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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전의 하나는 원자력의 발견과 그것의 이용이다. 원자력은 원자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를 낳았고, 이는 인류의역사를 변화시켰다. 원자력은 의료 분야에 적용되어 암 같은 불치병의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거대한 동력이 되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기도 한다.
원자력은 인간이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완전히 죽일 수도, 완전히 살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거대한 힘인 이 원자력을 발견하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초석을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위대한 과학자는 마리퀴리이다.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소녀
마리 퀴리(1867-1934)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로 폴란드 사람이다.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난 마리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16세에 고등학교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그러나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마리의 집은 이를 뒷바라지할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한다.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다.마리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브로냐가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대달라고 제안을한 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입학하고 4년 뒤 의사가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르본느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고 오랫동안 갈망하던 공부다 보니 마리의 관심을 끈것은 오로지 학문 뿐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거의 먹지도자지도 않으면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수학과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마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 뿐이었지만 이 독특하고 천재적인 처녀에게도 많은 남성들이 구애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정열을 쏟고 있는 쌀쌀한그녀 때문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감상적인 청년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때도 그녀는 그 청년에게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될 차례는 없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마리는 연구소에서 8세 연상의 한 남자를 만난다. 피에르 퀴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값싼 연애 감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연구와 학문의 동지로서 다가왔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신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연구욕과 단촐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행복한 과학자 부부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실험실로 출근했고 열악한 실험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따스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실제로 그들의 실험실은 지붕이 뚫려 비가 샜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아 물이 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나날이 새로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이 퀴리 부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이었다.
퀴리 부부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올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radioactivity; 이 방사능이라는 이름도 마리 퀴리가 붙인 것이다) 을 가진 라듐을 추출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원자력을 컨트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죽음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불의의 마차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남편의 죽음은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던 마리 퀴리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느의 교수가 된 그녀는 실험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르본느 최초의 여교수였던 마리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엔 언제나 남편의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학문적 동지로, 애모하는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마리는 피에르 퀴리의 자리를 영원히 남겨 두었다.
위대한 행보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느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번째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자신의 연구를 자기들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인류에게 돌린 것이다.
마리 퀴리의 투철한 인류애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또 한번 발휘된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만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20세기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거대한 변화는 작고 여리지만 강인하고 천재적이었던 한 여인, 마리 퀴리의 실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dlwl****
고수
국어, 한문, 과학, 수학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전의 하나는 원자력의 발견과 그것의 이용이다. 원자력은 원자 폭탄이라는 엄청난 살상 무기를 낳았고, 이는 인류의역사를 변화시켰다. 원자력은 의료 분야에 적용되어 암 같은 불치병의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거대한 동력이 되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여러 분야에 적용되기도 한다.
원자력은 인간이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완전히 죽일 수도, 완전히 살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20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거대한 힘인 이 원자력을 발견하고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과학적 초석을 닦은 사람이 있다. 그 위대한 과학자는 마리퀴리이다.
폴란드의 가난한 천재소녀
마리 퀴리(1867-1934)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로 폴란드 사람이다. 교사 부부의 많은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난 마리는 어릴 때부터 비범한 소녀였다. 그녀는 16세에 고등학교 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그러나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에는 여자의 입학을 허가하는 대학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하려면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마리의 집은 이를 뒷바라지할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나 마리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리는 언니 브로냐와 재미있는 약속을한다.
