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과 한국의 부르주아 그리고 근대성

최태섭|성공회대 대학원생

얼마 전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삼성이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신라호텔에서 모임에 참석하려던 한복디자이너가 출입을 거부당했다. 호텔에서 한복과 트레이닝복을 ‘출입금지 복장’으로 지정해 놓았던 것이다. 한복의 ‘세계화’를 위해 힘쓰던 디자이너는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 소식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천라지망’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대중은 분노했고, 이에 호텔 측에서는 식당 이용에 있어 안전상의 위험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건은 결국 이건희 회장의 딸이자 신라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이부진 사장이 직접 디자이너를 찾아가 사과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2030 콘서트]한복과 한국의 부르주아 그리고 근대성

연일 터지는 굵직한 사건에 비하면 하나의 해프닝처럼 보이는 이 일은, 그러나 한국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복이라는 옷에 얽혀 있는 삼성가와 대중의 다양한 반응은 한복이 상징하는 것, 즉 전통이라는 것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복잡한 심경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먼저 삼성가라는 한국 최고의 부르주아를 보자.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는 이들이 얼마나 복식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단편들이 등장한다. 이런 이들이 단지 식당 이용에 불편하기 때문에 한복을 금지시킨다는 것은 이상하다. 설령 그것이 이유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간단하게 자국의 전통복장을 금지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의 부르주아가 사실은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지 못한 사정을 반영한다. 요컨대 이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정·재계와 사법계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명실공히 ‘지배계급’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이들이 이미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아니라 서구라는 선진자본주의의 중심지다. 한국의 부르주아들은 그 소유의 규모로만 놓고 보자면 이미 충분한 세력을 이루었으나, 과거 일본이 맡았던 세계 경제에서의 ‘졸부’ 역할을 점점 이어받고 있다.

이는 스티브 잡스가 삼성을 비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상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도 삼성에 하나의 강박적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극복하기 위해 사고와 습관, 미적 감각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근대화(서구화)가 계속해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복으로 표상되는 ‘전통문화’는 버려야 할 대상으로 악몽처럼 존재한다. 서구의 미감으로 무장된 이들에게 고색창연한 한복이 나부끼는 것은 잊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눈앞에서 반복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통문화가 대중에게도 실체 없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지적처럼 분노의 대부분은 대중을 무시하는 부르주아의 고압적이고 계몽적인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사건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그런데 내가 저기에 한복을 입고 갈 일이나 있을까’라는 성찰적 의문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 분노가 딱히 유구한 전통 때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한복은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문화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 일은 결국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통은 신라호텔에도, 한복의 세계화를 위해 애쓰는 디자이너에게도, 분노한 대중에게도 없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서구적인 근대화가 하나의 법으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라는 비서구 사회의 곤경이며, 또한 전통을 빌미 삼아 드러난 신자유주의하의 계급적 갈등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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