분의 광업을 통제한다. 판매는 페루광물상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페루는 주요석유생산국이며, 석유수출액은 대략 구리와 맞먹는다. 송유관이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해안과 북동부 정글 지대에 있는 유전을 연결한다. 티티카카 호 북쪽에는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철·아연·구리·비스무트·납·은 생산도 세계적이며, 광물이 페루 전체 수출액의 2/3를 차지한다. 공업은 리마와 인접한 카야오 주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제조업이 GNP의 약 1/3, 노동력의 1/10 이상을 담당한다. 주요제품으로는 시멘트·직물·강철·텔레비전·가공식품·정유·타이어·자동차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말부터 실제 구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결과 제조업의 국내수요는 줄어들었다.

 

전력은 정부가 통제하며 주로 수력발전에 의존한다. 그러나 국민의 3/4 미만에 해당하는 정도에만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도로는 1/10이 포장되어 있다. 1972년 공공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카야오는 페루의 수많은 해항·하항·호항들 가운데 가장 크며, 페루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이 있다. 수출품에는 광산물·농산물·수산물·석유 등이 포함되며, 수입품은 주로 식량, 소비재, 국내 기타 산업을 위한 조립부품 등이다. 미국·일본·독일 등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다. 수출관세가 터무니없이 높았지만 간접세 징수를 위해 줄이고 있다. 수입할당액은 높은 관세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 이후 외화획득에 큰 몫을 해온 상품의 국제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페루는 외채를 상환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외채상환이 심각할 정도로 연기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차관을 제한했다. 1987년에는 금융조직을 국영화했다.

 

정치·사회

 

20년 이상의 군부통치가 끝나고, 1980년 문민정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1979년 공포된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선출된 5년 임기의 대통령에게 행정권이 주어진다.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대통령을 보좌한다. 입법권은 180명의 하원의원과 60명의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의회에 있다. 의원은 임기 5년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나 상원의원은 지역구로 하원은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된다. 주요정당은 중도파인 아메리카 혁명 인민동맹(APRA)이다. 사법부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며, 고등법원·원심법원을 포함한다.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질병·임산부·신체장애자에게 금전적 혜택과 의료혜택을 제공하며, 노인, 병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 무능력자, 무의탁자에게는 연금을 지급한다. 고용조건은 노동법에 의해 보장된다. 그러나 장티푸스·결핵·위장질환·백일해·말라리아·감기를 비롯한 전염병이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 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영양결핍이 특히 심각하며, 시골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하며, 물과 하수설비가 부족하며, 도시 외곽의 무허가촌과 시내의 값싼 도시빈민 아파트에는 증가하는 도시빈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문맹률이 낮은 편이다. 6∼15세의 아동들에게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성인문맹퇴치 프로그램과 기술교육이 다른 정책보다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리마의 산마르코스국립대학교(1551)를 비롯해 30여 개의 대학이 있다. 1791년에 첫 신문사가 창립된 페루는 남아메리카 최고(最古)로 손꼽히는 신문의 역사를 자랑한다. 군사통치시기에 신문은 검열법이 도입되기도 했으나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폐지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전체 또는 일부가 국가 소유로 되어 있다.

 

문화

 

페루의 고대문화는 스페인-잉카 도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쿠스코에서 80km 떨어진 해발 2,450m의 고지에 있는 잉카 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의 유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민속문화에 스페인 통치 이전과 메스티소 전통에서 유래된 요소들이 풍부하다. 고대 페루인들은 건물을 자연경관에 조화시키는 훌륭한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축물은 리마 대성당이며, 리마산프란시스코 교회와 수도원도 중요하다. 19세기말 이후의 저명한 작가로는 세사르 바예호, 호세 마리아 아르궤다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이 손꼽힌다. 주요음악작품으로는 바예 리에스트라의 〈오얀타 Ollanta〉와 빈센테 스테아의 〈Sinfonía autóctona〉 등 19세기의 작품들이 있다. 미술은 쿠스코파가 활동하던 17∼18세기에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역사

 

