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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배재학당 출신자 중 역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물
gpdn**** 조회수 8,524 작성일2011.06.16

국사 수행평가로 해야되서 그러는데..

 

배재학당 출신자 대표인물 5명이상 알려주세요 ㅠ

 

내일까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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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46위, 역사학 53위, 동양사 5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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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고종 12) - 1965. 독립운동가, 정치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본관은 전주(全州). 황해도 평산출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경선(敬善)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이듬해 8월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를 시해하자,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고 국왕을 구출하여 친일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지명수배를 당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협성회 (協成會)ㆍ독립협회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ㆍ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당한 뒤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와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부패ㆍ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적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의 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투옥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해 10월에 귀국,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 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 하면서 좌우합작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거부, 김구(金九)의 남북협상거부 등의 정치적 반탁, 반공 및 단독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을 주장하여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고, 미군정의 용공정책에 반대하였다.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당선되어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통령제로 헌법이 제정되도록 하여 그 해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취임하였다.

 

나도향(羅稻香) 1902-1927. 소설가.

본명은 경손(慶孫). 필명은 빈(彬). 도향은 호이다. 서울출생. 양의(洋醫) 성연(聖淵)의 맏아들이다. 
1917년 공옥학교(攻玉學校)를 거쳐,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같은해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에 뜻을 두어 할아버지 몰래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송달되지 않아서 귀국하였고, 192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22년 현진건,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 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해에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에 이어 11월부터 장편 <환희 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한편, <옛날의 꿈은 창백(蒼白)하더이다>를 발표하였다. 1923년에는 <은화백동화 銀貨白銅貨>, <17원50전 十七圓五十錢>, <행랑자식>을,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에는 <벙어리 삼룡(三龍)>, <물레방아>, <뽕> 등을 발표하였다. 1926년 다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초기에는 작가의 처지와 비슷한 예술가 지망생들로서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데 그쳐, 객관화된‘나'로 형상화되지 못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일종의 습작기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고비로 빈곤의 문제 등 차츰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극복의지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을 내세움으로써, 초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사실주의로의 변모를 보여준다.그 변모의 현실화로 나타난 작품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뽕>이다. 이 작품들에는 본능과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객관적 사실묘사에 의하여 부각되어 있다.
특히, 이들 후기의 애정윤리와 궁핍의 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객관적인 관찰은 좌절과 패배, 허무와 감상이 교차하던 192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투영되었던 초기 작품에서의 전환으로, 적극적인 대결로 나아가지는 못하였으나 당대 현실과 사회를 부정적으로 예리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등장인물의 치밀한 성격 창조를 기반으로 한국농촌의현실과 풍속을 보였다는 관점에서, 1920년대 한국소설의 전원적 사실주의로 꼽히기도 한다.



 

주시경(周時經) 1876(고종 13) - 1914. 국어의 연구와 운동을 통하여 일제침략에 항거한 국어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ㆍ백천(白泉) 황해도 봉산출생.
간호원양성학교ㆍ공옥학교(攻玉學校), 명신학교(明信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서우학교(西友學校)교원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 오성학교(五星學校), 이화학당(梨花學堂),
흥화학교,기호학교(畿湖學校), 융희학교(隆熙學校), 중앙학교(中央學校), 휘문의숙(徽文義塾),
보성학교(普成學校), 사범강습소ㆍ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 주산, 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 국어운동, 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典籍)과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 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김소월(金素月) 1902 - 1934. 시인.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출생. 아버지는 성도(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 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 (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 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 江村>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 朔州龜城>, <가는 길>, <산>,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의 <왕십리> 등이 있다. 그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 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燭)불 켜는 밤>(1925), <무신 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유>(1925)를, <조선문단 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 文明>에 <지연 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 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 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 <첫치마>, <금잔디>, <달맞이>등에서 피고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 <건강한 잠>(1934), <상쾌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 , <팔벼개 노래>(1927), <돈타령>(1934), <삼수갑산>―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 (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ㆍ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1939), 하동호, 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지청천(池靑天) 1888(고종 25) - 1957 .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 충주(忠州). 호 백산(白山). 본명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1888년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배재학당 졸업 1908년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으며,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그 간부에 취임하였다. 청산리(靑山里)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쇄, 병력을 이끌고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하였다. 서일(徐一)ㆍ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만주를 벗어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자유시(自由)에 집결하였다. 흑하(黑河)사변으로 러시아혁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양기탁(梁起鐸), 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 군사위원장겸 사령장이 되고, 그해 군민의회(軍民議會)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고, 1932년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 한ㆍ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을 받아 무장해제당한 후 그 해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키고뤄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충칭[重慶]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였다. 1947년 제헌국회의원, 정부수립 후 초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1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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