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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주남산불교문화재
wed2**** 조회수 1,773 작성일2009.09.15

경주남산에있는불교문화재중에삼릉곡 마애 석가아래좌상 ,포석정 터,용장사곡3층석탑,칠불암 마애 석불이있나요 있으면설명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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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한국사 99위, 영어 독해, 읽기, 문화재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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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문화재에 삼릉곡 마애 석가 여래좌상, 포석정 터, 용자사곡 3층석탑, 칠불암 마애 석불이 있습니다.

 

 

삼릉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 정 일 1982.02.2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산72-6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이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있으며, 반쯤 뜬 눈은 속세의 중생을 굽어 살펴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있게 깊게 새겨서 돋보이게 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광배형의 높이 7m, 너비 5m 되는 거대한 자연 암벽에 6m 높이로 새긴 이 불상은 앉은 모습의 석가여래상이다. 남산의 좌불 중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전체적인 느낌은 바위 자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 조각되어 있는 불상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먼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다. 대좌의 연꽃은 2겹으로 피었는데, 꽃잎마다 보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즉, 눈은 가늘고 코는 길며, 입술은 매우 두꺼워서, 얼굴 모습이 투박하고 소박한 지방 양식을 보여주는 듯 하다. 옷은 통견으로 옷주름이 가늘게 선각되었다. 몸체 뒤에는 다소 굵게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었다.

 

머리만 사람이 조각을 했을 뿐 몸 전체는 천연의 바위 그대로 두었다. 즉, 몸체에서는 인공적 가공을 생략하고 선각으로 손발을 그림으로써 주위의 바위산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머리부분과 몸부분이 각각 다른 시기에 조각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 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그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머리 부분은 8세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선각으로 처리된 몸부분은 9세기의 기법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양식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경주 포석정지


종 목  사적  제1호 
면 적 7,445㎡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용장사곡 3층석탑

 

종목 :  보물 제186호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
시대 : 통일신라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절을 감싸고 뻗은 동쪽 바위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서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자연암석을 아래층 기단으로 삼고, 그 위로 바로 윗층 기단이 올려져 있다. 즉, 자연암석이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고 그 아래 바위산 전체가 또한 아래층 기단일 수도 있는 셈이다. 윗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조각을 새기고 2장의 판돌로 덮어 기단을 마감하였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층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쇠막대를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쓰러져 있던 것을 1922년에 재건하였는데, 사리장치는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한다.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주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종목 : 국보  제312호

지정일 : 2009.09.02

수량 : 7구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36

시대 : 통일신라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칠불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200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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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ltah 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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