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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리퀴리보고서좀..
wlgp**** 조회수 20,331 작성일2008.08.18

마리퀴리 보고서 좀..

내일이 개학인데 보고서3장이상을 써야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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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wl****
고수
국어, 한문, 과학, 수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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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전의 하나는 원자력의 발견과 그것의 이용이다. 원자력은 원자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를 낳았고, 이는 인류의역사를 변화시켰다. 원자력은 의료 분야에 적용되어 암 같은 불치병의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거대한 동력이 되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기도 한다.

원자력은 인간이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완전히 죽일 수도, 완전히 살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거대한 힘인 이 원자력을 발견하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초석을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위대한 과학자는 마리퀴리이다.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소녀

마리 퀴리(1867-1934)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로 폴란드 사람이다.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난 마리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16세에 고등학교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그러나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마리의 집은 이를 뒷바라지할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한다.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다.마리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브로냐가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대달라고 제안을한 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입학하고 4년 뒤 의사가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르본느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고 오랫동안 갈망하던 공부다 보니 마리의 관심을 끈것은 오로지 학문 뿐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거의 먹지도자지도 않으면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수학과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마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 뿐이었지만 이 독특하고 천재적인 처녀에게도 많은 남성들이 구애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정열을 쏟고 있는 쌀쌀한그녀 때문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감상적인 청년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때도 그녀는 그 청년에게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될 차례는 없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마리는 연구소에서 8세 연상의 한 남자를 만난다. 피에르 퀴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값싼 연애 감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연구와 학문의 동지로서 다가왔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신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연구욕과 단촐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행복한 과학자 부부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실험실로 출근했고 열악한 실험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따스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실제로 그들의 실험실은 지붕이 뚫려 비가 샜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아 물이 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나날이 새로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이 퀴리 부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이었다.

퀴리 부부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올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radioactivity; 이 방사능이라는 이름도 마리 퀴리가 붙인 것이다) 을 가진 라듐을 추출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원자력을 컨트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죽음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불의의 마차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남편의 죽음은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던 마리 퀴리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느의 교수가 된 그녀는 실험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르본느 최초의 여교수였던 마리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엔 언제나 남편의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학문적 동지로, 애모하는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마리는 피에르 퀴리의 자리를 영원히 남겨 두었다.

위대한 행보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느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번째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자신의 연구를 자기들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인류에게 돌린 것이다.

마리 퀴리의 투철한 인류애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또 한번 발휘된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만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20세기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거대한 변화는 작고 여리지만 강인하고 천재적이었던 한 여인, 마리 퀴리의 실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리퀴리가 남긴 명언

Nothing in life is to be feared. It is only to be understood.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1867-1934)는 인생의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뉴스
 

[커버스토리]두 천재의 2세는 천재일까 아닐까

2008 07/29   뉴스메이커 785호

절대다수의 천재, 평범한 집안서 출생
100여 년 연구, 유전 요인 20~85%로 다양

<경향신문>
‘김택진-윤송이 부부 2세의 IQ는 얼마나 될까?’
최근 언론의 조명과 함께 세인의 주목을 끈 커플은 김택진(41) 엔씨소프트 사장과 윤송이(33) 전 SK텔레콤 상무다. 1년 전 한 일간지의 결혼 예정 보도에 펄쩍 뛰며 완강히 부인한 두 사람이 이미 부부로 살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올가을 출산을 앞두고 있는 사실도 함께 공개됐다.

두 사람의 결혼설이 처음 터진 것은 지난해 6월 16일. ‘6월 25일 제주도 ㅅ호텔에서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과 SK텔레콤 윤송이 상무가 결혼한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다. 하지만 당시 엔씨소프트와 SK텔레콤 측은 일제히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사실 무근’임을 강조했다. 이 같은 완강한 부인에 해당 신문은 정정기사까지 내야 했다.

윤 전 상무는 지난해 12월 SK텔레콤을 그만뒀다. 당시 SK텔레콤 측은 젊은 스타 여성에 대한 사회의 지나친 관심을 그의 사의 배경으로 해석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4년 3월 윤 전 상무가 엔씨소프트 사외이사를 맡으면서 시작됐다.

