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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국지사 민영환은 탐관오리?
pkh4**** 조회수 4,478 작성일2003.12.20
우국지사로 알려진 민영환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지목한 구한 말 대표적인 탐관오리였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왜 전봉준은 그를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지목했는지 궁금하군여.
참고로 이 글은 주간조선 8/15특집기사로 쓰여진 글의 일부입니다.

8·15특집 / ‘조선 망국’ 원인은 아마추어 정치가들
한국 지배 엘리트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원칙은 “개인이나 가문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국인들의 판단이었다. 개인적 축재는 민영환같이 신망 받는 정치인에게서도 발견되었는데, 동학 농민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은 그를 가장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지목하기도 했다. 민영환을 일제 침략에 대항해 목숨 바친 애국지사로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 그가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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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입니다. 민영환의 가치는 민비정권의 역사적 가치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민비정권을 역사적으로 인정해주는 이유는 반일 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비정권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국가재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부패정권의 극치였습니다.
민영환이 인정받는 이유는 반일인사이기는 했지만 청렴한 관리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민비정권의 인물들은 대부분 개화파 였구요.. 동학농민의 입장은 쇄국정책의 입장이 었구요.. 대원군도 역시 쇄국정책의 입장.. 대원군의 개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대원군 집권시기에 서민들은 그나마 안정된(세도정치기보다 조금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개화가 필요하긴하였지만 이 시기의 개화란 서민들에게는 자신의 생활기반이 없어지는 것이었구요.. 해서 서민들은 개화에 반대했구요.. 서양열강의 이권침탈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2차 동학농민전쟁에서는 대원군의 연결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견입니다만.. 민비정권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부가 자신의 권위(?)에 합당한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국민경제의 파탄을 신경쓰지 않았을 따름이지.. -_-;;
나름대로 자신들은 애국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역시 자신들의 정권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이 치욕스러웠기도 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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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백과사전에서 찾은 민영환에 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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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閔泳煥, 1861.7.2 ~ 1905.11]

한말의 문신·순국지사.
본관 : 여흥
호 : 계정
별칭 : 자 문약
주요수상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본관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명성황후의 조카.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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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 아랫부분은 민영환에 관한 백과사전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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