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설탕을 먼저 먹은 나라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677 작성일2003.06.28
설탕을 먼저 가공해서 먹은 나라는 어느 나라죠??

사탕수수의 재배가 많은 곳인가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manh****
지존
과실류 97위, 음식점, 맛집, 면류, 만두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설탕의 역사



사탕수수의 고향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벼과 다년초로서 쿠바, 태국, 호주 등 연평균 기온이 20℃ 이상인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재배되며 줄기에 10~20%의 당분이 들어 있다.

설탕을 처음 제조한 곳은 인도지만 사탕수수가 처음 재배된 곳은 태평양 남서부의 뉴기니(New Guinea) 섬이다. 호주 바로 위에 위치해 오세아니아 주로 분류되는 이 섬은 현재, 서부는 아시아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속하고, 동부는 파푸아뉴기니로 불린다. 뉴기니 섬의 사탕수수 경작은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탕수수는 이어서 뉴기니 섬 바로 동쪽에 자리잡은 솔로몬 제도로, 다시 동남쪽의 뉴헤브리디즈, 그리고 뉴칼레도니아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6000년경에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거쳐서 마침내 설탕 생산의 원조국인 인도에 도착했다.





사탕수수의 기원에 관한 설화



폴리네시아에는 이런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에 지상의 유일한 인간인 두 어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그들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서 대나무 모양의 막대기 하나를 발견했다. 두 어부는 그것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사흘 뒤에 다시 그 막대기를 발견하고는 땅에 심었다. 막대기가 자라고 잠시 후에 꽃봉오리가 터지더니 거기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낮에는 어부들을 위해 요리를 했고 밤이 되면 다시 꽃 속으로 들어갔다. 어부들이 땅에 심은 막대기가 바로 사탕수수였다. 여자는 사탕수수가 선물한 맛있는 음식, 즉 설탕을 상징한다.





최초의 설탕 생산국, 인도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인도에서는 설탕을 제조하고 있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가 인도를 침략했을 때 알렉산더 군대의 사령관인 네아르쿠스(Nearchus) 장군은 벌의 도움 없이도 갈대의 줄기에서 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reed)’라고 했다. 기원전 320년에 인도를 다녀온 그리스인 메가스테네스는 설탕을 ‘돌꿀(stone honey)’이라고 소개했다. 돌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때 이미 액체 상태의 사탕수수즙이 아닌 결정화된 상태의 설탕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탕수수즙을 끓이고 햇볕에 말려서 만든 이 덩어리는 요즘처럼 고도의 기술로 정제되지 않은 조야한 수준의 설탕으로 원당(原糖)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5세기의 힌두교 종교 문헌들에 나타난다. 수액을 끓이고 당밀을 만들고 설탕 덩어리를 굴린다는 표현들이 종교적 가르침을 설파하는 데에 비유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중국에 전해진 설탕



사탕수수나 설탕이 중국에 건너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의 영토가 워낙 넓고 국경선의 변동도 심해 어디까지를 중국으로 볼 것인지 그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시기를 기원전 8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사탕수수가 아닌 설탕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5세기경이다. 이 때부터 인도의 설탕은 갈래의 길을 통해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한때 설탕을 돌꿀(石蜜, stone honey)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 수입한 하얀 케이크 모양의 돌꿀이 중국에서는 가장 비싼 상등품으로 통했다.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험준한 산맥들로 가로막혀 있었다. 당나라가 서역을 정벌하면서 텐산 남북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알게 되고 불교에 대해 심취하면서 중국은 인도와 더욱 활발하게 교류했다. 7세기에 중국 정부는 기술자를 인도로 보내 설탕 제조법을 배워오도록 했지만 인도의 설탕처럼 달게 만들지는 못했다.





