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학교숙제인데일본에관한것좀알려주세요
gs**** 조회수 4,978 작성일2010.10.21

1.우리나라와의관계

2.역사적 사건

3.문화제

4.관광지

5.유명한인물

6.음식

7.전통의상

8.주요자원

9.수도 , 면적 , 인종 , 언어 , 종교 , 화폐 , 기후

 

욕으루답글달지말아주세요,,

내공드림

부탁드려요. 일본관련조사숙제라서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ity****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현재는 경제적측면에서 보면  동맹국이라고 할수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대일적자가 꾸준히 계속돼는것때문에 문제가 좀 많긴했지만.^^;;)

1965년 박정희 정권이후로 꾸준히 수입수출이 증가해서..지금에 이르러선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수출2위대상국이고 수입측면을보면 1위대상국에 해당합니다.

또한 일본으로서도 수출입 2-3위정도의  대상국이 되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현재의 관계는 수교상태로 국민감정은 저희나라쪽에서 일본쪽에 안좋은 감정을 갖고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영향입니다..일제강점기에대해서는 잘아실꺼라믿고...

일본측에서는 잘못된역사교육으로인해서 한국사람들의 대일감정에대해 좋은시각은 없습니다.

더욱이, 경제적인 우월을 바탕으로 우익세력에의해 신군국주의로 향하는 측면이 없지않아있습니다.

과거로 넘어가면 일본은 조선시대까지만했어도(왜란이전) 우리나라에서 벗어나기 힘든 국가였죠,

문화문물의 주 수입처이였기때문인데요, 이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교역하러오는

배들의 입항서를가지고(이당시에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매우크게 남는장사였다고합니다.)

일본을 통제했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지금의 대마도의경우에는 대마도주는 조선의 관작을 받고,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알리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에대한 대가로 입항서를 몇장까지

만들수있는 권한을 주었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서는 신문물이었구요,

매우 사절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과는 조금 반대의 양상인데요,

현대에있어서의 일본국민이 한국인에게 갖는 감정과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갖는 감정이런 관계가

반대로 역전돼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 일본의 역사적 사건

1.러일 전쟁

1904년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가을까지 계속된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사이의 전쟁으로, 만주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반도와 한반도 근해이며,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만주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욕망이 충돌하여 발생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 해군과 해상 무역을 위해 태평양연안의 부동항을 얻으려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사용 가능한 유일한 항구로,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다. 여순(旅順; Arthur) 항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이후인 1903년8월부터 진행된 짜르정부와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였다.

 

 

2.진주만 공격

()1941년12월 7일아침, 일본 제국해군 비행기들이 미국하와이 주 오아후 섬진주만에 있는 미국해군육군기지에 가한 기습 공격이다.

1941년12월 7일아침, 일본 제국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 주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 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국보급 문화재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나라 현이코마 군이카루가 쵸에 있는 성덕종의 총본산이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즉 우마야토노키미(厩戸王)가 세운 사원으로, 창건시기는 역시 쇼토쿠 태자가 세운 사원인 오사카 시텐노지가 세워진 지 약 20년 뒤인 607년이라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금당, 5중탑 등이 있는 서원(西院)과 몽전 등이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눠져 있다. 서원가람(西院伽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호류지의 건축물은 호키지(法起寺)와 함께 1993년에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축물"로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 절은 백제인이 일본으로건너가서 건축한것입니다

 

3. 일본의 문화제

①도지 (東寺)

796년에 고보대사가 창건한 진언종의 총본산. 경내에는 남대문·금당·강당·식당 등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남동쪽 구석에 5층탑이 세워져 있다. 오층탑(국보)은 1644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도쿠가와이에야쓰<家光>의 손자)의 기부로 건축된 전통적인 와요양식으로 재건되었으며 높이 약55m의 고탑이며, 금당과 대사당도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라고도 부르고 있다.


 

②엔랴쿠지 (延曆寺)

788년에 승려 사이초가 히에이산 정상에 세운 천태종의 총본산.

본당인 네모토추당[根本中堂]는 1642년 개축한 큰 규모의 근세 불당이다. 도토(東塔), 사이토(西塔), 요카와(橫川) 등 세 지역의 가람을 총칭해서 엔랴쿠지라고 한다.