페루에는 적어도 BC 8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피었다. 1438년경 잉카 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를 탐험했다(→ 스페인사).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잉카의 왕인 아타우아이파를 죽였다. 스페인은 페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했고, 약 300년간 페루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9세기초 독립운동 당시도 페루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836년 안드레스 산타 크루스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만들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병시켰으나 이 합병은 1839년 페루군이 칠레에 패하자 깨어졌다. 1844∼62년 라몬 카스티야 장군의 페루 통치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카스티야는 공공교육을 발전시켰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대를 강화시켰다. 1870년대에 시민당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통제권이 군(軍)에서 민간정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혼란은 칠레와의 전쟁(1879∼84)에서 패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공공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회복을 돕기 위해 채권자들이 1889년 페루회사를 설립했다. 1895년에 민주당이 성립되고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질서정연한 발전을 이룬 후에 시민당의 아우구스토 레기아 이 살세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1908∼12) 통치했다. 레기아는 1919년 재선되어 미국 출자공공사업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재선되었지만 인기가 하락했고,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군의 지도자인 루이스 산체스 세로 대령은 1931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33년 암살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장군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마누엘 프라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누엘 오드리아가 정권을 장악했다(1948). 1956년 오드리아의 뒤를 이어 프라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63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대통령이 되어 효율적인 농경지 이용, 조직적인 지역사회 개발을 시작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다. 1969년 군사평의회가 정권을 잡고 난 뒤 많은 외국상사 재산을 국유화했고, 대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소작농이 수용하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8월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군사평의회를 대체했고, 문민정부를 회복하는 기반을 닦았다. 새 군사평의회는 1978년 새헌법 초안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980년 벨라운데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5년에는 APRA의 알란 가르시아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 두 정부는 모두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엄청난 외채, 테러리스트 전술을 사용하는 신(新)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 게릴라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마약 거래와 만연해진 코카나무 재배로 경제개혁도 난관에 부딪혔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조치, 의회와의 대결 및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현재는 진정되어가는 추세이다.

 

한국과의 관계

 

페루는 한국정부와 1963년 4월 1일 국교를 수립했다. 1971년 8월 1일 주(駐)페루 상주공관이, 1980년 2월 8일 주한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현재 양국간에는 통상협력(1976. 5)·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81. 12)·투자보장협정(1993. 6) 등이 체결되어 있다. 1982년 페루의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12월 페루에서 자원협력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1993년 6월 2일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2박 3일간 공식 방한했다. 북한은 1974년 7월 11일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1989년 11월 21일 국교를 수립했다. 페루는 동광석을 수출하고 한국은 주로 텔레비전·철강제품 등을 수출한다. 1991년 대한 수입액은 2,000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1억 3,500만 달러이다. 1990년 6월 현재 교민 476명, 체류자 49명이다.

 

 

 

페루    원본보기
  

 

경제

 

파나마는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수송·통신·저장 서비스업, 국제금융, 관광업 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장경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보다 느리나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농업은 GNP의 1/10을 차지할 뿐이지만 노동력의 1/3이 종사하고 있다. 주로 벼·옥수수·콩 등이 재배된다. 밀을 제외하면 식량은 대부분 자급자족할 수 있다. 바나나·설탕·커피·카카오 등의 환금작물이 가장 중요한 수출품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목축의 비중이 크며, 어업은 성장산업으로 새우·바다가재·보리새우·어분 등이 주로 수출된다. 광업은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파나마시티와 그 주변에서 식품·시멘트·건축자재·석유제품·의류·가구 등의 제조업이 주로 행해진다. 138km의 파나마 횡단송유관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규모 계획이 건설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전력은 주로 수력발전에 의존하며, 수입연료로도 소량 생산된다. 서비스업이 GNP의 3/4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1/2이 종사하고 있다. 1960년대말부터 파나마는 유리한 금융법, 우수한 교통·통신 시설, 환(換)관리의 부재, 파나마 통화인 발보아의 미국 통화로의 자유로운 환 대체 등을 이용해 주요 국제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미국의 높은 이자율로 인해 1980년대말부터 상대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파나마 운하에서 나오는 서비스 수입액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미국·일본·멕시코·독일 및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다. 이들은 연료·윤활유·기계류·수송장비·염기제품·화학제품·식품 등을 파나마에 수출한다. 1953년에 세워진 콜론 자유무역지대는 세계 최대의 무역 중심지로 꼽히며 저장·조립·옮겨싣기 등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서비스 수출이 제품 수출보다 비중이 크다. 파나마 운하, 자유무역지대, 국제금융, 관광업 등의 관련 서비스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전통적으로 계속되는 거대한 무역적자를 상쇄한다.

