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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설탕의 세계사
tpru**** 조회수 10,252 작성일2010.08.21
줄거리나 인상깊은 점좀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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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소개

→지은이 : 가와가타 미노루

: 교토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문학박사(서양사학 전공)를 취득했으며 현재 오사카 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영국사”, “영국 근대사 - 종교개학부터 현대까지”, “공업화의 역사적 전제 - 제국과 젠틀맨”, “민중의 대영제국 - 근대 영국사회와 아메리카 이민”, “미국은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다.

2. 줄거리 요약

■1장. 설탕의 신비

높은 칼로리와 성인병 유발 등 미용과 건강의 적으로도 여겨지고 있는 설탕. 하지만 이런 인식이 확산된 것은 최근이다. 설탕은 특유의 단맛으로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찾게 만든다. 16c 이래의 세계 역사는 세계상품이 된 중요한 상품의 독점판매권을 어느 나라가 쥘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전개되어왔다. 이처럼 세계를 움직여온 세계상품의 첫 사례가 바로 설탕이다. 그래서 16~19c 에 걸쳐 전 세계의 정치가와 실업가들은 설탕의 생산권 확보와 그 유통의 장악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그 결과 브라질이나 카리브 해의 섬들에 사탕수수 생산을 위한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이 만들어졌다. 플랜테이션에는 유럽제국 그중 영국 자본이 주로 주입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이 노예로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초기에는 백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값싸게 대량 노동력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프리카인들을 끌고 오는 것이었다. 오늘날 미국이나 영국, 카리브 해의 섬들에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을까 궁금해 한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노동력을 위한 노예가 설탕 생산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상품이 된 설탕은 이슬람 의학과 중세유럽에서 결핵 치료 등 10가지 효능을 가진 약재로 여겨졌고 고급스러운 조미료요,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당시에는 설탕이 그만큼 비싸고 귀했기에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권위의 상징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또한 설탕이 하얀 색깔은 더 큰 신비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희소성과 비싼 값 때문에 처음에 약재나 신비한 존재로 여겨졌던 설탕은 17c 중반부터 칼로리의 보급원과 일반식품으로서 용도가 변화하게 되었다.

■2장. 설탕은 어디에서 왔나?

설탕의 원료가 되는 것에는 대나무설탕, 캐나다의 단풍시럽과 사탕무 사탕수수가 있다. 하지만 세계상품이 될 만큼 대량생산이 가능한 것은 사탕수수와 사탕무 뿐이었는데 사탕무는 19c에 이르러서야 유럽에서 재배되었으므로 그 전까지는 사탕수수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겠다. 열대나 아열대에 적합한 식물인 사탕수수는 원산지가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어디쯤일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유럽에 처음 설탕의 존재를 알린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병사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인도북부에서 벌이 도움 없이도 단단한 꿀을 만들고 있음에 놀랐다고 한다. 이후, 캐러밴(통상이나 성지순례, 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겸하여 무리를 이루어 여행하는 상인.) 들의 손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설탕의 생산이 유럽이나 그 밖의 지역으로 널리 전파된 것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이다. 이슬람교는 전성기 때는 북쪽을 제외한 지중해의 삼면을 석권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이렇게 뻗어나가면서 그 지역에는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조기술도 함께 전파되었다.

이쯤에서 사탕수수의 재배에 필요한 조건을 알아보도록 하자. 사탕수수의 재배는 적당한 강우량과 온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탕수수는 토양의 비료분을 소모시켜 토질을 황폐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어서 계속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이동해야만했다. 또한 재배와 제당(사탕수수나 사탕무 등에서 분밀, 정제, 결정화 등의 공정을 거쳐서 설탕을 만드는 일. 즉, 사탕수수의 가공)을 위해서는 중노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집단노동력도 필요했으므로 이때부터 노예 내지 노예에 가까운 사람들이 존재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두 가지 특성은 수백년동안 설탕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존재한다. 따라서 설탕과 노예제도는 불가피한 존재였다. 이러한 현상은 사탕수수가 전해지는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다. 심지어 카리브 해의 여러 섬에서는 선주민을 대신한 흑인 노예들의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마저 벌어지기도 한다.

