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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영효의 출생에 대해서
비공개 조회수 138 작성일2013.05.29

안녕하세요

조선 말기의 문신,정치인,사상가인 박영효의 출생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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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

박영효는 1861년 노론계 인사로 대호군을 지낸 박원양(朴元陽)과

이윤행(李潤行)의 딸이던 그의 후취 부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때 의금부판사를 지냈던 오창 박동량의 후손으로,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서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먼 일족으로는 북학파인 박지원, 박규수가 그의 일족이었고,

그와 같은 시대에 개화당에서 활동하던 박정양도 아저씨뻘 되는 일족이었고,

박제순은 족대부뻘 되는 일족이었다.

 

201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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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함께 19세기 말 개화운동의 대명사이기도 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그 짧지 않은 인생의 부침을 통해 인간의 신념과 권력욕의 불행한 조우를 극명하고 불편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 그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의욕적이고 패기에 찬 우국 청년이었지만, 시대의 혼돈 속에서 그릇된 선택을 하였고 결국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인해 변절한 친일파로 생을 마감하였다.

개화사상에 매료된 왕실의 사위


박영효는 조선후기 누대에 걸쳐 명문가이던 반남 박씨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으로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의 스승이 된 박규수를 비롯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개화의 뜻을 품었던 박정양 등이 있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우의정이던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고명딸인 영혜옹주의 남편이 되었다. 당시는 이미 고종의 재위기였지만, 왕실의 사위가 되는 일은 왕실 가족으로 편입됨을 의미했고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부마가 된 박영효의 행운은 3달을 가지 못했다. 영혜옹주가 요절하여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아내를 잃은 홀아비가 되었다. 남자의 축첩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조선 사회였지만 부마의 재혼에 대해서는 까다로웠다. 왕실의 여인과 결혼한 남자는 다시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였다. 박영효는 12살 나이에 영혜옹주와의 결혼으로 평생 정식 부인을 맞을 기회를 잃었고 첩실만 거느릴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서출이 되었다. 어딘가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평생 해야만 했던 박영효를 측은하게 여긴 왕실과 고종은 그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18세의 나이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고 19세인 1879년에는 혜민서제조, 스무 살인 1880년에는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부마가 되어 얻은 일그러진 가정생활과 승승장구하는 관직 생활 속에서 박영효는 당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실학적 학풍과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을 기르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중인계급의 한의학자 유대치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아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등 동년배들과 함께 개화당을 결성하였다.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던 박영효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 청년이었고 조선의 앞날을 위해서는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근대화에 큰 충격을 받다


그러던 중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개화로 인해 일어난 부작용, 임오군란이 터진다. 신식군대에 대한 우대와 구식군대 차별로 인해 터진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노골적 간섭과 함께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급이라는 불리한 상황을 불러왔다. 이 시기 박영효는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과 맺은 제물포 조약의 이행을 위한 특명 전권 대신 자격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게 된다.

사태에 대한 사과 및 배상금의 완화 협상이 당시 박영효의 임무였다.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면서 고종의 명으로 태극팔괘의 도안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국기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태극기의 바탕이 된다.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는 대사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 일본의 근대화시설을 돌아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군대,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들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일본 근대 유명인사와 접촉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 근대화의 핵심인사이던 후쿠자와 유키치 등도 있었다. 이 외에도 박영효는 유럽과 미국의 외교사절을 만나 국제정세 등을 파악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조선의 자주와 부국강병은 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었다.

번번히 좌절되는 개화운동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돌아온 조선의 정치 상황은 그러나, 박영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의 힘을 얻은 민씨 척족 세력인 민태호, 안동김씨 세력이던 김병시, 김병국 등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의 개혁 시도는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부 판윤(현 서울 시장)이 되어 박영효가 만든 개혁적인 부서인 치도(도로 정비), 경순(치안 관련), 박문(출판 관련)의 3국은 수구파들의 반대로 폐지되었고 광주부 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신식군대를 신설하고 훈련을 시작하였지만 이마저 수구 세력들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되기도 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이 박영효의 꿈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자신의 뜻이 수구 세력에 의해 번번이 꺾이는 시련을 감당할 수 없었던 박영효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성급한 상류층 젊은이답게 한방에 수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전복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3일천하


청나라를 등에 업은 수구파들의 견제로 정치적으로 계속 궁지로 몰리던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자신들의 근대화에 대한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정권을 획득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었다.