③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

 

창건 연대는 미상, 헤이안시대(794 ~ 1192) 후기로 추정되며, 신사는 본당이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는 정자식 건물로서 신사 건축물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를 보인다.


 

 

④료안지 (龍安寺)

1450년에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창건한 임제종 묘신지파의 명사찰로, 방장 앞의 정원은 대표적인 가레산스이식(枯山水式) 정원으로 일본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기부했다는 동전 모양의 쓰쿠바이(손 씻는 물그릇)도 유명하다.


 

 

⑤니조성 (二条城)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교토숙소로 지어졌으며, 그의 손자인 이에미쓰가 완성하였다. 국보인 니노마루고텐, 중요문화재인 혼마루고텐, 특별명승인 니노마루 정원 등이 있음.

 

 

 

⑥닌나지 (人和寺)

888년에 창건된 절로, 우다천황이 주지로 있었던 절임.

문적사원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진언종 오무로파의 총본산으로, 금당, 오중탑 등 국보 및 중요문화재의 가람이 줄지어있다.



 

⑦가모와케이카즈치진자(賀茂別雷神社) /가미가모진자(上賀茂神社)

 

678년에 창건되었으며, 액막이, 전기의 신을 모시고 있다.

황실의 숭배가 두터운 신사로, 본전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⑧시모가모진자 (下鴨神社)

가모미오야진자(賀茂御祖神社)라고도 불리며, 창건연대는 미상, BC 2년에 복원하였다. 동서에 있는 두 개의 본전(本殿)이 국보이며, 동쪽 불당에는 결혼과 육아의 신을, 서쪽 불당에는 교토의 수호신을 모시고 있다.


 

 

⑨덴류지 (天龍寺)

1339년에 창건되었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後嵯峨)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임제종 덴류지파의 대본산으로, 교토 5대산 중 제 1위로 지정된 명사찰. 무소국사가 조성한 소겐치정원이 유명하다.


 

⑩사이호지 (西芳寺)

729년 ~ 749년에 창건되었으며, 고케데라(苔寺)라고도 불림. 1339년에 무소국사가 재건한 임제종 사찰로, 울창한 삼림에

 둘러싸인 정원이 유명하다.


 

⑪혼간지 (本願寺) /니시혼간지 (西本願寺)

1272년에 창건된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본산. 고에이도(어영당)는 1636년에 재건되었으며,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한 아미타도는 1760년에 재건되었음.


 

 

⑫로쿠온지 (鹿苑寺) /킨카쿠지 (金閣寺)

1397년에 창건된 절로,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지은 산장인 기타야마덴(北山殿)을 선사로 개조한 절로서 사리전[舎利殿(킨카쿠. 금박을 씌운 건물)]과 교코치 연못을 중심으로 한 정원은 무로마치시대의 대표적인 지센카이유식(池泉回遊式) 정원으로, 일본의 특별 사적, 명승지이다.


 

⑬지쇼우지(慈照寺) /긴카쿠지 (銀閣寺)

 1482년에 창건되었으며,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의 킨카쿠(金閣)를 모방해서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세운 임제종 소코쿠지파의 절.



 

⑭고잔지 (高山寺)

774년에 창건되었으며, 가마쿠라시대(13세기)에 묘에대사가 재건하였다.  일본 중요문화재가 1만점 이상 있다.




⑮기요미즈데라 (淸水寺)

 778년에 엔친대사가 오토와 폭포를 발견한 뒤에 세운 절로, 부타이라  불리는 본당(국보)은 에도시대 초기에 재건된 곳이다. 교토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


 

 

⑯다이고지 (醍醐寺)

874년에 창건된 진언종 다이고파의 총본산.

다이고산 전체를 영역으로 하며, 금당, 오층탑 등 수많은 국보와 중요문화재가 있다. 본당인 삼보원의 정원은 일본의 특별 사적 명승지이다.