유럽의 크리스트 교도가 설탕에 대해 알고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1c말부터 일어난 십자군운동 때부터이다. 유럽각지의 크리스트 교도는 이슬람교도의 점령하에 있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목적아래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나 2c에 걸친 이 운동은 그 목적이 변질되어갔다. 그러나 이 원정으로 유럽인들은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에 성공했으며, 당시 그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해있던 이슬람 세계의 문화와 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다. 그 때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기술이 전달되었다. 그전까지 단맛을 내는 감미료라고는 꿀밖에 몰랐던 유럽인들에게 설탕은 매우 신비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 의해 동지중해의 여러 섬들로 퍼져나간 사탕수수의 생산은 15c 말에 포르투갈 대서양 앞바다의 여러 섬들로 그 중심이 이동된다. 그 섬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대규모로 전개되었고 포르투갈 인들을 선두로 한 유럽인의 대외진출 거점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은 15c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노력으로 대서양의 여러 섬들과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대외진출을 하였다. 결과, 인도항로가 열렸고 더불어 이 항로를 통해 사탕수수 재배도 계속 서쪽으로 전개되며 전파되었다. 이 시기부터 사탕수수 재배의 주도권은 이슬람교도가 아닌 크리스트교 포르투갈인으로 교체된다. 이리하여 16c부터 사탕수수 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당시의 세계 경제 중심이 되는 국제시장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안트베르펜(벨기에)에 집결한 다음 유럽각지로 팔려나간다. 이로서 설탕은 세계상품에 근접한 물품이 되기에 이른다.

초기에 설탕은 귀중품이요 귀족들만의 사치품이었으나 플랜테이션을 통해 유럽인 자신들의 손으로 재배하게 되면서 생산량이 점점 늘면서 식품으로 보급되게 된다. 점점 수요가 늘고 이익이 높은 고급식품이 된 설탕을 생산하기위해 유럽 각국은 대서양의 여러 섬들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넓은 사탕수수 재배지를 찾아 나서는데 혈안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탕수수는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지력을 급속히 쇠퇴시키는 작물이었기에 생산지를 계속 이동해야만 했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탕수수재배는 노예제도와 함께하였고 15c말에도 계속 지구 서쪽으로 이동해 나갔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후부터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수상이었던 에릭 윌리엄스는 “사탕수수가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카리브 해 최남단의 섬으로 섬전체가 사탕수수 농장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탕수수 재배지는 브라질로 옮겨갔고 플랜테이션 형태로 대규모로 재배된다. 그리하여 16c내내 세계의 설탕생산은 브라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7c에 들어서면서 당시 세계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활약하기 시작한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사탕수수는 영국령이나 프랑스령의 카리브 해 섬들로 이동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설탕이 세계상품이 된 것이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 3장. 카리브 해와 설탕

세계적으로 해적이 활약하던 16,17c. 당시 가장 큰 부를 가진 은괴를 나르는 스페인 선단은 해적들의 타깃이 되었고, 카리브 해는 이 선단이 지나쳐야만 했던 길목이었다. 따라서 해적들의 거점지가 되었다. 1655 영국의 독재자였던 크롬웰이 군대를 파견하여 카리브 해중에서도 해적들의 은신처라 할 수 있었던 자메이카를 점령한다. 이 때, 카리브 해로 온 백인들이 주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염두 했기 때문에 자메이카와 그 이외의 섬들은 보물찾기와 광산개발만 이루어졌을 뿐, 제조업은 물론 기본적인 농․어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7c에 이곳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됨으로써, 많은 것이 변했다. 원시림과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섬들에 거대한 플랜테이션이 개발되면서 섬 전체가 사탕수수밭으로 변해갔다. 플랜테이션은 모노컬처(단일경작)방식인데 17c 카리브 해의 경우 그것은 설탕이었다. 현지의 식량조차 수입해야할 정도로 사탕수수 재배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되면서 그 섬의 토착민인 카리베족은 거의 소멸되고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인구의 대부분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카리브 해의 여러 섬들은 풍경, 구성주민, 사회구조, 경제 모습도 모두 사탕수수의 도입과 더불어 급변하였다. 이 같은 일련의 변화를 ‘설탕혁명’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후로 설탕은 누가나 좋아하는 세계상품 중 하나로서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다.

■4장. 설탕과 차의 조우

16c 브라질, 17c 카리브 해의 설탕혁명의 결과, 17c 후반에 막대한 양의 설탕이 유럽에 들어왔고 설탕을 소비하는 일의 의미도 급속히 변화되어갔다. 17c전까지 만해도 유럽인들에게 설탕은 식품보다는 약에 가까웠다. 아니면 상류층들의 권세와 재산을 자랑하기위한 사치품으로 설탕을 이용했다. 한 연구가는 설탕은 약품, 장식품, 향료, 감미료, 보존료 등의 다섯 가지 용법이 있다고 한다. 이중 약품과 장식품은 설탕이 귀중품인 시대에 적합했다. 설탕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던 생각은 십자군들이 돌아올 때 함께 들어왔는데, 만성 영양불량에 시달리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고칼로리의 설탕은 어떤 경우에나 즉효가 있는 약품이었다. 또한 해열제로서도 사용되어 결핵의 열을 내리는데 필수적인 약품이었다. 또한 소화촉진에도 설탕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다. 당시 설탕은 의약품으로서 꼭 필요한 물품이 되었다. 설탕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몸에 나쁠 수도 있다는 시각이 대두된 것은 18c 이후부터이다. 윌리스라는 영국 의사가 당뇨병을 발견하면서 의학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설탕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높아져갔고 의학서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약품으로의 설탕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은 늘었을지언정 식품으로서의 설탕은 급속히 보급되어 나갔고, 귀족들의 사치품으로서 설탕과자, 케이크 등의 데커레이션 식품으로도 빈번하게 쓰였다.

