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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석굴암, 불국사, 수원화성,창덕궁이 지어진 시기와 쓰임새
비공개 조회수 8,411 작성일2012.11.05
  석굴암, 불국사, 수원화성, 창덕궁이 지어진 시기와 쓰임새에 대해 알려주세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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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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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굴암

 

 석굴암은 서기 750년대에 김대성이라는 사람이 지은 두 개의 절 중 하나입니다. 이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은 어릴 적에 스님께 밭을 시주하고 병에 걸려 모량리에서 죽었는데, 신라의 재상 김문량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불교를 숭배하며 자신의 신비로운 탄생을 알고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합니다. 석굴암의 이름은 원래 (石佛寺)였고, 700여 채에 달하는 규모가 큰 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다 타 버리고 돌로 되어 있는 석굴만 남아 있어 석굴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석굴암은 현재 불국사에 딸려 있는 작은 암자로, 절에서 암자로 격이 낮추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현재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인자한 웃음을 띤 본존불 뒷면에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이 있습니다. 석굴암은 일제 시대 때, 일본이 윗면에 있는 돌을 빼었다가 맞추었는데 그 이후 습기가 차기 시작하여 현재 에어컨을 틀어 놓았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 때의 모습으로 복귀시킬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2. 불국사

 앞에서 석굴암이 김대성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사찰이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 현생이 부모, 즉 김문량 부부를 위한 사찰로,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불국사는 청운교와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 범영루 등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석가탑에서는 세계에서 인정해 주는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다보탑은 다보보살이 많은 보석(多寶)를 걸치고 있다 하여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보탑은 원래 네 개의 사자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일제가 훔쳐 가고 나서 남은 단 한 새의 사자상이, 그마저도 코가 떨어져 나간 채 쓸쓸히 다보탑을 지키고 있습니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의 세계를 표현해 놓은 곳입니다. 극락전 일대가 극락보살의 공간, 대웅전 일대가 석가모니의 공간, 관음전은 관음보살, 비로전은 비로나자불, 나한전 일대는 부처의 제자들의 공간입니다. 그야말로 부처의 세계를 축소해 놓은 것입니다.

 3.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조선 22대 왕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백성들을 살게 하기 위해 만든 성곽입니다. 그러나 이 성을 쌓았던 진짜 의미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게 만든 노론 세력을 쓸어 버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 세자와 아들 정조 대왕의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수원 화성은 특이하게도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이 정문인데, 정조 대왕이 북쪽에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화성은 1950년 일어난 한국 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재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정조 대왕은 지지대를 넘어 장안문을 지나쳐서 화성행궁에서 머물렀을 것입니다.

  수원 화성은 장안문과 팔달문은 완전 옹성을, 창룡문과 화서문은 반옹성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주요 장대인 서장대, 또는 화성장대가 함락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동장대, 또는 연무대를 만들었고, 전쟁에 대비해 봉수대인 봉돈과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치와 포루, 그리고 안이 비어서 총을 쏘기 쉬운 공심돈 등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수원 화성에서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이 건축물들이 실제로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수원 화성에는 수원천이 빠져나가는 화홍문과 남수문이 있는데, 남수문과 팔달문 주변 성곽은 북원이 되지 않았다가 2012년 6월에 완전히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아름다운 수원 화성이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것입니다.

 4. 창덕궁

 창덕궁은 임금이 법궁인 경복궁이 불타거나 소실되었을 때 법궁으로 이용하던 임시 궁궐, 이궁(異宮)이었습니다. 창덕궁은 1404년(태종 4년)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다음 해인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이 중건하기 시작했으나, 도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났기 때문에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가장 큰 수난은 일제가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 우리 조선 왕조를 낮추는 의미로 오얏꽃을 새긴 일입니다. 그 문양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요.

