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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1-한국사-안창호독립운동가의 업적
비공개 조회수 3,582 작성일2017.11.02
안창호독립운동가 활동 당시의 국내적, 국제적 상황은 어떠하였나요?
위와 같은 상황 속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안창호독립운동가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한 활동은 무엇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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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so****
태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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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평생 동안 나라의 독립과 교육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다.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대성 학교, 흥사단 등을 세우고 교육 활동에 힘썼다. 또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신민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에서도 활약했다.
1919년 10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을 설립했을 때의 모습. 앞쪽 가운데 앉은 사람이 바로 안창호이다.

1878년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 양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이후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민족의 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뛰어난 말솜씨로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한 이승훈이 후에 오산 학교를 설립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대한 제국 정부에 의해 독립 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한 뒤, 안창호는 교육 운동을 하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도 교포들의 계몽을 위해 힘쓰면서 한인 민족 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료들과 함께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국내로 돌아온 안창호는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대성 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벌였다. 또한 최남선, 김좌진 등과 함께 청년 학우회를 만든 뒤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이 더욱 강해지자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간 뒤 민족 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3 · 1 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갔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국내외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만들고,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그는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났던 날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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