브로냐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역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다.마리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돈을 벌어 브로냐의 유학자금을 대겠으니 대신브로냐가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신의 학비를 대달라고 제안을한 것이다. 언니 브로냐는 파리 소르본느대학에 입학하고 4년 뒤 의사가된다. 그리고 마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녀를 파리로 부른다. 마리는꿈에도 그리던 공부를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다시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르본느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고 오랫동안 갈망하던 공부다 보니 마리의 관심을 끈것은 오로지 학문 뿐이었다. 파리 빈민가의 춥고 좁은 방에서 거의 먹지도자지도 않으면서 배움의 열정으로 하루 하루를 보낸 마리는 결국 물리학과수학과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마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 뿐이었지만 이 독특하고 천재적인 처녀에게도 많은 남성들이 구애하였다. 오로지 공부에만 정열을 쏟고 있는 쌀쌀한그녀 때문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감상적인 청년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때도 그녀는 그 청년에게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될 차례는 없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마리는 연구소에서 8세 연상의 한 남자를 만난다. 피에르 퀴리였다. 그는 그녀에게 값싼 연애 감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연구와 학문의 동지로서 다가왔다. 함께 실험을 하면서 마리는 피에르 퀴리에게 따뜻한 신뢰와 동지애를 넘어선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강렬한연구욕과 단촐한 일상생활까지 마치 쌍둥이처럼 비슷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행복한 과학자 부부
마리와 피에르의 결혼은 이상적이었다. 그들은 함께 실험실로 출근했고 열악한 실험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따스한 애정으로 이를 극복해갔다.
실제로 그들의 실험실은 지붕이 뚫려 비가 샜고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아 물이 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나날이 새로 배우고 발견하는 기쁨이 퀴리 부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이었다.
퀴리 부부사이에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문명의 새로운 변화에 신호탄을 올리는 두 가지 광물, 즉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으로부터 더 강력한 방사능(radioactivity; 이 방사능이라는 이름도 마리 퀴리가 붙인 것이다) 을 가진 라듐을 추출해내는 것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원자력을 컨트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거대한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받는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피에르 퀴리의 죽음
1906년 봄 피에르 퀴리는 불의의 마차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남편의 죽음은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던 마리 퀴리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연구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느의 교수가 된 그녀는 실험을 계속 이어 나갔다.
소르본느 최초의 여교수였던 마리는 강의를 시작하기 전엔 언제나 남편의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학문적 동지로, 애모하는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마리는 피에르 퀴리의 자리를 영원히 남겨 두었다.
위대한 행보
마리 퀴리는 1908년 소르본느의 명예교수가 되었고 1910년에 방사능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출간했다. 1911년 순수 라듐을 분리해낸 공로로 화학 분야에서 두번째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1914년 파리대학교 라듐 연구소가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자신의 연구를 자기들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행한 모든 실험과 결과는 아무런 조건없이 개방되었다. 열악한환경의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노출되며 고생스럽게 이루어낸 모든 업적을인류에게 돌린 것이다.
마리 퀴리의 투철한 인류애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또 한번 발휘된다. 그녀는 뢴트겐이 발견한 X-선과 자신이 발견한 방사선을 이용해 전쟁에서 부상당한 많은 병사들을 직접 병원에서 치료하였다.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오로지 연구 속에서만 기쁨을 찾으며 그 결과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리지 않았던 마리 퀴리는 1934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20세기 과학의 진보와 인류의 거대한 변화는 작고 여리지만 강인하고 천재적이었던 한 여인, 마리 퀴리의 실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리퀴리가 남긴 명언
Nothing in life is to be feared. It is only to be understood. 프랑스의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1867-1934)는 인생의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
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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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국내 체류 외국인 노동자 비자 줘야” | |||||
2008 07/29 뉴스메이커 785호 | |||||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 최서연 소장, 한국어 교실 열어 언어소통 도와 “철수야, 영희야….” 서울 강서구 화곡7동의 한 주택가. 결혼한 여성 이민자들이 한국어를 따라 읽는 목소리가 골목까지 울린다. 모두 태국·중국·베트남·필리핀·캄보디아 등에서 온 30명 안팎의 젊은 여성 이민자다.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소장인 최서연 교무. 150㎝ 정도의 자그마한 키에 가녀린 몸을 지녔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강단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2층 단독주택의 1층을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최 교무와 한집에 사는 최 교무의 어머니는 3년 전 330㎡(100평)에 달하는 이 집을 통째로 원불교에 헌납했다. 또 나머지 재산은 수도회에 기부했다. 어머니는 최 교무의 막내 여동생이 수녀가 된 후 가톨릭 신자가 됐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종교 간 벽이나 갈등은 없다. 오히려 자비와 사랑, 나눔, 헌신이라는 숭고한 뜻을 실천하는 동지로서 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최 교무는 과학도였다. 한국의 ‘마리 퀴리’를 꿈꾸던 그는 1978년 아주대 화학공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진학한 후 1983년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소재 리하이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1986년부터 4년간 한국과학기술원(KIST)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포항공대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마리 퀴리’ 꿈꾸던 과학도 그런 그가 종교에 귀의한 것은 과학에 대한 회의와 스스로 쌓은 업을 조금이나마 현세에서 풀고 가야겠다는 의지에서다. “과학에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과학이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꼭 필요한 연구도 돈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고, 돈 되는 것만 연구하는 세태에 염증을 느꼈거든요. 