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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히말라야 14좌의 위치 좌표좀 알려주세요
zoom**** 조회수 14,833 작성일2010.05.02
히말라야의 14좌 정상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14좌의 정상 위치 정보를 알려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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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5****
태양신
산, 계곡 2위, 등산, 암벽등반 3위, 강원도여행 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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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위도 27도59′17"N, 경도 86도59′31"E의 네팔히말라야 쿰부산군과 중국 티베트 경계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확인된 것은 1852년의 일이다.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의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였는데 그중에서 P15란 기호로 표기되었던 봉우리가 해발 8,848m로 세계 최고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세계 최고봉은 그후로도 P15란 기호로만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비로소 전임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Sir Gorge Everest)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Mt. Everest)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산의 이름에 인명을 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관례를 깬 것으로 재래의 고유명이 없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십 수년이 지나서 이 산에 초모량마(Chomolangma)라는 티베트 이름이 옛 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세상에서는 에베레스트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초모량마는 티베트어로 초모(Chomo)는 '여신, 수도녀'를 뜻하며 량마(Langma)는 '산골짜기, 지역, 경지'를 뜻한다.

그래서 초모랑마는 '대지의 여신, 세계의 여신'을 의미한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원정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부터지만, 첫 등정은 1953년 5월 29일 에드먼드 힐러리에 의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제 3의 극점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이는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실로 100년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에베레스트는 세계 산악인들의 동경의 대상으로 매년 원정대가 끊이질 않았다.
한국은 1977년 9월 15일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고상돈대원과 셀파 1명이 남동릉 루트로 등정해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되었다.

 

위치 : 위치 : 위도 76도3051"N, 경도 35도5255"E의 카라코람 발토로산군

K2는 그 높이에서 뿐만 아니라 등반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 봉우리가 세계 두 번째 고봉으로 알려진 것은 1858년의 일이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이 산을 측량한 결과 8,611m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이때까지 이 산은 K2(카라코람 제2봉이란 뜻)란 기호로 쓰여왔던 것인데 우연하게도 세계 2위의 고봉으로 밝혀지자 그대로 '케이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 후 이 산에 최초로 다가간 사람은 영국인 고드윈 오스틴이었다.

그는 1861년 카라코룸에서 탐험을 하다가 K2에 이르는 발토로빙하를 발견해 냈다.

그 후 1888년 영국 왕립지질학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K2에 그의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 아주 오래된 지도 중에는 이 산의 이름이 K2 대신에 '마운트 고드윈 오스틴(Mt.Godwin-Austin)'이라고 표기된 것들이 있다.

후에 이 산은 원주민들이 초고리(chogori)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K2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초코'는 크다라는 뜻이고 '리'는 산을 뜻한다.
발토로 빙하 깊숙이 위치한 콩코르디아 북쪽 끝에 우뚝 솟은 K2는 크게 나눠 북릉, 북서릉, 서릉, 남릉, 남동릉, 남서릉, 북동릉의 7개 능선으로 이루어진 삼각뿔형 독립봉이다.

이 산을 오르겠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은 영국인 엑켄스타인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이 히말라야에 본격적으로 원정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02년에 5명의 대원을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와 총 11개의 캠프를 전진시키며 등반했다.

결국 북동릉 6812미터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이 원정으로 K2가 그렇게 만만한 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K2의 등반에 관심을 가진 두 번째 사람은 1909년 당시 이태리 왕의 사촌형이 되는 아브루찌公이었다.

아브루찌는 비록 등정에 실패했지만 그가 발견한 남동릉은 '아브루찌 릉'으로 명명되었고 그의 뜻을 이어받아 44년 뒤인 1954년에 이 루트로 초등정하게 된다.

A. 데지오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대규모 원정대가 7월 31일 아브루찌 릉을 통하여 L. 라체델리와 A. 콤파뇨니를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1858년 이 산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판명된 ?? 96년 만의 일이었다.