과학고 2년 만에 졸업·KAIST 수석졸업
두 사람의 결혼이 초미의 관심거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천재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윤 전 상무는 1993년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하고 19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수석으로 졸업한 데 이어 만 24세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천재소녀’로 불렸다. 29세에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 상무로 선임되면서 다시금 유명세를 치렀다. 2006년에는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2006 차세대 지도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택진 사장의 이력도 만만치 않다. 김 사장은 서울대에서 전자공학 학사와 석사를 취득하고 컴퓨터공학과 박사 과정을 밟다 중퇴했다. 1989년 이찬진 전 한컴 사장과 함께 아래아 한글 공동개발에 참여했다. 그에게 박사학위가 없는 이유는 1991년 현대전자에 들어가면서 시간이 없어 공부를 중단했기 때문이지 능력으로 본다면 학위를 서너 개도 딸 수 있는 사람이다.

현대전자에 다니면서 얻은 1년간의 미국 연수 기간 동안 그는 인터넷을 체험했다. 그 경험은 오늘날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하는 성공의 발판이 됐다. 현대전자에서 그는 아미넷 등 잇따라 성공작을 내놨다. 그리고 아미넷을 개발한 능력을 밑천삼아 1997년 3월 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게임업체 엔씨소프트를 설립했다. 연이어 SK텔레콤의 넷츠고 서비스를 개발해 첫 성과를 올렸다.

특히 1997년 주변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발한 리니지 게임은 초대박을 터뜨렸다. 이를 바탕으로 김 사장은 엔씨소프트를 5년 만에 연매출 1200억 원 이상의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게 했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 온라인게임으로 성공한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만으로 2000억 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김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엔씨소프트 지분은 27.27%. 올 3월 기준 2800억 원에 달하는 돈이다. 김택진 사장은 2004년 11월 전 부인과 이혼할 때 양육비와 위자료로 엔씨소프트 주식 35만6461주를 지불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는 당시 시가로 300억 원이 웃도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리니지 게임 2000억 이상 벌어
김 사장의 IQ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학력과 이력으로 볼 때 김 사장 역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최첨단 IT 관련 연구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연구실에서만 몰두하는 천재성이 아닌, 사업적 천재성까지 겸비한 능력은 과거와 다른 현대적 의미의 천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IT 분야에서 천재소녀로 통하던 윤 전 상무와 역시 IT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과시한 김 사장 사이에서 태어날 2세는? 많은 사람은 두 천재의 결합을 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2세의 능력에 대해 궁금해한다. 천재와 천재의 결합, 그 2세는 더욱 뛰어난 천재일까. 과연 그럴까. 이는 결국 부모의 두뇌가 자녀에게 얼마나 대물림이 되는지와 관련 있다. 즉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 선천적(유전)이냐, 후천적(환경의 영향)이냐가 관건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과학자들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단지 현대에 들어와 유전과 환경이 고루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좀 더 힘을 얻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때도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이 각각 몇 %씩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유전적 요인이 적게는 20%라는 주장부터 많게는 85%에 달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여기에 태내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다.

1997년 미국 피츠버그대와 카네기 멜론대 합동연구팀은 유전적 요인은 통설보다 크지 않으며 오히려 태내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지에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이들은 지능의 60~85%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212개 논문을 검토한 결과 “태내 환경을 감안할 경우 지능의 유전적 요인은 34~48%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지냈다는 김택진 사장과 과학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윤송이 전 상무. 두 사람은 결국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바탕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경향신문>

