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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민영환에 대해 궁금한것
adle**** 조회수 4,915 작성일2007.07.27

제 이름이 민준*이거든요

근데 위인전을 읽다가 우연히 민영환 이라는 이름을 읽게 되었어요

저도  여흥 민씨라서 민영환에 대해 알곳싶어서 이 질문을 올리게 되었어요

그 인물은 무슨 일을 했는지 등을 간추려서 (저 초등학교 5학생)적어줴요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좋은 답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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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
지존
한국사, 사회, 도덕 39위,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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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의 조카로서 (다시 말해 명성황후도 여흥민씨) 1861년 태어났습니다.

 

 민겸호의 아들인데 임오군란 때 죽어서 (임오군란은 구식군인들이 차별대우 등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사건이죠.) 큰아버지 민태호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1878년 문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해 (3등)  정자-수찬-동부승지(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 소속된 비서 벼슬입니다.)-성균관대사성(성균관은 지금의 서울대처럼 우리나라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으로 쭉쭉쭉 승진합니다.

 

 1882년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버지 민겸호가 죽자 3년간 벼슬을 하지 않았고 후에 이조참의(요즘같으면 행정자치부 차관보),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홍문관부제학(중학교 가면 외우셔야 할텐데 홍문관은 궁중 서적을 관리하고 임금님께 이건 잘했고 이건 못했으며 이렇게 나랏일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자문을 하는 등의 기능을 갖고 있었던 기관입니다.), 이조참판(행정자치부 차관), 한성우윤(서울시 부시장이라고나 할까요?) 등의 여러 벼슬을 맡습니다.

 

 1887년부터 1894년까지는 여러 부의 판서 즉 장관을 맡았죠. 예조(교육인적자원부 + 외교통상부), 병조(국방부), 형조(법무부) 등....

 

 1895년 주미전권공사(미국 공사. 대사와는 다릅니다.)에 임명됐는데 하필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해 사직했죠. 다음해엔 우리나라 대표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다른 말로 즉위식이죠. 이 황제는 참고로 러시아제국 마지막 황제랍니다. 막내딸이 유명한 아나스타샤죠.) 에 참석하는데 그 후 일본, 미국, 영국 등을 돌아보며 서양 문명을 처음 접합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벼슬을 하고 1897년 유럽 6개국 공사로 임명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고 유럽을 돌며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 우리나라의 여러 제도를 개혁하려 합니다. 그 결과 군사제도 개혁이 이뤄져 육군을 이끌게 되죠.

 

 한편 민영환은 독립협회(사람들을 깨우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죠. (간단하게 말해서 독립협회는 주장하는 게 우리나라 고위관리들의 생각과 달랐기에 백성들은 큰 지지를 했지만 고종황제와 관리들은 독립협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참정대신 등의 벼슬을 지내고 친일파와 대립하며 일본의 잘못을 꾸짖고 그랬는데 결국 일본, 친일파들의 미움을 사 시종무관장이란 낮은 벼슬로 떨어집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이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인 통감을 두는 등의 내용으로서 우리나라를 반 식민지로 만드는 조약이었는데 이에 민영환은 신하들을 모아 대궐에서 반대도 해보고 상소문도 쓰려 했는데 이미 대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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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tk****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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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은 1861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나중엔 스스로 자결한다.

200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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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ge****
중수
지갑, 벨트, 넥타이, 시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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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905 (철종 12~고종 42)]
조선 말기의 문신.순국지사.
자는 문약, 호는 계정, 본관은 여흥, 시호는 충정, 서울 출생,호조판서 겸호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정자,수찬,사인 등의 청환직을 거쳐 1882년 대사성이 되었다.
그후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해방총관 등 여러직을 염익하고예조판서에 올랐다.
1888년과 1890년 두차례에 걸쳐 병조판서, 1883년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1894년 두판내무부사,형조판서들의 요직을 거쳣다.
1895년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명성황후가 살해되어 부임되지 못했다.
다음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의정부 찬정군부대신을 지낸후, 1897년(광무 1)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대사가 되어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축하식에 참석했다.
잦은 해외 여행으로 일찍 새문물에 눈을 떠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건의, 정치에 반영시켰다.
1896년(건양 1)독립협회를 적극 후원,민씨 일파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채결되자 시종무관장으로 있다가 비분을 못 이겨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자결시에 혈의를 장치하여 두었던 침방 뒤 골방 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가 났다 한다.
대광부국숭록대부의정대신에 추증, 고종의 묘정에 배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유고에는 << 해천추범>> <<사구속초>> 등이있다.