과학자들이 마음공부가 부족해 그런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과학자의 길을 접었다고 할 순 없어요. 모든 인간은 과학자라는 게 제 신념이니까요. 종교에 관심을 가진 건 대학 다닐 때부터예요. 정식으로 종교활동을 한 건 아니지만 틈틈이 불교서적을 읽었어요. 그게 미국에서 유학할 때 도움이 됐어요.”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원 시절 불교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는 원불교 경전을 접하면서 개종을 결심했다. 원불교대학인 영산 선학대를 졸업한 뒤 입교했다. 그리고 1999년 출가해 교무 자격이 주어지는 사령장을 받았다. “불법체류자란 이유로 인권 침해” 그가 종교인이 된 데는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 1남 3녀 중 장녀인 그는 송정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부터 명석한 아이로 통했다. 학급에서 1등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과 딸을 차별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그의 몫이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부모님은 반대했다. 그가 취업해 가계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여자가 많이 배워 뭐에 쓰나…”라는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제적으로 부모님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죠.” 하지만 종교에 심취하면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한쪽 눈만 뜨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의 은혜를 입었는지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 갑자기 사물이 훤히 보이듯,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어요. 제 마음이 오랜 세월 검은 보자기로 덮여 있었음을 깨달은 거죠. 그간 얼마나 제가 부모님께 못되게 굴었는지, 저 잘난 맛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됐어요.” 그는 출가 직후 스리랑카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스리랑카는 내전이 심각했다. 출국을 잠시 미룬 채 준비하던 과정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스리랑카 노동자가 5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을 위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분들에게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뭐냐고 물었어요. 언어 소통이라고 하더군요. 그분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2000년 경기 파주에서 스리랑카 노동자를 위한 한국어 교실을 열게 된 거예요.” 한국어 교실은 이후 파주를 거쳐 화곡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 과정에서 최 교무는 원불교가 좀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노동자지원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상부에 외국인 센터 설립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면서 2001년부터 원불교 외국인 센터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스리랑카 노동자뿐 아니라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아시아 여성을 위한 센터다. 그는 최근 일부에서 일고 있는 반외국인 정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던졌다. 그는 “현재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중 절반은 불법체류자로,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은 안정된 체류 자격을 갖는 것”이라며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갖가지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단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정부가 비자를 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출입국 심사를 한층 더 엄격히 해 문제가 있는 외국인은 아예 입국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남아지역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은 작업환경이나 임금 수준이 열악해 한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어요. 동시에 상당수 노동자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죠. 그럼에도 이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한국인의 일자리를 뺏으니까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에요. 또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시집온 아시아지역 여성에 대한 시선에도 문제가 많아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결혼할 때 신랑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함부로 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결혼하지 못한 한국 남성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해준 데 감사해야죠. 다만 국제결혼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는 브로커는 싹을 없애야 해요. 위장결혼, 사기결혼도 대부분 브로커가 개입돼 있어 발생하는 문제예요.” 그에게 향후 바람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마음공부를 더 잘하며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는 생전 이런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모든 학문을 다 공부해도 끝에 가면 다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해놓으면 그런 한계가 없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공부를 하는 게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
2대에 걸쳐 6개의 노벨상…퀴리 가문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퀴리 가문/데니스 브라이언 지음/전대호 옮김/지식의숲/2만8000원데니스 브라이언 지음/전대호 옮김/지식의숲/2만8000원
“여섯 차례 노벨상을 수상한 퀴리 가문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라듐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이며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조국 폴란드를 사랑했던 애국자인 마리 퀴리의 전기는 ‘공부 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최고라고 여겼던 시절에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강요하다시피한 필독서로 기억된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작가인 데니스 브라이언은 ‘퀴리 가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마리 퀴리의 위대함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가문의 것이라고 말한다. 퀴리 가문은 과학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집안이다. 과학자들은 2대에 걸쳐 6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집안인 퀴리 가문의 과학적 업적은 과학과 역사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한다. 이 가문의 과학적 발견은 이후 속속 이루어진 새로운 물리·화학적 발견의 토대가 됐으며 이들의 발견으로 화학원소의 절대적인 불변성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게 됐다고 설명한다.