 

정치·사회

 

파나마는 1972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라 통치되는 시민공화국이다. 1983년에 승인된 일련의 헌법개정하에 단원제인 입법부는 5년 임기로 선출된 6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에는 법률제정 발의권, 국제조약 결정권, 예산승인권, 정당창당권 등의 권한이 주어진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각료와 다른 핵심 공직자를 직접 임명하며 임기는 5년이다. 사법부는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다. 주요정당으로 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성향의 민주혁명당(PRD)과 구속력이 약한 동맹인 전국반대전선당(FNO)이 있다.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노동자에게 질병·임신 수당을 제공하며, 노인·무능력자·유가족 등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결핵이 만연한 도시 빈민지역을 제외하면 위생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주민 대부분이 몇몇 종류의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1인당 의사 비율이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유아사망률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평균수명은 남자 약 70세, 여자 약 74세로 라틴 아메리카의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모든 아동은 6학년까지의 초등교육을 마치거나 15세까지 학교에 다녀야 한다. 초등교육 취학연령에 있는 아동 가운데 거의 90%가 학교에 다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에 갈 수 있다. 중등학교는 다시 3년씩 두 과정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상급과정에서 '바치예라토'라는 학위를 수여받으면 파나마대학교(1935)와 산타마리아라안티과대학교(1965) 같은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다. 1980년대말 반정부 항거가 있고 나서 대중매체는 엄격한 검열을 받게 되었다.

 

문화

 

파나마의 음악과 춤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다채로운 편이다. 드럼과 박수에 맞추어 추는 아프리카 춤인 탐보리토가 여전히 인기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민요는 18세기 스페인에서 전래된 메호라나이다.

 

역사

 

1501년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포르토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타페데보고타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 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퍼져나갔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는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으로 파나마가 예전의 미국 운하지대에 대한 사법권을 맡게 되었으나, 운하 자체의 운용권은 1999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다. 20세기말 경제침체와 심각한 정치변동은 1989년 12월 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국방부 총사령관이자 파나마의 실권자인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물러나게 했다.

 

한국과의 관계

 

파나마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승인, 1962년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1973년 5월 5일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1979년 3월 1일에는 주한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4년 7월 대통령 당선자 바를레타가 방한하여 우호를 다졌다. 양국간에 문화협정(1974. 6)·항공협정(1979. 12)이 체결되었다. 해외지사 14개, 교포상사 9개가 진출해 있다. 한국은 의류·선박을 수출하고, 파나마는 선박·석유를 수출한다.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은 31억 9,501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5억 4,765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수는 89명, 체류자는 239명에 이른다.

 

 

 

200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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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루

 

공식 이름은 페루 공화국(Republic of Peru/República del Perú.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국가.

 

개요

 

지도

수도는 리마이다. 남위 0∼19˚(북서에서 남동방향으로 2,132km), 서경 68∼82˚(917km)에 걸쳐 있다. 북서쪽으로 에콰도르, 북동쪽으로 콜롬비아, 동쪽으로는 브라질·볼리비아, 남쪽으로는 칠레, 서쪽으로는 태평양에 인접해 있다. 면적 1,285,216㎢, 인구 27,148,000(2003 추계).

 

자연환경

 

지형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3개 지역, 즉 코스타(해안)·시에라(고지대)·몬타냐(동쪽의 광대한 산림지)로 구분된다. 길고 좁은 건조 저지대인 코스타(460m)에 페루의 주요도시들이 있다. 시에라는 옥시덴탈 산계, 센트랄 산계, 오리엔탈 산계 등 안데스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리엔탈 산계는 고도가 2,750∼5,800m에 이른다. 페루 최고봉은 페루 중서부에 있는 우아스카란 산(6,768m)이다. 시에라 지역의 너비는 북부에서 95km, 남부에서 320km 이하이다. 몬타냐는 해발 915m 이하의 습한 저지대이며, 아마존 강 유역의 열대우림지역을 포함한다. 페루를 흐르는 아마존 강의 본류로는 마라뇬 강과 우카얄리 강이 있다. 남부의 티티카카 호(8,288㎢)는 고도가 3,810m로 항행할 수 있는 수역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 페루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기 쉽다. 마지막 화산 분출이 186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진은 보다 잦은 편이다. 페루의 기후지역은 고도 및 안데스 산맥에 의하여 구분되는 기후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해안에서 19∼22℃, 안데스에서 1∼14℃, 동부 삼림지대에서 24∼35℃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크다. 강수량은 동부에서 1,900∼3,175㎜로 가장 많고, 건조한 서부 해안에서는 50㎜로 가장 적으며, 설선은 4,480∼5,000m의 분포를 나타낸다.