 

⑰뵤도인 (平等院)

 1053년에 창건되었으며, 후지와라 노요리미치(藤原 賴通)의 부친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의 별장을 개조한 것임. 호오도(鳳凰堂:봉황당 일본 10엔짜리 동전 앞면에 새겨져 있는 건물)는 창건 당시의 건축미를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로, 아미타여래상(국보)과 운증공양보살상(국보)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의 세계유산

1)호류지 불교기념물군(지정연도 : 1993년)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는 7세기 초반 불교를 일본에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쇼토쿠 태자(574~622)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다. 670년 절의 일부가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곧 대규모로 경내를 재건했으며 이후에 서부 경내로 지정되었다.

 

4. 일본의 관광지

도쿄타워

오사카성

히메이지성(히메지성)

후지산

마루노우치
고쿄마에 히로바
신주쿠

시부야

디즈니랜드 등이 있어요...(사진은 시간이 없어서 못 올리겠어요!!)

 

5. 일본의 유명한 인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산포를 빼앗고 우리나라 도자기공들을 납치해간 고니시 유키나가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쓰
죽어서도 히데요시를 충성하려는 미츠나리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히로히토 천황
행주산성 빼앗다 진 우기다
그리고 하나부사 공사와 다케조에 공사
또 고니시 유키나가를 도와준 가토
이순신 장군을 저격시킨 와카자키

 

6. 일본의 음식

 

1. 스시 (초밥) :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해산물이 풍부합니다.

따라서 가격은 저렴하지만 신선도는 우수한 스시를 맛볼 수 있습니다.

 

2. 라멘(라면) :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인스턴트 라면과는 다른 돼지뼈를 우려 끓인 생라면입니다.

 

3. 규동(소고기덮밥) :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

 

4. 우동(우동) : 추운겨울 라면과 함께 따뜻한 우동이 일본에서는 인기가 좋습니다.

 

5. 소바(메밀국수) : 여름에는 시원한 소바가 인기가 많습니다.

 

6. 오코노미야키(일본식 빈대떡) : 밀가루 반죽에 해산물과 돼지고기 등을 넣어 지진 음식으로 마요네즈와

가쓰오부시를 올려먹습니다.

 

7. 다코야키(문어구이) : 잘게 썬 문어를 넣어 만든 풀빵 스타일의 간식거리 입니다.

  

8. 크레이프 : 밀가루 전병에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을 말아서 주는 간식거리 입니다.

 

9. 도시락  : 일본사람들은 도시락을 상당히 즐겨 이용합니다.

                 우리나라의 한솥도시락과 같은 도시락 체인점이 상당히 많고

                 편의점과 백화점에도 도시락을 많이 판매합니다.   

 

10. 카레 : 우리나라 사람 못지않게 일본 사람들도 카레를 좋아합니다.

 

11. 햄버거  : 우리나라처럼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같은 외국브랜드의 매장이 있긴 하지만 모스버거처럼

                  일본 국내의 브랜드를 가진 햄버거가게도 많습니다. 물론 훨씬 맛있구요~

 

12. 오므라이스 : 다양한 소스와 절묘한 계란부침, 맛있는 볶음밥이 삼위일체가 되며 최고의 맛을 낸다고 하네요.

 

 

7. 일본의 전통의상

기모노의 종류는

① 후리소데 : 미혼 여성의 제1예복 성인식무늬는 繪羽(에바하오리-큼직한 그림 무늬가 있는 여자용 덧옷)모양이며 무늬가 바느질 자리를 따라 연결되어 기모노 전체가 한장의 그림처럼 되어 있다. 사은회,결혼식등에 입는다.


② 토메소데 : 기혼 여성의 제1예복이며 격조가 높은 기모노이다. 토메소데는 쿠로토메소데(黑留袖)와 이로토메소데(色留袖)가 있다.

 먼저 쿠로토메소데는 무늬는 상반신에는 달지 않고 옷단에서 옷깃까지는 에바하오리모양으로 이루어져있다. 예전에는 토메소데는 흰 속기모노를 겹쳐서 착용했지만 현재에는 옷이 두 겹으로 된 것같이 보이기 위하여 깃,소매,옷단 따위만을 이중으로 하는 것으로 해서 간소화하고 있다. 결혼식이나 피로연에서 친구들이 입고 신랑신부의 양친,친족중 기혼부인들이 착용한다.

