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 수어장대 | |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 재 제1호 소재지 : 중부면 산성리
이 건물은 남한산성 서쪽 주봉인 일장산(日長山) 정상(해발 453m)에 세워진 성곽시설물로 조선 인조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이며, 이 곳에서는 성내와 인근의 양주ㆍ양평ㆍ용인ㆍ고양ㆍ서울ㆍ부천 및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조된 2층 누각이며 축조당시에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불리었으나 영조27년(1751)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왕명을 받들어 2층 누각을 증축하였는데 외부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이 산성이 수어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으나 성곽이 준공된 뒤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케 하였는데, 이 수어청에는 전ㆍ중ㆍ후ㆍ좌ㆍ우의 오영(五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군사를 이끌고 청태종의 13만 대군에 대항하여 47일 간을 항전하던 곳이기도 하며, 무망루라 이름한 것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 인조의 아들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봉천)에 잡혀갔다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10년 만에 죽은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영조ㆍ정조가 효종의 능침(陵寢)인 여주ㆍ영능에 전배(展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수치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고종 건양 원년(1896)유수 박기수(朴岐壽)가 개건하였으며 또한 1957년에 해체복원하였다. 구조는 한식 목조2층 와즙(瓦葺)으로 웅장한 규모의 성곽건조물이다. | <!-- list 2--> 승열전 | |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 소재지 : 중부면 산성리
숭열전은 남한산성내 일장산(日長山)중턱에 건립되어 있는 백제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이며, 산성 축성당시 총 책임자였던 완풍군 (完豊君) 이서(李曙)를 배향(配享)으로 종사(從祀)하고 있다. | 조선인조 16년(1638)에 왕명으로 건립하였으며 이서는 이산성축성에 공이 커 여기에 배향하였는데 매년 춘추로 택일해서 향제하고 향축은 예조에서 보냈으며 정조19년(1795)숭열이라 사액(賜額)하였다.
건물양식은 한식 목조 단층의 와즙각우(瓦葺閣宇)이며 수차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 제22대 정조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서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치하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신하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한사람 같이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정조가 곧 축성시의 공로자 이서를 종사케 하였다. | <!-- list 3--> 청량당 | |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소재지: 중부면 산성리 815-2
청량당은 남한산성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의 서편에 위치한 당우(堂宇)로서 이회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인조 2~4년 사이에 산성의 동남편 축조공역의 책임자로 있던 이회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언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는데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 본전의 구조는 한식 목조 단층 기와지붕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0.8평의 건물이다. 남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총책임자는 이서이고 동남성 축조는 이회, 서북성(西北城)축조는 벽암대사의 승병들이 맡았는데 동남성 축조는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성되지 못하자 이회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동남성 축조공사가 부진하고 취약한 것은 이회가 공사경비를 주색에 탕진한 때문이라고 참언상소하였기 때문에 즉결 처분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회는 형장에서 구차스러운 변명을 하지 않고 다만 「사필귀정이니 내가 죽는 순간에 매 한마리가 날아오리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오면 내 죄 없느니라」하였다. 이회가 절명하려는 순간 과연 하늘에서 매 한마리가 날아 와서 곁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 절명하는 이회를 슬프게 응시하였다 한다. 이에 비로소 이회의 죄상을 재검토하게 되어 축성공사의 자취를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주색에 탐닉했다 함은 전연 낭설로서 공사가 매우 치밀·견고한 것이어서 무고하였음이 밝혀졌다. 이회는 난공사의 완벽한 추진을 위하여 처첩을 삼남지방에 보내 축성비용을 모금 전달케 하였을 만큼 갖은 성의를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회의 충성과 무고하게 희생된 원혼을 위안하기 위하여 당우를 짓고 사시로 제향을 드리며 청량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이회의 사랑하는 처첩들은 남편의 맡은 일을 돕기 위하여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에 돌아오는 길에 송파강두에서 남편의 원보(怨報)를 듣고 슬퍼한 나머지 몸을 강물에 던져 순사(殉死)하였다. 청량당에는 예부터 구정 초 2日을 제일로 정하고 산성일대의 부녀자들이 소원성취의 치성을 올리는 풍습이 전해 오고 있다. 산성의 동남쪽과 서북쪽 축성을 이회와 분담ㆍ축조하였던 벽암대사의 공적을 기림과 아울러 호란 시 구국을 위해 용전분투하였음도 무위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신하의 맹을 맺고 말았기 때문에 표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음을 애석히 여겨 이회장군과 함께 합사하였다. | <!-- list 4--> 연무관 | | 지정번호: 경기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6호 소재지: 중부면 산성리