  창덕궁은 경복궁을 제치고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올랐습니다. 북악산 자락에 지어 후원이 외국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의미였지요. 정조가 두 개의 규장각(내규장각과 외규장각)을 지을 때, 내규장각은 창덕궁 후원에 지었답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데, 주합루지요. 2층이 규장각이었답니다. 그러나 후에 규장각은 인정전 동쪽으로 옮겨졌지요. 세초를 하기 전에 실록에 실릴 내용을 훑어보는 검서청(檢書廳) 등이 남아 있습니다.

  업무를 보는 외전에는 인정전, 빈청, 선정전, 은대(승정원), 문서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 선정전 앞에 있던 승정원과 문서고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동궐도>를 통해 그 모습을 대충 알 수 있을 뿐입니다.

  편히 쉬는 곳인 내전에는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 환경전 등이 있는데, 환경전은 소실되었고, 낙선재에서는 덕혜 옹주께서 1975년에 돌아가시기도 한 슬픈 장소입니다.

201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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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dw****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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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과 불국사 [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 유적이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이다. 두 유산은 모두 경주시 동남쪽의 토함산(吐含山)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유산은 8세기 후반에 같은 인물이 계획해 조영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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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출처 : 문화재청

  •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 위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 좌표

    N35 46 60, E129 20 60

  • 등재연도

    1995년

  • 등재기준

    (ⅰ), (ⅳ)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진정성

석굴암 본존불과 그 주위 대부분의 석조 조각과 건축의 형태는 8세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높다. 불국사 경내의 석조 유산은 부분적 보수 과정을 거쳤을 뿐 신라 시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목조 건축물들은 16세기부터 보수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복원 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전통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었다.

완전성

석굴암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불국사는 불법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한 걸작으로, 이들 두 유산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 전 영역과 두 유산이 위치한 토함산이 유산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본문

토함산 남동쪽 비탈에 있는 석굴암은 동해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됐다. 기록에 따르면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벽에는 39개의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본존불상이 놓여 있다.

석굴암은 전실(前室), 비도(扉道), 돔형 주실(主室)로 구성된다. 전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에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이 각각 네 사람씩 새겨져 있다. 비도는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데, 비도의 입구 옆에는 두 사람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서 있다. 비도의 좁아지는 부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각각 한 쌍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에 팔각형 돌기둥 두 개가 각각 세워져 있고, 본존불상은 주실의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놓여 있다. 주실의 입구 양쪽 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두 보살, 십나한이 새겨져 있다. 본존불상 뒤의 벽 한가운데에는 자비의 보살로 알려진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이 새겨져 있다.

전실과 주실의 벽에 새겨진 불상들 아래 놓여 있는 돌에도 마찬가지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석굴암이 만들어진 당시에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던 대리석 사리탑은 일제강점기 때 제거됐다. 본존불상 뒤의 벽에 새겨진 십일면관음보살상 위에는 거대한 원형 연판(蓮瓣)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형 연판은 정면에서 보면 마치 본존불상의 후광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연판 위쪽 벽에는 열 개의 감실들이 가로로 늘어서 있다. 감실 각각에는 보살이나 불자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으나, 현재 그 중 두 개가 없어진 상태다.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돌들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3.45m 높이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카락은 달라붙은 곱슬머리이며, 정수리에는 궁극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돌기처럼 튀어나와 있다. 이마는 넓고, 초승달 같은 눈썹 아래로 반쯤 감은 눈은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져 왼팔과 가슴을 덮은 모양의 법복은 섬세하고도 현실적이다. 불상은 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다.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십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걸작이라면, 불국사는 신라의 이상향인 불국토를 현세에 드러내고자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동시에 만들어졌는데, 불국사의 축조를 시작하고 지휘한 사람 역시 석굴암을 만든 재상 김대성이었다. 효심이 깊었던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불국사를 세웠고, 전생의 부모들을 기리며 석굴암을 지었다.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고,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다. 때문에 불국사라는 이름 자체도 신라인들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는 말 그대로 부처님 나라의 사찰을 뜻한다. 이것은 곧 불국사가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다.