 

서부해안지역은 식생이 희박해 선인장과 메뚜기콩 정도만이 자란다. 시에라의 식생에는 다년생 관목, 선인장, 후추나무, 키 큰 초본류 등이 포함되며, 페루에서 가장 식생이 풍부한 몬타냐 지역에서는 야생고무·마호가니·기나수·코코아·바닐라·쿠라레나무 등을 주로 볼 수 있다. 낙타와 모습이 비슷한 라마·알파카·비쿠나·과나코 등 유명한 페루 특유의 동물들이 모두 고지대에서 방목된다. 아마존 강 유역에 앵무새·원숭이·나무늘보·재규어·카피바라·악어 등이 서식하며, 강에는 피라니아가 산다. 페루에는 엄청난 양의 금·은·구리·철광·인산염·망간 등이 매장되어 있다. 북부 사막, 아마존 강 유역, 좁은 대륙붕에는 석유와 천연 가스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 수력발전의 개발 가능성도 매우 크다.

 

국민

 

가장 큰 민족은 케추아 인디언으로 전체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밖에 메스티소와 백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흑인과 아시아인(특히 일본인)도 소수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와 케추아어이다. 인디언 주민 가운데 다수는 아이마라어도 사용한다. 주민의 약 70%가 스페인어를 쓴다. 국민의 9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연평균 인구성장률은 라틴아메리카 평균치이며, 국민의 2/5가 15세 미만이다. 인구밀도는 적당한 편이며, 해안도시지역으로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2·3차 도심지들의 발전이 방해를 받고 있다. 수도인 리마에 인구가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아레키파·카야오에 인구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인구의 70%가 도시에 살고 있다. 젊은 세대에 의한 엄청난 출산율로 인해 자급자족이 어려울 정도이며, 사회적·경제적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성장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1976년 수많은 여성들을 노동력화시키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일반인 및 유아 사망률이 높고, 특히 시골지역에서 더 심각하다. 평균수명은 남자 58세, 여자 62세이다.

 

경제

 

농업·제조업·서비스업·광업 등이 근간을 이루는 개발도상의 혼합경제체제를 이루고 있다. 석유산업과 기타 산업 대부분은 1960년대말과 1970년대초 사이에 국유화되었다.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하도록 한 정부의 방침으로 외국회사의 투자가 위축되어왔다.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 심각한 상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인구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농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자의 1/3이 종사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는 주로 자급 수준의 영세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관개지역 또는 해안가의 오아시스에 있는 농장에서는 수출용 곡물이 대량 재배된다. 전 국토의 3%만 경작이 가능하다. 가뭄이 잦으며 관개시설이 불충분하다. 1969년 토지개혁법을 제정하여 1만 500㏊의 토지를 몰수했으나 소수의 농민들만이 이득을 보았다. 작은 소작지는 협동농장에 합병되었다. 주요농작물은 사탕수수·목화·커피·감자·옥수수·벼·플랜틴 등이다. 코카인 채취를 위해 코카나무가 재배되며, 코카인은 콜롬비아에서 미국·유럽으로 밀수출된다. 양·라마·알파카·비쿠나 등이 양모를 얻기 위해 사육된다. 1972년 이전까지 페루는 세계의 주요어업국이었으며, 주요어획품종은 멸치류였다. 1972년의 엘니뇨(남아메리카 열대지방의 서해안을 흐르는 페루 한류에 이상난류가 유입되어 바닷물이 따뜻해지는 현상으로 플랑크톤·멸치류가 떼죽음을 당하며, 연안에는 집중호우·홍수 등의 재해가 유발됨) 현상으로 인해 어장이 큰 피해를 입었고, 어획고도 갑자기 떨어졌지만 여전히 세계 굴지의 어업국으로 남아 있다. 보존 조치를 통해 1980년대 이후 점차 회복되었다.

 

광업은 GNP의 1/10을 차지하며, 노동인구에서는 2%의 비중을 차지한다. 정부가 페루광물회사·페루중앙광물회사·페루석유회사를 통해 대부분의 광업을 통제한다. 판매는 페루광물상사에서 담당하고 있다. 페루는 주요석유생산국이며, 석유수출액은 대략 구리와 맞먹는다. 송유관이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해안과 북동부 정글 지대에 있는 유전을 연결한다. 티티카카 호 북쪽에는 우라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철·아연·구리·비스무트·납·은 생산도 세계적이며, 광물이 페루 전체 수출액의 2/3를 차지한다. 공업은 리마와 인접한 카야오 주변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제조업이 GNP의 약 1/3, 노동력의 1/10 이상을 담당한다. 주요제품으로는 시멘트·직물·강철·텔레비전·가공식품·정유·타이어·자동차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말부터 실제 구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결과 제조업의 국내수요는 줄어들었다.

