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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14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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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교수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상명대학교 어문대학장, 상명대학교 천안캠퍼스 부총장을 역임 후 현 상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고려 후기 사대부 문학의 연구』외 50여 편의 논저.

  • 중국 8대 요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천요리는 「천채(川菜)」라고 하는데, 요리마다 풍격이 있고 각각의 독특한 맛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맛이 얼얼하고 매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명한 요리가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요리 몇 가지만 소개한다. •마파두부(麻婆豆腐) : 청나라 때 성도 북문 거리에 개업한 진흥성반포(陳興盛飯鋪)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두부 요리다. 이 요리를 만든 노파가 곰보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진씨 곰보 할머니(陳麻婆)'라고 부르던 것이 요리의 이름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뜨끈뜨끈하고 얼얼하며 매운 맛이 일품이다. •담담면(擔擔麵) : 1950∼6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밤중에 골목길에서 '찹쌀떡이나 메밀묵!' 하고 외치는 행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예전 성도에서는 이처럼 국수를 만들어 골목길로 메고 다니면서 팔았던 모양이다. 요즘은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다. •화과(火鍋) : 샤부샤부처럼 큰 양푼에 담긴...

  • 합려왕은 제(齊)나라와 싸우기 위해 검 제작의 명인 간장(干將)과 막사(莫邪) 부부를 불러 다섯 자루의 명검을 만들었는데, 검의 성능을 시험하고자 바위를 내리치니 두 동강이 났다고 전해진다.

  • 성도(成都)에 가면 당(唐)나라의 유명한 여류 시인의 낭만과 만날 수 있다. 이 시인의 이름은 설도(薛濤), 자는 홍도(洪度)이다. 원래 장안(長安) 사람이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촉(蜀) 땅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하층 관리였는데, 촉 땅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청상과부에다 집안마저 가난한 탓에 설도는 악적(樂籍)에 들어 악기(樂妓)가 되었다. 그러나 설도는 선천적으로 음률에 능통하여 시가를 잘 지었고, 당시 유명한 사대부들과 즐겨 교류하였다. 바로 위고(韋皐)·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두목(杜牧) 등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창화(唱和)를 나누었다. 그녀는 성도의 백화담(白花潭)에 살면서 직접 송화지(松花紙)와 짙은 소채지(小彩紙)를 만들어 당시의 유명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설도전(薛濤箋)'이라고 불렀다. 위고는 천서절도사(川西節度使)를 맡은 뒤에 그녀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는 황제에게

  • 능운사의 천왕전을 나오면 바로 앞에 경수정이 있는데, 바로 낙산대불의 머리 왼쪽에 해당한다. 그곳에서 아래를 보면 세 갈래 강이 보이고, 옆으로는 가파른 돌층계가 아래로 나 있다. 여기서부터 구곡잔도(九曲棧道)가 시작되는데, 잔도(棧道, 바위에다 구멍을 내어 나무를 꼽아 만든 길)처럼 바위에다 길을 만들어 그 모양이 구불구불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낙산대불은 낙산시 동쪽 능운산 서란봉(棲鸞峰)의 서쪽 절벽을 깎아서 만들었다. 오른쪽으로는 민강(岷江), 왼쪽으로는 대도하(大渡河), 그리고 가운데로는 청의강(靑衣江)의 강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당나라 현종 개원 원년(713)에 만들기 시작하여 덕종 정원 19년(803)에 완성하였는데, 도합 90년이 걸렸다고 한다. 세 갈래 강이 합쳐지는 곳이라 옛날부터 물살이 흉용(洶湧)하여 배가 자주 전복하자, 능운사의 해통(海通)스님이 선박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가 71m이고, 한쪽 귀 안에 세

  • 공리(鞏莉)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배우다.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붉은 수수밭(紅高粱)〉으로 영화에 데뷔한 후, 〈귀주이야기(秋菊打官司)〉 〈패왕별희(覇王別姬)〉 등의 작품을 통해 명실 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성장했다. 그녀의 영화 중 잊을 수 없는 1편은 〈홍등(紅燈)〉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 여성이 겪는 갈등과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지만, 영화의 스토리 전개 못지않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합원(四合院)'이라는 전통적인 민간 가옥의 모습이 더욱 압도적이다. 북경의 사합원 이외에 중국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객가(客家)의 '토루(土樓)', 서북의 '요동(窯洞)' 그리고 소수민족의 '죽루(竹樓)'와 몽고의 '포합(包合)'이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가옥은 일반적으로, 대문·이문(二門)·정원·당(堂)·실(室)·방(房) 등으로 구성된다. 대문은 집안과 밖을 나누는 역할을 하며, 이문은 바깥뜰과 안뜰을 구분하는데, 이문의 안쪽은 주인의 거처이다. 당은