아브루찌가 택한 대규모 캬라반과 조직적인 등반방식은 후에 히말라야 8,000m급 고산원정의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위치 : 위치 : 위도 27도42'09"N, 경도 88도09'00"E 의 네팔 히말라야 최동부

네팔 히말라야의 가장 동쪽에 솟아 있는 세계 3위 고봉 칸첸중가는 티베트어로 눈을 뜻하는 '캉(Kang)', 크다란 의미의 '첸(Chen)', 보고(寶庫)란 뜻의 '주(Ju), 그리고 다섯이란 뜻의 '은가(Nga)'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 '다섯 개의 위대한 눈의 보고'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는 캉첸중가가 주봉 외에도 서봉(일명 얄룽캉; 8,505m), 중앙봉(8,473m), 남봉(8,491m) 등의 연봉으로 이루어진 데서 연유한 것이다.
1899년 영국의 더글라스 프레쉬필드 일행이 <캉첸중가 일주>라는 탐사기를 남기면서 서구세계에 알려졌다.

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인도의 유명한 피서지인 다아질링(Darjeeling)으로부터 불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산은 55년 에반스 대장이 이끈 영국대가 얄룽빙하를 경유하여 남서면으로 초등정했다.

1905년 이 산에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 지 반세기 만에 이룩된 업적으로 10개팀의 실패와 11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이룬 인간승리였다.

그 후 77년 인도대가 북동릉으로 두 번째 등정을 이루었고, 78년 봄에는 스페인대가 중앙봉을, 폴란드대가 남봉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북면으로 영국과 일본이 새 루트를 뚫었으며 82년에는 메스너 일행이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84년에는 일본대가 남봉, 중앙봉, 주봉을 종주하는 기록을 세웠다.

 

위치 : 위도 27도58'00"N, 경도 86도56'00"E의 네팔히말라야 쿰부산군의 중북부

세계 4위의 고봉 로체는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남쪽으로 3km정도 떨어져 있으며 에베레스트의 사우스콜을 기점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으로 인식이 되어서인지 등반이 다른 8,000m봉에 비해서 등반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성공률 역시 매우 낮은 봉우리이다.

산이름 로체의 '로(Lho)'는 남쪽을, '체(Tse)'는 봉우리란 뜻으로 '에베레스트의 남쪽 봉우리'를 의미한다.

최초의 등반은 1955년 N.다이렌퍼스가 지휘하는 국제원정대가 시도를 하였는데 프리몬순에 이산의 남쪽에 서 정찰등반을 그리고 E. 슈나이더가 지형도를 제작했으며 몬순 후에 웨스턴 쿰으로부터 정상등정을 시도했지만 8,100m 지점에서 철수했다.
초등정은 1956년 5월 18일 A. 에글러 지휘한 스위스 원정대에 의해 5월 18일 이루어졌는데 F. 루이징거와 E. 라이스가 서벽을 경유하여 정상에 도달했다.

현재 히말라야의 고봉의 벽중에서 가장 등반이 어려운 벽 중의 하나로 로체 남벽이 꼽히는 데 라이홀트 메스너가 '21세기에나 가능한 벽'이라고 했다.

8,000m급 14봉을 모두 오른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89년 로체 남벽을 오르던 중 추락사했다.

 

위치 : 위도 27도53'23"N, 경도 87도05'29"E의 네팔과 중국 국경, 쿰부히말라야의 동부

마칼루는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을 이루는 중부히말라야에서도 쿰부 산군 동쪽에 위치해 에베레스트의 관문인 남체바잘에서 불과 3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세계 제5위의 고봉이다.
산의 이름은 힌두교 시바신의 화신(化神) '마하카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검은 신'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 마칼루는 밑에서 보면 흑갈색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다른산에 비해 검게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검은 귀신'이라고 발표하여 이 산의 인상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만들었다.
마칼루의 모습은 1921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정찰대가 북카르마 계곡으로 들어가 웅장한 자태를 촬영하여 처음 알려졌고, 본격적인 등반은 54년 봄 미국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동남릉으로 등반을 시도하여 7,200m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55년 장 프랑코대장이 이끄는 프랑스대가 북서릉 초등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5월 15일, 16일, 17일 3회에 걸쳐 9명의 대원 전원이 등정해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위치 : 위도 28도21'07"N , 경도 85도46'55"E 의 중국 티베트 남서부, 시샤팡마 산군

세계 6위의 고봉 초오유는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지역에 걸쳐 있다.

초오유라는 산 이름의 초오(Cho O)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성(神性)을 뜻하는 '초'와 여성을 뜻하는 '오'의 합성어로 여신을 의미한다.