 

전력은 정부가 통제하며 주로 수력발전에 의존한다. 그러나 국민의 3/4 미만에 해당하는 정도에만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도로는 1/10이 포장되어 있다. 1972년 공공철도가 국유화되었다. 카야오는 페루의 수많은 해항·하항·호항들 가운데 가장 크며, 페루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이 있다. 수출품에는 광산물·농산물·수산물·석유 등이 포함되며, 수입품은 주로 식량, 소비재, 국내 기타 산업을 위한 조립부품 등이다. 미국·일본·독일 등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다. 수출관세가 터무니없이 높았지만 간접세 징수를 위해 줄이고 있다. 수입할당액은 높은 관세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 이후 외화획득에 큰 몫을 해온 상품의 국제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페루는 외채를 상환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외채상환이 심각할 정도로 연기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차관을 제한했다. 1987년에는 금융조직을 국영화했다.

 

정치·사회

 

20년 이상의 군부통치가 끝나고, 1980년 문민정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1979년 공포된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선출된 5년 임기의 대통령에게 행정권이 주어진다.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이 대통령을 보좌한다. 입법권은 180명의 하원의원과 60명의 상원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의회에 있다. 의원은 임기 5년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되나 상원의원은 지역구로 하원은 비례대표제에 의해 선출된다. 주요정당은 중도파인 아메리카 혁명 인민동맹(APRA)이다. 사법부는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며, 고등법원·원심법원을 포함한다.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으로 질병·임산부·신체장애자에게 금전적 혜택과 의료혜택을 제공하며, 노인, 병으로 치료를 받는 사람, 무능력자, 무의탁자에게는 연금을 지급한다. 고용조건은 노동법에 의해 보장된다. 그러나 장티푸스·결핵·위장질환·백일해·말라리아·감기를 비롯한 전염병이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 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영양결핍이 특히 심각하며, 시골에는 의료시설이 부족하며, 물과 하수설비가 부족하며, 도시 외곽의 무허가촌과 시내의 값싼 도시빈민 아파트에는 증가하는 도시빈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보다 문맹률이 낮은 편이다. 6∼15세의 아동들에게 무상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성인문맹퇴치 프로그램과 기술교육이 다른 정책보다 우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리마의 산마르코스국립대학교(1551)를 비롯해 30여 개의 대학이 있다. 1791년에 첫 신문사가 창립된 페루는 남아메리카 최고(最古)로 손꼽히는 신문의 역사를 자랑한다. 군사통치시기에 신문은 검열법이 도입되기도 했으나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폐지되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전체 또는 일부가 국가 소유로 되어 있다.

 

문화

 

페루의 고대문화는 스페인-잉카 도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쿠스코에서 80km 떨어진 해발 2,450m의 고지에 있는 잉카 제국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의 유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민속문화에 스페인 통치 이전과 메스티소 전통에서 유래된 요소들이 풍부하다. 고대 페루인들은 건물을 자연경관에 조화시키는 훌륭한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식민지시대 건축물은 리마 대성당이며, 리마산프란시스코 교회와 수도원도 중요하다. 19세기말 이후의 저명한 작가로는 세사르 바예호, 호세 마리아 아르궤다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이 손꼽힌다. 주요음악작품으로는 바예 리에스트라의 〈오얀타 Ollanta〉와 빈센테 스테아의 〈Sinfonía autóctona〉 등 19세기의 작품들이 있다. 미술은 쿠스코파가 활동하던 17∼18세기에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역사

 

페루에는 적어도 BC 8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부터 발달된 다양한 문화가 페루 각지에서 꽃피었다. 1438년경 잉카 제국이 50년에 걸친 정복사업을 시작했으며, 결국은 지금의 페루,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을 장악했다. 1524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처음 페루를 탐험했다(→ 스페인사). 그는 1531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다시 와서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잉카의 왕인 아타우아이파를 죽였다. 스페인은 페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했고, 약 300년간 페루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9세기초 독립운동 당시도 페루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지키고 있었다. 페루의 독립운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이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에 힘입어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1년 리마를 점령한 후 페루는 독립을 선포했다.

 

