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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포메란츠,스티븐 토픽/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2003)

독서일기/세계사

by 태즈매니언 2015. 4. 2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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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공의 법칙을 늘어놓는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다. 성공한 자신들의 방식을 따라한다고 똑같이 성공할 수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 설교를 늘어놓는다는 이야기는 책을 팔아먹겠다는 욕심이 깔렸거나, 자신의 성취가 시대적 조류와 행운에 크게 힘입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의 안목을 드러내기에.

 

이 책은 교역사이기에 주로 정치사를 통해서 각 국가나 위인의 성공담을 비중있게 서술하는 교과서 스타일로 근대세계사를 서술한 책들과 관점이 다르다. 맑스적인 사회경제사의 생산력에 대한 집착보다 스케일이 크고. 덕분에 역사를 보는 내 관점을 상당부분 바꿀 수 있었다. 그동안 커피, 대구, 후추 등 개별 물품 중심의 미시사에 흥미를 느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 이 책은 그런 류의 칼럼들을 모은 종합선물세트 격인 책이었다. 다만 칼럼집이다보니 했던 이야기가 또 나오는 경우가 많고 글을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제시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번역판의 제목보다는 원어 제목인 <The World That Trade Created :Society, Culture and the World Economy, 1400 to the Present>이 이 책의 내용을 잘 알려준다. 제1장~제6장에서 지리와 물품 중심 교역사를 400페이지 가량 서술한 후에 제7장에서 이러한 상업혁명의 성과와 산업혁명의 시작 및 근대의 시작을 연결짓는다. 따라서 7장은 좀 더 집중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아래의 422쪽의 서술이 거칠게나마 이 책의 주제가 되는듯 싶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 군국주의와 후후발 산업혁명이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는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성실한 일본 농부들의 고단한 생활 또한 빛을 못봐서 그렇지 근대화의 중요한 원동력이었구나. 노구치 히데요의 어머니가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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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쪽

 

영국식 표준 궤간은 그것이 최고여서가 아니라 관습이었기 때문에 사용되었다. 그 결과 원자 시대에서도 가장 세련된 축에 드는 탈 것이 아직도 로마와 영국 석탄 수레와 같은 4피트 8인치 반 위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다.

 

422쪽

 

한 사회를 산업화하려면 다른 제품들도 엄청나게 수입해야만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농업 인구가 빨리 늘어나는 만큼 농업생산성도 빨리 늘어나지 않을 때, 식량 수입을 늘리지 않으면 노동자들을 먹일 수 없다. 식량도 수입이 안 되는데 소비재들을 충분히 수입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그나마 낯선, 종종 가혹하기도 한 작업환경이나 아직도 거북스럽기만 한 산업사회의 일상을 받아들일 거의 유일한 동기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소비재들이다. 따라서 산업화는 거의 항상 교역의 급격한 증가를 동반했다. 이제는 다양한 물건들을 사려는 수요는 훨씬 많이 늘어났는데도 공급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수급 불균형이 생겨났고, 상인들은 대용품을 찾으려고 전세계를 뒤지고 다녔다.

 

435쪽

 

카를 마르크스는 산업화와 자본주의는 동시에 진행된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사실 최초의 공장은 상투메같은 대서양의 섬들, 그 다음에는 카리브 해 연안에 건설된 사탕수수 압착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탕수수 압착소들은 국내 시장을 겨냥해 생산된 제품을 팔아 자연스럽게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임노동을 많이 사용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전문 노동자들을 많이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실제로는 유럽으로 수출하려고 거대한 노예 노동력을 동원해 설탕을 제조했던 것이다.

 

이미 17세기에 설탕 플랜테이션에서는 200여 명의 노예와 자유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고, 여기에 사탕수수 압착기, 보일러 하우스 당일 분리기, 럼주 증류기, 창고 따위가 딸려 있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사용했던 제조 기법들은 당시로는 최첨단이었고, 또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과 수천 파운드에 이르는 투자도 뒤따라야 했다.

 

443쪽

 

미국 중심적 입장에서 기술한 고등학교 교과서들은 보통 노예무역을 '당밀과 럼주, 노예'의 삼각무역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 아프리카의 추장들은 유럽과 미국 사람들이 내놓은 유해한 물건들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정교한 직물(인도산 캘리코 면직물)이나 가구 따위를 더 좋아했다. 영국인들이 노예와 맞바꾼 물건들 중 알코올은 4%만을 차지했고, 총은 5%였다.

 

455~457쪽

 

1차대전까지 산업 생산품이 일본 수출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4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에 은과 목재가 조금 힘을 보탰고, 대부분은 농산품이었다. 그리고 일본이 처음 60년 동안 들여온 기계류 따위 근대적 수입품의 결재 대금을 마련해 준 것도 바로 비단이었다. 1900년까지 이 비단 한 품목이 일본 수출에서 평균 4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2차 대전 직전까지도 여전히 30%를 웃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났지만 쌀 수입이 전체 쌀 소비의 20%를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해내면서도 일본 농업 인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누에치기와 쌀농사는 둘 다 단위면적당 소출이 많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일본의 처지에는 딱 맞는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누에치기와 쌀농사는 함께 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이 둘은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갔는데, 공교롭게도 한참 일손이 많이 필요한 때가 상당 부분 겹쳤던 것이다. 봄이 되어 논에 물이 차면, 며칠 간격으로 간격을 정확히 맞춰 모를 다 심어야만 했다. 누에는 다 클 때가 되면 하루에 여덟 번씩 먹이를 줘야 했고(고치를 지을 때까지 제 몸무게의 3만 배를 먹어치운다.), 누에를 기르는 쟁반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청소를 해야 했다. 일을 더 힘들게 했던 건 새로 딴 뽕잎만 먹여야 하는 점이다. 그리고 누에 역시 자연싀 섭리를 따라 4월에서 6월 사이에 알을 까고 명주실을 뽑아냈다. 모내기를 하는 때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초가 되면서 사정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누에고칫간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 누에가 좀 더 일찍 알을 까고 더 빨리 뽕잎을 먹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1870년 이후에는 확실한 돌파구가 열렸다. 새로운 누에 품종이 개발된 것이다. 이 누에는 적당하게 관리해 주고 몇 가지 화학 약품들을 쓰면 알 까는 때를 7월에서 8월 사이로 늦출 수 있었다. 싸지도 않고 쉽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188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비단 생산은 무려 열 배나 뛰어 올랐다. 그리고 농부가 한 해 평균 일하는 날짜는 45%가량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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