설탕의 세계화에 힘쓴 마호메트



페르시아에서는 500년경부터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그 때 이후 설탕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된 데에는 마호메트의 공이 크다. 마호메트는 죽기 몇 해 전인 630년경에 이슬람교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한 성전(聖戰)을 개시했다. 정복지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를 발견한 마호메트 군대는 즉각 그 ‘페르시아 갈대’에 매료되어 정복지마다 사탕수수를 갖고 갔다. 710년에 정복된 이집트에도 군대와 함께 사탕수수가 들어갔다. 이집트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농업 기술과 화학 지식을 동원해 사탕수수 재배 기술과 세척, 결정화, 정제 등의 설탕 생산 과정들을 발전시켰다. 사탕수수는 이집트에서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모로코까지 이르렀고 755년 마침내 지중해를 넘어 스페인 남부까지 이동했다.





유럽에 설탕을 전파한 아랍



설탕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아랍인의 역할이 크다. 아랍인들은 8세기에 스페인을 정복하면서부터 유럽에 설탕을 전하기 시작했다. 11~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설탕 전파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아랍으로부터 설탕뿐 아니라 설탕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시칠리아 등의 지중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랍과 지중해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 무척 까다로웠다. 수확을 하기까지 12개월에 이르는 긴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에 30여 차례 물대기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물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아랍인들은 이러한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원당 무역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정제 기술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한 부의 축적은 나중에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 지중해 지역은 15세기까지 유럽 각지에 설탕을 공급하는 사탕수수 재배지로 각광받았다. 15세기 중엽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의 아프리카 서해안 섬들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이슬람의 설탕사원



설탕이 다른 식품들과 잘 섞이는 성질을 이용하여 11세기 무렵 이슬람 국가에서는 명절이 되면 아주 많은 양의 설탕을 사용하여 갖가지 거대한 예술품을 만들고는 했다. 이때는 나무를 비롯한 각종 물건들을 만들고 심지어 완전히 설탕만으로 회교 사원을 짓기도 했는데 명절이 끝날 무렵에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것을 함께 먹어치우기도 했다고.





동방에서 온 향신료



향신료는 영어로 ‘스파이스(spice)’라고 하는데, 라틴어 어원에는 ‘약품’이라는 뜻이 있다. 설탕이 향신료이면서 동시에 의약품으로 여겨진 것에는 이 어원도 한몫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세 유럽 의학에는 모든 병이 나쁜 냄새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런던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에도 환자의 집에 후추를 태워서 소독했다고 한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향신료류에 들어가는 많은 식물들이 요즘도 한의학에서 약재로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당시에는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향신료 대신 ‘양념’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양념은 향신료에 비해 훨씬 포괄적인 것을 지칭한다. 양념 가운데서 톡 쏘는 매운맛과 독특한 향을 내는 것들은 향신료, 단맛을 내는 양념은 감미료이다. 설탕이 유럽에 처음 알려질 때에는 동방에서 전해진 값비싼 것이라 하여 감미료가 아니라 향신료로 분류되었다. 그 당시에는 설탕을 음식에 넣을 때도 다른 귀한 향신료들처럼 단맛이 날까말까 할 정도로 아주 조금만 사용했다.





아메리카에 사탕수수를 이식한 콜룸부스



아메리카에 사탕수수가 처음 들어간 것은 1493년에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두 번째 항해를 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의 사탕수수를 카리브 해의 아이티 섬으로 가져가면서부터다. 이로써 설탕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아랍과 지중해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갔다. 1493년에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령 산토도밍고에 이식된 조그만 사탕수수 종자 하나가 아메리카 대륙 역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게 되었다. 초기에 설탕 사업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1509년에 이르러 이윤을 낼 수 있는 유망한 사업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아이티 섬을 시작으로 쿠바, 자메이카 등 카리브 해 전역에 사탕수수가 심어졌다. 1535년에는 스페인 탐험가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설탕 공장을 세웠다. 사탕수수는 페루,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로 계속 퍼져 나갔다. 푸에르토리코에는 1547년에 설탕 공장이 세워졌다. 1600년 무렵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설탕 생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인 동시에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산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인도 제도의 설탕 섬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꿀과 설탕의 지위를 역전시킨 종교개혁