1836년 안드레스 산타 크루스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만들기 위해 페루와 볼리비아를 합병시켰으나 이 합병은 1839년 페루군이 칠레에 패하자 깨어졌다. 1844∼62년 라몬 카스티야 장군의 페루 통치기간 동안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카스티야는 공공교육을 발전시켰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대를 강화시켰다. 1870년대에 시민당이 형성되면서 국가의 통제권이 군(軍)에서 민간정부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경제침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혼란은 칠레와의 전쟁(1879∼84)에서 패함으로써 더욱 심각해졌다. 공공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경제회복을 돕기 위해 채권자들이 1889년 페루회사를 설립했다. 1895년에 민주당이 성립되고 니콜라스 데 피에롤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질서정연한 발전을 이룬 후에 시민당의 아우구스토 레기아 이 살세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4년간(1908∼12) 통치했다. 레기아는 1919년 재선되어 미국 출자공공사업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재선되었지만 인기가 하락했고, 1930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군의 지도자인 루이스 산체스 세로 대령은 1931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33년 암살되었다. 그의 후임자인 오스카르 베나비데스 장군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마누엘 프라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쟁이 끝나자 마누엘 오드리아가 정권을 장악했다(1948). 1956년 오드리아의 뒤를 이어 프라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1963년에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대통령이 되어 효율적인 농경지 이용, 조직적인 지역사회 개발을 시작하고 문맹퇴치에 힘썼다. 1969년 군사평의회가 정권을 잡고 난 뒤 많은 외국상사 재산을 국유화했고, 대지주가 소유했던 토지를 소작농이 수용하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75년 8월 또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기존의 군사평의회를 대체했고, 문민정부를 회복하는 기반을 닦았다. 새 군사평의회는 1978년 새헌법 초안을 위한 제헌의회를 소집했다. 1980년 벨라운데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85년에는 APRA의 알란 가르시아 페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 두 정부는 모두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엄청난 외채, 테러리스트 전술을 사용하는 신(新)마오주의 단체인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 게릴라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마약 거래와 만연해진 코카나무 재배로 경제개혁도 난관에 부딪혔다. 1990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일본계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에 의한 헌정중단조치, 의회와의 대결 및 대통령 암살과 정부 전복 쿠데타 기도 등으로 정국이 혼미했으나 같은 해 11월 총선거에서 후지모리가 승리함으로써 현재는 진정되어가는 추세이다.

 

한국과의 관계

 

페루는 한국정부와 1963년 4월 1일 국교를 수립했다. 1971년 8월 1일 주(駐)페루 상주공관이, 1980년 2월 8일 주한 상주공관이 설치되었다. 현재 양국간에는 통상협력(1976. 5)·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81. 12)·투자보장협정(1993. 6) 등이 체결되어 있다. 1982년 페루의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12월 페루에서 자원협력위원회 설립에 합의했다. 1993년 6월 2일에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2박 3일간 공식 방한했다. 북한은 1974년 7월 11일 통상대표부를 설치했고, 1989년 11월 21일 국교를 수립했다. 페루는 동광석을 수출하고 한국은 주로 텔레비전·철강제품 등을 수출한다. 1991년 대한 수입액은 2,000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액은 1억 3,500만 달러이다. 1990년 6월 현재 교민 476명, 체류자 4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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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나마

 

공식명칭 : 파나마공화국(Republic of Panama)

인구 : 3,172,000 명

면적 : 75,040 km2

수도 : 파나마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언어 : 스페인어

독립년월일 : 1903. 11. 3

화폐단위 : 발보아(balboa/B)

국가(國歌) : Alcanzamos por fin la victoria("We achieve victory in the end") [국가듣기]

공식 이름은 파나마 공화국(Republic of Panama/República de Panamá).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

 

개요

 

지도

남아메리카의 북서쪽 끝부분에 연결되는 파나마 지협의 남쪽 끝부분 연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수도는 파나마시티이며 긴 S자 모양의 나라이다. 북쪽 카리브 해 쪽으로 1,160km의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콜롬비아에 접해 있다. 남쪽 태평양 쪽으로 1,690km의 험준한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코스타리카에 접해 있다. 면적 74,979㎢, 인구 3,116,000(2003 추계).

 

자연환경

 

국토는 저지대·온대지대·고지대 등 뚜렷하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700m 이하의 저지대는 열대지역으로 국토의 85% 이상을 차지한다. 해발 700∼1,500m 지역은 온대지대, 해발 1,500m 이상은 냉대지역인 고지대가 분포한다. 고지대에는 타바사라 산맥 중부에 있는 국내 최고봉인 사화산인 바루 화산(3,475m), 산블라스 산과 다리엔 산이 있는 활 모양의 북동부 산맥, 활 모양의 남동부 산맥, 남부 화산 산맥 등이 있다. 저지대는 파나마 만과 치리키 만 부근에 있는 평원, 바야노 강 유역과 추쿠나케 강 유역, 카리브 해 지역의 평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륙붕에는 1,600개 이상의 섬이 분포한다. 해안은 크고 작은 만·반도·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나마에는 투이라·바야노·식사올라·창기놀라·치리키비에호·산타마리아 등 500개가 넘는 강이 흐르는데 대부분 고지대에서 발원한다.