1884년 청나라와 프랑스의 베트남을 둔 일대 격전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3,000명의 청나라 군대 중 절반 정도가 빠져나가고 일본이 급진 개화파에게 접근해오면서 박영효와 급진적 개화파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근대화를 단시간에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의 계획은 박영효의 집에서 세워졌다. 청나라에 붙어 정권을 잡고 개화운동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일시에 권력을 장악하기로 한 급진적 개화파들은 거사일을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의 개설일로 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원할 수 있는 신식군대의 군인들과 유학생을 모으고 청나라 군대의 반격과 개혁자금 문제를 일본의 협조로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국권침탈의 걸림돌이던 수구 세력과 청나라를 한꺼번에 해결해주겠다는 급진적 개화파들의 제안이 반갑기 그지없었을 것이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본군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했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 피로연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민씨척족세력을 살해하고 일본군과 조선군을 동원하여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에 유폐한 후 정권을 획득하였다.

다음날 12월 5일에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킨 본인들이 중심이 된 젊은 정권을 탄생시켰다. 박영효는 이 정권에서 경찰권과 군사권을 가진 전후영사 겸 좌포장의 직책을 맡았다. 12월 6일에는 개혁정치의 신념이 깃든 14개조의 신정강이 발표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청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문벌을 폐지하며 계급제를 타파하여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며, 호조관할로 모든 재정을 관리하고 경찰제도를 시행하는 등의 매우 급진적이고 근대적인 내용이었다.

박영효를 비롯하여 정변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이상은 높았지만 정권을 유지하는 기술은 부족했고 무엇보다도 이 정변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신정강이 발표된 12월 6일 오후, 서울에 주둔한 1,500명의 청나라군은 유폐에서 풀려난 고종이 돌아온 창덕궁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고종을 호위, 감시하고 있던 일본군은 급진 개화파들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청나라 군대에 밀려 싱겁게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힘만 굳게 믿던 갑신정변의 주요 세력은 당황하여 나라의 상징인 임금, 고종을 결국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다.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홍영식 등 일부는 청나라 군에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망명의 길을 택했다. 이때 박영효도 김옥균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았던 이 3일간을 '3일천하'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신정변 이후의 정치적 행보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는 일본정부 측의 푸대접 등으로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기도 하였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곧이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 영어문제였는지 메이지 학원 영어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이름도 야마자키(山崎)로 개명하였다. 그는 1888년에는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상소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때 우편의 발신 주소로 민씨 세력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여기저기를 떠돌던 박영효는 1893년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도움을 받아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친린의숙을 열어 경영하기도 하였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자 조선정부는 친일인사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사면된 박영효는 1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의도를 외교 관계를 통해 저지하려 하였고 그 활로로 손을 잡은 것이 러시아였다. 조선 정부 내의 일본의 세력이 점차 줄어들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박영효는 김홍집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1895년 박영효는 을미개혁을 단행하여 각 방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명성황후의 암살음모를 꾸민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0년에는 고종을 몰아내고 의화군을 옹립하는 역모를 일본에서 원격으로 지휘하기도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일본 망명 12년 만인 1907년, 박영효는 같은 반남 박씨 일족이며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이 다리를 놓아주어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했는데, 당시 그는 한때 자신이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하였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억지 양위를 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제주도로 유배가기도 하였다.

친일파로의 완전한 변절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박영효가 보여준 행보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와 거금의 매국 공채를 받고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18년에는 조선식산은행 이사로 취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동광회·조선구락부·민우회 등 단체와 관계를 맺고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6년 이완용의 뒤를 이어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 중 죽었다.

말년을 친일파의 거두로 산 박영효는 1935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으며 사망하고 나자 일본정부에 의해 정2위 훈1등으로 '추서'되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사회기략]이 있으며 관훈동에 있던 그의 집은 현재 남산한옥마을로 옮겨져 조선 시대 8대 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201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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