국내에 퀴리 가문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본격 소개하는 이 책은 마리 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그 가문 전체에 대해 주목케 한다.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나 큰딸 이렌 퀴리와 작은딸 이브 퀴리, 맏사위 프레데릭 졸리오의 삶과 업적은 마리 퀴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는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살 때 사랑하던 여성을 잃은 충격 때문에 한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고 결심하지만 서른다섯 노총각 때 마리 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외국 출신이고 여성인 마리 퀴리가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 세력에 막혀 휘청거릴 때 그를 잡아준 것도 피에르 퀴리였다.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마차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마리 퀴리는 남편이 사고 당시 입고 있던 피와 뇌수 묻은 옷을 간직하고 오열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사망한 후 유부남이던 남편의 후배 폴 랑주뱅과 불륜에 빠졌다는 소문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1908년 마리 퀴리가 딸들과 함께 찍은 사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사고로 숨진 후 실의의 나날을 보냈던 당시 그는 언론에 “피에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이렌 퀴리의 남편 졸리오는 평생 장모와 아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생긴 청년이던 졸리오는 과학계에서 완전히 아웃사이더였다가 일종의 부마(駙馬)로 간택됐다고 경멸받았고, 이렌의 기둥서방이라는 놀림도 받았다. 하지만, 졸리오는 이렌과 함께 알루미늄에 방사선을 쬐면 인이 산출된다는 것을 화학적으로 확인해 사상 최초로 인공 핵반응의 존재를 증명, 핵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공로로 이렌과 공동으로 노벨화학상을 받는다. 또 가문에서 유일하게 과학자가 아닌 이브는 피아니스트이자 극작가로 성장해 나중에 어머니의 전기를 쓰게 된 점도 흥미롭다.
이 책은 퀴리부부의 위대함은 과학적인 천재성과 업적 못지않게 자신들의 발견으로부터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은 ‘과학 정신’에 반하는 일이라며 라듐 정제법의 특허신청을 포기한 것이라고 독자에게 전한다. 마리는 20년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것은 라듐산업을 위한 기부였다. 라듐산업은 처음엔 프랑스에서 나중엔 외국에서 특허권 사용료를 전혀 지불하지 않으면서 성장해 과학자와 의사들에게 원하는 산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격동의 시대에 지식인으로 책임과 소명을 다했던 퀴리 가문 인물들의 당당함과 초연함이 느껴진다.
옮긴이의 말이다. “평전을 남길 수 있는 개인은 적지 않으나, 평전을 남길 수 있는 가문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개인을 넘어선 어떤 정신이 구성원들에게서 일관적이면서도 다채롭게 나타나는 진정한 의미의 가문만이 평전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박태해 기자 pth1228@segye.com
내 이름은 마리 퀴리…왜 퀴리부인이라고 부르나요
<script type=text/javascript> // </script>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7.11.30 18:00
<script type=text/javascript> try{var rand = Math.random().toString(); var ordval = rand.substring(2,rand.length); var clintAgent = navigator.userAgent; document.writeln("");}catch(e){} </script>
"여러분, 교수를 채용하는 데 후보자 성별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수회의가 공중목욕탕은 아니지 않습니까?"