 

파나마는 대체로 비가 많이 오는 열대성기후에 속해 1년 내내 따뜻한 낮과 서늘한 밤이 계속된다. 태평양 해안의 대초원지역에만 한때 건기가 있다. 양쪽 해안에서 연평균기온은 약 27℃이며, 산악지대는 10∼19℃이다. 비가 가장 많이 오는 기간은 5∼12월이다. 연평균강우량은 카리브 해안에서 1,500∼3,500㎜이상이며, 태평양 해안에서 1,140∼2,290㎜ 이상이다. 파나마는 절반 이상이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다. 홍수림·카티보·오레이 등을 비롯해 습지 삼림이 풍부하다. 습윤한 카리브 해안 삼림이 상록수인 반면에 건조한 태평양 해안의 삼림은 부분적으로 낙엽성이다. 국화(國花)인 홀리고스트 난초를 포함하여 적어도 2,000종(種) 이상의 꽃피는 식물이 있다. 동물로는 거대한 개미핥기, 부시 도그, 오셀롯, 재규어, 중앙 아메리카산(産) 맥, 미국산 악어 등이 서식한다. 대체로 천연자원이 빈약하지만 구리광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국민

 

16세기 스페인인들이 파나마 지협을 최초로 식민지화했을 때 이곳에는 쿠나족·과이미족·초코족 등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스페인인과 인디언의 통혼으로 메스티소가 생겨났다. 아프리카 흑인이 유입되면서 다른 혼혈인종도 발생했다. 19세기에 주로 미국 출신의 북아메리카인, 프랑스인, 중국인 등이 철도건설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도착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동안 카리브 섬들에서 온 흑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외에 많은 미국인들이 이주했다. 전체 인디언 부족 가운데 상당수가 파나마 서부에 사는 과이미족이다. 이들은 '평원의 언어'로 불리는 '모베레'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쿠나족이 과이미족 다음으로 많다. 이들은 지협의 다른 부분인 투이라 강과 그 지류들의 기슭, 산블라스 제도와 부근에 있는 해안에 거주한다. 언어는 쿠나어를 사용한다. 초코족은 국토의 1/3을 차지하는 동부에 주로 산다. 파나마 남서부와 중부에는 메스티소가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앤틸리스 흑인은 파나마시티에 주로 사는 소수 인종이다. 파나마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국민의 80% 이상이 로마 가톨릭교를 믿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서 출생률이 가장 낮으며 사망률 또한 비교적 낮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입국 이민자들이 감소함에 따라 1960년대초부터 매년 인구증가율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경제

 

파나마는 파나마 운하와 관련된 수송·통신·저장 서비스업, 국제금융, 관광업 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시장경제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증가보다 느리나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농업은 GNP의 1/10을 차지할 뿐이지만 노동력의 1/3이 종사하고 있다. 주로 벼·옥수수·콩 등이 재배된다. 밀을 제외하면 식량은 대부분 자급자족할 수 있다. 바나나·설탕·커피·카카오 등의 환금작물이 가장 중요한 수출품에 속한다. 전통적으로 목축의 비중이 크며, 어업은 성장산업으로 새우·바다가재·보리새우·어분 등이 주로 수출된다. 광업은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파나마시티와 그 주변에서 식품·시멘트·건축자재·석유제품·의류·가구 등의 제조업이 주로 행해진다. 138km의 파나마 횡단송유관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규모 계획이 건설산업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전력은 주로 수력발전에 의존하며, 수입연료로도 소량 생산된다. 서비스업이 GNP의 3/4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1/2이 종사하고 있다. 1960년대말부터 파나마는 유리한 금융법, 우수한 교통·통신 시설, 환(換)관리의 부재, 파나마 통화인 발보아의 미국 통화로의 자유로운 환 대체 등을 이용해 주요 국제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미국의 높은 이자율로 인해 1980년대말부터 상대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파나마 운하에서 나오는 서비스 수입액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미국·일본·멕시코·독일 및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다. 이들은 연료·윤활유·기계류·수송장비·염기제품·화학제품·식품 등을 파나마에 수출한다. 1953년에 세워진 콜론 자유무역지대는 세계 최대의 무역 중심지로 꼽히며 저장·조립·옮겨싣기 등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서비스 수출이 제품 수출보다 비중이 크다. 파나마 운하, 자유무역지대, 국제금융, 관광업 등의 관련 서비스업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전통적으로 계속되는 거대한 무역적자를 상쇄한다.