불국사 경내는 이승에 실현된 불교적 이상향이라 여겨졌다. 석단(石壇) 위에 지어진 목조 건축물들은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비로자나불의 전당인 비로전, 득도의 전당인 대웅전, 지복의 전당인 극락전이 그것이다. 세 구역은 하나의 현세 공간과 두 개의 천상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순수한 부처의 나라로, 비로자나불이 존재하는 현세, 아미타불의 낙원,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비로전, 극락전, 대웅전을 포함해 석단 위의 공간은 곧 부처의 나라이며, 석단 아래의 공간은 이승이다. 이 두 세계는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두 쌍의 다리로 연결된다. 석단, 석교(石橋), 그리고 대웅전 앞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보여 준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불국사는 손으로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옛날에 불국사에는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로 만들어진 구품연지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품연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토함산의 물이 흘렀던 수구의 흔적이 아직까지 석단에 남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불국사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목조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다행히 석단, 석교, 석탑, 등(燈), 금으로 도금된 청동 불상들은 무사히 남았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불국사의 건축물은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시행된 복구 작업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건된 것이다. 복구는 불국사 유적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신라 시대 당시의 대규모 복합 건축물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다. 불국사의 중심에 위치한 대웅전 앞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동서로 놓여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 사찰의 주 건물 앞에는 동일한 외관을 가진 한 쌍의 탑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으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파할 때 보배로운 탑이 땅에서 솟아났고, 이미 깨달음을 얻은 다보여래가 그 탑 위에 나타나 석가모니의 설법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는 탑 안에 나란히 앉았다는 것이다. 다보탑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있다.

폭 6.7㎝, 길이 6.2m의 두루마리에 적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또한 주목할 만하다. ‘흠 없이 순수한 빛의 위대한 다라니경’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유물은 1966년에 석가탑의 2층에서 발견됐다. 8세기경에 만들어진 이 경전은 목판으로 인쇄된 경전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등재기준

기준 (ⅰ) : 석굴암과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창조적 예술 감각과 뛰어난 기술로 조영한 불교 건축과 조각으로 경주 토함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한국 고대 불교예술의 정수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기준 (ⅳ) : 석굴암과 불국사는 8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건축과 조각으로,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축조된 석굴과 불상 조각에 나타난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 불국사는 석조 기단과 목조건축이 잘 조화된 고대 한국 사찰 건축의 특출한 예로서 그 가치가 두드러진다.


석굴암

 

수원화성

 

 

수원화성(華城)은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장헌)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아래에 축성한 것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지 산성으로 군사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과학적ㆍ실용적인 구조로 축성되었다.

즉, 이 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平山城)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실용적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바깥쪽만 쌓아올리고 안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또 화성은 백성의 현실생활 속에서 학문의 실천 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벽돌과 돌의 교축,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 동양 성곽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 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ㆍ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건립된 것으로,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한편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 성역 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 [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

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애초의 건립 목적이나 도성 내에 자리한 입지도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창덕궁이 자리한 곳은 언덕 지형으로 평탄한 곳이 많지 않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이러한 불규칙한 지형지세를 이용해 궁궐 건물을 경내 남쪽에 배치하고, 북쪽 넓은 구릉에는 비원이라고도 불리는 후원을 조성하였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건물을 세운 까닭에 궁궐 건축의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특색을 지녔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으로 조선 전기의 약 200년 동안 왕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소실된 도성 내 궁궐 중 가장 먼저 중건되며 이후 약 250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했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시대 궁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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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출처 : 문화재청

  • 국가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 위치

    서울시(Seoul City)

  • 좌표

    N37 32 60, E126 58 60

  • 등재연도

    1997년

  • 등재기준

    (ⅱ), (ⅲ), (ⅳ)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진정성

창덕궁의 건물과 후원의 원림은 조선후기 축조 당시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의 지형과 경관 또한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변형되었거나 노후한 시설에 대한 복원과 수리는 공인된 장인들이 관련 문헌과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진행하고 있다.