  • 하늘엔 천당, 땅엔 소주와 항주(上有天堂, 下有蘇杭) 중국 사람들은 산물이 많고 경치가 좋은 항주와 소주를 '지상의 천당'으로 꼽았다. '소주에서 나서 항주에서 살고 광주(廣州) 가서 먹고 류주(柳州) 가서 죽자'는 말도 있다. 부유하고, 놀기 좋고, 음식을 잘하고 먹기 좋고, 관을 잘 만드는 곳을 각각 이르는 말이다. 소주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4천 년 전부터 고대 문화가 일어났으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이다. 특히 원(元)나라 때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이곳을 방문해, 자신의 고향 베니스와 매우 닮은 소주를 격찬하여 '동양의 베니스'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실 소주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베니스를 '서양의 소주'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소주는 중국 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장강(長江) 하류를 북으로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상해, 서

  •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張家界)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 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단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이곳 무릉원(武陵源) 자연 풍경구를 2002년 겨울에 답사하게 되었다. 이곳의 기후가 온난하고 겨울에는 춥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눈 덮힌 무릉원 자연의 설경을 보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장가계의 풍경은 세계자연유산인 무릉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무릉원은 장가계시에서 30㎞ 떨어진 곳에 있으며, 199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중국의 독특한 자연 풍경구이다. 무릉원은 장가계 풍경구인 국가삼림공원, 삭계욕(索溪峪) 자연보호구역, 천자산(天子山) 자연보호구역, 양가채(楊家寨) 풍경구역 등 4대 풍경구역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무릉원 밖의 옥황동(玉黃洞), 구천동(九天洞), 팔대공산(八大公山), 오뢰산(五雷山),

  • 그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유비가 제갈량을 만났을 때 제갈량은 서천(西川) 54주의 지도를 펼쳐놓고, "장군이 패업을 이루시려면 북쪽은 천시(天時)를 차지한 조조에게, 남쪽은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에게 각각 양보하고, 장군은 인화(人和)를 이루어 형주(荊州)와 서천을 취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룬다면 뒤에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천하삼분'의 계책이다. 제갈량의 이 계책은 오늘날의 면양에서 실현되었다. 면양시에는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이 마주보고 있다. 서산에는 제갈량이 죽은 뒤 대사마에 오른 촉한의 명신 장완(蔣琬, ?∼246)의 묘와 묘비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일정에서는 제외되었다. 동산은 '제일산(第一山)', 혹은 '부락산(富樂山)'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 유비가 촉(蜀)에 첫발을 디딘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16년, 서기 211년에 익주목(益州牧)으로 있던 유장

  • 동정호는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악양루가 있어서 더욱 이름이 알려졌고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있어서 예술적 상상을 자극했다. 역대의 많은 문인들이 앞 다퉈 노래해왔고, 화가들의 붓끝에서 신선경이 연출되었던 곳.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시인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를 보자. 예로부터 듣던 동정호수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네 오초가 동남으로 갈라져 있고 언제 보아도 천지가 다 떠 있는 듯 친구로부터는 편지 한 장 없고 늙고 병든 몸에 남은 것은 배 한 척뿐 관산 북쪽 고향엔 전쟁 중이라 누각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리노라 昔聞洞庭水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憑軒涕泗流 두보도 동정호 악양루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그 현장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뭇 사람들이 그 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데 비해 두보는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만큼 인간사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늙고 병든 외로운 신세가...

  • 항주는 4천년 전부터 고대 문화인 양저(良渚)문화가 번성했으며, 춘추시대에는 오·월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툰 곳이기도 하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을 통일한 후, 이 지역에 전당현(錢糖縣)을 설치한 것이 항주 역사의 시작이라 한다. 도시 명칭은 수(隨) 개성(開星) 9년(589) 처음 쓰였으며, 그 후 항주는 오월(893~978년), 남송(1127~1279년)의 도읍으로 번성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절강성의 성도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으며, 서호(西湖)를 중심으로 한 명승지 항주는 중국 화동지방의 고도(古都)이다. 서호는 원래 전당강(錢塘江)과 서로 연결된 해안의 포구였는데, 진흙·모래로 막혀 육지의 인공호수로 조성된 것이다. 지금은 중국의 10대 명승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6.3평방킬로미터이며, 둘레는 15킬로미터, 길이가 동서 2.8킬로미터, 남북 3.3킬로미터, 평균 수심은 1.5미터, 최대 수심