어쨌든 유전이냐 환경이냐의 지루한 논쟁의 길목에서 김택진 사장과 윤송이 전 상무의 집안과 성장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사장의 부모와 관련해 알려진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김택진 사장이 어린 시절 몹시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정도만 전해진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 실패해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아내의 등에 업혀 있던 어린 아들의 눈과 마주치자,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후 양말 등을 팔아 빚을 모두 청산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에디슨 등 열등생 취급
윤 전 상무는 서울 양천구 목동 단독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윤호식씨는 서강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고 산업은행에 근무하다 한국증권금융으로 옮겨 상무를 지내고 2002년 퇴임했다. 어머니 이지수씨는 한글 서예가로 국전 심사를 하기도 했다. 윤 전 상무는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소양을 물려받아 서예도 배우고 바이올린 연주도 즐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윤 전 상무의 동생인 하얀씨 역시 언니 못지않은 수재라는 점이다. 서울과학고를 나와 서울대 자연대 분자생물학과를 수석 졸업한 하얀씨는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2005년에는 동물이 페로몬(동물이 짝짓기를 할 때 사용하는 체외 분비성 물질) 냄새를 감지하는 경로를 새롭게 규명해 생물학 분야의 최고 권위지인 미국 ‘셀(Cell)’지에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자란 환경은 확연히 달랐지만 김택진 사장과 윤송이 전 상무는 공통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이 훗날 명성을 떨친 분야에 대해 끼와 재능을 보였다. 김 사장은 어릴 때부터 컴퓨터 게임에 흠뻑 빠져 있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윤 전 상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방 책장에 비커, 플라스크 등의 실험 도구를 갖춰놓았고 5학년 때는 서울시 과학전람회에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 대한 통계적 분석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6학년 때는 무당벌레에 관한 연구로 금상을 받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머리가 탁월하게 좋은 부모 밑에서 뛰어난 두뇌의 자식이 태어난 사례는 적지 않다. 혹은 대를 이은 과학자 집안이라든가, 음악가 집안 등 특정 분야에서 두드러진 집안의 이야기도 드물지 않다. 유전적 요인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입증하는 이런 가족의 이야기를 감안하면 김택진-윤송이 부부의 2세도 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천재가 전후 3~4대 가족 중 탁월함을 보인 인물이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또 아이슈타인과 에디슨이 어린 시절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아 열등생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이슈타인은 4살이 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진아였고 에디슨은 청각 장애를 지녀 학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슈타인의 부모는 평범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이 자신의 장점과 자신감을 찾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아이슈타인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사는 성적표에 “이 학생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써보냈다. 그리고 이 짧은 글을 읽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에겐 남과 다른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단다. 남과 같아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니?”라고 말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는 곧 천재가 만들어지는 데는 환경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김택진
생년월일 1967년 3월 14일생(양) 출생지 서울 직업 벤처기업인
전문분야 네트워크시스템 정보기술 솔루션 소프트웨어 개발
학력
1989 서울대학교 전자공학 학사 1991 서울대학교대학원 전자공학 석사
1998 서울대학교대학원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 중퇴
경력
1985~1989 한메소프트 창업. 사장 1991~ 현대전자 인터넷서비스 아미넷개발팀장
1997~ 마이크로소프트 공인 지역대표 / 엔씨소프트 기술고문 / (현)엔씨소프트 대표이사&사장 2000. 8~ 아이스크림엔터테인먼트 공동설립 2001. 2~ (현)벤처기업협회 이사 2007. 7~ (현)한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연구실적
아래아한글 개발
기타
2001. 6 미국 비즈니스위크 아시아뉴리더 50인(기업인 부문)에 선정 2001. 11 홍콩경제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가 뽑은 ‘변화를 주도한 인물(기업부문) 20인’에 선정 2002 세계경제포럼(WEF) ‘아시아 차세대 리더 18인’ 선정 / 미국 비즈니스위크 ‘세계 e비즈 영향력 있는 25인’ 선정 2005. 1~ WEF(세계경제포럼) 선정 ‘2005 영 글로벌 리더(The Forum of Young Global Leaders)’ 2005. 3 중앙일보 조인스닷컴 인터넷 발전 기여 ‘i-People’ 선정

윤송이
생년월일 1975년 12월 26일(양) 출생지 서울 전문분야 인공지능개발
학력
1991~1993 서울과학고등학교 2년 졸업 1993~1996 KAIST
1996~2000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대학원 박사 미디어랩 3년반 졸업
경력
2000~2003 맥킨지앤컴퍼니 서울사무소 매니저
2001~2002 연세대 영상대학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1~2003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2002~2004. 3 와이더덴닷컴(Widerthan.com) 이사
2004. 3~엔씨소프트 사외이사
2005. 3~2007. 12 SK텔레콤 CI사업본부장 상무
기타
~2000. 2 만 24년2개월 한국인으로는 국내, 해외 망라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 기록
2004. 6~ 세계경제포럼(WEF)이 뽑는 올해의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에 선정
2006. 1~세계경제포럼(WEF) 선정 ‘2006 차세대 지도자(Young Global Leader)

