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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립협회... 독립협회에 보면 이완용...
soojin 조회수 2,549 작성일2018.05.06
독립협회...
독립협회에 보면 이완용이나 안경수는 친일파인데
독립협회 높은 자리에 있더라구요
왜 그런가요?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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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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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문법 80위, 영어작문 11위, 영어 공부, 시험 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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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란 인물이 본래부터 친일을 하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친미 인물이었으며 독립협회장을 지내기도 했죠. 다만,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명성황후와 민씨일가의 압력으로 인해 자신의 부지가 좁아지자 조선에 적극적이었던 러시아로 갈아탔죠.

아관파천을 계획한 인물 중 한명입니다. 이후에도 서재필을 후원하고 독립협회장을 연임하기도 한 조선의 기둥 중 하나였지만, 러시아의 행동을 반대하고 다시 친미 성향을 띄자 러시아의 압력으로 인해 좌천 됩니다.

이완용은 본래 재물욕과 권력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펼차돈 러시아와 척을 지게 되고 친미로 돌아갔지만, 미국이 완전히 발을 빼자 마지막 수단으로 일본의 손을 잡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완용은 조국인 조선보다는 자신의 사리사욕과 권력욕심에 빠져 매국노가 된 것이죠.

원래부터 매국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재였죠.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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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5001
지존
사회학 92위, 경제 정책, 제도,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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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주의 개화파이자 독립협회의 핵심인물로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인물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문서에 서명하고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팔아 넘긴 매국노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보이지만, 이완용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것이 사실은 현실의 힘과 권력이었다는 점을 안다면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이완용은 25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뒤, 첫 주미공사관팀에 발탁되어 2년간 주미공사관에서 일하고 조선에 돌아와 친미주의 개화파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후 그는 친러파와 연합해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최고의 실세로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합니다. 그리고 공사관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주미공사 알렌마저 해임되어 한국을 떠나자 정치적 고립 상태에 빠진 이완용의 선택이 바로 친일이었던 것입니다. 1926년 죽기 직전 그의 재산은 지금 돈으로 약 600억원에 이르렀고 전국 곳곳에 수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경성제일의 현금 부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일본 순사들의 호위 아래 호사스럽게 치러졌다고 합니다 ..


안경수는 조선 말의 개화파 정치인이며, 친일파이자,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입니다.1894년 갑오개혁 때는 친일파 관료로 활동하며 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다 1895년에 삼국간섭 이후에는 근왕파로 변했다가 춘생문 사건을 밀고하면서 친일파로 확연하게 다시 기웁니다. 이후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창설하자 윤치호, 이상재 등과 활동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김재풍 등과 함께 황제 양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안경수를 용서할 것 같은 모션을 취하였고, 여기에 기대를 걸고 1900년 귀국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종의 페이크로, 영선군의 모역사건을 눈감아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안경수에게 안전을 보장했던 일본과 상당한 외교적 대립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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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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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세계사 68위, 일본어 어원, 어휘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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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독립은 우리가 아는 그 독립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독립이라하면 외세의 간섭없이 우리 힘으로 나라를 꾸려간다는 것이지만 청일전쟁직후에 결성된 독립협회는 청나라가 패하자 청나라와의 종속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으로 독립이라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청나라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기둥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독립문을 바로 그 뒤에다 세운것이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독립협회맴버 대부분은 개화파들이었는데 이 개화병환자들은 처음부터 열강에 의존, 숭배하는 자세를 취하죠. 그래서 친미,친러,친일파가 그렇게 많을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독립협회의 보스인 서재필도 이런 작자였죠.

[서재필의 이중성]

독립협회는 애국단체였는가. 그들이 말한 ‘독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왜(附倭)역적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회장이었던 독립협회는 결코 독립단체도 애국단체도 아닙니다.” 필립 제이슨(한국명 서재필 또는 피재손)이 주도해 설립 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10여 년 간 철저히 연구 분석한 려증동(呂增東. 78) 국립 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대한제국시기와 일제로부터 나라 잃은 기간 잘못 알려진 역사와 인물에 대한 연구를 올곧게 진행해 왔다. 매국노가 애국자가 되고 매국단체가 애국단체가 되는 잘못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학자적 양심과 소신에서다. 그는 “독립협회의 ‘독립’이란 청나라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를 왜색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펼친 단체다. 

결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일한 단체가 아니다”고 강조한다. 그러니까 ‘독립’이란 단어도 1890년대의 ‘독립’과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즉, 실국(失國)한 이후의 ‘삼일독립만세 운동’ 같은 ‘독립’이란 말의 뜻을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 3월은 3.1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달이자 금년은 또한 경술국치 100주년의 해. 려 교수의 댓 쪽 같은 주장을 들어 봤다.

