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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민영환이 한일좀 자세히 써주세요~!!!!
두부맴 조회수 2,364 작성일2010.07.01

저는 초딩 6학년인데요 .

민영환이 한 일, 태어난 시기

돌아가신 때 등등 좀 자세히 부탁드릴게 염~!!!

내공냠냠 이나 저주글 신고하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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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식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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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1861 ~ 1905)

 

1861년 호조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성 황후의 조카로 큰아버지인 여성부원군 태호의 양아들이 되었다.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고, 187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이 때 아버지 민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다시 예조판서, 한성부윤 등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쳐 1894년에는 내무부독판사와 형조판서가 되었다. 1895년 주미 전권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발발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896년 특명 전권 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영국ㆍ독일ㆍ러시아ㆍ프랑스ㆍ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 등 6개국의 특명 전권 공사도 함께 맡았다.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했다. 잦은 해외 여행으로 근대화된 외국의 문물을 직접 접하게 된 민영환은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가 주장한 정치 제도 개혁과 민권 신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군제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육군을 통할하게 되었다.

귀국 후 외부, 학부, 탁지부의 벼슬을 지내며 독립 협회의 활동을 지원했다가 민씨 일파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탁지부, 내부, 학부 등의 대신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일본의 내정 간섭을 질타했다. 이후 일본의 간섭으로 시종무관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반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문에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명의 역적을 즉각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로 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민영환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난 뒤 45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결 소식에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이 연이어 자결을 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자는 문약이고, 호는 계정, 시호는 충정이다. 저서에 「해천추범」, 「사구속초」 등이 있다.

 

 

20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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