아메리카에 사탕수수가 심어진 뒤에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설탕은 사치품으로 남아 있어 설탕은 아주 귀한 의약품이나 향신료로 여겨졌다. 왕은 식탁 위에 설탕 사발을 올려놓는 것으로써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4파운드(1.5kg)의 설탕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꿀은 여전히 감미료의 대표 자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 꿀은 수도원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수도원에서 초의 재료인 밀랍을 생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꿀의 생산까지 담당했던 것인데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개혁의 대상이 되면서 꿀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반면에 설탕은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공급되었고 수요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설탕이 음식을 오래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과 그러한 성질을 이용해 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수요가 크게 늘었다. 특히 차나 커피처럼 새로운 음료를 선호하는 프로테스탄트가 늘면서 설탕의 수요는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설탕과 맞바꾼 노예들



아메리카에서는 설탕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력의 수요도 늘어났다. 한동안은 유럽 본토의 정치범들이나 흉악범들을 노예로 이용하는 것으로써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도 했으나 점점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노동력의 또 다른 공급원으로 찾은 곳이 바로 아프리카였다. 이로써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세 꼭지점을 잇는 삼각형의 무역이 탄생했고, 이는 당대의 전형적인 무역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옷감이나 철기구 등이 배에 실려 유럽을 떠난다. 그것들은 서아프리카에서 금이나 노예들과 교환된다. 서인도제도에 도착하여 이 노예들은 설탕과 럼으로 바뀐다. 설탕과 럼은 다시 유럽에서 옷감이나 철기구 등으로 교환된다. 요약하자면,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공산품이 실려 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들이 실려 갔으며,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설탕이 실려 갔다. 설탕은 흰 화물이라고 불리었고, 상품으로 전락한 노예는 검은 화물이라고 불리었다. 대서양은 흰 화물과 검은 화물을 가득 실은 배들로 분주했다.





사탕수수와 자본주의 정신



사탕수수는 일단 베어내면 빠른 속도로 변질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속하게 수액을 뽑아내야 한다. 성숙하면 바로 베어야 하고 베고 나면 바로 갈아야 하는 사탕수수의 이러한 성질은 농업과 공업의 독특한 결합을 낳았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것은 농업이지만 설탕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를 가공하는 일은 공업이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베고 갈고 끓이는 작업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작업 과정들은 한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 이는 노동력을 아주 치밀하게 조직화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한다는 의미다. 시간을 강조하는 것은 훗날의 자본주의 정신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시드니 민츠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다. 토지와 공장을 연결시켰다는 점, 숙련 노동자들과 비숙련 노동자들을 결합시켰다는 점, 시간 계획을 엄격히 지켰다는 점,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와 생산 수단이 분리되었다는 점 등 이러한 특징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자본주의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사탕무가 설탕이 되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활발하게 설탕을 생산하는 동안에, 식민지가 거의 없었던 독일에서는 사탕수수 이외의 식물에서 설탕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베를린 궁정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난 화학자 마르크그라프(Marggraf)는 사탕수수를 대신할 만한 식물로서 사탕무를 발견했다. 사실 사탕무는 마르크그라프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 곁에 있어 왔다. 오랜 세월 사탕무는 채소로 쓰이거나 콧병, 인후염 등의 질환과 변비의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비록 달기는 했지만 마르크라프에 의해서 자당을 다량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일개 채소에 머물러야 했다. 1747년 마르크그라프는 무의 뿌리로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신문에 발표했지만 그 제조 과정은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탕무 설탕은 한동안 실험실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사탕무 설탕이 생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 4세이다. 사탕무 생산공장에 대한 지원 요청을 받은 그는 10년간의 생산 독점권과 보조금, 토지 등을 지원했고 그 결과 1801년 드디어 본격적인 사탕무 설탕 공장이 설립되었다.