이태규·원병오 박사, 대를 이은 과학의 명가

퀴리 부부와 두 딸.
역사적으로 대를 이어 과학이나 음악 등 특정 분야에서 업적을 쌓아 명성을 떨친 집안이 많다. 과학자의 집안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라듐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마리 퀴리의 가문이다. 마리 퀴리 가문은 6번이나 노벨상을 수상해 과학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다. 퀴리 가문의 과학적 업적이 과학과 역사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최근 출판된 ‘퀴리가문’(넥서스)에 따르면 교사인 아버지를 둔 마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의사인 천재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1903년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또 마리는 순수한 라듐을 분리한 공로로 1911년 다시 노벨 화학상을 받아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로 이름을 올렸다. 퀴리 부부의 장녀 이렌과 사위 프레데릭 졸리오 부부도 노벨상을 받았다. 1935년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것이다. 또 수학자로 유명한 베이커라는 가계에도 자랑할 만한 수학자가 수십 명 나왔으며 그중 20여 명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한국 최초로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태규 박사(1902~1992), 조류학계의 거두 원병오 박사 집안이 대를 이어 과학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태규 박사의 장남 회인씨는 서울대 졸업 후 유타대에서 응집물질 및 통계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차녀인 고(故) 신혜씨는 유타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아메리칸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을 거쳐 피츠버그대 생화학교수로 일했다. 조류학자 원병오 박사의 아버지는 북한의 저명한 조류학자인 고(故) 원홍구(1888~1970) 박사다. 원홍구 박사는 김일성대 생물학부장과 과학원 생물학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북한의 조류 연구를 집대성했다. 원홍구 박사의 장남이자 원병오 박사의 형인 고 원병휘 동국대 명예교수는 광복 이전 만주와 북한 지역의 쥐 연구로 명성을 떨쳤고, 월남한 후에는 동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포유동물을 연구했다. 또 원병오 박사의 아들 창덕씨 부부는 미 매사추세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환경과학자들이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회]“국내 체류 외국인 노동자 비자 줘야”

2008 07/29   뉴스메이커 785호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 최서연 소장, 한국어 교실 열어 언어소통 도와


“철수야, 영희야….”
서울 강서구 화곡7동의 한 주택가. 결혼한 여성 이민자들이 한국어를 따라 읽는 목소리가 골목까지 울린다. 모두 태국·중국·베트남·필리핀·캄보디아 등에서 온 30명 안팎의 젊은 여성 이민자다.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소장인 최서연 교무. 150㎝ 정도의 자그마한 키에 가녀린 몸을 지녔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강단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2층 단독주택의 1층을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최 교무와 한집에 사는 최 교무의 어머니는 3년 전 330㎡(100평)에 달하는 이 집을 통째로 원불교에 헌납했다. 또 나머지 재산은 수도회에 기부했다. 어머니는 최 교무의 막내 여동생이 수녀가 된 후 가톨릭 신자가 됐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종교 간 벽이나 갈등은 없다. 오히려 자비와 사랑, 나눔, 헌신이라는 숭고한 뜻을 실천하는 동지로서 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최 교무는 과학도였다. 한국의 ‘마리 퀴리’를 꿈꾸던 그는 1978년 아주대 화학공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진학한 후 1983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소재 리하이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1986년부터 4년간 한국과학기술원(KIST)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포항공대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마리 퀴리’ 꿈꾸던 과학도
그런 그가 종교에 귀의한 것은 과학에 대한 회의와 스스로 쌓은 업을 조금이나마 현세에서 풀고 가야겠다는 의지에서다.