완전성

창덕궁의 공간 구성과 건축물의 배치, 원림은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나라 궁궐건축의 형식과 유교 예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다. 창덕궁은 조정의 관료들이 왕을 보좌하며 업무를 본 외조, 왕이 신하를 만나며 국정을 수행한 치조, 왕과 가족들이 취침하는 침조, 왕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건물과 조경, 자연지형이 창덕궁 경내에 잘 어우러져 있으며 궁 전체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본문

창덕궁은 수세기 동안 한국의 건축과 정원, 조경 설계, 관련 미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창덕궁은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세련된 건축적 가치를 보여 준다. 복합 건축물인 창덕궁은 극동 지역의 건축과 정원 설계의 우수 사례로서 주변 환경에 조화를 이루고 있고, 해당 지형에 적합하게 지어졌으며, 자생종의 수목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1405년, 태종(재위 1400∼1418)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창덕궁은 풍수지리에서 서울 북쪽을 수호하는 산인 응봉산 자락에 있는 58㏊의 불규칙한 직사각형 지대에 있다.

궁궐의 건축을 위해 만든 궁궐조성도감(宮闕造成都監)은 전통적 설계 원칙에 따라 업무용과 주거용 건물로 구성된 복합 건축물을 지었다. 창덕궁은 전면의 궁궐, 후면의 비원, 세 개의 문과 더불어 정사, 주거, 의전을 위한 세 개의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주 건물들(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은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7년 동안 나머지 주요 요소들이 추가되었다.

창덕궁은 1462년에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는 한양의 다른 중요 건축물들과 함께 불에 타 허물어지기도 했다. 선조가 1607년에 창덕궁의 재건축을 명하여 1610년에 완료되자 창덕궁은 정사를 돌보고 임금과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 되어 258년 동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후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재건축 작업은 항상 원래의 설계에 충실하게 따랐다.

2층으로 된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06년에 지어졌고, 화재를 입어 1607년에 재건축되었다. 돈화문과 동일한 양식으로 지은 1층짜리 인정문(仁政門)은 정사를 돌보는 데 쓰이던 정전으로 연결된다. 1592년과 1803년에 화재로 파손되었던 웅장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이 바로 그 안에 있다. 인정전은 두 겹의 단 위에 지은 2층 건물로, 네 개의 거대한 기둥들로 지탱되고 있다. 인정전 안의 조각을 새긴 천장 보개(寶蓋) 아래 연단에는 정교한 어좌가 놓여 있으며, 그 용마루에는 독수리와 용 같은 수호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위로 올라가는 주 계단은 신화 속 수호 동물들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인정전 동쪽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宣政殿)이 있는데, 푸른 기와를 올린 소박한 건축물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소박한 건물인 희정당(熙政堂)이 있는데, 이곳에는 왕의 침전과 신하들의 침실이 있었다.

근처의 대조전(大造殿)은 왕비를 위한 건물이다. 대조전의 정원은 잔디, 나무, 꽃, 연꽃 연못, 수목을 배경으로 한 정자 등으로 꾸몄다. 정원에는 자생종 나무 100종 26,000개 표본과 함께, 주목(朱木), 돌소나무(stone pine), 스트로부스 소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등 외래종 나무 15종 23,000개의 표본을 심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재위 1400∼1418)은 그의 아버지 태조의 뜻에 따라 1405년에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궁궐 건축을 관장하는 직책이 만들어졌고, 건축 공사는 전통적 개념의 원칙, 특히 전조후시(前朝後市:궁궐이 앞에, 저자거리는 뒤에)와 삼문삼조(三門三朝:문 3개, 궁궐 3개)의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또한 삼조제도(三朝制度), 즉 앞쪽에 신하들의 공간인 외조(外朝), 중앙에 임금이 정무를 보는 치조(治朝), 뒤에 왕의 처소와 왕비의 처소인 연조(燕朝)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랐다.