사탕무를 사랑한 나폴레옹



사탕무 설탕의 등장은 왕과 노예 반대 운동가 모두를 고무시켰다. 이들은 물질적인 차원에서 또한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사탕무 설탕 생산을 적극 후원했다. 사탕무 설탕의 급속한 발달에는 나폴레옹의 역할이 컸다. 전쟁 중의 유럽 봉쇄는 사탕무 설탕 산업의 발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유럽 봉쇄에 맞서서 나폴레옹은 영국과 통하는 대륙의 모든 항구를 폐쇄했다. 유럽은 설탕이 필요했지만 설탕의 통로는 막혀 버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정치 생명을 걸고 사탕무 설탕을 적극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에 기술은 급격히 발달했다. “영국과의 무역은 완전히 종식되어야 하고 영국은 그 많은 설탕을 템즈 강에 던져 넣는 수고를 감당해야만 한다”던 나폴레옹의 으름장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사탕무를 가축의 먹이쯤으로나 여기던 지역까지 사탕무 설탕이 전해져 유럽 대륙 곳곳의 보편적인 산업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설탕산업에서도 나폴레옹은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겠다.





기호품의 인기와 설탕 소비



설탕의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설탕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설탕이 널리 퍼질 무렵에 다양한 종류의 차와 커피 같은 기호품들의 소비도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차가 맥주를 대신했고 프랑스에서는 커피가 와인을 대신했을 정도로 그 소비가 증가했다. 이런 기호품들의 유행은 설탕 소비를 크게 늘렸다. 기호품의 인기가 날로 더해가고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설탕의 소비 또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차를 마시기 위해 설탕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섭취하기 위해 차를 마신 것은 아닐까. 설탕은 빠른 시간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식품으로 산업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설탕을 넣은 차는 더 이상 부자들의 사치품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소한의 양식이자 대충 때워 먹는 칼로리였다. 그들은 마른 빵에 차 한 잔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했던 것이다. 유럽 평민들의 식탁 위의 차는 우리네 김치와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이러한 유형의 식사는 준비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여성과 아이들까지 공장의 노동력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국가별 1인당 설탕 소비량



설탕의 소비는 문명의 척도라는 말이 있듯이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리고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설탕 소비량이 많아진다. 지구상에 단맛을 거부하는 사회는 단 하나도 없지만 단맛을 좋아하는 강도는 조금씩 다르다. 2001년 ISO 연감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1인당 설탕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싱가포르다. 한 사람이 한 해에 69.4kg의 설탕을 먹는다고 한다. 거의 쌀 한 가마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이다. 쌀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이 한 가마를 먹으려면 2~3년은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싱가포르의 설탕 소비량은 대한하다. 그밖에 이스라엘이 65.6kg, 사탕수수의 나라인 쿠바와 브라질이 각각 62.1kg과 57.7kg을 먹어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미국은 31.5kg, 세계 평균은 21.0kg. 우리나라와 일본의 1인당 소비량은 각각 23.0kg과 18.4kg으로 세계 평균과 비슷하다.



(단위 : kg)

싱가포르 69.4

이스라엘 65.6

쿠바 62.1

브라질 57.7

뉴질랜드 55.6

호주 55.2

자메이카 52.2

멕시코 47.9

말레이시아 45.1

노르웨이 41.2

아르헨티나 41.0

러시아 40.2

이집트 35.6

미국 31.5

태국 31.0

남아프리카공화국 30.2

홍콩 27.5

사우디아라비아 27.5

한국 23.0

일본 18.4

세계 평균 21.0






도움이 되셨길..

2003.06.28.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havs****
영웅
본인 입력 포함 정보

하하 아무래도 가공해서 먹은나라는 인도,우리나라,미국 인것같습니다

 

재배가 많은부분은 옛적에는 미국에서 재배를 햇지만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재배를 하는중입니다

2008.04.14.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