연무관은 남한산성내 동편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군졸들이 무기를 닦던 곳으로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숙종 때에 와서 종전에는 연무당이라 불러오던 것을 연병관으로 개칭하는 한편 수어사 김재호로 하여금 일대 개수를 하게하고 「연병관」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 예전에는 이 건물을 중심으로 무술을 닦고 연무관에서 무재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한양으로 보냈다 한다. 구조는 한식 목조 단층 와즙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에 건평 37평의 건물이다. 원기둥에는 4개의 주련(主聯)을 걸어 놓았으며 통나무에 글을 썼는데 안쪽을 파내어 기둥에 부착해 놓았다. 그 글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옥과 같이 단단한 진터와 철벽과 같이 견고한 성곽이 높은 산 위에 축조되어 있고, 풍운을 탄 용처가 기이한 힘을 내는도다. 궁상각치우 오음육률(宮商角緻羽 五音六律)이 경내에 진동하여 삼밀(三密) 신밀(身密) 구밀(口密) 의밀(意密)을 총본(蔥本)에 전하니 삼본(三本)위는 덕본(德本), 녹은 공본(功本), 직은 능본(能本)이 공허하도다. | <!-- list 5--> 침괘정 | |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소재지: 중부면 산성리침괘정은 남한산성내 마을 동쪽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정각인데 여기서 이 건물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축조한 이서라 한다. 이서가 축성에 착수하였을 때 이 지점 수풀 속에 한 고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몇 백 년이 되었는지 건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초가 견고하였으며 방의 온돌이 상하지 않았고 건물 중간 한 방의 온돌 높이가 수 척에 달하였다 한다. | 시험삼아 불을 아궁이에 때어 보니 웃목부터 더워지고 차차 아랫목이 더워졌다 한다. 따라서 주민들의 전하는 말로는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였다 한다. 침괘정이 온조왕의 왕궁지라 하는데 대해서는 이를 고증할 아무런 자료도 없기 때문에 무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재의 건물은 후세의 것이고 이서가 발견할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이 중수(重修) 하고 침괘정이라 명명한 것이고 무기고 혹은 무기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인 듯 하다. | <!-- list 6--> 현절사 | |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소재지: 중부면 산성리
이 건물은 남한산성 동문안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의 척화신(斥和臣)인 3학사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에 의하여 심양에 압송되어 항거하다가 결국 인조 15년(1637)비참한 죽음을 당한 뒤 그 충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에 유수 이세백에 명하여 세웠으며 동왕 19년(1693)봄에 사액하였다. | 그 뒤 1711년에 주전파의 거두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溫)을 다시 추향하였다. 인조 14년에 청태종이 군신의 맹약을 강요하여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주화파와 주전파 양파로 갈리어 맹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청태종의 13만군의 질풍과 같이 침입하여 수도를 위협하자 왕세자와 비빈, 대군들은 강도 (江都)(강화)로 피난시킨 후 인조도 뒤이어 강도로 몽진하려 하였으나 적의 예봉이 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수성중에도 주전, 주화 양파의 논쟁은 더욱 치열하였다. 주화파의 주장은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이었고 주전파의 맹장은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장령 홍익한(洪翼漢)등 이었다. 병자호란이 종결되고 청과의 강화조약 가운데 주전파 인사들은 청에 인질로 보낸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청태종의 독촉이 심했다.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주전파중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만을 인질로 보냈다. 이 3학사는 청태종의 친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죽이고 친서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왕에게 진언한 사람들이다. 홍익한은 선조 19년(1586)에 진사 홍이성의 아들로 태어나 인조 2년(1624)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서 등을 거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윤집은 선조 39년(1606)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서 등을 거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윤집은 선조 39년(1606)에 현감 윤형갑(尹衡甲)의 아들로 출생하여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오달제는 광해군 1년(1609)에 오충해의 아들로 태어나 2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사헌부 지평등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홍익한이 심양에 압송되자 별관에 있게 하고 잔치를 베푸는 등 조석으로 극진히 후대하였으나 음식을 전폐하고 완강히 반항하였다. 청태종이 친히 불러 그 사유를 물어본 즉 「우리나라는 본시 예의지국으로 예의를 숭상하여 왔고 간관은 옳은 일을 진언하는 것을 그 직책으로 하고 있는데 작년에 청왕의 서면이 왔을 때 나는 그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황제라 칭하여 왔으니 만약 이렇게 위약을 하면 형제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요, 황제라 칭한다면 이는 천하에 두 천자가 될 것이다. 너의 나라는 우리나라와 새로 교린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일 먼저 위반하였고,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준 명나라와의 의를 무시하고 먼저 맹약을 위반하는 너의 나라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이치에 당치 않은 일이니 이를 왕께 아뢰어 우리나라가 잘못을 범치 않기 위한 것이니 어찌 이치의 옮음을 알아듣지 못하는가?」