 같은 바느질로 바탕이 칼라인 것을 이로토메소데라고 하는데 쿠로토메소데쪽이 격이 높다. 이로토메소데는 문양수에 따라 착용범위가 넓어진다. 다섯문양이라면 쿠로토메소데와 같은 격으로 입을 수 있다.


③ 호우몬기 : 이로토메소데나 후리소데 다음격의 약식 예복으로 기혼 미혼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고, 또 모양도 에바하오리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사교용으로도 많이 입게 되었다. 현재에는 사교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호우몬기는 흰색감을 한번 가봉하고 나서 밑그림을 그리고 다시 솔기를 뜯어 밑그림을 따라 염색한다고 한다. 그림 전체,또는 바느질선을 따라서 전체적으로 무늬가 연결되어 있다.


④ 이로무지 :오글쪼글한 비단 또는 무늬가 들어간 감에 색을 들인 글자 그대로 전체적으로 문양이 없는 기모노이다. 검은 색은 상복이 되지만 화려한 색의 바탕무늬에 광택이 들어가 두드러지는 기모노는 축하석에 어울리며 수수한 색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상복으로 입을 수 있다. 문양이 들어가면 약식예복이 된다.


⑤ 쯔케사게 : 호우몬기 다음가는 약식예복으로 전후 기모노 제작의 간략화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과 전시중 화려한 기모노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고안된 것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지만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기모노이다.


⑥ 코몬 : 염색한 기모노인 경우는 카따소메(型染め)라고 함.
기본적으로는 사교용 기모노이지만 격식있는 문양이나 에도코몬과 같이 멀리서 보면 이로무지처럼 보이는 섬세한 문늬의 기모노는 격상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입을 수 가 있다

 

8. 일본의 주요 자원

일본은 자원의 종류가 많은 나라입니다. 분포도 전국에 걸쳐있구요. 하지만 그 매장량이 미미하여,
자원으로 일본이 이득을 보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와 이점은 비슷하죠.
석탄이 일본의 최대자원이구요, 석유도 나오는 산유국이랍니다. 하지만 그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을 수입합니다.(석유 자급률 0.3%)
자급률이 높은 자원은 석회석과 황화광(이 둘은 자급이 가능하답니다.)이고, 다른 것들은 자급률이 미미하답니다. 구리광은 자급률이 1.3% 철광석은 2%정도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국토의 70%가 삼림으로 덮힌 세계적인 삼림국입니다. 인공림이 33%정도이며,수종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반반입니다. 생산량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그 수요 또한 만만치 않아서 목재의 수입이 많습니다.

 

9. 일본의 수도, 면적 인종 언어 종교 화폐 기후

개요아시아 대륙 동쪽에 있는 섬나라
수도도쿄 (Tokyo)
언어일본어
기후아한대다우, 온대다우기후...[현재날씨]
종교불교 8400만명, 신도 9200만명
역사선사시대, 고대시대, 중세시대, 근세시대...more
환율100¥ = 1393.04 원   (2010.10.21. 매매기준)
인구약 1억 2729만명 (2008)


 

이상 입니다. 내공좀 팍팍 주세여^^

글구!!!! 이거 퍼가시면 저한테 쪽지좀....(안그럼 함부로 퍼가지 마세여!!!!!!!!!!!!!)




2010.10.21.

  • 채택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pa****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제가 아는것만 답해드릴께요..

 

우선 제가 가본곳은 후지산, 하우스텐보스, 도쿄타워, 하코네 온천, 등이있습니다.

 

음식은 일본 라멘이 유명하고요..

 

전통의상은 기모노 입니다.

 

수도: 도쿄입니다.

 

언어: 일본어(하지메마시데:처음뵙겠습니다. 하이: 네. 와다시와 나마에와______데스: 제이름은 _______입나다. ) 등 알고 있습니다.