1922년 독일 괴팅겐대학 교수회의.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현대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비드 힐베르트 교수는 분통을 터뜨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 추상대수학자인 에미 뇌더(1882~1935)를 교수로 임용하는 데 교수회의가 '여성은 교수가 될 수 없다'며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뇌더는 1918년에 '가환환의 이데알론'을 발표해 세계적인 추상수학자로 알려졌음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은 물론 많은 차별을 겪었다.
그녀는 힐베르트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지만 다른 여성 과학자들의 학문적 삶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적 연구성과를 낸 여성 과학자는 많지만 100년이 넘는 노벨상 역사에서 과학 분야 여성 수상자는 단 10여 명에 불과했다. 500여 명의 남성 과학자가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전체의 2%밖에 되지 않는 것도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뇌, 살아 있는 생각-노벨상의 장벽을 넘은 여성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 15명의 삶의 자취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1922년 독일 괴팅겐대학 교수회의.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현대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비드 힐베르트 교수는 분통을 터뜨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만든 상대성 이론의 수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 추상대수학자인 에미 뇌더(1882~1935)를 교수로 임용하는 데 교수회의가 '여성은 교수가 될 수 없다'며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뇌더는 1918년에 '가환환의 이데알론'을 발표해 세계적인 추상수학자로 알려졌음에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은 물론 많은 차별을 겪었다.
그녀는 힐베르트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지만 다른 여성 과학자들의 학문적 삶은 순탄치 않았다.
세계적 연구성과를 낸 여성 과학자는 많지만 100년이 넘는 노벨상 역사에서 과학 분야 여성 수상자는 단 10여 명에 불과했다. 500여 명의 남성 과학자가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전체의 2%밖에 되지 않는 것도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뇌, 살아 있는 생각-노벨상의 장벽을 넘은 여성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 15명의 삶의 자취를 통해 이 같은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디오판토스의 산수학과 아폴로니오스의 원추곡선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대한 주석 등으로 5세기 당시 최고이자 세계 최초 여성 과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가 남성 우월주의자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이후 여성 과학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여성으로서 삶보다 더 힘겨웠다. 이런 상황은 남녀평등사상이 일반화된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여성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고, 설사 대학 강의를 청강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수로 임용될 수 없었다. 특별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말이 좋아 '특별'이지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물론 봉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여성 과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리 퀴리(그녀의 이름은 퀴리 부인이 아니다)도 제대로 된 실험실을 찾지 못해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고, 설사 대학 강의를 청강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수로 임용될 수 없었다. 특별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말이 좋아 '특별'이지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물론 봉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여성 과학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리 퀴리(그녀의 이름은 퀴리 부인이 아니다)도 제대로 된 실험실을 찾지 못해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생명의 비밀 열쇠로 불리는 DNA 구조를 X선 분광학으로 처음 밝혀냈음에도 그녀의 허락 없이 X선 사진을 이용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빼앗기기까지 했다.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지금 이런 일들은 옛날 얘기처럼 돼 버렸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배출되고 세계적 연구 결과를 내고 있다. 이는 남성 과학자들보다 적은 인원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엄청난 결과를 낸 선구자적 여성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섀런 버트시 맥그레인 지음.
[유용하 기자]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진 지금 이런 일들은 옛날 얘기처럼 돼 버렸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배출되고 세계적 연구 결과를 내고 있다. 이는 남성 과학자들보다 적은 인원으로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엄청난 결과를 낸 선구자적 여성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섀런 버트시 맥그레인 지음.
[유용하 기자]
여까지구요.... 이게 맞나 모르겠네요...
어쨌든 도움 되시길 합니다...
200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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