“과학에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과학이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꼭 필요한 연구도 돈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고, 돈 되는 것만 연구하는 세태에 염증을 느꼈거든요. 과학자들이 마음공부가 부족해 그런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과학자의 길을 접었다고 할 순 없어요. 모든 인간은 과학자라는 게 제 신념이니까요. 종교에 관심을 가진 건 대학 다닐 때부터예요. 정식으로 종교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틈틈이 불교서적을 읽었어요. 그게 미국에서 유학할 때 도움이 됐어요.”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원 시절 불교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는 원불교 경전을 접하면서 개종을 결심했다. 원불교대학인 영산 선학대를 졸업한 뒤 입교했다. 그리고 1999년 출가해 교무 자격이 주어지는 사령장을 받았다.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인권 침해”
그가 종교인이 된 데는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 1남 3녀 중 장녀인 그는 송정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부터 명석한 아이로 통했다. 학급에서 1등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과 딸을 차별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그의 몫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부모님은 반대했다. 그가 취업해 가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여자가 많이 배워 뭐에 쓰나…”라는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결혼여성 이민자들과 함께. 앞줄 맨오른쪽이 최서연 교무.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죠.”
하지만 종교에 심취하면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한쪽 눈만 뜨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의 은혜를 입었는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 갑자기 사물이 훤히 보이듯,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어요. 제 마음이 오랜 세월 검은 보자기로 덮여 있었음을 깨달은 거죠. 그간 얼마나 제가 부모님께 못되게 굴었는지, 저 잘난 맛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됐어요.”

그는 출가 직후 스리랑카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리랑카는 내전이 심각했다. 출국을 잠시 미룬 채 준비하던 과정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스리랑카 노동자가 5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을 위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분들에게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뭐냐고 물었어요. 언어 소통이라고 하더군요. 그분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2000년 경기 파주에서 스리랑카 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교실을 열게 된 거예요.”

한국어 교실은 이후 파주를 거쳐 화곡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 과정에서 최 교무는 원불교가 좀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노동자지원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상부에 외국인 센터 설립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면서 2001년부터 원불교 외국인 센터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스리랑카 노동자뿐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아시아 여성을 위한 센터다.

그는 최근 일부에서 일고 있는 반외국인 정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던졌다. 그는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 절반은 불법체류자로,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은 안정된 체류 자격을 갖는 것”이라며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갖가지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단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정부가 비자를 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출입국 심사를 한층 더 엄격히 해 문제가 있는 외국인은 아예 입국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남아지역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은 작업환경이나 임금 수준이 열악해 한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어요. 동시에 상당수 노동자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죠. 그럼에도 이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으니까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에요. 또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시집온 아시아지역 여성에 대한 시선에도 문제가 많아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결혼할 때 신랑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함부로 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결혼하지 못한 한국 남성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해준 데 감사해야죠. 다만 국제결혼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는 브로커는 싹을 없애야 해요. 위장결혼, 사기결혼도 대부분 브로커가 개입돼 있어 발생하는 문제예요.”

그에게 향후 바람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마음공부를 더 잘하며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는 생전 이런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모든 학문을 다 공부해도 끝에 가면 다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해놓으면 그런 한계가 없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공부를 하는 게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2대에 걸쳐 6개의 노벨상…퀴리 가문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데니스 브라이언 지음/전대호 옮김/지식의숲/2만8000원
    퀴리 가문/데니스 브라이언 지음/전대호 옮김/지식의숲/2만8000원

    “여섯 차례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가문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라듐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이며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조국 폴란드를 사랑했던 애국자인 마리 퀴리의 전기는 ‘공부 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최고라고 여겼던 시절에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강요하다시피한 필독서로 기억된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작가인 데니스 브라이언은 ‘퀴리 가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마리 퀴리의 위대함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가문의 것이라고 말한다. 퀴리 가문은 과학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집안이다. 과학자들은 2대에 걸쳐 6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집안인 퀴리 가문의 과학적 업적은 과학과 역사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한다. 이 가문의 과학적 발견은 이후 속속 이루어진 새로운 물리·화학적 발견의 토대가 됐으며 이들의 발견으로 화학원소의 절대적인 불변성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됐다고 설명한다.