-독립협회에 부왜파들이 많은 건 사실이나 모두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잖습니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요. 창립 당시 안창호, 이상재, 주시경 같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참여 했습니다. 이 단체가 진짜 독립운동을 하는 곳인 줄 알고 참여 했던 겁니다. 그러나 간판 격으로 내세운 이분들을 빼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부왜역적 간부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려 교수에 따르면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될 당시 구성원들은 고문에 필립 제이슨,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근호 이채연 권재형 현홍택  등으로 축을 이루고 있다. 1898년에는 이완용이 회장, 윤치호가 부회장이었고 그해 5월엔 윤치호가 회장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과연 독립 애국자들이었던가. 려 교수는 이를 철저히 경계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열흘 후 왜놈들은 합병에 공이 큰 매국노들에게 돈과 귀족 작위를 주었습니다. 김가진, 안경수, 이완용, 김종한, 민상호, 이근호 등 독립협회 간부 거의가 합병공신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윤치호는 그의 부친 윤웅렬이 남작을 받음으로써 일단 보류 됐다가 결국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됩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서도 독립협회가 부왜 매국단체임을 드러낸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다. 1898년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이 서울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날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 자격으로 그에게 독립문이 새겨진 은찻잔을 선물로 준 것이다. 이등박문은 대신 그에게 자신의 사진을 건네준다. 일제 때 윤치호의 일본식 이름은 이토 지코(伊東致昊). 이토 히로부미의 성에 첫 글자와 발음이 같은 것도 흥미롭다.

이토의 방문에 대해 독립신문은(고종 35년) 논설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당금 세계의 정치가요, 또 우리 대한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에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독립협회를 대변하는 독립신문은 한국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순 한글신문의 효시로 한국신문협회가 인정하고 있고 또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기 까지 한다. 이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독립신문으로선 이러한 내용의 글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은 한국인 서재필이 아니라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지요.”

  이완용과 윤치호 필립 제이슨(서재필)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결코 애국단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려 교수. 인터뷰 내내 댓 쪽 같은 자세로 갈파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컬럼비안대(현재 조지 워싱턴대)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고 귀화,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그 이후 미국 이름 외에 단 한번도 ‘서재필’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친일세력이 정권을 잡자 유길준이 나라 돈 5000원을 보내며 귀국을 요청, 10년 계약의 중추원 고문이 된다. 미국인 신분 필립 제이슨이 첫 외국인 공무원인 셈이다. 필립 제이슨은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 창간호를 낸다. 

신문사 설립 비용은 유길준이 준 5000원에서 여비 600원을 뺀 4400원으로 차리는데 시설비 3000원, 자신이 거주할 주택 구입비 1400원이 들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논조와 독립협회 등의 문제를 들어 고종이 추방하자 그는 ‘중추원 고문관 10년 계약’을 이유로 남은 7년 10개월에 대한 급료 2만80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내외 2인) 600원을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고종은 이를 모두 지불하고 그를 추방한다. 

그는 또 독립신문 소유주라는 이유로 신문사의 이익금을 1년에 600원씩 차지했다. 송금해 준 사람은 독립신문을 책임 맡았던 윤치호였다. 나중에 고종은 4400원을 주고 아예 신문사를 인수하게 된다. 정부 돈으로 만든 신문사를 다시 정부가 사들이는 기이한 일이 생긴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8년 5월10일 까지 발행으로 끝난다.

려 교수는 “탁지부 국고가 고갈될 정도로 어려운 나라 재정에 일하지도 않은 7년 10개월의 품삯을 미리 받아 챙긴 것이야 말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라고 말한다. 려 교수는 독립신문의 논조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사람이 일본에 대해 감사해야만 되는데 감사할 줄 모른다.”(고종 33년 6호) “동양의 주인은 일본이다.” “일본은 조선을 위한다.” 이밖에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찬양하고, 이등박문을 존경하는 등의 논조가 그렇다.(‘고종시대 독립신문’. 형설출판사)

려 교수는 단호히 외친다. “‘청국에서 독립하여 일본에 붙자’고 외쳤던 그 부왜 독립협회의 ‘독립문(獨立門)’도 필립 제이슨의 요청으로 매국노 이완용이 쓴 글씨다. 매국노가 쓴 ‘독립문’에 침을 뱉을 사람, 그 ‘독립문’을 무너뜨릴 의롭고 용기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이런 일을 해 오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왜놈 쪽의 거짓말 책들이 먼저 나와 이미 퍼뜨려졌던 것을 나중에 진실을 내어 넘어뜨리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일당백으로 싸우려니 힘이 듭니다.”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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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청나라 개화파 지식인이던 량치차오가 한말입니다.

안중근은 1억명중에 1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물이다.

조선의 문제점은 안중근같은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안중근같은 인물이 중요한 임무를 하는 자리에 갈 수가 없다.


수백년이 흘러도 교훈이 되는 핵심적인 명언이지요.


이완용이야기를 하지요.

이완용은 안중근같은 인물은 아닙니다.

이완용은 100년에 1명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이다. 라는 말을 듣던 사람입니다.

외국어에 능통했고 서체는 조선 명필가중에 한명입니다.

뛰어났던 지능 재능을 가진 인물이지요.

조선의 문제는 이완용같은 지능을 가진 인물이 그 지능을 좋은일에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이완용은 안중근도 가지지 못한 지능을 가진 사람이고 처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어요.


이완용의 가장 큰 흠결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았고, 세상흐름을 따라 다녔다는 점이지요.

당시 가치라면 자유 평등 형제애 자주 민권 독립 이런 단어지요.

이완용은 외국사정도 가장 정통하게 아는 지식인이라서 자유 평등 형제애 같은 가치를 알고는 있었지요.

이완용은 가치보다는 대세를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조선말 나라가 위급하던 시절에 대세에 순응하게 되면 결국 친일매국노가 되는 거지요.


요즘에도 이런말을 할 수 있지요.

우병우가 머리 나쁜사람이 아니지요.

우병우의 문제점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이명박 박근혜 당시 흐름이던 독재에 야합하면서 출세지향의 결정을 하는 거지요.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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