여기에 터키옥(玉)을 뜻하는 '유'를 합쳐 초오유는 '터키 보석의 여신' 또는 '청록 여신이 거주하는 산'이란 뜻이 된다.
이 산은 대부분의 히말라야 고산들이 그러하듯이 남면, 즉 네팔쪽은 상당한 급경사에 장장 2km에 달하는 넓고 긴 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면은 비교적 완사면으로 형성되었다.

이 산만을 대상으로 한 정찰기록 1952년 에베레스트 남면 정찰 대원이었던 에드먼드 힐라리와 에릭 쉽튼에 의해서 북서릉 6,800m까지 접근한 기록이 유일하다.
이후 1954년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경등반대에 의해 초등이 이루어진다.

당시 이들은 네팔과 티베트간의 교역로이자 남체 바잘에서 가까운 낭파라(Nangpa La 5,716m)를 넘어서 북서릉을 통하여 둥정에 성공했다.

당시 이들은 8200m가 넘는 고소임에도 불구하고 산소 보급 없이 등정에 성공하였다.

 

위치 : 위도 28도41'48"N, 경도 83도29'42"E 의 네팔 히말라야 중부, 다울라기리 산군

세계 7위봉 다울라기리는 고대 티벳과의 교역 통로였던 칼리간다키(Kali Gandaki) 강을 사이에 두고 안나푸르나 산국과 마주보고 있다.

산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발라기리(Dhavalagiri)에서 비롯되었는데, 'Dhavala'는 '희다'는 뜻이고 'Giri'는 '산'이란 뜻이니 다울라기리는 '하얀 산'을 의미한다.
다울라기리는 프랑스원정대의 7회에 걸친 도전에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다가 1960년 이 산에 세 번째로 찾아온 스위스 합동대(대장 막스 아이젤링)에 의해 마침내 초등정 되었다.

북동릉 루트를 선택한 스위스대는 카라반 대신 경비행기로 타파고개(5,200m)와 북동콜(5,877m)에 물자를 수송하는 등 치밀한 등반활동을 펼쳐 5월 13일 6명의 대원이 무산소로 정상을 밟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박철암 대장이 이끄는 경희대학팀에 의해 최초로 정찰되었으며, 1988년 11월 14일 부산합동대(대장 조정술 외 11명)의 최태식 대원과 셀파 2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위치 : 위도 28도33'00 N, 경도 84도33'43" 의 네팔 히말라야산맥 중앙부

네팔 제2의 수도 포카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마나슬루 산군의 최고봉이자 세계 제 8위의 고봉이다.

주위에 북봉(7,154m), 서봉(7,571m)과 피크29(7,835m), 추렌히말(7,371m) 등을 거느리고 있다.
인도측량국의 측량기호로 P30이었던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마음'이나 '영혼'을 뜻하는 '마나사(manasa)'와 '나라'나 '토지'를 의미하는 '룽(Lung)'의 합성어로 '영혼의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현지인들은 이 산을 신성시하여 초등정을 목표로한 일본대의 등반을 수년간 집요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네팔왕국이 개국한 직후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영국원정대(대장 틸만)가 이산의 북서면을 답사했고, 이어서 52년부터 일본원정대가 3회에 걸쳐 등반활동을 펼치면서 북측과 동릉의 등반 가능한 루트를 관찰했다.
마침내 1956년 5월 9일에 마키대장이 이끄는 일본대에 의해서 이마니시와 셀파 걀첸 노르부가 정상등정에 성공했다.

그 후 1971년에는 다까하시가 이끄는 일본원정대가 북서벽을 경유하는 새롭고 험난한 루트로 2등을 기록하면서 이 산이 '일본인의 산'임을 재확인 했다.

이어서 72년에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남벽에 새 루트를 뚫었다.

 

위치 : 위도 35도14'21"N, 경도: 74도35'24"E 의 파키스탄 푼잡 히말라야

'산중의 왕'으로 불리는 낭가파르밧은 약 2,500Km에 달하는 협의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푼잡 히말라야의 최고봉으로, 북쪽으로는 인더스강 상류를 경계로 카라코람과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캐시미르를 이어 히말라야로 통하고 있다.
다섯 개의 큰 빙하 위에 수직의 루팔(Rupal)벽이 남쪽으로, 디아미르(Diamir)벽이 서쪽으로, 그리고 라키오트(Rakhiot)벽이 북동쪽으로 내리 뻗고 그 위에 북봉, 주봉, 남봉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400m 정상벽을 이루며 장엄하게 솟아 있다.
'낭가파르밧'은 인도측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벌거벗은 산'을 의미하고, '디아미르'는 산의 서측 탈트계 사람들이 '정령(精靈)의 산'이란 의미로 부른다.
세계 제 9위의 고봉 낭가파르밧은 일찍이 알프스에서 등로주의를 선창하고 나선 머메리가 1895년 히말라야등반사의 첫 장을 열었던 산이다.