 

화페: ___엔 입니다. 우리나라의 1400원이 일본에선 100엔이라고 하더군요. 일본은 많이 비싼편이예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2010.10.21.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I like your style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일본의 역사왜곡>

1.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왜곡하는 이유는 고대 우리나라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하여 우리나라를 36년간 지배한 근거로 삼았습니다. 고대에도 한국은 일본이 지배했으니 지금우리가 한국을 지배하는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라는 뜻으로 임나일본부설을 퍼트린것 입니다.게다가 전후 경제를 발전시켜 호황을 누리던 일본이 근래들어 경제가 예전처럼 활발치못하고 저조하게 되는것을 막아보려고 젋은이들에게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큰일을 했고 한국이나 중국은 우리가 침략(일본 교과서에는 진출이라고 썼음)해서 식민지를 만들고 중국의 많은 영토를 차지했던 과거를 미화하여 자부심을 불어 넣으려고 역사왜곡을 감행하고 있는것 입니다.그런데도 우리의 정치가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당파싸움에 주력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2.’도쿄서적’과 ’오사카서적’은 아예 신청본에서 각각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 ’한국도 영유를 주장하는 다케시마’ 등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 그대로 통과됐다. 이들 교과서는 채택률이 각각 60%, 10% 안팎에 달해 채택률 기준으로 볼 때 일본 공민교과서의 70% 가량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기술하게 됐다.

 

3.사회과 지리교과서에서도 ’일본서적신사’ 1종이 동해를 ’일본해’로 명시한 관련지도와 함께 ’한ㆍ일간 일본해의 다케시마를 둘러싼 문제가 있다’며 독도가 일본영토로 오해될 수 있도록 기술한 것으로 나타났다

 

4.특히 고대사에서는 대방(帶方)군을 ’중국의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의 서울부근’이라는 일본 사학계의 소수의견을 추가로 실어 개악했으며, 일본 고대 ’5-6세기에 걸쳐 야마토(大和)조정이 조선반도의 정치에 적극 관여한 결과 조선반도를 통해 중국의 앞선 문화가 일본에 받아들여졌다’며 한반도를 속국시한 시각에서 기술, 후퇴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보다 단군조선 부정하는 한국사학계가 더 큰 문제

 

 1990년대에 돌변한 중국
 중국대륙에는 진시황이 지나[漢族]의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통일된 중국’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그 당시까지 동북아는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지배하였다.
 
 중국정통의 역사서 ‘25사(史)’ 가운데 『사기』나 『후한서』, 『삼국지』 등을 비롯한 제사서는 우리민족을 「조선열전」이나 「동이전」에 따로 두어 지나족과 독립된 한민족으로 기록해 왔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교과서는 물론 정치인도 고조선,  고구려 , 발해가 고대 한국의 국가라고 쓰거나 말했다. 주은래 수상은 1963년  고구려 나 발해가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말했으며, 1950년대의 중국 교과서 『세계중세기사』, 1960년 주일량이 쓴 『세계통사』, 1981년 출판된 『중학 세계역사』도  고구려 나 발해가 조선반도 북부의 독립된 국가라고 쓰고 있다. 길림성 연변대학 교수들이 쓴 역사책은 1994년까지도  고구려 는 당연히 한국사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은 1998년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 『중국 고구려 사』를 펴내고 2002년부터 3조원을 들여  고구려 , 발해, 고려는 물론 고조선사도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침탈 행위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 주류사학자인 북경대 송성유(宋成有) 교수는 역사 당시 환경에서 역사를 복원하는 역사주의 입장에서 “ 고구려 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외국의 역사다”라고 말하고, “ 고구려 는 낙랑, 대방, 현도, 요동군까지 자신들의 치하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동북공정 목적은?
 그러면 중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혈연보다는 땅에 중점을 두어 생각한다.
 
 첫째로, 그 영토 안의 나라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보고 제국주의적 역사왜곡에 나선 것이다. 중화제국의 꿈이 있는 듯하다. 지금 중국은 제주도 남단의 이어도까지 삼킬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이미 주변의 제국가에 대하여 공정(공작)을 마치고, 끝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눈을 돌린 것이다. 북부공정(내몽골을 중국에 편입), 서부공정(위구르에 대한 서북공정,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 남부공정(베트남…) 등이 그 예이다.
 
