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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어떤차동차가잇는가?????,옛날에는어떤자동차를사용했는가????,누가발명했는가???
rudt**** 조회수 4,319 작성일2009.09.23
제발..알려주세요...급해요..바로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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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
바람신
학교생활 61위, 학교생활, 꿈, 해몽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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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우리나라 최초의 수입 자동차
    1903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에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 의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자동차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서양 외교관이나 기술자 또는 선교사들이 갖고 온 자동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로 보이는 차는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진학 교수이며 여행가였던 버튼 홈즈가 한강을 구경하러 가다가 소달구지를 들이받아 사고를 낸 차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어용으로 들여온 차가 4대로 1911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고종 환심용으로 들여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과 국가 대신들이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 했던 1913년경부터 비로써 일반 국민의 자동차 시대가 개막 되었다.
     

1910

  • 1911년 진주에 살았던 일본인 에가와는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간을 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영업을 시작 했었다고 전해진다. 이 차에는 대개 10명까지는 탈 수 있었으며, 저녁에는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버스요금은 1인당 마산-진주간이 3원 80전, 진주-삼천포간이 1원 30전으로, 마산-진주간 한번 승차에 쌀 한가마니 값이었으니 꽤나 비싼편이었다.
     
  • 1913년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씨와 일본 청년 곤도 그리고 장사꾼 오리이 3인이 합자해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우고 "포드T형" 승용차 2대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의 택시의 시초이며. 이때가 우리나라 운송사업의 출발점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자
    1914년 영친왕 이강공이 미국제 오버랜드를 들여 왔을 때, 1915년 윤권이라는 사람이 이 차를 운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사가 되었다.
    원래 전직 마차부였던 윤권은 1914년에 이태리 공사관에 근무 하던중 공관 자동차로 운전을 배워서 의친왕 이강공의 오버랜드를 몰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금테두른 검정 정장 운전복을 입고 고등관 행세를 하며 왕족 운전기사로 출세해서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 1910년대말 함경도 북청태생의 방의석,방예석 형제가 함흥과 흥남을 있는 자동차 도로를 닦고 영업 허가를 받은후 8인승 포드차를 들여와 독점 영업을 시작 했다.
     

1920

  •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차비가 택시보다 훨씬 저렴한 승합버스가 지방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 했다.
    승합버스라야 70~80명을 태우는 대형버스가 아니라 15인승 또는 20인승버스였다.  이북에서는 길도 험했고 좁아서 힘들었지만 남쪽에서는 수 많은 버스업자들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중 가장 경쟁이 심했던곳이 전주지방이었다.
    전주 토착 재벌이었던 최종열,최승열 형제가 세운 "공화 자동차부"의 영업이 잘되자, "군산 자동차부"가 생겨났고, 또 이어서 마학진이라는 군산 대지주가 뛰어들어 3파전이 벌어 졌는데 당시의 황금노선은 전주-군산,군산-이리간 노선이 승객이 가장 많았다.
     
  • 1928년초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에서 서울 장안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할 목적으로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일본에서 들여와 서울시내 주요 간선도로에 투입함으로서 정기 노선 버스가 처음으로 등장 하였다.
    그러나, 전차보다 비싼 요금으로 인해 이 버스회사 (부영버스)는 경성전기주식회사에 불하되게 되었다.
     
  • 1920년대말 서울 인사동에 살던 애가와라는 일본인이 강천상회라는 조그만 공장을 만들어 왕실의 자동차들을 수리해주고 무개차의 지붕도 만들어 씌워주는 작업을 했으니 이게 원시적인 한국자동차공업의 시초로 본다.
     

1930

  •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일본인 구스모도는 서울에서 가장 큰 포드대리점을 인수하고,인현동에 대지2천평을 구입해서 자동차 차체 제작 공장과 정비 공장을 세운후, 일본에 있는 포드 공장으로부터 프레임에 엔진,미션,핸들 및 앞/뒤 차축이 달린 하체만을 들여와서 20인승 및 30인승의 대형버스를 최초로 제작,시중에 판매하기 시작 했다.
     

 

1940

  • 1940년 조선자동차차체공업조합을 설치 했으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지원 되지 못했다.
     
  • 1949년 3월 대한자동차공업회가 발족 하였다.
     

1950

  • 1950년 3월 정부는 자동차업계의 자구적 노력을 지원하고 자동차 부품공업의 육성을 위하여 상공부, 교통부, 국방부등 3부 공동으로 피스톤,피스톤링,피스톤핀,브레이크 라이닝등 13개 품목을 국산 장려품으로 지정하여 군납하도록 하는 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을 시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공업육성시책이었다.
     
  • 1951년 6월 정부는 서울 수복에 따른 피난민 귀향을 돕기위해 영등포 이남지역부터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버스 60대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 영업을 허가 했다. 이때 서울-부산간 먼지나고 털털대는 국도를 달 리는 버스요금이 3만4천환이었으니 굉장히 비쌌다. 당시 쌀한가마니에 8만환,짜장면 한그릇에 1,800환 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서울-부산간 비행기 요금의 3배나 되는 비싼값이어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요금 이었다.