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태종은 대노하여 그를 감금하였다가 형장에 끌어내어 처참한 방법으로 사형에 처하였다. 윤집도 심양으로 압송될 때 수창자(首唱者)를 협문하자 말하기를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베려면 마땅히 베일 것이요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자 청태종이 일면 회유, 일면 협박하면서 감언이설로 개심을 강요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으며 오달제도 후대와 감언이설의 회유, 협박에 대해서도 끝내 굴하지 않자 형장에 끌어내어 참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하고 군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영혼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이 세 사람을 「3학사」라 부른다. | <!-- list 7--> 신익희선생 생가 | | 지정번호: 도문화재 지정 경기도 문화제 제134호 소재지: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전통한옥, 해공유품도보관"
해공선생의 생가를 경기도는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도문화재 제134호로 지정하고, 그간 각조형물을 설치하여, 계속 보완하고 있다. | 해공선생의 생가는 원래 2백여 년 전의 한옥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올축년(1865)장마로 인해 가옥일부가 파손돼,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해공선생이 유년을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다. 유품으로는 목판, 고서, 휘호(친필), 놀이용 화살 등이 보존되어 있다. | <!-- list 8--> 신경유선생 영전 | |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소재지: 도척면 진우리
신경유공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으로 자는 자질(子質) 시호는 경의공(景毅公)이다.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로 충주에서 순국한 신립장군의 둘째 아들로 형은 인조반정공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경진이요, 아우는 동성군 경연인데 3형제가 모두 인조반정 공신들이다.
공은 선조 14년(1581)에 태어나 23세 때인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돈영 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으며 그 뒤 통정(通政)의 품계(品階)에 승진하였다. 그러던 중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지고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창하자 흉종(兇從)들이 대비를 석궁에 유폐하고 충신을 내쫓으니 윤기는 타락하고 사직이 장차 위태롭게 되자 광해군 15년(1623) 3월 인조반정거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 그 공으로 경기도 수군절도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해 겨울 논공행상할 때 분충찬모립기정사공신의 훈에 책록되고 동평군에 봉해졌다. 인조 5년(1627)정유호란에는 주사대장이 되어 강화에 호종(扈從)하였고 이듬 해(1628)에 충청도 병사가 되었다가 모함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인조 9년(1631)에 전라도병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체직되었다. 인조 11년(1633)향년 56세로 졸하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 list 9--> 광주유정리 좌불상 | |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소재지 : 도척면 유정리유정리 부락 가운데에 위치한 이 좌불상은 미륵불이며 부락의 수호신으로서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불상이다. 보호각에 봉안되어 있다. 부락 주민이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불교축 제일이나 길흉사가 생긴 때에는 축복과 소재(消災)의 기원을 드리기도 한다 화강암 불상인 이 좌불상은 호분(胡粉)을 너무 많이 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분명치 않다. 얼굴은 넙적한 방형이며 눈, 코, 입이 빈약하게 처리되었고 귀는 목까지 늘어졌으며 체구에 비해서 머리가 유난히 큼직하다. | 목에는 삼도(三道)를 표현하였으며 머리는 팽이 모양으로 뾰족하고 여기에 계주를 표시하였으며 머리칼은 나발(螺髮)이다. 얼굴에 비해 좁은 어깨는 둥글지만 웅크린 모양으로 되어 있고 몸매는 풍부한 편이 아니며 무릎 역시 상체에 비해서 워낙 작아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옷은 통(通)의 법의를 이고 있으며 결가부좌 (結跏趺左)한 자세도 원만하지 못한 편이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전정인의 손은 빈약하며 팔의 양감(量感)도 보잘 것 없고 옷 주름도 세련되지 못하여 도식적인 솜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넙적한 용모, 웅크린 듯한 신체 등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에 조각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큼직한 얼굴에 보이는 온화한 분위기는 부처님의 자비를 애써 전달하고자 하는 면모가 엿보여 호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불상은 조각자도 알 수 없고 사찰이 있던 유지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와 모셔놓고 부락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list10 --> 유재공묘와 신도비 | | 지정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지정신청 소재지 : 실촌읍 연곡리
유재공은 1647년(인조25) 정해 8월 8일생이며 1703년(숙조29) 계미 10월19일 생을 마쳤다.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游齋) 수광의 증손으로 당규(堂揆)의 아들이다. 1667년(현종8)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1) 증광시(나라에 경사 때 보던 과거)에서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에 보직된 뒤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682년(숙종14) 우승지가 되였으나 송시열 서인(西人) 예론(禮論)을 반대하다가 철원에 부처(付處)되었다.
