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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창호 시대는?
jin3**** 조회수 1,715 작성일2017.06.08

안창호 시대적 상황을 10분안에 정리해주시면 안될까요? 제발 부탁드립니다.유유

내공 250겁니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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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상황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입니다. 


구한말은 대한제국시대를 지칭하는 다른말 입니다


따라서 대한제국에 대해서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1896아관파천 1년 후인 1897년 고종황제는 다시 경운궁으로 환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외국 열강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가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대한 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을 모토로서

상공업 진흥정책, 지계발급 등 민생안정, 국가 경쟁력 향상에 초점을 둡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1904년에 한일의정서를 맺게 됩니다  러일전쟁에서 중립할것을 표명했지만

일본이 맘대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맺습니다 이때 학부대신 이완용 고종의 도장을 날인하여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때문에 유효성이 없다고들 하는 겁니다) 1907년에 한일신협약을 맺는데 여기서 고종은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군대도 해산 됩니다 모두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으려 물밑작업을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1909년 우리는 감옥권 사법권 경찰권까지 박탈당합니다


1910 한일합병조약(경술국치)을 맺고 대한제국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일제강점기(한국 한자日帝強佔期,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일본 제국의 직접적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이다. 한일병합 이후 형식적으로, 비록 옛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일본 제국이 주는 이왕직이 존재하였지만, 당시의 한반도는 대한제국 황제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이 조선총독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총독이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 제국 천황의 명을 받아 통치하던 식민지로,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독자적 권한이 박탈된 일본 제국의 영토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정책에 따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헌병 경찰 통치기(무단 통치기)'(1910년~1919년), '문화 통치기'(1919년~1931년), '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로 각각 지칭한다.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방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 9월 2일 미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후 행정권 인수인계 기간을 거쳐 9월 28일까지 유지되었다.

차별 신분의 개방과 교육의 보급 등의 변화가 진행되었으며. 한편,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과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생애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소를 돌보는 목동 일을 하면서 동네 한문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살 때 노남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김현진이라는 선비에게 글다운 글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같은 서당에 다니던 서너 살 위의 필대은과 친분을 맺으면서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6세 때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소년다운 울분으로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다짐했던 도산은 서울로 상경하여 무료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밀러스쿨(지금의 경신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는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후로 독립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약관의 나이 21세에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24세 때는 본격적인 신학문을 배우고자 이혜련과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공부보다는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교민사회의 교화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05년에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하였다. 또한 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여기고 있던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노력에도 선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일본 총독 이토가 약관의 나이 29세의 도산을 만나 소위 도산 내각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이를 일축한 후로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도산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 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한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끌었고,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은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20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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