 

1905년 11.30 시종무관장 민영환,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조약에 찬성한 을사5적을 죽이고 조약을 취소하도록 요구하는 글을 고종에게 올렸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종과 국민들에게 글을 남기고 스스로 자결하셨습니다. 흑흑....

민영환 ( 1861 - 1905 ) 생애와 업적

조선 후기의 문신인 민영환은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한성 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일본·미국·영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고, 선진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힘쓰는 한편, 민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독립협회를 지원하다가 한 때 관직에서 파면 당했던 민영환은 관직에 복귀되어 나라 일을 보면서, 슬슬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일본을 성토하면서 친일파들과 대립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대신들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갔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뢰고 일본을 성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영환 일행은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지금의 국무총리인 의정 대신 조병세가 약을 먹고 자살했고, 민영환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해천추범> <사구속초>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소청(疏廳)을 열고,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명함 앞뒤에 연필로 5통을 작성하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였다. 그 때 나이 45세이다.

http://kr.encycl.yahoo.com/final.html?id=67749

민영환 閔泳煥 [1861.7.2~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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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 1861 - 1905 ) 생애와 업적

조선 후기의 문신인 민영환은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한성 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일본·미국·영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고, 선진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힘쓰는 한편, 민권 신장에도 앞장섰다.

독립협회를 지원하다가 한 때 관직에서 파면 당했던 민영환은 관직에 복귀되어 나라 일을 보면서, 슬슬 간섭을 하고 들어오는 일본을 성토하면서 친일파들과 대립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대신들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갔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임금에게 아뢰고 일본을 성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민영환 일행은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지금의 국무총리인 의정 대신 조병세가 약을 먹고 자살했고, 민영환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는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해천추범> <사구속초>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소청(疏廳)을 열고,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명함 앞뒤에 연필로 5통을 작성하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였다. 그 때 나이 45세이다.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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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조카로서 (다시 말해 명성황후도 여흥민씨) 1861년 태어났습니다.

 

 민겸호의 아들인데 임오군란 때 죽어서 (임오군란은 구식군인들이 차별대우 등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사건이죠.) 큰아버지 민태호 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1878년 문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해 (3등)  정자-수찬-동부승지(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 소속된 비서 벼슬입니다.)-성균관대사성(성균관은 지금의 서울대처럼 우리나라 최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으로 쭉쭉쭉 승진합니다.

 

 1882년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버지 민겸호가 죽자 3년간 벼슬을 하지 않았고 후에 이조참의(요즘같으면 행정자치부 차관보),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홍문관부제학(중학교 가면 외우셔야 할텐데 홍문관은 궁중 서적을 관리하고 임금님께 이건 잘했고 이건 못했으며 이렇게 나랏일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자문을 하는 등의 기능을 갖고 있었던 기관입니다.), 이조참판(행정자치부 차관), 한성우윤(서울시 부시장이라고나 할까요?) 등의 여러 벼슬을 맡습니다.

 

 1887년부터 1894년까지는 여러 부의 판서 즉 장관을 맡았죠. 예조(교육인적자원부 + 외교통상부), 병조(국방부), 형조(법무부) 등....

 

 1895년 주미전권공사(미국 공사. 대사와는 다릅니다.)에 임명됐는데 하필 명성황후가 죽임을 당해 사직했죠. 다음해엔 우리나라 대표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다른 말로 즉위식이죠. 이 황제는 참고로 러시아제국 마지막 황제랍니다. 막내딸이 유명한 아나스타샤죠.) 에 참석하는데 그 후 일본, 미국, 영국 등을 돌아보며 서양 문명을 처음 접합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벼슬을 하고 1897년 유럽 6개국 공사로 임명돼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고 유럽을 돌며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 우리나라의 여러 제도를 개혁하려 합니다. 그 결과 군사제도 개혁이 이뤄져 육군을 이끌게 되죠.

 

 한편 민영환은 독립협회(사람들을 깨우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이 때문에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죠. (간단하게 말해서 독립협회는 주장하는 게 우리나라 고위관리들의 생각과 달랐기에 백성들은 큰 지지를 했지만 고종황제와 관리들은 독립협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참정대신 등의 벼슬을 지내고 친일파와 대립하며 일본의 잘못을 꾸짖고 그랬는데 결국 일본, 친일파들의 미움을 사 시종무관장이란 낮은 벼슬로 떨어집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이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일본인 통감을 두는 등의 내용으로서 우리나라를 반 식민지로 만드는 조약이었는데 이에 민영환은 신하들을 모아 대궐에서 반대도 해보고 상소문도 쓰려 했는데 이미 대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08.06.12.

  • 출처

    wt godya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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