 

정치·사회

 

파나마는 1972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라 통치되는 시민공화국이다. 1983년에 승인된 일련의 헌법개정하에 단원제인 입법부는 5년 임기로 선출된 6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법부에는 법률제정 발의권, 국제조약 결정권, 예산승인권, 정당창당권 등의 권한이 주어진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은 각료와 다른 핵심 공직자를 직접 임명하며 임기는 5년이다. 사법부는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을 정점으로 한다. 주요정당으로 정부를 지지하는 우익 성향의 민주혁명당(PRD)과 구속력이 약한 동맹인 전국반대전선당(FNO)이 있다.

 

정부는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노동자에게 질병·임신 수당을 제공하며, 노인·무능력자·유가족 등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결핵이 만연한 도시 빈민지역을 제외하면 위생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주민 대부분이 몇몇 종류의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1인당 의사 비율이 중앙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유아사망률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한다. 평균수명은 남자 약 70세, 여자 약 74세로 라틴 아메리카의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모든 아동은 6학년까지의 초등교육을 마치거나 15세까지 학교에 다녀야 한다. 초등교육 취학연령에 있는 아동 가운데 거의 90%가 학교에 다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에 갈 수 있다. 중등학교는 다시 3년씩 두 과정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상급과정에서 '바치예라토'라는 학위를 수여받으면 파나마대학교(1935)와 산타마리아라안티과대학교(1965) 같은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다. 1980년대말 반정부 항거가 있고 나서 대중매체는 엄격한 검열을 받게 되었다.

 

문화

 

파나마의 음악과 춤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다채로운 편이다. 드럼과 박수에 맞추어 추는 아프리카 춤인 탐보리토가 여전히 인기 있다. 가장 인기 있는 민요는 18세기 스페인에서 전래된 메호라나이다.

 

역사

 

1501년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75만 명의 인디언이 파나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약탈·질병·살인 등으로 전체 인디언의 1/10이 죽었다. 스페인 식민지는 1510∼14년에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의해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세워졌다. 1514년에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일명 페드라리아스)가 발보아를 물리쳤다. 1519년 페드라리아스는 파나마시티를 세우고 태평양 쪽으로 행정부를 옮겼다. 파나마는 스페인과 식민지 사이에 물건을 옮기는 수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1748년까지 포르토벨로에서 열렸던 무역박람회에서는 1688년까지 파나마 해안을 약탈했던 영국 해적선이 관심을 끌었다. 1751년 파나마는 콜롬비아 산타페데보고타의 속령이 되었다. 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에콰도르·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과 왕당파군을 격퇴한 후, 파나마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자발적으로 콜롬비아 동맹과 결합했다. 1830년대에 콜롬비아에서 이탈하려고 3번 시도를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파나마는 번영을 누렸다. 많은 탐광자들이 대륙을 횡단하는 험한 미국 철도 대신에 캘리포니아로 가는 파나마 노정을 택했다.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건설된 파나마 철도가 1855년 개통되었으며, 곧바로 콜론 시가 세워졌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경영하는 프랑스계 회사가 1879년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정부로부터 얻어냈으나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1850∼1900년에 40개의 행정부, 50번의 폭동, 5번의 분리 시도, 13번의 미국 간섭 등이 있었으며, 20세기초 운하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콜롬비아 상원이 파나마 운하 조약의 비준을 연기했을 때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의 운동을 지지했다. 그로 인해 1903년 11월 6일 파나마 폭동이 일어났으며, 11월 18일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파나마 운하지대의 영구 소유권을 얻어냈으며, 완공된 운하는 1914년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파나마는 혼란에 빠졌다.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며 반미감정이 퍼져나갔다. 1968년 국민수비대가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대령의 지휘 아래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는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협상했다. 이 조약으로 파나마가 예전의 미국 운하지대에 대한 사법권을 맡게 되었으나, 운하 자체의 운용권은 1999년까지 미국에 남아 있다. 20세기말 경제침체와 심각한 정치변동은 1989년 12월 그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하여 국방부 총사령관이자 파나마의 실권자인 마누엘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을 물러나게 했다.

 

한국과의 관계

 

파나마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승인, 1962년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1973년 5월 5일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며, 1979년 3월 1일에는 주한 파나마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4년 7월 대통령 당선자 바를레타가 방한하여 우호를 다졌다. 양국간에 문화협정(1974. 6)·항공협정(1979. 12)이 체결되었다. 해외지사 14개, 교포상사 9개가 진출해 있다. 한국은 의류·선박을 수출하고, 파나마는 선박·석유를 수출한다. 1996년 현재 대한수입액은 31억 9,501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액은 5억 4,765만 달러이다. 1997년 현재 교민수는 89명, 체류자는 239명에 이른다.

 

 

 

200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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