1688년(숙종14) 당시 동내 부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91년(숙종17) 동지중추부사 1693년(숙종19) 춘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청풍현감을 자원하여 나가서 명사강목(明史綱目) 24권을 저술하였으며 그 뒤 한성부 부윤 우참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있는 동안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관한 여러 소장과 저서(著書)를 제진(製進)하였고 탕평책, 중농정책을 건의하였으며 경연장 교재의 개편을 진언하였다.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강화도 축성(築城) 방안과 봉수제도(烽燧制度) 개선방안 등을 건의하여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춘천부사 등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진휼(흉년에 곤궁에 빠진 백성을 구함)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경제세무(經濟稅務)에 관한 실용적인 사상을 가지고 조세의 감면 등 각종 정책을 입안하였고 역리(易理)로써 군도(君道)와 치술(治術)을 설명한 역의규반(易義窺班)을 저술하여 임금께 올렸다.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론보다는 존심양성(存心養成)등 실천적인 덕목에 치중하였다
실촌읍 연곡리 입구에서 약 60m 들어가 우측으로 유재공의 묘가 나타난다. 묘소 아래에는 신도비(총높이281㎝)가 건립되어 있다. 방부와 개석은 산화되어 검게 변색되어 있고 백대리석의 비신(높이206㎝, 폭 89㎝, 두께 30㎝) 하단은 부식이 심하여 비문의 판독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묘역에는 좌우로 각 1개의 촛대석 모형과 문관석 등의 옛 석물이 구비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는 화강암 계열로 보이는 비석(총 높이 188㎝)이 있으며 살짝 산화된 듯한 개석이 받치고 있다. 비석은 앞쪽으로 약간 기운 듯 하나 지형 탓으로 보이기도 하다.
| <!--list10끝--><!--list11---> 지수당 | | 지정번호: 도문화재 지정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4호 소재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고관들이 한유하던 낚시터이다. 건립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이 있다. | 정자에는 지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의 남쪽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성을 관류하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 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이것은 을축년 대 홍수 때 매몰된 정자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래 'ㅁ' 자 형의 정자를 완전 복원하지 못한 것이 현재의 정자 모양으로 남았다. 지붕의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정자 크기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되어 있으나 측면의 1칸은 반칸 크기로 되어 건물의 평면은 장방형 꼴을 이룬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주위에 30cm 높이의 난간을 둘렀으며 남북동 3곳의 난간 중앙을 트고 디딤돌을 놓아 출입토록 하였다. 천장은 연등(삿갓)반자와 우물반자를 겸하여 호화롭게 보이게 하였다. 기둥의 양식은 주심포에 사각기둥을 쓴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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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의 사적:
분원리 도요지 | | 지정번호 : 광주시 향토유적 제1호 소 재 지 : 남종면 분원리 |
| 분원이란 사옹원의 제작소이며 관영자기 제조를 맡아보던 곳으로 광주시에 설치되었으며 그 후에 분주원(分廚院)이라 개칭하였다.
'고려사열전'과 '고려사절요'등에는 조준(趙浚)(1346-1405)의 건의 내용에 '사옹원에서 매년 사람을 각 도로 보내어 왕실에서 쓰는 어용자기를 감조(監造)한다.