궁궐은 주요 건축물과 비원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정원은 잔디, 나무와 꽃, 연못으로 꾸몄으며, 숲이 우거진 후면 가까이에 정자를 세웠다. 주요 건물(어좌가 있는 방, 국사를 돌보는 방, 왕족의 생활공간)은 1405년에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좁다고 생각해, 이후 7년 동안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한다. 1462년에는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 있는 중요한 건물들과 함께 궁궐도 불태워졌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창덕궁은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 선조는 1607년에 궁궐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1610년, 선조의 왕위를 이은 광해군 때 공사가 끝났다.

궁궐은 다시 통치의 중심지이자 왕실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청의 침략에 의한 병자호란(1636), 프랑스 함선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1866), 미국 군대에 의한 신미양요(1871)에 걸쳐 주로 화재를 입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258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재건축할 때마다 원래의 설계를 충실히 따랐다. 수세기 동안 궁 전체에 걸쳐 몇몇 건축물이 추가되었다. 1828년 순조는 전아(典雅)한 스타일의 건물을 짓게 했고, 1846년 헌종은 궁궐 외딴 곳에 낙선재라는 이름의 왕실 거처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추가된 건물은 1921년에 세운 선원전(璿源殿)인데, 역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인정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의 북서쪽 방향에 있는 덜 중요한 장소로 이전되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창덕궁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궁궐 전 영역과 주요 건물 및 식재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의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따라서 해당 구역 내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이외에도 창덕궁 후원은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창덕궁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창덕궁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4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창덕궁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창덕궁 주변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창덕궁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창덕궁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창덕궁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의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등재기준

기준 (ⅱ) : 창덕궁은 유교 예제에 입각한 궁궐 건축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건물의 배치나 진입 방식에서는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다양한 특성을 보여 준다.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정문의 진입로에서 직각으로 두 차례 방향을 틀어야 정전에 도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지형지세에 따라 조성된 이러한 진입로의 배치는 남북 방향의 일직선 중심축을 따르는 경복궁이나 중국의 궁궐과는 차이가 있다. 건물과 주변 환경이 잘 조화된 창덕궁의 궁궐 배치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궁궐 건축양식의 상호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 궁궐 건축의 창의성을 보여 준다.

기준 (ⅲ) : 창덕궁은 전통 풍수지리 사상과 조선왕조가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유교가 적절히 조화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전통 풍수에 입각하여 선정된 입지와 유교 이념에 따라 상징적, 기능적으로 배치된 창덕궁의 건물들은 조선 시대 고유의 독특한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 준다.

기준 (ⅳ) : 창덕궁은 원래의 자연 지형을 존중하기 위해 궁궐 건축의 전통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 변형을 가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자연적인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정형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건물을 배치해 건축과 조경을 하나의 환경적 전체로 통일시킨 훌륭한 사례이다.

2012.11.12.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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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에 대하여 

 

불국사


종 목  사적 제502호
지 정 일 2009.12.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 대 통일신라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불국사의 문화재)


1.다보탑


종 목  국보  제2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2.불국사 삼층석탑 (석가탑)


종 목  국보  제2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3.무구정광대다라니경


종 목 국보 제126-6호
지 정 일 1967.09.16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 불교중앙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간행된 목판인쇄본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이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할 당시 탑 안에 있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부식되고 산화되어 결실된 부분이 있었는데 2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져, 1988년에서 1989년 사이 대대적으로 수리 보강하였다. 불경이 봉안된 석가탑이 751년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세워졌으므로 이 불경은 그 무렵 간행된 것으로 인정된다. 또한 본문 가운데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집권 당시만 썼던 글자들이 발견되어, 간행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인쇄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770년경에 간행된 일본의『백만탑다라니』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을 다 새긴 것이 아니라『무구정광대다라니경』중에서 발췌하여 새긴 것으로, 판각술에 있어서도『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훨씬 정교하며 글자체가 예스럽고 힘이 있다.따라서 목판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이라 할 수 있다.

 

 

4.연화교 및 칠보교

 

종 목 국보 제22호

지 정 일 1962.12.20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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