머메리는 불행하게도 이 등반에서 조난사하고 만다.

그로부터 58년 뒤인 1953년 7월 3일 독일-오스트리아합동대(대장 헤를리히코퍼)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정되기까지 독일인에게 여섯 차례나 실패를 안겨주었고 그 과정에서 31명의 히생자를 낸 산이기도 하다.

초등정 당시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정상도전에 나서 3일만에 살아 돌아온 헤르만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다.
보다 높고 어려운 등반을 추구하는 머메리즘의 실현 대상으로서의 낭가파르밧은 8,000m급 산 중에서 가장 많은 히생과 고통을 요구하는 산이었다.

대표적인 벽은 디아미르벽과 루팔벽인데, 특히 남동쪽의 루팔벽은 수직 고도가 4,500m로 세계 최대의 벽이며 그 등반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낭가파르밧 정상등정을 시도했으나 정성백(조대공전 OB) 대원이 7,900m지점에서 실종되고, 1992년 우암산악회가 등정에 성공했다

 

위치 : 위도 28도35'44"N, 경도 83도49'19"E 의 네팔 히말라야 중부, 안나푸르나 산군

세계 10위의 고봉 안나푸르나는 서쪽으로 칼리간다키(Kali Gandaki)강과 동쪽으로 마르산디(Marsian야) 계곡까지 수많은 연봉을 거느리고 있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최고봉이다.

안나푸르나 2봉, 3봉, 4봉의 위성봉과 닐기리, 틸리쵸, 강가푸르나, 마차푸차레 등 아름다운 7,000m급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모리스 엘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는 본래 공격목표였던 다울라기리에서 안나푸르나로 진입하여 등반로를 정찰했는데 등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등반을 시도하여 6월 3일에 정상에 서는데 성공하였다.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란 의미이며 인류 최초로 등정된 봉우리라 하여 'Premier 8000'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1949년 네팔왕국이 오랜 쇄국정책 끝에 문호를 개방했는데 이에 세계 각국의 원정대가 미답의 8,000급 봉우리를 등정하기위해 몰려들었고, 1970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원정대가 험난한 남벽을 통해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등로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안나푸르나에는 10여개의 루트가 개척되었으나, 특유의 눈사태로 수많은 산악인이 희생 되었다.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14명의 대원과 셀파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위치 : 위도 35도43'30"N, 경도 76도41'48"E 의 카라코람 발토로산맥, 중국 신강자치구 경계

가셔브룸산군은 콩코르디아 남동쪽 아브루찌(Abruzzi)빙하에 들어서면 만나는 남가셔브룸 빙하를 1봉부터 6봉까지 말굽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가셔브룸 I봉은 아브루찌 빙하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산들에 의해 숨겨져 있어 일찍이 1892년 이 산군 정찰에 나선 독일의 콘웨이(W.M. Conway)가 '히든피크(Hidden Peak)'라 불렀다.

가셔브룸은 발티어로 '아름답다' 혹은 '빛나는'이란 뜻의'Rgasha'와 '산'이란 뜻의 'Brum'의 합성어로 '빛나는 산'을 의미한다.
1889년부터 1929년 사이의 히말라야 카라코람 개척사의 초기에 영국, 이탈리아인들이 가셔브룸 I봉을 측정하고 탐사활동을 펼쳤다.

이 산의 측량기호는 K5.
1934년 스위스의 디렌푸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원정대가 가셔브룸 I봉에 대한 대규모의 탐사를 감행했는데 H.에르틀과 A.로흐가 남서쪽에 있는 스퍼를 올라 6,300m 지점까지 도달했고, 1936년에는 H.드세고뉴의 프랑스 원정대가 수송문제와 포터의 파업으로 남쪽의 스퍼를 통해 6,900m까지 도달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958년 미국원정대(대장 크린치)가 이 '숨겨진 봉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7월 4일 쇼닝과 카프만 대원이 강추위와 심설을 헤치고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이로써 미국은 8,000m급 초등정 대열에 끼게 되었다.
히든피크는 알파인스타일로 등정된 최초의 8,000m봉이다.