그러나 사리를 취한 자가 많아서 왕도까지 와서 진헌(進獻)하는 수량은 대폭 줄어져서 그 폐단이 크다'고 한 것을 보면 이 기록은 고려 말 공양왕 때의 기록이므로 고려시대에 이미 사옹원에서 왕실용 어기번조를 소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고려왕조에 이어 태조 원년(1392)에 사선서(司膳署)를 설치하였으며 바로 이것을 사옹방(司甕房)으로 개칭하였고, 세조 13년(1467)에 사옹원으로 개칭하고 조선조말까지 존속하였다. 분원사기란 옛날 광주분원에서 만든 도자기로서 백자, 염부(染付)와 유리유(琉離釉), 진산(辰砂), 염부와 철사(鐵砂).진산의 삼채(三彩)등 여러 종류의 자기가 생산되었다. 고요지(古窯址)는 분원초등학교 중심부에 있었으며 분원에는 사옹원관선정비(司甕院官善政碑)가 있다. 상번천 도요지 | | 시 대 : 조선전기(15C-18C)
종 류 : 청자, 백자, 접시류 등
소재지 : 광주시 중부면 상번천리 |
| 1985년 중부 고속도로가 착공되면서 이곳이 고속도로 진입로에 해당되자 정부에서 이화여대 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발굴공사가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 작업시설의 구조를 알 수 있었고, 만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출토된 백자는 밥그릇, 술잔, 접시가 전체 출토량의 95% 이상을 차지하고 다른 종류는 불과 5% 미만이었다.
이밖에도 청화백자 1편, 철회백자 2편, 중국 명대의 청화백자 2편이 발견되었으며, 이들 백자의 제작시기를 측정할 수 있는 '가청33년명'이 있는 묘지가 발견되었다. 남한산성 | |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축성시기 - 본성 : 인조4년(1626)
구 성 :: 본성, 외성(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규모 및 시설 - 총연장 : 본성(9.05Km), 옹성포함(11,755Km) - 성곽의 높이 : 3 - 7.5m - 시설 : 장대4(수어장대만 현존), 접문4, 옹성5, 봉화대2, 암문16 |
|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AD672)에 토성으로 축성하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 하였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가 주변부가 높고 협약한데 비해 성의 중심부가 낮고 평평한 평지를 이루어 수비가 용이하고 성내의 주거가 평안하여 산성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광해군 13년(1621)에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한 것을 이괄의 난을 치르고 후금의 위험 이 증가하므로 인조 4년(1626)에 준공되었다. 광주시의 기념물: 망월사지 | |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 111호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4
지정일 : 1988년 12월 2일 |
| 남한산성 성내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에 장의사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 화엄경,
금정(金鼎)하나를 옮겨 창건하였다 하나 옛 망월사는 모두 타버리고 90년부터 복원 계획을 추진 금다요사채, 사리탑, 대웅전과 기타 부대시설 등이 복원되었다. |
개원사지 | | 경기도 지정기념물 제119호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98-5
지정일 : 1989년 12월 29일 |
| 산성 동문 안에 있고 많은 불경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함.
현재는 옛 개원사는 모두 타버리고 외3포, 내5포의 한식법당 1동, 한식요사 1동, 용왕당 1동, 종각 1동, 일주문 1동이 복원되고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수호 승군들의 음식물 제공에 사용했던, 직경 83㎝의 대형청동수조 1개와 대형 항아리 9개 대형함지 5개 등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
최항 선생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33호
소재지 : 퇴촌면 도마리 |
| 최항 선생의 묘는 묘역에 비하여 봉분이 작으며 얕게 형성돼 수성에 둘러졌고 봉분 좌우측에서는 묘비 전면에 발달석, 혼유석, 상석, 향로석, 주막석이 밀집되어 있으며 그 앞에 방형의 석등이 있다. 제단 좌우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좌측 묘비는 묘소 설치 당시 건립한 것이고 상석과 우측 묘비는 선생의 17대손이 약 300년 전에 설치한 것이다. | | 선생은 태종 9년(1409)에 출생하여 세종 16년(1434)에 알성시에 장원급제하고 세종 25년(1443) 집현전학사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언해하였으며 또한 용비어천가를 주해하였다.
단종1년(1453) 승지로 있으면서 수양대군(뒤에 세조)을 추종하여 김종서 등 단종의 광지신을 제거하는데 가담하여 그 공으로 세조가 즉위한 후 정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
| 그 후 동국통감(東國通鑑)과 육전(六典)의 수찬(修撰)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12준도(十二駿圖)등을 찬(撰)하고 명황계감 (明皇誡監)의 번역과 어제유장설(御製諭將說) 3편(篇)을 신숙주등과 같이 주해(註解)하였다.
