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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산 안창호에 대한 업적 몸 구체적이
csha**** 조회수 20,589 작성일2018.04.26
도산 안창호에 대한 업적 좀 구체적이게 설명 좀 해주세요.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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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님의 생애와 업적 내용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생애

 

생애 초기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초리면 봉상도에서 1878년 11월 9일 농부인 [1] 안흥국(安興國)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수학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에 그 자신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가 세우고, 밀러 목사가 경영한 구세학당(救世學堂,현재 경신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1], 부인 이혜련 여사는 장인의 허락하에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서재필을 만나면서 자주 독립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 1899년 구세학당을 졸업한 안창호는 고향에서 점진학교와 교회를 세워서 고향의 계몽을 위해서 일했다.


미국 유학 시절
1902년에 부인 이혜련 여사와 결혼한 안창호는 교육학과 신학을 배워서 민족을 위해 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인과 같이 청소부로 일하던 안창호는 한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어느날 길가에서 한국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싸움을 말리고 이유를 물어보니 인삼판매구역 문제로 시비가 붙어서 다툼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하였는데, 인삼판매구역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이해관계에 따른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컸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창호는 미국인들에게 '미개인'이라느니,'독립국민의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모욕적인 말들을 듣는 재미교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동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빗자루와 걸레로 청소하고, 헝겊과 철사로 커튼를 설치하며, 꽃도 심어서 깨끗하고 예쁜 집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한민족의 삶이 변하였다. 안창호는 인삼행상들의 영업구역을 평등하게 만들어서 이해관계에 따른 다툼을 예방하고,인삼가격을 협정하여 출혈경쟁이 없게 하였으며,계를 만들어서 인삼행상들이 일한만큼 정직한 보상을 받게 하였다.

또한 한국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기관을 만들었는데, 이 기관에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실직이 없게 함으로써 노동력 착취와 고용불안이 없게 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안창호가 일방적으로 진행한게 아니라, 민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사람들이 "한국에서 대단한 지도자가 왔나보다."라고 감탄할만큼 미국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창호는 한국사회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우고, 공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그는 미국과 멕시코의 한국 사람들을대한인국민회로 단결시켰는데, 이 기관들은 민족계몽기관이요,독립운동단체요,민주주의를 배우는 정치운동기관이었다.[2]

민족운동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이 빼앗자,1907년 도산은 귀국하여 대한 사람[3]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등으로 민족운동을 하였다. 또한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도산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된 조만식은 그의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기도 했다. 그의 강연에 감화받은 조만식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한일 합병 이후인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실력 양성과 인재 육성을 부르짖자 급진파는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하였으나,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보기에 한국이 문명개화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우리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자신이 왜 인물될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가?",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으며, 민족이 천대받을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며 기독교 믿음에 뿌리를 둔 애국심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였다.

 


생애 후반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가 1932년 체포되어 5년간 옥살이를 하였는데, 출소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0세를 일기로 간경화로 별세하였다. 사망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20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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