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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도산 안창호...
비공개 조회수 5,758 작성일2017.07.04
도산 안창호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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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알려주세요 오늘 까지 꼭 부탁 드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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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maru
수호신
교육인 #강사 #복지관 한국사 12위, 한컴오피스 36위, MS워드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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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1878년 ~ 1938년)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였던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도 강서군 대동강 하류에 있는 도롱섬에서 태어났다.

 안창호는 1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는 16세가 되던 1894년에 청. 일 전쟁이 일어나자, 삼촌과 피난길에 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로 올라와 구세 학당에 입학하여 신문학을 배웠다.

 1899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 안창호는 맏형 안치호가 사는 마을 에 점진학교를 세우고, 시골 어린이들에게 신식 학문을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안창호는 1900년, 보다 큰 뜻을 품고 아내 이혜련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는 흩어져 살고 있는 재미 교포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한인 친목회를 만들어 교포들을 한마음으로 뭉치게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안창호는 1906년 2월에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 각성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안창호는 신민회 사업을 더욱 힘차게 밀고 나가게 하기 위해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민족의 기둥이 될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또 <대한 매일 신보>를 기관지로 사용하였으며, 평양과 대구 출판사인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국민들에게 올바른 지식과 교양을 전해 주기에 힘썼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검거되어 3개월만에 풀려난 안창호는 1910년 4월,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베이징을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우선 1912년에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장에 선임되었으며, 1913년에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창단하였다.

 3.1운동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간 안창호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내무 총장, 국무 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을 지내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흥사단 극동 임시 위원부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돌보는  한편, 민족 계몽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은 또다시 애국지사의 일제 검거령을 내렸다. 마침 중국에 있던 안창호는 소년단 기부금을 주기로 한 이만영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그 소년의  집에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곧 서울로 송환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2년 6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1935년 가출옥하여 고향인 평양 근처 대보산에 들어가 휴양하였다. 그러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 해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안창호의 4대 정신

 (1)무실 : 참에 힘쓰자, 진실을 실천하자는 뜻

  ·실은 진실, 성실, 실질, 실력, 참의 뜻

  ·무는 힘쓴다는 뜻

 (2)역행 : 나 자신부터 몸소 행하고 실천하자는 뜻

          실천 궁행과 학행 일치의 사상을 강조

 (3)충의 : 충성과 신의가 중요함을 강조한 말. 변절과 불신을 증오

 (4)용감 : 용기 있는 인간, 용감한 국민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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