세조의 행상을 초집하였으며 또 좌익공신 2등에 성종2년(1471)에는 좌리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세조 13년(1467)영상에 이르고 예종 1년(1469)에 상정소(詳定所) 제조(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세종실록을 수찬(修撰)하였으며 영성부원군에 진봉되었고 성종5년(1474)에 졸하였다. |
허난 설헌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 초월읍 지월리 |
|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 묘역에서 약 500여 m 오른쪽에 있었으나 서울-대전 간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85년 11월 24일 현 위치로 이전 되었다.
새로 조성된 묘역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종중에서 선영의 묘를 모두 이곳에 이장하였는데 허난설헌의 묘는 이 가운데에서 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묘 앞에는 1985년 11월 24일 전국시가비 건립동호회에서 건립한 시비가 서 있다. 시비 중에는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는데 그 대상인 어려서 죽은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우측 전면에 나란히 있고 1978년 3월에 건립된 묘비가 있으며 그 비문은 문학박사 이숭녕씨가 지었다. 허난설헌은 조선 명종 18년(1563)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의 딸로 출생하여 선조 22년(1589)에 27세를 일기로 요절한 조선조의 대표적이며 천재적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호는 난설헌, 본관은 양주이다. 또한 홍길동전 저자 허균(許均)의 누이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태어나서 시인 이달에게 글을 배웠는데 천재적 시재를 발휘했으며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나 어렸을 때 여신동이라고까지 칭송이 자자하였다. |
맹사성 선생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21호
소재지 : 직동 |
| 맹사성선생의 묘는 맹산 중턱에 위치하여 봉분과 묘역이 다소 협소한 편이다.
선생은 공민왕 9년(1360) 전교부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 동통(古佛東通)이다.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일찍부터 뛰어난 재질을 길러 오왕 12년(1386)에 27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검열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수원판관, 예조정랑, 시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6년(1406)에 이조참판, 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시종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한성부사가 되고 태종 8년(1408) 대사헌으로 있을 때 왕에게 보고함이 없이 부마평양군 조대림을 지평 박안신으로 하여금 국향(鞠向)한 것이 태종의 노여움을 크게 사서 한주에 유배되었으나 당시 영의정 성석린의 극간으로 마침내 풀려났다. 그 후 이조 참판을 거쳐 57세에 예조판서에 오르고 호조ㆍ공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도고 문신으로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가 되었다가 68세에 좌의정에 올랐다. 세종 1년(1429) 궤장을 하사받고 다음 해 「태조실록」을 감수하였으며 그 후 좌의정에 올라 이듬해 영춘추관사를 겸하고 「팔도 지리지」를 찬선하여 당대의 명상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고려 조선조에 걸쳐서 두 왕조를 역사하면서 청백리요, 어진 선비이며 훌륭한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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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선생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98호
소재지 : 오포읍 신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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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유신(遺臣)이며 충신인 김자수 선생의 묘소는 다사동에 안장되어 있으며, 공의 유언에 따라 묘비를 건립하지 않다가 조선조 효종 대에 이르러 7대손 찰방 적(察訪 績)의 발의에 따라 신도비를 마련하였으나 공의 유계(遺戒)가 지엄하였음을 반성하고 묘하게 묻어두었다가 추후에 세웠다.
공은 증례조참의(贈禮曺參議) 오의 아들로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경상도 안동부에서 출생하였는데 자(字)는 순충, 호는 상촌(桑村) 이다 |
|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편모 봉양에도 극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환 중 시탕(侍湯)에도 온 정성을 다하였고 별세 후에는 3년간 시묘 (侍墓)하였으며 왕께서도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리셨다. 그 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좌정언직(左正言職)에 승진하였다. 당시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의 포상문제를 논의할 때 반대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도(孤島) 돌산(突山)으로 정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나 복직되었다. 공양왕 4년(1392)에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칭하는 변혁이 일어나자 공은 안동으로 귀향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공의 도덕과 경륜을 아껴 누차에 걸쳐 헌장(憲長)(현 검찰총장)으로 초청하였으나 불응하였는데 태종이 노하여 다시 공을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급히 부임하라 명하나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평생에 충효에 뜻을 두고 스스로 격려하였거늘 지금 태종에게 굴복하면 이것은 의리가 아니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 대하랴 」하고 내가 죽을 때가 왔다고 하며 수의와 장례기구를 마련해서 아들을 배종케 하고 출발하였다.