하지만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들이 설탕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된 것은 약품이나 장식물로서가 아니었다. 이전까지 서민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에게도 설탕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7c 이후인데, 다른 세계상품인 차(홍차, 커피)의 보급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영국에서 차와 설탕이 합쳐지게 된 것이 시발점이다. 1600년 영국은 동인도회사의 설립을 통해 아시아와의 무역과 외교권을 손에 넣었다. 18c 말부터 동인도회사가 아시아 각지를 조사한 결과 차나무가 확인되었고 홍차를 비롯한 차나무를 수입하면서 나중에는 플랜테이션으로 재배하기에 이른다. 차도 설탕처럼 초반에는 여러 질병에 대한 특효약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홍차에 설탕을 넣게 되었을까? 17c 초 설탕과 차는 귀중한 약품이었다, 비싼 설탕과 차는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돈 없는 서민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무렵, 엄청난 재산을 모은 상인계습이 영국에 대거 등장해 재력을 과시하기위해 아낌없이 사치를 부렸고 그러기에 설탕과 차는 아주 적합했다. 뿐만 아니라, 고품격의 취미를 즐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왕실을 선두로 사교계에서는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따라서 과시욕/신분의 상징으로 결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7c 후반부터 영국에서 백년동안 유행한 사교장인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소비량이 증대되어 중류층 국민들에게 까지 설탕을 넣은 차가 보급되었다. 그리고 17c 중반부터 가격이 떨어지고 차와 설탕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점차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퍼져 ‘국민적 음료’가 된다.

더욱이 19c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고칼로리였던 설탕은 칼로리 보급원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생활의 기초식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시간을 엄수해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더운물만 있으면 간편하게 준비될 수 있었던 홍차와 오트밀 죽은 아침식사의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허나, 그 전까지 영국에서 설탕의 과보호로 인한 높은 가격 때문에 서민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 식민지령에 대한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플랜테이션이 붕괴되고 곡물법의 폐지 및 설탕관세 인하,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폐지 등이 시행되면서 값싼 아침식사로 전락하게 되었다.

■ 5장. 사탕수수 여행의 끝.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카리브 해의 설탕 식민지를 가졌던 17c 이후에 뒤늦게 식민지 획득 경쟁에 뛰어든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설탕식민지 확보가 매우 어려웠다. 독일의 일부가 된 프로이센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는 식민지를 거의 확보하지 못했으나 동방의 러시아나 폴란드에는 일찍이 식민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그들 지역에서 설탕을 생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18c에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1747년에 가축사료용으로 널리 이용되던 ‘사탕무’라는 무에서 사탕수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량의 당분이 포함되고 있음이 발견되었고 1799년경부터는 에크하라트란 학자가 사탕무의 품종개량과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때부터, 열대지방이 아닌 온대지방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나 아메리카에서도 경쟁적으로 사탕무의 품종개량과 재배가 시작되었고 1880년대가 되어서는 사탕무의 생산이 사탕수수의 생산을 앞지르게 된다. 노예제도는 비인간적이라는 인식이 이에 한 몫 하였다. 그러다 노예제도가 없어지기는 했어도 이민노동자들의 고용과 오세아니아나 인도양 등지에도 새로운 재배지가 생겨났기에 사탕수수의 생산도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고, 적당히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의 적은 사탕무나 메이플 시럽도 아닌 식생활의 변화였다. 여태껏 설탕의 소비량이 한 나라의 문화수준과 경쟁력을 가늠하는 척도라고까지 이야기 될 정도로 그 영향력과 소비량이 대단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오늘날 설탕은 건강과 미용의 적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설탕의 세계상품으로서의 지위도 불안해지고 있다. 이제 황혼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결과가 작용했건, 부정적으로 작용했건 간에 그것이 과거에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찬란하게 빛을 발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3. 작가의 메시지(의도 및 주제의식)

⇒하나의 상품을 통해 근대의 세계사를 살펴보겠다는 것이 목적이라고 작가는 이 책이 뒷부분에 밝히고 있다. 이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이를 통해 각지의 각 계층의 사람들이 영위했던 생활상 또한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옛날 일을 조사하고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변천을 거쳤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전혀 상반되는 상황에 있는 사회가 지구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그런 문제는 역사적인 맥락으로 볼 때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하고 살펴보아야한다.