 둘째로,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국제법상 우리 영토인 간도에 대한 한국의 반환요구를 막고(간도가 반환되면 우리나라는 6천리 금수강산이 됨), 만일의 북한정권 붕괴시 등 유사시에 연고권을 주장하며, 국제법상 국제분쟁시 관리권이 있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임을 이용하여 영토를 차지하고, 중국내 조선족의 독립이나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중국분열을 막으려는 등 다목적 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20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만주를 관외대황(關外大荒)이라 하여 중국 밖의 버려진 땅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팽창주의와 탈북자문제, 소수민족문제, 경제정책 등을 생각하여 만주가 중국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한국정부는 왜 소극적으로 대응할까?
 그러면 한국정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한국은 역사주권과 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역사적 진실에 바탕을 두어 영토전쟁에 대비한 정치논리로 대항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의해 벌어진 한·중 역사전쟁에서 한국은 제정신을 못 차렸다.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양심이 없으며 사대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정부는 눈치외교만 강조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쩔쩔매는 꼴이 되었다.
 
 한국정부는 첫째, 국민의 생명과 영토 그리고 역사를 보위해야 하는데, 자주의식 결핍과 민족정기 부재로 중국 눈치만 보며 국가통치의 중심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주체사상을 얘기하면서도 중국의  고구려 사 왜곡 및  고구려  유물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정과 동북공정에 대하여 제대로 된 정부차원의 대책이 없었다.
 
 둘째, 중국역사 침탈에 대한 대응논리 개발과 그에 따르는 외교적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역사왜곡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중국에 대하여 저자세외교로 일관했다. 티베트의 성자 달라이 라마가 방한하겠다고 비자를 신청했으나 중국 눈치보기 등으로 입국을 허가하지 않은 것도 그 궤를 같이한다. 정부는 2004년 8월 ‘한국고대사 정치쟁점화 금지’ 구두 양해 이후 2년간 허송세월만 보냈을 뿐, 정치적 외교적 대응을 전혀 하지 않고 동북공정 과정을 알면서도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여러 문제의 은폐를 기도했다고 9월 7일 김양수 의원이 말했다.
 
 셋째, 정부는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국사학, 국어학, 국토학 등 국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국학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하는데,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하고 또 고대사를 정립하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넷째, 정부는 한·중 역사전쟁이 불붙자 연간 100억원씩 투자되는 ‘ 고구려  연구재단’을 만들었으나, 그 지도부가 일제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 교수와 신석호 교수의 제자김정○, 최광○, 노태○ 씨 등이어서 민족자주사관에 입각한 인사로 구성되길 바라는 국민을 열망을 외면하고 말았다. 또 2년간 60권의 책을 졸속으로 발간한  고구려  연구재단을 통폐합한 ‘동북아 연구재단’의 면면을 보면, 김모 이사장 역시 일본제국주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학자이며, 20여명의 이사 가운데 제대로 민족자주사학을 연구한 사람이 드물어, 현 정부가 중국의  고구려 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조차도 불투명하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남한과 북한이 상호협조하여 남북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런 노력이 남에서도 북에서도 사실상 전혀 없다.
 