수일 만에 광주추령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려 「포은(圃隱)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내가 죽을 땅은 이 곳이다. 여자도 불경이부(不敬二夫)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의 왕을 어찌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곳에 매장하고 행적을 금석(金石)에 새기지 말며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무인(武人) 투성이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된다.」는 말을 남기고 음독자진 하였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 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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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 선생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101호
소재지 : 오포읍 능평리 |
| 김균 선생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서 묘소는 오포 태현(台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신묘로서 장방형묘에 화강암 묘위석(墓圍石)이 둘러져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문충공 송병준(宋秉濬)이 찬(撰)하고 공의 18대손 가선대부 중추원의장(嘉善大夫 中樞院議長) 정목(正穆)이 광무 9년(1905)에 건립하였다. 공은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으며 공양왕 4년(1392) 7월 17일 밀직부사(密直府使)로 있을 때 익안대군 (益安大君)등 39인과 함께 이성계 조선태조를 추대하여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식을 거행케 함으로서 개국공신 3등훈 15명중 제 2인으로 책훈(策勳)되어 순충분의좌명 개국공신 숭록애부 의정부 좌찬성 게림군이 되고 뒤에 제숙(齊肅)의 시호가 내렸으며 불천지위(不遷之位)로 향사(享祠)되었다. 사당(祠堂)은 백세불천지묘(百世不遷之廟)로 되었다. 출생 시기는 알 수 없고 세조 4년(1458) 에 별세하였다. |
신립 장군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95호
소재지 : 실촌읍 신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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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립장군은 조선명종 1년(1546)에 생원 화국(華國)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조의 무장으로서 임진왜란(1592)때 충주에서 순국하였다. 선조 원년(1567)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도청부도사 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1583)문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 온 니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와 그 전공으로 함경도 북병사에 승진하고 얼마 뒤에 니탕개를 투멸하였다. 그 후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 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기도 하였다. 선조 23년(1590) 평안도병마절도사, 동왕 24년(1591) 한성부판윤, 동왕 25년(1592) 임진왜란 삼도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진 하여 충주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으나 참패하여 김여물과 함께 물에 투신 순국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장군의 묘역은 약 70여 평의 면적에 비 1기, 문인석 2기, 망추석 2기, 동자석 2기, 사석 1기, 장명등 1기가 배열되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찬하고, 신익상(申翼相)이 글씨를 썼는데 숙종 14년(1688)에 건립되었다. |
의안대군묘 | 성명 : 의안대군(宜安大君)/이방석(李芳碩)
생몰년 : 1382(우왕 8)∼1398(태조 7)
본 관 : 전주(全州) 이(李)
시 호 : 소도(昭悼)
시 대 : 조선 전기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166호 소재지 : 중부면 엄미리 산15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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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군1382(우왕 8)∼1398(태조 7).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방석(李芳碩)이며 태조의 8번째 아들로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이다.
선 태조의 왕자로 고려 말 군기 녹사가 되었고,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태조 7년(1398) 이복 형인 방원(芳遠)이 중심이 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 남은 · 심효생과 동모제(同母弟)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과 함께 살해되었다.
시호는 소도(昭悼)로 의안군(宜安君)에 추봉(追封)되고 세종 19년(1437)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癒)를 후사로 정해 입묘 봉사(立廟奉祀)하였으며, 숙종 6년(1680) 영춘추관사 김수항(金壽恒) 등의 상언으로 의안대군에 추봉되었다. |
안정복묘 | 소재지 : 광주시 중대동 18세기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본관은 광주(廣州)며 자는 백순(百順)이다. 그리고 호는 순암(順菴)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서우(瑞雨)이고, 아버지는 극(極)이며, 어머니는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중앙정계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던 남인 계열로 아버지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었으며, 그 자신도 한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벼슬이 주로 외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제천·울산·영광·무주·한양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1736년(영조 12)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이주했다.