1975년 8월 베이스캠프까지 불과 12명의 포터만 동원한 2인조 원정대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가 가셔브룸 I봉의 북벽을 경유하여 등정했는데 이것은 히말라야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알파인스타일 등정이었다.

 

위치 : 위도 35도48'35"N, 경도 76도34'25"E의 카라코람 발토로산군, 중국 신강 자치구와의 경계

발토로산국의 고드윈 오스틴 빙하 오른쪽으로 솟아 있는 세계 12위의 고봉.

K2와 남동쪽으로 이웃하고 있으며 북봉(7,537m), 중앙봉(8,006m)을 거느리고 있다.
산이름은 발티어로 '넓은 눈의 산'이란 뜻을 지닌 팔첸 캉리(Falchen Kangri)가 있었으나1892년 콘웨이가 이끄는 영국탐험대의 정찰 때 '폭 넓은 봉우리'란 뜻으로 현재의 이름 브로드 피크로 붙여졌다.
1954년에 헤어리히코퍼가 지휘하는 독일-이탈리아 원정대가 처음으로 브로드 피크를 도전해 남서사면에 있는 위험한 빙벽을 오르려고 시도하다가 6,900m 지점에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고, 1957년에 M. 슈무크의 지휘 아래 헤르만 불, 디엠베르거, 빈터슈텔러 등 강력한 4인조가 전원 초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고소포터와 산소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장비를 3개의 고소캠프를 전진 시킨 후 두차례의 정상공격으로 간단히 등정에 성공했다.

 

위치 : 위도 28도21'07"N , 경도 85도46'55"E 의 중국 티베트 남서부, 시샤팡마 산군

시샤팡마는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14좌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동쪽으로 순코시(Sunkosi)강과 서쪽으로 트리술리(Trisuli)강을 끼고 있는 랑탕-쥬갈 지역의 최고봉이다.

이 산은 8,000m급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관계로 14좌 중 가장 늦은 1964년에야 gjrud(許競) 대장이 이끄는 중국 원정대에 의해 초등정된 산이다.
산명은 티베트어로 '황량한 땅' 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산을 네팔에서는'고사인탄(Gosainthan)'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50여 Km 떨어진 힌두 성지 '고사인쿤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사인쿤드는 힌두어로 '성자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시샤팡마는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는 서쪽으로 무려 420Km나 떨어진 반면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북북동쪽으로 불과 8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네팔서 티베트 국경 잠무를 거쳐 육로를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팀이 많다.
중국은 대륙의 공산화에 성공 후 최후의 8천미터급 산을 초등정하기 위해 1961년부터 3회의 정찰로 현재의 주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갈라 빙하를 통해 7,160m까지 도달한 후 1964년 10명의 중국산악인을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시샤팡마의 가장 곤란한 점은 극심한 기상변동으로 인한 바람인데, 10월부터 시작 되는 티베트고원의 폭풍은 바람을 피할 것조차 없는 평야지대 위에 우뚝 선 시샤팡마로 불어 와 등반가들에게 고통을 준다.

 

위치 : 위도 35도45'31"N, 경도 76도39'15"E의 파키스탄, 카라코룸 산맥 위치

가셔브룸 산군의 가장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 13위의 고봉 가셔브룸II봉은 K4의 측량부호가 붙여진 것 외에는 특별히 다른 이름이 없다.

8,000m 봉 중에서는 가장 등정이 쉬운 산으로 꼽힌다.

1909년 아브루찌가 이끄는 원정대와 이때 참가한 이탈리아의 사진사 V. 셀라가 북쪽과 초 고리사 방면에서 가셔브룸 산군을 정찰했으며, 1934년 스위스의 G.O.

디렌푸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원정대가 가셔브룸 II봉의 등반 가능한 루트를 살피면서 6,250m까지 올랐다.

1956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리츠 모라벡의 지휘 아래 6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남서릉을 경유하여 가셔브룸 II봉의 초등정에 성공했다.

201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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