 
 한국의 식민사대사학계가 더 큰 문제다
 한국사학계의 문제는 그 잘못된 뿌리가 너무 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까지는 제정신을 가진 민족자주사학이 국사학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남쪽엔 사대식민사학이 지배하는 실정이고 북쪽은 유물계급사관이 판치는 형국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자주사학자가 드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한·중 역사전쟁이 불붙은 2004년도까지  고구려 를 전공한 박사가 1명도 없는 실정이었으며, 한국 전체에서  고구려 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단 3명에 불과했다. 중국 측이 1970년대에 발해사를 침탈할 때도 우리정부나 강단 사대식민학계에서 아무런 대응이 없었고, 이제 중국이  고구려 사에 이어 고조선사, 부여사, 백제사, 고려사를 침탈해 와도 사대식민사학계는 매국사학의 꿀 먹은 벙어리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강단의 사대식민사학자들의 기본논리는 나라역사 5천년을 통채로 중국에 바치기 좋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상을 보면 사대식민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최초 민족국가인 2천여 년의 단군조선을 잘 인정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중국 동래(東來)의 기자조선은 인정한다. 또한 진시황이 대동강까지 지배했으며, 요동·요서지방에 있던 한사군을 이병도설에 따라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중국이 고양씨(황제의 손자)의 후손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고구려 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사대식민사학자들은 남쪽에는 신라·북쪽에는 발해가 함께 있던 남북국시대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의 태조 왕건도 중국에서는 중국 쪽의 낙랑군 후손이라 하여 중국 속방이라 하는데, 한국사대식민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본래 중국 속방으로 자처해 왔다. 그러면 한민족국가 역사 5천년 가운데 해방 후 50여년만이 한국의 자주국사로 남게 된다. 이들이 아무리 실증사학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양심이 있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리오? 중국의 시선(詩仙) 이태백도 시문집 『옥진총담』에서 발해를 고려( 고구려  이칭)라고 부르며 한민족 독자적 국가라고 썼는데, 우리학자들의 태도는 이렇게 해괴할 수 있는가?
 
 
 민족혼을 되찾아야
 나는 구한말에 애국자가 많았는데도 우리나라가 망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해가 간다. 진실에 기초한 민족자주사학을 한국 사학자들이 외면하고 사회 곳곳이 분열되어 허위와 사기가 판을 치니 이 어찌 총체적 위기가 아니리오?
 
 더군다나 북한 핵실험 이후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 4대강국의 국제정세도 심상치 않다. 여기서 우리는 심기일전하여 단합하고 위기를 호기로 꼭 바꿔야 한다.
 
 우리 국민은 모두 남북통일에 대비하여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주국사와 홍익인간 광화세계를 바탕으로 민족혼을 되찾아 국학을 굳건히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상생방송 STB초청특강 - http://www.stb.co.kr/program/info/55/index.html

중국 북경대와 연변대에서 역사학 박사로서 연구활동을 했던 심백강 박사는 현재 한국민족문화 연구원장이며 월간 '한배달'편집인입니다.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조선세기’, ‘기자고기록 선편’,‘황하에서 한라까지’등을 저술하였습니다. 
최근 출간된 '황화에서 한라까지' 를 통해,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밝히면서 한국 고대사 쟁점으로 남아있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대동각 유역이 아니라
중국 요서지방의 난하와 대릉하 유역에 있었으며 이곳이 고조선의 발상지였다." 
 
심백강 교수의 박람박식한 강의를 통해 동북공정의 허구와 한민족의 조상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본다.
심백강 교수의 흥미로운 주장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는 지금 동아시아 역사문화전쟁의 중심에 서 있다.
둘째, 왜곡된 역사교육의 문제점은 식민사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역사교과서에 있다.
셋째, 왜곡된 반도사관의 뿌리는 “낙랑”이다.
넷째, 한사군은 한 무제가 고조선 땅을 네 등분해서 설치한 한의 행정구역이며, 그것은 낙랑군,임둔군,진번군,현도군이다.
다섯째, 낙랑의 위치에 따라 한사군과 “고조선의 강역”을 밝힐 수 있다. 
여섯째, 한국사가  반도사냐 아니면 대륙사냐 하는 중대한 문제는  낙랑에 의해서 좌우된다.
일곱번째, 반도사관과 동북공정은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그는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홍산 문화는 동아시아 최초로 “건국의 규모”를 갖춘 유적이다.
둘째, 홍산 문화 유적이 발굴된 곳이 바로 낙랑지역이다
셋째, 홍산 문화유적의 상징적인 유물은 “제단,적석총,사당(여신묘)”이다.
넷째, 홍산 문화유적, 그 건국의 주체는 바로 고조선의 선민들이다.
다섯째, 홍산 문화유적을 바탕으로 해서 고조선이 동아시아 최초의 건국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여섯째, 결국 동아시아의 뿌리가 되는 것은 ‘요하문명’이고 그 주체는 동이족의 ‘조이’이며 조이는 바로 ‘한민족의 조상’이다.

 

2010.10.25.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