1746년 이웃 안산에 있던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삼고 과거를 외면한 채 여러 학문을 섭렵했으며 특히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뛰어났다. 남인에 속했다. 그 뒤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고 1748년 이익이 동몽교관으로 추천했으며, 1749년(영조25)부터 만령전 참봉 ·사헌부감찰 ·익위사익찬 ·목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돈녕부주부·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1790년(정조 14)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광성군(廣成君)에 봉해졌으나, 그가 맡은 직위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령에 따른 예우로 받은 산직(散職)이었다. 그 중 목천 현감 때 저술한 교화행정서 《임관정요(臨官政要)》를 몸소 시행하였고, 덕곡 마을에서는 향약을 실시하였다. 만년에는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제수되었으나, 주위의 친구와 제자들이 천주교 탄압에 희생되었으며 슬하에 어린 손자 ·손녀만 남게 되었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주자학적인 경학설에 따라 만사를 판단하면서도 경학은 어디까지나 경세(經世)적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경학의 해석에서는 이황(李滉) ·이익은 물론 주자의 해석까지도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있었다. 저서 《하학지남(下學指南)》과 《잡동산이(雜同散異)》에서는 불교 ·도교와 역사 ·서학(西學)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걸친 지적인 탐구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관계 저서에는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열조통기(列朝通紀)》 외에도 이익과의 역사문답인 《동사문답(東史問答)》이 있고, 한국의 여러 인물전기류가 있다. 특히 1758년(영조35) 완성한 《동사강목》(20권)이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모방하였다고 하지만, 자주적 ·객관적 ·실증적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였다. 종래의 중국적 사관에서 벗어나 단군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사의 상한을 올려잡았을 뿐만 아니라, 종전에 모호하던 사실을 규명하였고, 외적의 침략에 항거한 장수들을 내세워 민족의 활기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동사강목》 본편(17권)과 《고이(考異)》와 《지리고(地理考)》에서 다룬 133항목에서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유행하던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비판하였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천주교는 사위인 권일신 등의 남인학자들이 신봉하고 있었는데, 《천학고(天學考)》와 《천주문답(天主問答)》을 저술하여 이교(異敎)로 지목하는 등, 그릇된 외래문화에도 적극 반대하였다. 즉 그는 경세치용의 경세론을 학문과 현실에 연결시키고, 그 정신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신보수적인 학자였다.
이와 함께 그는 정전(井田)을 연구하면서 민산(民産)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토지개혁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환곡제도를 없애고 관권이 배제된 가운데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이를 자치적으로 운영하자는 적극적인 사창론(社倉論)을 제기했다. 그가 현실적인 개혁론으로서 제기했던 토지제도 개혁론은 기존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한 위에서 토지소유 규모의 상한선을 정하고 부농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농업문제의 해결 방향을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에서보다는 증산(增産)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사창론도 기존의 환곡제도를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개선을 주장했다. 결국 안정복이 가졌던 현실적인 개혁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부분적인 제도개혁과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1783년 정조가 《동사강목》을 을람(乙覽)하였으며, 이 책은 근대에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 ·신채호(申采浩) 등의 민족사학자의 학문적 ·사상적인 계몽서가 되었고, 뒤에 문헌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7~19세기의 경세성 ·비판성 ·실증성으로 특징되는 한국 실학사에 기여하였다. |
정충묘 | 소재지 :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22世 허완(許完)은 보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북진하여 남한산성에 포위당하여 있던 왕(인조)을 구하려 하였으나,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적을 만나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뒤에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병조판서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閔英), 안동영장 선세강(宣世綱), 죽성산성 성주 이의배(李義培)등 네 분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이다.
2001년도에 광주시(廣州市)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서 수리하고 정화했다. | <!-- 행궁추가---> 행궁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164호
소재지 : 중부면 산성리 |
| 행궁이란 도성 안의 궁궐이 아니라 임금이 거동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을 말하며, 조선조의 행궁으로는 수원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의주행궁, 양주행궁, 부안행궁, 온양행궁 등과 함께 남한산성의 행궁은 '광주행궁' 또는 '남한행궁' 이라 하였다. 이 행궁은 상궐,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행궁의 종묘), 우실(행궁의 사직단)이 뒤에 설치되었다. 또 행궁 뒤 언덕에는 숙종때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1798) 여기서 상궐은 내행전(행궁의 내전)으로서 1625년(인조3)에 준공한 70여 칸 건물이며, 서쪽 담에 문이 있어 좌승당으로 통하였다. 또 하궐은 외행전으로서 상궐과 동시에 지었고, 상궐의 삼문 밖에 있으며, 서쪽담의 문으로 일장각과 통하는 것으로 중정남한지에 기록되어 있다. 하궐의 규모는 154칸으로 광주부읍지에 전한다. 남한산성 행궁터는 199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2차 발굴조사를 완료하였고, 2002년에 상궐 72.5칸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2004년 8월 현재 하궐지의 발굴조사와 좌전(26칸)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고, 2005년 한남루지 및 행궁주변 일곽의 조사 완료 후 하궐복원공사를 착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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