  • 1950년대 전후에 폐차로 있던 군수용품인 트럭,짚차,쓰리쿼터와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차량을 전국에 흩어져 있던 운수업자나 정비업자들이 망치로 드럼통을 두드려 펴고, 판금작업을 해서 버스나 트럭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재생자동차산업이 번창 했으며, 당시 부산에서 1955년 2월 설립된 신진공업은 미니 합승버스 25인승차를 2천여대나 만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이 합승 버스가 서울에서 운행할 때는 노란색 페인트 칠을 해서 운행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은 "노랑차"라고 불렀다.

     
  • 1952년 10월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로 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의 사명을 개칭)이 설립되었다.

  • 우리나라 첫 국산차
    1955년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미군으로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차축 등을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첫 지프형 승용차 『시발』을 내놓았다.
    우리손으로 만든 이 첫 국산차는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으나,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나 걸려, 시발차의 값이 8만환으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7년 광복 12주년 기념 산업박람회때 최무성씨가 시발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됨과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을지로 입구에 있던 그의 천막 공장에는 시발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로인해 가격도 하루 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대통령상을 받은후 한달도 못되어 1억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공장도 사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서 양산 체제로 돌입 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후 시발 투기붕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하여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차 개발에 많은돈을 썼고 5.16혁명으로 정부 보조금이 끝난데다가 1962년 산뜻한 "새나라"자동차가 쏟아져 나오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차는 1963년까지 3천여대를 만들어 시판했다.
     

1960

  • 1961년 9월 30일 공업표준화법이 제정되었으며, 12월 27일 도로법, 12월 30일 차동차운수사업법 제정 되었다.
     
  • 1962년 1월 29일 재일교포 박노정씨는 닛산과 기술제휴로 새나라 자동차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한국 자동차 공업의 현대화 기수 역할을 했으며, 1962년 8월 부평(현 대우자동차 공장)에서 준공식을 가지고 블루버드를 KD로 들여와서 조립하다가 외환사정의 악화로 도입금지된 1963년 5월 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평균 10대를 만들어 총 2,722대를 판매 했다.
    그후,이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은 1965년 김창원씨의 신진공업으로 소유주가 넘어가게 되었다.
     
  • 1962년 4월 29일부터 서울에서 택시미터제가 실시 되었다.
     
  • 1962년 5월 31일 5.16혁명후 군사정권은 국가재건 방안의 하나로 국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한다는 취지하에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 1962년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는 최초의 경3륜화물차인 K-360을 생산하였다.

     
  • 1962년 12월 하동환자동차공업(현 쌍용자동차)이 설립되었다.
     
  • 1964년 8월 20일 자동차 공업 종합육성계획이 발표 되었다.
     
  • 1965년 7월 아시아자동차가 설립 되었다.
     
  •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 되었다.
     

 

1970

  •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설계부터 생산까지 전과정을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낸 첫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 하였으며,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 하였다.


  • 1976년 신진자동차와 미국 G.M이 합작으로 G.M.K를 설립,
    후에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이 변경된뒤 1983년 대우자동차로 통합되었다.
     

 1980

  •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발표되었다.
     - 승용차,픽업 : 새한,현대
     - 1톤~5톤 트럭 및 라이트버스 : 기아
     - 특장차 : 동아
     - 2륜차  : 기아,대림 합병,효성(2원화)
     - 방산용 차량 : 아시아
     
  • 우리나라 첫 전륜구동방식 승용차
    1982년 2월 현대자동차는 5도어 해치밸 스타일의 전륜구동방식인 "엑셀"을 생산 판매 하였다.


  • 1984년 9월 자동차 등록대수가 90만대를 돌파 하였다.
     
  • 1985년 1월 17일 정부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87년 해제키로 결정,예고 하였다.
     
  • 1985년 5월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대를 돌파 하였다.
     
  • 1987년 1월 자동차 전면에 이중 안전접합유리 사용이 의무화 되었다.
     
  • 1987년 1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일부 해제하여 기아의 승용차 생산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 1987년 5월 1일부터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 되었다.
  • 1989년 7월 1일부로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되어 업계는 경쟁체제에 돌입하였다.

 1990

  • 우리나라 첫 경승용차
    1991년 5월 14일 대우조선 (현 대우자동차)는 국내최초의 경승용차 "티코"를 생산 판매 하였다.




  • 1992년 10월 10일 자동차 보유대수 500만대를 돌파하였다.
     
  • 1995년 5월 제1회 서울모터쇼가 개최되었다(5/4~10)
     
  • 1995년 7월 27일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800만대를 돌파 하였다.
     
  • 1996년 6월 24일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900만대를 돌파 하였다.

  • 1997년 7월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0만대를 돌파 하였다.
     
  • 1999년 10월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1,100만대를 돌파 하였다.(10월말 기준 등록대수 : 11,027,519대)

200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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