  • 촉도나 그 길의 험난함은 이백의 시 「촉도난」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촉도를 가본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촉도를 시로 묘사했던 또 한 사람의 저명한 당나라 시인이 있었다. 바로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장편시로 노래한 「장한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그 사람이다. 백거이는 자를 낙천(樂天), 호를 취음선생(醉吟先生) 혹은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하였으며, 산서성 태원(太原) 출신이다. 이백의 사후 10년, 두보의 사후 2년 무렵에 태어난 그는 30대 초에 이미 그의 명작인 「장한가」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에 대해 고려 때 실제로 촉도를 가본 적이 있었던 이제현(李齊賢)이 이의를 제기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어서 소개한다. 이제현은 충숙왕 3년(1316) 30세 때 원(元)의 수도 연경(燕京)에서 아미산(峨眉山)에 제사 지내는 사명을 띠고 촉의 땅 성도로 떠났었다. 『역옹패설(櫟翁稗說)』에

  • 천극은 예로부터 '촉의 배우는 대부분 문장에 능하며 박학다식하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 올 정도로 내용이 다양하고 대사가 세련되며 문학적이다. 동시에 천극은 사천방언과 노래를 이용한 사천인 특유의 유머감각에서 나온 재치 있는 말과 연기로 대중의 웃음을 끊임없이 자아내게 한다. 비극적인 내용도 이러한 표현을 이용해 희극적으로 처리되어 희극적인 분위기를 지니게 한다. 또 천극에 사용되는 언어는 해학적이고 통속적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도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극종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천극의 가장 큰 특징은 변검(變臉)을 들 수 있다. 변검은 천극지화(川劇之花)라고도 불리며 파촉 공연예술 뿐 아니라 파촉 문화의 명물로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이것은 천극을 공연할 때 배우가 얼굴에 있는 검보(臉譜)를 극의 분위기에 따라 바꾸는 연출기법을 말한다. 변검은 천극에서만 볼 수 있는 연기기술로 등장인물의 감정변화와 독특한 개성을 얼굴에 나타내는...

  • 황룡(黃龍) 풍경지는 사천성 서북부의 아패장족강족자치주(阿壩藏族羌族自治州)의 송반현(松潘縣)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56㎞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황룡(黃龍) 풍경구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

  • 2001년 10월 상해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정상회의'가 열렸다. 공교롭게 우리는 그 기간에 예원(豫園)을 관람하기 위해 시내 중심가에 있는 성황묘(城隍廟)를 찾았다. 홍교(虹橋)공항에서 성황묘까지는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정상회의 때문에 버스노선이 차단됐고, 택시도 우회해 진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와 전철, 그리고 택시를 번갈아 타고 가까스로 성황묘에 도착했다. 우리는 성황묘의 수많은 인파와 각종 상점에 진열된 화려한 물건을 뒤로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샤오룽바오(小籠包) 전문점으로 직행했다. 이곳에 샤오룽바오가 유명하다는 말은 일찍이 들었지만, 이를 먹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참으로 '그 명성이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님(名不虛傳)'을 알게 됐다. 먹고 있는 사람들 테이블 옆에 서서 30여 분을 기다린 뒤에 간신히 좌석을 차지했지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에 불과했다. 우리가 좌석에 앉자마자, 다른 손님

  •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는 1972년 1월 16일 옛 초나라 땅이었던 장사시 동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당시 존재하던 무덤을 10세기 군소 정권의 하나였던 초나라 마은의 무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왕의 무덤, 즉 마왕퇴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1971년 겨울, 호남성 주둔군이 장사병원에 지하병실과 수술실을 짓기 위해 탐사를 할 때 우연히 공구 한 곳의 무덤을 건드리자 갑자기 무덤으로부터 청백색의 가스가 높이 분출되었다. 불꽃구멍(火洞子)이 발견된 것이다. 이곳을 통하여 2100년 전의 귀부인이 환생한 것이다. 전한의 장사국(長沙國) 승상이었던 대후(軑侯) 리창(利倉)과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의 묘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1호 묘에서 발견된 대후부인의 시신은 보존상태가 완벽하여 2천여 년이 지났는데도 근육에 탄력성이 있고 관절을 움직일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미이라의 보존 상태가 좋았던 이유는 마와 견직물로 시신을 싸고, 산소와 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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