4. 새롭게 알게 된 정보 소개

■ 커피하우스

17c후반부터 18c에 걸쳐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도시에서 유행한 일종의 사교장이 ‘커피하우스’이다.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대학도시인 옥스퍼드에서 탄생했는데 2년 뒤 부터는 런던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후에는 런던에만 해도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커피와 홍차, 초콜릿 같은 유럽 외부에서 수입된 음료들만을 팔았다 (※여기서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당시에는 초콜릿 또한 액체의 음료였다. 고형 초콜릿의 등장은 19c 부터라고 한다.) 또한 담배도 즐겨 피우는 곳이었다고 한다. 커피하우스는 신분이나 경제력 차이는 문제 삼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충만한 공간이었다. 우호를 다지는 한편 정보를 교환했으며 비판과 토론에도 열심이었다. 그 결과 근대의 문화라 부를 만한 것 중 대부분이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과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협회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화학자인 로버트 보일과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창시자이며 뉴턴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가 왕립협회에서 과학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를 ‘과학혁명’의 시기라고 하는데 커피하우스에서의 집회와 정보교환이 밑바탕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커피하우스에서 정보산업(신문, 잡지)도 발달했고, 커피하우스는 경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오늘날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 증권 류(국채, 주식)가 처음 유통되기 시작한 곳이 이 곳이다. 주식 등에 대한 정보도 이곳으로 흘러들었으므로 증권회사, 은행, 보험회사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학, 연극, 음악에 관한 평가도 커피하우스에서의 담소 중에 결정되기도 하였고 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도 이곳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커피하우스에서 정당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크롬웰의 시대가 끝나고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찰스 2세가 영국으로 돌아온 1660년 휘그와 토리라는 두 정치그룹이 형성되어 상호 견제하며 정치를 펼치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데 정당이라고는 해도 정식 조직은 아니었고 막연히 동류의식으로 뭉친 정치그룹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들은 커피하우스를 무대로 하여 상호비판과 사전 검토를 한 뒤 의회에 제출하는 식으로 정치를 펼친다.

이러한 커피하우스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세상이 평온해지자 클럽 같은 것으로 전환되어갔고 도박판으로 타락하면서 쇠퇴하고 소멸하였다. 영국에서 오늘날에도 카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이유가 이 때문이다.

5. 인상적인 부분과 이유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하자면, 설탕이 약으로서 알려졌다고 하는 부분이다. 단 것을 좋아하는 나는 기회가 되면 설탕을 듬뿍듬뿍 넣어 먹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나를 말린다. 이유인 즉, 설탕을 먹으면 칼로리가 높아 살이 찌고, 당뇨병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기에 해롭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설탕이 건강과 미용의 적으로 인식되고 그로인해 한 때 유럽을 지배했던 설탕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언급되어있다. 하지만 16c 까지만 해도 만병통치약 , 해열제, 결핵 치료제(해열의 역할 때문에), 열병, 흑사병(페스트)의 치료제로 여겨졌다고 하니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16c 이후 유럽에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설탕의 떨어진 약방 같다’라고 하니 오늘날과 대조해보면 극과 극이 아닐 수가 없다.

6. 읽으면서 느낀 점 및 보람.

이 책을 읽으면서 즐거움이나 보람은 새롭게 알게 된 지식과 설탕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존재였구나 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즐거움이나 보람보다는 느낀 점이 많다. 바로 ‘노예’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유럽 자본가들은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값싼 흑인 노동자를 고용한다. 그렇지만 거의 노예에 가까운 대우를 한다. 게다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을 사탕수수 재배에 강제로 착취한다. 역시 노예로서. 게다가 어느 한 나라 전체가 사탕수수 경작지였고 그 섬 주민 거의 대부분이 흑인 노예들이였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노예무역도 성행한다. 그렇게 사탕수수 재배는 흑인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비인도적인 이 노예무역과 강제착취는 노예사냥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자, 카리베 족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민족은 절멸했다고 한다.

이렇게 흑인노예들의 땀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설탕은 누구나 좋아하는 세계상품이 되었고, 유럽 백인들은 그것을 평온하게 즐긴다. 평화롭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이런 비극은 설탕의 역사에서 계속된다. 사탕수수를 발견한 그때부터 12~13c부터 19C까지. 난,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비인도적인 일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그렇게 평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피와 눈물로 얼룩진 설탕을 즐길 수 있었는지 참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비인도적인 착취가 없었다면, 오늘날에는 물론이고 당시 큰 영향을 지니고 있던 설탕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난 더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프다.

7. 토론할 논제 제기 및 질문 사항.

⇒ 식민지국이나 노예들에 대한 과거의 역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 비인도 적인 과거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 오늘날, 설탕이 비만이 된다고 하며 경원시하는 선진국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설탕가격의 폭락 때문에 사탕수수 재배지인 동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배고픔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그로인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러한 격차는 역사의 어떤 부분에서 발생하였는가? 또, 우리는 그런 격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0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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