    국내에 퀴리 가문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본격 소개하는 이 책은 마리 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그 가문 전체에 대해 주목케 한다.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나 큰딸 이렌 퀴리와 작은딸 이브 퀴리, 맏사위 프레데릭 졸리오의 삶과 업적은 마리 퀴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908년 마리 퀴리가 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사고로 숨진 후 실의의 나날을 보냈던 당시 그는 언론에 “피에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살 때 사랑하던 여성을 잃은 충격 때문에 한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결심하지만 서른다섯 노총각 때 마리 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외국 출신이고 여성인 마리 퀴리가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 세력에 막혀 휘청거릴 때 그를 잡아준 것도 피에르 퀴리였다.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마차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마리 퀴리는 남편이 사고 당시 입고 있던 피와 뇌수 묻은 옷을 간직하고 오열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사망한 후 유부남이던 남편의 후배 폴 랑주뱅과 불륜에 빠졌다는 소문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렌 퀴리의 남편 졸리오는 평생 장모와 아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생긴 청년이던 졸리오는 과학계에서 완전히 아웃사이더였다가 일종의 부마(駙馬)로 간택됐다고 경멸받았고, 이렌의 기둥서방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하지만, 졸리오는 이렌과 함께 알루미늄에 방사선을 쬐면 인이 산출된다는 것을 화학적으로 확인해 사상 최초로 인공 핵반응의 존재를 증명, 핵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공로로 이렌과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받는다. 또 가문에서 유일하게 과학자가 아닌 이브는 피아니스트이자 극작가로 성장해 나중에 어머니의 전기를 쓰게 된 점도 흥미롭다.

    이 책은 퀴리부부의 위대함은 과학적인 천재성과 업적 못지않게 자신들의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은 ‘과학 정신’에 반하는 일이라며 라듐 정제법의 특허신청을 포기한 것이라고 독자에게 전한다. 마리는 20년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것은 라듐산업을 위한 기부였다. 라듐산업은 처음엔 프랑스에서 나중엔 외국에서 특허권 사용료를 전혀 지불하지 않으면서 성장해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원하는 산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격동의 시대에 지식인으로 책임과 소명을 다했던 퀴리 가문 인물들의 당당함과 초연함이 느껴진다.

    옮긴이의 말이다. “평전을 남길 수 있는 개인은 적지 않으나, 평전을 남길 수 있는 가문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개인을 넘어선 어떤 정신이 구성원들에게서 일관적이면서도 다채롭게 나타나는 진정한 의미의 가문만이 평전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박태해 기자 pth1228@segye.com

 

내 이름은 마리 퀴리…왜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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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7.11.3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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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교수를 채용하는 데 후보자 성별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수회의가 공중목욕탕은 아니지 않습니까?"

1922년 독일 괴팅겐대학 교수회의.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현대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비드 힐베르트 교수는 분통을 터뜨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 추상대수학자인 에미 뇌더(1882~1935)를 교수로 임용하는 데 교수회의가 '여성은 교수가 될 수 없다'며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뇌더는 1918년에 '가환환의 이데알론'을 발표해 세계적인 추상수학자로 알려졌음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은 물론 많은 차별을 겪었다.

그녀는 힐베르트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지만 다른 여성 과학자들의 학문적 삶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적 연구성과를 낸 여성 과학자는 많지만 100년이 넘는 노벨상 역사에서 과학 분야 여성 수상자는 단 10여 명에 불과했다. 500여 명의 남성 과학자가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전체의 2%밖에 되지 않는 것도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뇌, 살아 있는 생각-노벨상의 장벽을 넘은 여성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 15명의 삶의 자취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디오판토스의 산수학과 아폴로니오스의 원추곡선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대한 주석 등으로 5세기 당시 최고이자 세계 최초 여성 과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가 남성 우월주의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이후 여성 과학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으로서 삶보다 더 힘겨웠다. 이런 상황은 남녀평등사상이 일반화된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여성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고, 설사 대학 강의를 청강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수로 임용될 수 없었다. 특별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말이 좋아 '특별'이지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물론 봉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여성 과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리 퀴리(그녀의 이름은 퀴리 부인이 아니다)도 제대로 된 실험실을 찾지 못해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생명의 비밀 열쇠로 불리는 DNA 구조를 X선 분광학으로 처음 밝혀냈음에도 그녀의 허락 없이 X선 사진을 이용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빼앗기기까지 했다.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지금 이런 일들은 옛날 얘기처럼 돼 버렸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배출되고 세계적 연구 결과를 내고 있다. 이는 남성 과학자들보다 적은 인원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엄청난 결과를 낸 선구자적 여성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섀런 버트시 맥그레인 지음.

[유용하 기자]

 

여까지구요.... 이게 맞나 모르겠네요...

어쨌든 도움 되시길 합니다...

 

 

200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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